선교논단(19)
기독교 선교적 관점에서 본 G2국가로서 중국에 관한 연구
세계 지도자 역할에 관하여
목 차
I. 서론
II. 중국의 역사적 배경 연구
III. G2국가로서 중국
IV. G2국가 중국민족의 세계관
V. 100년간 G1 국가의 역할을 수행한 미국의 청교도 정신
VI. 중국의 G2 역할과 수행 능력
VII. G2국가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
1. G2 중국의 국정운영자 시진핑 주석
2. 13억 5천만 중국 국민의 삶을 감당해야 하는 시진핑 주석
3. 60억 지구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G2 국가의 능력
4. G2중국과 한국의 경제
VIII. G2 중국의 기독교 선교와 역사적 교훈
IX. 결론
VII. G2중국의 지도자 시진핑 주석
2. 13억 5천만 중국 국민의 삶을 감당해야 하는 시진핑 주석
중국 최고의 권력 지도부는 덩샤오핑이 설계한 10년 임기의 지도층 교체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정부의 지도층 교체는 국가적인 면에서 자유선거 제도로 인한 국가적인 경제적 부담이 적게 소모되면서 업무적 공백 기간도 단축된다는 것이다. 직접선거제도가 아니라 간접선거제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단점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2016년) 중국의 국가지도자 선출방법을 논하는 것이다.
1992년 덩샤오핑이 장쩌민 제3세대 지도부에게 권력을 이양한 것이 첫 번째이고, 10년 뒤 2002년 후진타오 제4세대 지도자에게 권력을 이양한 것이 두 번째이고, 2012년 10월 시진핑 총서기 5세대 지도부에게 권력을 이양한 것이 세 번째이다.
이번에 선출된 제5대 지도자들은 모든 중국의 인민들에게 여유있는 생활을 구가하는 전면적으로 균형있는 소강사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중국의 오랜 숙원인 부국강병의 꿈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5세대 지도자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1978년 개혁개방의 역사에서 이룩한 G2 중국의 미래를 위하여 이제부터 그는 중요한 분수령이라는 주장과 함께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30여년 만에 세계 제 2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것은 세계적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역사적 사실이다. 서구의 선진국들이 수 백년에 걸쳐 이룩한 성과를 13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중국이 불과 수 십년 만에 이루어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장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중국의 남녀 젊은이들이 힘겨운 작업의 일터에서 노력의 대가를 지불하고 피땀을 흘리며 견디고 참아왔든 그들의 노력을 알아야 감히 G2국가 중국을 평가할 수 있다. 세계의 공장이라는 중국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희생의 결과로 맺어진 결실이다. 무능했던 선조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13억 중국 대륙의 인민들이 사치스러운 구호인 자유를 외면하고 국가와 인민이 함께 묵묵히 노력한 보상이 G2중국이라는 대명사이다.
굶주려 죽어가는 자에게 먼저 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국대륙의 5000년 역사에서 한번도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평화적으로 누려 본 시대가 없었던 중국 백성이다. 서구의 민주주의 역사는 몇 천년을 거치면서 배워온 문화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 진리 자체가 평등한 인권에 기초하는 민주주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자유민주주의 선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 사상은 유교적 민족주의 중화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하루 아침에 자유민주주의를 논한다는 것은 중국 민족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 올 수 있으며, 국가적으로도 어려운 일들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현실 상황에 신중해야 하며 국가적 발전과 국민적 안녕과 질서가 우선 되어야 하며 현실에 만족하고 충실해야 할 의무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여전히 많은 인구, 취약한 기반, 불균형한 발전이 드러나는 이슈들이 있다. 경제규모는 크지만 13억이 5천여 만명 넘는 인구로 나누면 1인당 GDP가 세계에서 90위 정도에 불과하다. 2014년 기준으로 1인당 연평균 7,600달러였다. 물론 국제수준에 비교하면 적은 액수지만, 중국국내의 물가지수의 생활 여건에 비교하면 적은 액수는 아니다.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할 때는 GDP가 200달러였는데, 이것은 중국 경제가 고속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이웃 국가들인 일본, 대만, 한국, 싱가포르, 홍콩 등은 GDP가 3만달러 내외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성장 잠재력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중국은 경제가 발전 중이며, 13억5천이라는 내수시장과 강력한 중앙정부의 중앙계획 경제에서 국가가 택한 전략적 계획을 민감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이 경제 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유엔의 기준에 따르면 중국은 1억2,800만 명이 여전히 절대빈곤 아래서 생활하고 있다.
13억5천이 넘는 인구 모두 함께 빈곤에서 벗어난 생활을 누리려면 아직도 많은 길을 걸어야 하고 오랫동안 힘겨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국이 꾸준히 발전함에 따라 중국인민들의 생활수준은 계속 향상될 것이다. 그리고 시진핑 주석은 아프리카 순방의 연설중에서 “중국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중국은 언제까지나 아프리카 각국들과 고난을 같이 할 수 있는 벗으로 여길 것이다”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13억5천이 넘는 중국인민은 중화민국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중국정부는 10억이 넘는 아프리카 인민과 연대와 협력을 통해 아프리카의 발전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 중국과 아프리카 인민은 연대 협력을 강화하고 서로가 지지하고 도움을 주어 각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이다. 또한 우리는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항구적 평화, 공동의 번영 실현이라는 세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류 평화와 발전이라는 숭고한 사업을 위해 더 큰 새로운 기여를 해야 함이다.
시진핑은 본 연설문에서 중국의 G2국가이지만 GDP가 세계에서 90위라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13억이 넘는 중국인민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선진국이 수 백년에 걸쳐 이룩한 성과를 13억2천이 넘는 인구를 가진 중국은 수 십년 만에 달성했다고 말하고 있다. 1840년대 2번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이래로 서구의 식민지 평창주의 세력에서 능멸을 받으며 빈곤과 낙후의 수렁에서 허덕이던 낡고 가난했던 중국대륙이 발전하여 부흥과 영광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전세계 인구의 5분 1에 해당하는 인구의 생명과 운명이 걸려있는 중국의 대륙국가 어떻게 발전하고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세계의 역사가, 정치가, 사상가들이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시진핑 주석이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방문하여 그가 한 연설처럼 서구국가들이 수 백년에 걸쳐 이룩한 발전을 중국은 수 십년 만에 달성하였다고 연설했다. 경제성장 이전의 중국의 농민은 얼마나 가난했을까? 1978년 전후하여 신화사 국내부 농촌팀이 기자를 파견하여 농촌의 상황을 조사한 기록이 있다. 1979년 전국의 농민의 연평균 소득이 가장 높은 지역은 산시(山 西)성 뤼량지역으로 70위안이었고, 2위는 룽동의 칭양지역으로 64.86위안, 3위는 옌안지역으로 57.02위안, 4위는 위린지역으로 52위안, 5위는 간쑤성 핑량지역으로 47.6위안, 가장 낮은 지역은 구우안과 딩시로 모두 36.8위안이었다. 농업부 인민공사 관리국 통계에 따르면 1978년 집단으로부터 분배되는 전국 농민 1인당 연평균 소득은 겨우 74.67위안이었다.
그중 2억 명에 달하는 농민의 연평균 소득은 50위안도 되지 않았다. 그중에 1억1,200만의 농민의 소득은 매일 겨우 11전의 수입에 해당했다. 그리고 1억9,000만의 농민의 소득은 매일13전이며, 2억7,000만 명의 매일 소득은 14전이었다. 1978년 전국의 3분의 2의 농민들의 생활수준이 1950년대보다 못했으며, 3분의 1의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1930년대보다 못했다는 사실이다. 대다수 농민들의 가정은 찢어지게 가난하여 집 안에는 벽만 덩그러니 있을 정도이고 농민들은 거지처럼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1978년 신화사 선쭈룬 기자가 안후이성 딩위안, 펑량, 자산 등지를 취재한 결과는 매우 참혹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농업의 축적 자본과 이익금을 공업화 실현에 전략적으로 투자함으로 농촌 개발자본은 투자되지 못했으며 집단농장제도로 인한 생산성의 중국의 국토는 생산성이 감소되어 갔다. 그리고 1953년부터 시행된 “협상 가격차”가 시행되면서 농민들의 생산 능률의 저하로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중국에서 기아로 죽어갔던 수 천만 명의 중국인민들 중에 대다수가 농민들이 죽어갔다.
1978년 개혁개방과 함께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1979년부터 집단농지를 폐지하고 가족단위 농업생산 책임제도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여 농민들의 적극성이 전례없이 상성하여 연간 33.6%의 농업생산성이 증가되면서 중국 농촌에서 기아로 죽어가는 농민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집단농장의 감독제도보다는 가족단위의 농업생산 책임제도는 생산성이 증가할 뿐 아니라, 농민 자신을 해방시켰다. 과거의 집단 감독체제에 매어서 여행이나 농지를 떠날 수 없는 감독 체제 속에 속박되어 살아야 했지만, 가족단위 책임제는 가족중 한 사람이 외지나 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농번기를 벗어나 떠날 수도 있기에 농민들은 더 많은 자유를 개혁개방 이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중공업의 육성을 위하여 1978년 개혁개방 이전에 이미 중국은 발전의 기틀을 만들기 시작했다. 1956년부터 1962년에는 현대식 전자관 공장이 건설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현대화된 상업항만, 전화 교환기, 제조공장, 석유공업단지, 그리고 1만 톤급 원양어선을 설계, 건조하는 설비를 갖춘 대형 조선소가 완성되었고 잉탄과 샤먼 간 잉샤철도의 제1기 공사가 완공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칭하이와 시장을 잇는 칭짱공로의 고속도로도 개통되었다. 우한에 창장대교가 개통되어 남북간에 또 하나의 길이 생겼으며 바오지와 청두간 바오청 철도가 개통되었고, 대형 수리사업의 핵심 공정이 준공되었다. 티베트의 라싸와 납금에 수력 발전소가 건설되어 눈 덮인 고원까지 송전하는 길이 열렸다. 이처럼 중국은 자연적 인위적 곤경을 극복하며 대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했다. 1959년 9월 14일에는 초당 1만회 연산 능력을 갖춘 전자계산기 시제품이 최초로 생산되기 시작하여 1965년 7월 19일에는 24바이트중 중형 아닐로그 컴퓨터 시제품이 생산되었다. 1973년 8월초에 초당 100만회 연산 능력의 직접회로 컴퓨터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중국은 1960년부터 1963년까지 3년동안 대기근을 당하여 수많은 어려움을 견뎌야만 하는 기간에도 매장량 26억7000톤에 달하는 다칭 유전이 발견되어 연간 생산량 수 백만 톤에 달하는 대형 정유 공장 제1기 공정에 착수했다. 다칭 유전은 세계 유수의 유전과 맞먹는 대형 유전 가운데 하나이다. 1964년 10월에는 최초로 원자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1967년 6월 중국 서부 대기층에서 수소폭탄 모의실험을 완수하였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8년만인 1967년 극도의 빈곤 대국으로서 핵보유국으로 진입하였다. 지금 중국은 핵원전 기술을 아프리카와 중동지역 국가에 핵원전 기술을 수출하고 있다.
모택동 주석 사망이후 덩샤오핑 부주석이 1979년 1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만나 양국의 외교를 수교한 이후 개혁개방의 정책을 수립하여 서구의 자유시장경제의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채택한 중국은 인류 역사에서 어느 국가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속도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덩샤오핑이 추진한 중국 의전 방위 대외개방 전략은 1978년부터 1997년까지 중국 경제는 매년 평균 14.9퍼센트의 초고속 성장을 계속해 1997년 경제 총생산액이 세계 7위에 이르렀다. 1998년 세계적 금융위기의 충격속에서도 중국의 경제는 7.8퍼센트의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2005년에는 국내 총생산이 이탈리아를 추월해 세계 경제 6위가 되었고, 2010년에는 일본을 넘어서 세계경제 2위의 경제강국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2010년 중국의 철강 생산량은 6억2,695만9,000톤으로 세계 1위를 차지했고, 식량과 면화 등 주요농산품은 세계 1위이다. 석탄 생산량은 32억4,000만톤이며, 원유 생산량도 연간 2억톤에 달한다. 중국은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습득하기도 하였지만, 중국의 고속철도망은 8,358킬로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 2006년 7월 1일부터 초고속 열차가 운행을 시작했다. 2011년 기준으로 중국의 고속도로는 총 연장 7만4,100킬로미터로 세계 2위이다. 영토가 광활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경제적 능력이 가능했기에 발전도 가능한 것이었다.
1978년 경제기준으로 중국의 대외 무역총액이 세계 32위였지만, 이제 중국은 세계 경제 생산이 제 2위(G2)이다. 그리고 외화 보유액은 세계 1위이다. 1988년 거저우 댐의 수력 발전소를 전면 가동하면서 전기생산 용량이 1978년에 비해서 다섯 배를 넘어섰다. 현재 싼사 수리 공정이 완공되어 수력발전소에서 사방으로 송전하고 있다. 댐의 건설 목적이 전기의 생산에도 유력하지만 홍수와 가뭄에 대비하는 역할들도 중요하다. 5,000년의 긴 역사 위에 아름다운 국토를 21세기 문화와 문명으로 개발하는 중이다.
선조들이 지혜로 통일하기도 하면서 때로는 나누어지면서 중국의 대륙을 지켜왔기에 통일 중국의 선조들은 오늘의 후손들에게 귀중한 유산으로 남겨준 것이 중국 대륙이다. 유럽의 대륙에서 강력한 제국들이 역사속에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역사와 함께 사라지고 명분만 존재하고 있다. 중국의 대륙은 수많은 민족들이 더불어 살아오면서 아름다운 대륙을 함께 힘을 모아 지켜 왔다. 선조들의 남겨준 문화와 유적들이 보존되어 있기에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건축했다. 만리장성의 건축공사 공정을 생각하여 보면 생각하여 볼수록 이해할 수 없다. 육중한 돌들을 어떻게 태산의 꼭대기까지 인력으로 운반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수 나라 양제(煬帝)는 항저우에서 베이징까지 1,794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운하를 건설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 운하공사이다. 중국의 동서의 거리는 대략5,200킬로미터이며, 남북의 거리는 5,500킬로미터에 이른다. 남북은 위도상으로 50도의 차이가 나므로 북방에서 엄동설한 눈이 오면 남쪽에서는 화사한 꽃놀이를 즐길 수 있다. 중국의 광대한 대륙에는 모두 56개의 민족들이 공존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단절되지 않고 발전해 온 고유한 문명위에 서 있다. 중국의 문명은 고대 문명이면서 현대적 문명으로 문명적 생명을 지속하고 있다. 인류 초기의 4대 문명가운데 중국의 황하문명(黃河文明) 만이 같은 민족의 후손들인 한족의 후손들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문명을 이어가고 있다. 외세의 침략으로 민족이 이동하거나 소멸되지 않았다. 그리고 혼합되지도 않았다. 오늘날 그들의 후손들이 21세기 중국의 정치 일선에서 세계적 주연으로 떠오르고자 (도광양회) 철학으로 실력을 연마하고 있다. 도광양회의 법칙은 중국인들이 비록 여러 민족들이지만 함께 공존하면서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융합하여 왔다는 전통의 중국 역사에서 주류는 다민족 통일 국가의 정체성이었다.
과거의 어느 시대보다 세계적 경제 불황이 엄습해 오는 21세기 13억5천이 넘는 중국인민의 삶과 중국의 미래를 위하여 선출된 시진핑 주석이다. 그는 2012년 11월 제18차 당대회를 통해 8,000만 중국 공산당원을 이끄는 당 총서기에 선출되고, 2013년 3월에 전국인민 대표대회를 통해 중국인민을 대표하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주석에 취임한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국가 목표가 ‘중국의 꿈’(中國夢)을 실현하는 것이며, 대외정책으로는 함께 G2로서 미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국제 문제에 대처하는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를 추구한다는 전략을 밝혔다. 그동안은 제3세계에 속한 발전도상국으로 자리를 매김하고 있었지만, 지난 35년간의 고속 경제성장으로 세계 경제무대에서 차지한 부분만큼 정치적으로 제자리를 찾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동안 G2였던 구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지난 몇 년 간은 사실상 미국의 단독 국제무대 이었다. 100년 이상 국제무대에서 조용했던 잠자던 중국이라는 사자는 잠에서 깨어나 국제의 들판에서 들판의 왕좌의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자 고유의 본능으로 조용히 활동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2015년 9월 22일부터 28일까지의 시진핑 주석은 미국방문에서 자신의 인간적 이미지와 G2국가의 리더로서 미국이라는 G1국가 국민들 에게 최대한의 이미지를 심어 간다는 것이다.
그는 도착하는 첫 번째 여정으로 부인 평리위안 여사와 함께 시애틀 위성 항구도시 타코마시를 찾아가 1993년 시 주석이 젊은시절 중국 푸저우(福州)가 속한 푸젠(福建城) 성과 미국 타코마시와 자매도시 결연을 맺었을 때 타코마시의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의 푸저우시를 방문한 코니 베이컨 항만청장이었던 옛 친구를 그의 집으로 찾아가 21년만에 재회하기 위해서다. 시 주석은 자신의 젊은 시절 지방 간부의 자리에서 쌓았던 해외 교류의 경험을 국가의 지도자가 된 뒤에도 소중한 외교 자산으로 재활용하면서 자신의 인간미를 소개하고자 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거대한 환영파티가 아니라 베이컨의 집으로 찾아가 베이컨 자신이 만든 미트볼 스파게티를 같이 먹으며 재회하는 모습이 미국 전역 TV와 전 세계의 뉴스 화면에 소개되기도 했다. 13억이 넘는 중국의 리더 시 주석이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자신의 젊은 시절 국가의 발전을 위해 함께 봉사했던 외국의 옛 동료를 찾아가 소박하게 담화하는 G2로 성장한 중국 인민의 지도자 시 주석이다. 시 주석은 미국 방문의 일정에서 22일-24일 타코마시 방문, 타코마 링컨 고등학교방문 연설, 주정부 및 우호 단체 주최 환영 만찬회에서 연설, 미·중 주지사 성장 포럼참석, 미·중 CEO 확대 좌담회, 24일-26일 워싱턴 일정에서, 미·중 정상회담,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공동기자회견, 국빈만찬, 26일-28일 유엔총회연설, 기후변화 지도자 오찬에서 연설 등이 시 주석의 방미 여정이었다.
G1미국과 G2중국의 국제 정세의 변화와 중국의 대외정책의 발전의 변화를 알아차린 일본 정부는 그동안 우호적이던 정책이 대립되는 방향으로 자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주적으로 생각하는 러시아 소련을 겨냥해서 홋카이도(北海道)에 배치돼 있던 최정예 전차 사단을 남쪽의 오키나와 일원으로 이동배치하고,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가 일본인 개인소유로 등기 되었던 것을 국가의 소유지로 등기 전환하면서 순찰을 강화하고 있다. 현재 실효 지배자는 일본 자신들이기에 덮어두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센카쿠 영토분쟁을 악화시킨 책임은 주로 일본정부에 있다. 1970년대 중·일 국교정상화 당시 양측은 서로가 영토분쟁을 덮어두기 약속했으나, 이후 일본정부는 끊임없이 남중국해역에서 중국에 대한 순시 선박의 도발을 통해 분쟁의 강도를 높여왔다. 일본에 대한 중국으로부터 일본의 안보 위협을 인위적으로 일본 국민들에게 조장함으로 이를 빌미로 삼아 평화헌법을 개정하고자 하는 이유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구 소련 붕괴 이후 주적으로 삼았던 소련보다는 이제 모든 초점을 중국에 두고 있다. 아베 정부는 센카쿠, 독도 등 주변 국가들과 영토문제로 분쟁을 문제가 기승을 부릴수록 그들이 원하는 평화헌법을 수정하여 재무장를 하기를 바라고 있다. 대부분 한국인들은 현재 중국의 군사력이 일본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은 일본의 군사력이 정보수집 능력이나 타격의 정확성 등 질적인 측면에서 중국을 앞서고 있다. 현재 아베정권은 중·일간에 군사적 충돌은 일본으로 하여금 군사력의 재무장을 빨리 구축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일 군사동맹의 저의에는 미국은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의 군사력을 건제하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으며 급부상하는 중국을 일본으로 하여금 방어하게 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은 과거의 어느 때보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문제들이 많은 시대에 중국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우선 그의 공식직함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 서기겸 국가 주석이다. 그러나 그가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기도 했다. 시 주석의 마지막 경쟁자는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무원 상무부총리에 이어 2013년 3월 15일 전국인민대표 회에서 중국 국무원 총리로 임명된 리커창 총리이었다. 그는 전임 후진타오 주석의 심복이면서 후진타오가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던 리커창이었다. 그러한 의중을 잘 알고 있는 전임 장쩌민 주석은 대항마로 제시한 인물이 바로 시진핑 주석이었다. 시진핑 자신에게는 언제나 리커창이라는 강력하고도 현실적인 영향력을 지닌 경쟁자가 마지막 무대에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공청단파인 현직후진타오 주석의 후원을 받는 리커창과 중국 공산당 원로들과 전임 장찌민 주석의 후원을 받는 시진핑과 마지막 일인자 선출에서 극적으로 시진핑 주석이 제5세대 13억이 넘는 중국인민의 삶을 책임지는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되었다.(다음호에 계속)
강호생 선교사
Dr.강호생 Mlssion Pastor
Iona Columba College 출강
Mental Health CPE 과정중
M.Div, M.Th, D.Ics
jhskang@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