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지리
현대 코린토스 운하와 고대 코린토스에 대하여 / 고린도 (Corinth)
코린토스 운하 (Corinth Canal)
그리스(한문: 희랍, 希臘)의 코린토스 운하(Corinth Canal)는 이오니안 해(Ionian Sea)의 코린토스 만(Gulf of Corinth)과 에게 해(Aegean Sea)의 사로니코스 만(Saronic Gulf)을 연결하는 운하이다.
코린토스가 일찍부터 세계의 상업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본토와 펠로폰네소스(Peloponnese Region)를 잇는 동시에, 동쪽에 사로니코스 만과 서쪽의 코린토스 만 이 두 만의 바다를 이어주는 지협에 위치한 때문이었다.
다른 두 바다를 이어 배가 항해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사로니코스 만에서 배를 들어 코린토스 만 육로로 운반해 내려 항해하기를 시도했으나, 아무리 작은 배라도 한쪽 바다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 일은 고되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대부터 이 지협에 운하를 파려는 수많은 계획과 시도가 있었다.
이미 기원전 6세기 초에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Periandros)는 이곳에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 역시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지만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6,000명의 유대인 포로들을 팔레스타인(Palestine)에서부터 코린토스로 이주시켜 운하를 파는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 공사도 골족의 로마 침입으로 중단되었다. 이 때 유대인 포로들은 계속 코린토스에 남아 살게 되었다. 이 유대인들이 나중에 사도 바울을 맞아 코린토스에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를 세우게 된다.
1881년 프랑스의 회사에 의해 운하가 기공되어 1893년 그리스 회사에 의해 완공되었다. 길이 6.3km, 바닥 너비 21m, 표면 너비 25m, 깊이 8m의 코린토스 운하가 완성됨으로써 아테네의 외항으로 그리스에서 가장 큰 무역항으로 상공업의 중심지인 사로니코스 만(Saronic Gulf)의 피레에프스(Piraievs) 항구와 이오니안 해(Ionian Sea) 이탈리아의 브린 디시(Brindisi) 항구 사이의 항로를 320km 단축하였다. 그러나 코린토스 지협을 따라 건설된 이 운하는 그 규모가 너무 작아 지금은 대부분 관광용 여객선이 이용하고 있다.
코린토스 (Korinthos)
그리스(한문: 희랍, 希臘) 본토와 남부의 21,549sqKm(제주도 1,845sqKm의 11.6배)의 필로폰네소스 반도(Peloponnese Region)를 잇는 코린트 지협(地峽)에 있었던 고대 폴리스 및 현대도시를 말한다. 코린트(Corinth)라고도 한다.
‘뿔’을 의미하는 코린토스(Corinth, 그리스어: Κόρινθος)는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로 기원전 400년에 인구 90,000명을 지닌 거대하고 중요했던 상업 도시로서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Peloponnesus) 반도를 잇는 지협(地峽)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의 코린토스는 1856년의 지진으로 고대 코린토스가 완전히 폐허가 된 후, 동북 5㎞ 지점(운하의 서쪽 끝 부근)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옮겨 갔는데, 현재 코린티아 주의 주도(州都)이며, 2011년 현재 인구는 38,132명이고, 면적은 102.2sqkm로 서울 605sqkm의 6분의 1정도이다.(출처: http://www.korinthos.gr/)
코린토스는 고대로부터 ‘온 그리스의 빛’(Iumentotius Graeciae)이라고 불리며 그 번영을 자랑하던 도시였으나, BC 146년 로마의 뭄미우스(Licius Mummius) 장군과 그의 정병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것은 코린토스가 반로마 운동을 일으킨 아가야 도시연맹의 본부였기 때문만 아니라, 로마는 이전부터 코린토스의 번영을 시기질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코린토스는 100년의 긴 세윌에 걸쳐 폐허가 된 채 버린 바 되었으나, BC 46년 선견지명이 있는 율리우스 가이사(Julius Caesar)는 그 유리한 지리적 위치에 착안하여 이것을 로마의 식민시로써 다시 부흥시키게 된다.
그는 이것에 Colonia Laus Julia Corinthus라는 명칭을 주었다. 먼저 식민으로써 보내진 사람은 로마의 노병과 피해방자(freedmen, 자유인)들이었으나, 곧 각 처에서 모여들어 사는 그리스인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나 알렉산드리아에는 각각 수만의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도시들과 거의 비등할 만한 번영을 자랑하기에 이른 코린토스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와서 살았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사도행전 18장에 의하면, 이 도시에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 또 코린토스의 땅에서 ‘히브리인 회당’이라는 비문을 새긴 돌조각이 발견되었다. 또 사도행전 18:2에 의하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로마에서 코린토스로 이주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곳에 와 살게 된 유대인의 수는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코린토스의 지리적 위치는 각처에서 오는 여행자, 상인, 항해자들을 끌어들이는데 매우 유리하였다. 즉, 코린토스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지협의 남단에 위치하여, 말하자면 그리스의 목을 조를 수 있는 유리한 곳을 차지하고 있음과 동시에, 서쪽 2.4㎞ 지점에 있는 레기옴(Lechaeum) 항은 코린토스 만에 있고, 또 동쪽 13.5㎞ 지점에 있는 겐그리아 항을 통하여 살로니카 항에 대하고 있어 마치 양쪽 바다를 발로 디디고 서서 지협을 가로막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서쪽으로는 로마, 멀리 스페인 방면에서 동양으로 가는 대부분의 선박은 일단 코린토스 만에 들어와 레기옴 항에서 양륙하고, 이것을 겐그리아로 보내고, 또 다른 배에 선적하여 항해를 계속하곤 하였다.
동양에서 서쪽으로 갈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펠로폰네소스의 우측 남단 말레 아갑(Akra Maleas)을 우회(320㎞)하면 많은 시일이 걸릴 뿐만 아니라, 풍랑이 거칠기 때문에 항해가 불편하거나 또는 위험했기 때문이다. 작은 배일 경우는 그대로 양륙하여 지협을 약 8㎞ 길이의 목제 궤도를 설치해 횡단하였다. 현재는 6.4㎞의 운하가 완공되었다.
코린토스는 신흥 도시로서 눈부시게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옛날 번영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전국에 있어서 최대의 무역 도시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 정부는 이것을 아가야 도(都)의 수도(首都)로 정하고 총독을 두었으므로 정치적 중심지로서도 역시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코린토스에는 샘물이 많이 있다. 아그로(Acrocorinthus)의 석회암 산(높이 575m)을 등지고 있는 요해지(要害地, 요충지로 지세[地勢]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였기 때문에 그리스에 있어서 최고(最古)의 도시 중 하나이며, 최초의 거주는BC 4000년대로 소급한다.
지형상 상업, 공업(놋세공, 도기제조, 이것은 특히 토질이 좋았음으로 유명)이 발달하였던 코린토스는 흥망성쇠의 역사를 반복했는데, 그 번영 시대는 BC 7~6세기와 BC 3세기(헬레니즘 시대) 그리고 AD 1세기(로마 시대)의 세 시기였다.
고대 코린토스의 성벽은 연장 8㎞로서 아그로코린토스의 것을 포함하여 만까지 연장된 것을 가산하면 총연장은 16㎞나 되며, 인구는 60만(그 중 3분의 2는 노예)이었다고 추정한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에서 코린토스를 방문했을 때는 비교적 새로운 부흥 도시로서 로마인을 비롯하여 헬라, 베니게, 팔레스틴, 애굽 등지로부터의 식민이 많아, 다양한 문화를 지닌 세계적인 코스모폴리탄적 도시로서 전통이 오랜 아덴보다도 전도지로서 유망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1년 6개윌 동안 체류하면서 전도하여 유력한 교회를 설립했다. 신자는 주로 하층 및 중산층으로부터 이루어져 있었다(고전 1:26~). 바울은 코린토스 체재중에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써 보냈다.
성읍의 중심부를 이룬 아고라가 발굴되었다. 그것은 동서 180m, 남북 90m의 장방형의 광장인데, 그 둘레에 신전, 상점, 주랑(柱廊) 등의 여러가지 건조물이 늘어서 있다.
남아고라는 두 단으로 되고, 남쪽은 낮고 북쪽이 2.5m 높다. 그리고 돌단을 따라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남단에는 길이165m의 도리어식(Doricorder) 주랑(BC 4세기)이 있으며, 뒷쪽은 33개의 방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최대의 아고라였다고 한다.
광장의 중앙, 즉 높은 부분과 낮은 부분의 경계에는 중앙 점포의 건물이 동서로 늘어서고, 그 중앙에 법정(행 18:12)이라고 부르는 다듬은 돌로 쌓은 높은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총독은 여기서 재판을 했으므로 바울도 이 법정 앞에 섰던 것이다. 이 때의 아가야 총독은 루기오 유니오 갈리오(Lucius Junius Gallio)였는데, 철학자 세네카의 형이었다.
코린토스 만의 북안 부근의 델피에서 출토된 비문은 갈리오가 51년 7월부터 52년 6월까지의 임기 동안 아가야 총독이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어 바울의 코린토스 체재 시기를 정확히 판단할 자료가 되었다.
광장의 북부에서는 항구 레가이온으로 훌륭한 포장 도로가 뻗어 있고, 이 도로가 광장에 접하는 곳에 백색 대리석으로 세운 아치의 주랑 현관이 있었다. 그것은 태양신이 화염의 전차를 탄 청동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주랑 현관 부근에서 ‘히브리인의 회당’이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회당 입구의 문 인방 돌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3, 4세기의 서체라고 하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바울 시대에도 상당수의 유대인의 식민이 있었으며, 이 시장 부근의 레가이온 가도에 연하여 회당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랑 현관의 동쪽에 베이레네 샘이 있다. 1시간에 11,000ℓ의 물이 솟아나와 오늘날도 부근의 마을에 급수하고 있다. 고대에는 아고라의 각 상점에 수도관으로 송수하고 가가호호는 우물을 파서 포도주나 육류를 우물 수에 달아매어 냉장하였다. 여기서 발견된 아구스도 시대의 비문에는 라틴어로 ‘macellum’이라 불리운 시장(市場)이 기록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0:25의 ‘시장[Shamble]’(정육점, mavkellon)은 같은 말인데, 여기서는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도 팔았다.
북서 시장의 주랑 동단에는 ‘거룩한 샘’이 있으며, 그 물은 지하터널로 10m 떨어진 밀교(密敎)의 소신전의 제단 밑으로 흘려 내려져 여기서 비밀스런 방법으로 물이 포도주로 된다고 한다. 아마 터널에 포도주를 미리 부어 넣고 제단에서 돌 항아리에 받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술의 기적은 디오뉴소스(박카스)의 제사에 관련하여 널리 행해지고 있었던 것인데, 그 방법을 여기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이 성천(聖泉)의 물이 말라 밀의가 없어지고 BC 4세기에는 메꾸어져 시장 부지의 밑으로 되어버렸던 것이다.
서북 시장의 북쪽 30m 지점에 고대의 아폴로신전(BC 550경)이 있었다. 기둥이 양측면에 15기, 정배면에 6기의 요주식(凹柱式), 도리아식 신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측 5, 남측 2, 도합 7기만이 선채 남아 있을 뿐이다. 원주(圓柱)는 높이 7m, 직경 1.7m인데, 로마 시대의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서북쪽으로 200m 떨어져, 극장가에 연한 유악당과 원형 극장이 있었다. 이 극장은 관중 18,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 시대에 건립, 로마 시대에 수복된 것이었다. 스테이지의 일부분이 발굴되었을 뿐 나머지는 발굴되지 않았다. 코린토스에서는 지중해 세계의 온갖 제사가 다 행해져 로마·그리스의 제신, 근동의 제신이 제각기의 신전에서 예배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성읍 남쪽에 높이 솟아있는 아그로(Acrocorinthus)정상에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 신전이다.
이것은 베니게의 아스다롯 제사의 영향을 받았으며 BC 5세기경 세워진 것이다. 신전에는1,000명에 달하는 미모의 부인들이 살면서 매춘에 종사했다고 한다. 성읍의 풍기가 매우 문란하여 ‘코린토스식으로 산다’(korinqiavzomai)란 말은 ‘행실이 나쁘다’란 의미로 통용되었다. 성문란이 교회 내에도 스며들어 교회의 고민이 컸다(고전 5:1).
고대 그리스 시대의 잡다한 인종과 민족의 집합 장소인 코스모폴리탄적 도시였다. 계급적으로도 여러 계층이 있었는데, 특히 주목할 것은 약 20만의 자유민에 대해 0만 이상의 노예가 의 인구를 구성하고 있었다. 코린토스는 상업도시였다.
따라서 이윤에 대한 사상이 발달하여 이기적 정신이 왕성하였다. 고대 그리스인의 자랑이었던 깊은 예술적 교양과 같은 것은 거의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다만 헛되이 수사(修辭)의 기교를 부리는 천박한 이기주의로 타락해버렸던 것이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발달, 이윤추구를 위한 투쟁, 헛된 변론수사 등의 폐단이 코린토스 사회를 풍미 하였다. 또한 코린토스는 향락의 도시였다. 코린토스를 지나가는 선객과 선원들은 수치도 모른 채 경박하게 행동하였다.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수많은 미모의 매춘부가 있어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코린토스에 모였다. 이리하여 코린토스는 음란한 도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바울이 로마서 1:21~32에서 부도덕, 불경건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한 것은, 그가 코린토스에 머물면서 코린토스 사회를 묘사한 것일 것이다.
백문경, 정성미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