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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도산서원과 퇴계 이황
도산서원 – 한국정신문화의 성지
도산서원은 퇴계 (退溪) 이황 (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이황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574년 (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 (陶山面) 토계리 (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영남학파와 한국유학을 대표하는 이황을 모신만큼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 원과 함께 한국의 양대서원으로 꼽힌다. 퇴계 이황은 1501년 (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 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기에 이곳이 생가이면서 태실이 모셔져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모 증축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 (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 (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그러나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 (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 (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 (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 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 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 (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 (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 (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1930년에 지은 동광명실 에는 이황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두었으며, 현재 약 1,300여 종 5,00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 (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 (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 (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 (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 (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 (玉振閣)’이 있는데, 퇴계 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 증축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한국정신문화의 성지로 불리우며 성역화 되었다.
퇴계 이황 (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뛰어난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 (眞寶), 자는 경호 (景浩), 호는 퇴계 (退溪)· 퇴도 (退陶) · 도수 (陶叟)이다. 좌찬성 이식 (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 (李堣)로부터 『논어 (論語)』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 (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周易)』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평생을 병치레하였다고 전해진다.
27세에 향시 (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하서(河西) 김인후 (金麟厚, 1510~1560)와 교류하고, 모재(慕齋) 김안국 (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 (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 (賜暇讀書)를 받았다. 중종 말년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히고,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 (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 (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았지만 끝내 퇴거 (退居)할 수 없는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 감사가 되자, 퇴계는 이를 피해 전임을 청해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 (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전임 군수 주세붕 (周世鵬) 이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扁額) · 서적 (書籍) · 학전 (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 (賜額書院)인 소수서원 (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 (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회에 이르렀다. 60세에 도산서당 (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 (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 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 (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 (招賢不至嘆:어진 이를 초빙했으나 오지 않음을 탄식하다)」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송인 (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 (陶山記)」 및 「도산 잡영 (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좌우에 두었다고 한다.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퇴계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 (行狀修 撰廳堂 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퇴계의 성망 (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 (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 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 (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고향에 돌아온 후 학문 탐구에 전심하였으나, 70세가 되던 다음해 11월 병환이 악화되었다. 돌아가시던 날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고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 (易愁: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 · 홍문관 · 예문관 · 춘추관 · 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 (遺誡) 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 (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황의 사상과 신념
이황은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와 양명학은 이단이자 화 (禍)로 간주 하고, 임금에서부터 동료,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불교 배척, 양명학 배척을 한결같이 말하였다. 이황은 송나라의 주자의 문서인 주자대전을 입수하려고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인 결과 그의 나이 지천명 때 1543년 (중종38년)에 드디어 주자대전을 입수한다. 그리고 그는 이언적이 쓴 저서들, 조광조가 쓴 저서들을 모두 탐독, 독파했는데 그중 이언적의 저서가 많고, 사서육경과 주자에 대한 원문과 그에 대한 해석, 주해와 이언적 자신의 생각, 견해를 적은 것을 읽고 크게 칭송하였다. 이언적 조광조의 저서 외에도 그는 이미 심경부주, 태극도설, 주역, 논어집주까지 이미 다 완독한 상태였다. 이황이 1543년 (중종 38)에 입수한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제 때에 재간 행한 가정간본 (嘉靖刊本)의 복각본 (復刻本)으로, 가정간본의 원본은 성화간본 (成化刊本)의 수정, 보충 본이었다 한다. 1549년 풍기군수를 사퇴한 직후부터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해서 완독하였다.
이황은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시대에는 기몬학파와 구마모토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 · 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 · 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경식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