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그리스·터키 여행공부
그리스 수도원들과 메테오라 수도원에 대하여
초대교회는 수도원이 없지는 않았지만 중요하지 않았고, 그다지 영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세의 신앙은 수도원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수도원 운동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로 인해 거의 종말을 고하게 되지만, 중세에서는 선하든 악하든 수도원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단체가 됩니다. 베네딕도는 중세 수도원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베네딕도 규칙’을 기록한 수도사입니다.
1. 수도원의 생활과 전통
수도원은 왜 생겨났을까요? 그것은 세속을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는 의도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 속에는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부름받은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수도원은 왜 만들어지고 탄생하게 될까요? 그것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수도적 삶을 사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수도사는 그리스어로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며, 수도원을 라틴어로 ‘Coenobia’로 불렀습니다. 이 말은 ‘공동의’라는 그리스어 코이노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것은 수도자들의 생활이 비록 은수자들이나 독수자들 처럼 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시작되었지만 가장 초기부터 공동생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문헌 속에는 이미 예수님 당시에도 그 후에도 고독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초기의 수도원 형성은 4세기 초에 이루어집니다. 주교였던 아타나시우스, 은수자인 안토니우스, 공주 수도사였던 파코미우스가 그들입니다. 그들을 통해 공식적인 수도원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수도원은 로마 제국의 박해와도 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 사막 깊숙이 피신했고, 세속적인 세상을 떠나 고독을 즐기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심했던 시기에는 수도원이 결코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밀라노칙령과 더불어 박해가 끝나고 교회가 점점 세력을 얻어 가며 정치적인 권세까지 획득하게 되면서 수도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교회가 직접 세우기도 하고, 은수자들에 의해 생겨나기도 합니다. 성 바실리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요하네스 카시아누스는 수도원 운동의 터를 닦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특히 카시아누스는 수도원 규칙을 만들어 공동생활의 기본적인 틀을 잡아 줍니다.
수도사의 생활은 노동과 예배, 두 기둥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예배는 찬양과 기도뿐 아니라 독서와 금욕적 생활까지 포함합니다. 수도사들에게 독서는 영적 생활을 증진시키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교부전’의 경우 예배 전에 한 장씩 읽는 것은 통상적인 관례가 되었습니다. “교부전은 명상적 기도와 완전성의 정점에 이르는 사다리는 올라가는 방법들을 다룬 설득력 있는 해설서에 해당한다.”
수도원에서의 독서는 현대인이 추구하는 지식을 습득하려는 실용적 측면보다는 영적인 깊이를 더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되었습니다. 이것은 후에 영적 독서(렉티오 디비나)의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 속의 도서관 이야기는 이러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서는 필사와 더불어 수도원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어 중세에는 거대한 부를 축적하기에 이릅니다. 독서와 더불어 수도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규칙입니다. 초기의 카시아누스의 ‘제도집’은 베네딕도에 의해 다시 규정되어 사용됩니다. 복잡하고 난해한 카시아누스의 제도집보다 베네딕도 ‘규칙’은 훨씬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지금까지도 수도원의 규칙은 ‘베네딕도 규칙’을 사용합니다.
중세의 문을 연 그레고리우스 교황(590-604년)은 베네딕도를 무척이나 존경하여 그의 대담집에 베네딕도 생애를 넣기까지 합니다. 그는 수도원을 선교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즉 르네상스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비판하고 조롱했던 수도원의 영향력 ‘안에서’, 그리고 수도원의 영향력을 ‘통해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수도의 일상은 매우 단조롭습니다. 모든 수도원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이른 아침에 찬미기도, 새벽 기도, 오전기도, 정오기도, 저녁기도, 마감기도, 한밤중의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도원의 일과는 대개 오전 2시부터 해가 질 무렵인 6시 30분 정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오후 낮잠 시간이 있었고, 식사와 노동, 독서 등으로 채워집니다. 독서는 지금 같은 묵독이 아니라 낭독입니다. 양피지의 책들은 가격도 엄청났고, 책이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읽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낭독하고 나머지는 듣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수도원의 간략한 역사를 정리해보면, 먼저 수도원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 바실리우스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규칙과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가장 초기의 역사에 속합니다. 그러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경건을 상실한 교회를 멀리하기 위해 은둔자들과 수도원이 크게 일어나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개인적인 은둔자가 아닌 이상 수도원의 경우는 교회나 부유한 귀족과 왕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수도원은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북동 지역인 이탈리아와 소시아 지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그레고리 교황이 등극하면서 수도원은 본격적으로 규모와 체계를 갖추면서 교회와 손을 잡고 선교적 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이 비록 금욕적이고 세속을 떠난 형태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세속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11세기가 지나면서 수도원들은 왕과 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부흥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0세기 수도원의 개혁과 성장을 이룬 클뤼니 수도원도 프랑스 윌리엄 1세가 910년에 지은 것입니다. 수도원의 성장과 역사는 가톨릭의 역사와 깊이 맞물려 있습니다.
2. 새로운 수도회들
수도원에서 가장 큰 난제는 그들이 가지는 삶이 과연 성경적이며 필요한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수도원이 개인구원과 완전에 몰입한 나머지 세속을 잃어버린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난제는 수도원과 교회가 때로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거나 11세기 말쯤에 다시 시작된 교회와의 연합을 이루기도 합니다. 사도적 삶은 세상 속에서 섬김과 봉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구도자적 삶은 홀로 독립되어 은둔과 명상을 추구합니다. 11세기 이후 갑자기 생겨난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은 명성을 이용한 가짜 문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도 규칙의 중요한 한 틀로 자리 잡았고, 사도적 삶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수도원에서 채용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은 독서와 기도, 고행에 집중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가 제자들에게 지침을 내릴 때 특히 청빈, 검소, 선행을 강조’했던 것으로 되돌아갑니다. 이것은 일종의 수도원의 개혁이었고,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수도원의 변혁이 교회의 변혁과 맞물립니다. 10세기가 넘어가면서 교회는 극도로 타락의 길을 걷습니다. 사제들은 온갖 부패와 음락과 악행에 절어 있었고, 교회는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 개혁을 부르짖었던 이들은 결국 수도원으로 눈을 돌렸고, 정체된 수도원들도 새롭게 개혁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개혁 운동은 교회와 수도원이 함께 손을 잡게 됩니다. 1039년에 창설된 아비뇽 교외의 ‘생 루프 수도원’이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톨레도, 오스마, 다른 대성당들이 수도 참사회로 바뀌면서 서서히 개혁의 운동이 일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개혁은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에까지 번져갑니다. 특이한 것은 기존의 수도원이 세속을 피해 깊은 산이나 사막 속에 있었다면, 개혁의 바람을 타고 시작된 수도원들은 ‘다수는 도시 안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수녀원은 아마도 그 어떤 수도원 역사보다 독특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자는 침묵하고 남자에게 배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위축되고 축소됩니다. 수도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엄격한 금욕생활을 추구한 나이 든 과부들의 청원으로 수녀원이 생기게 됩니다. 11세기 영국의 경우는 남자 수도원 네 개에 한 개의 수녀원이 존재했습니다. 수녀원은 독일에서 번영을 누립니다. 오토대제의 딸이었던 마틸데는 크베들린부르크의 수도원장까지 지낼 만큼 독일에서는 수녀원에 대한 호의적 정서가 자리 잡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편견은 결코 축소되지 않았습니다.
크산텐의 노르베르트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중세 수도원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입니다. 크산텐의 노르베르트는 12세기 수도사들 중에서 가장 사도적 삶을 실천했던 인물입니다. 성 프란체스코 역시 한 세기 후인 13세기에 가난과 청빈으로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크산텐의 노르베르트는 떠돌면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수도적 생활보다는 사도적 삶을 추구했기 때문에 베네딕도 규칙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을 따랐습니다. 그는 의전수도회인 프레몽트레회의 창설자이기도 합니다. 프레몽트레회는 수도적 삶을 추구하고 관상을 추구했던 이전의 수도생활과 탁발수도회의 활동적 생활을 접목시킨 수도회입니다. 1126년 교회의 정식 인가를 받았고, 서부 유럽, 특히 헝가리 지방의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한 세기가 지난 다음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프란체스코는 영적 모험이 소명임을 알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내어 자신만의 영적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의 규칙은 매우 급진적이었습니다. 소위 탁발수도사로 알려진 이들의 규칙은 ‘동정, 복종, 청빈’를 서약했고, 다른 부유한 수도원과 다르게 검소하고 초라한 수도원에서 생활합니다. 그들은 가난은 가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도원의 부흥기는 9-12세기로 보입니다. 그 이전에는 수도원이 그리 많지 않았고 큰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1346년~1353년에 절정에 달했던 흑사병과 16세기 종교개혁은 수도원의 치명적인 위협이었습니다. 개신교가 정착한 독일과 영국의 경우는 대부분의 수도원은 해체되고 재산은 몰수되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수도원의 전통과 역사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수도원이 전해준 영성과 독서, 노동과 필사의 이야기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만약 수도원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는 미미했거나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인문학적 기능을 수도원이 행해왔기 때문입니다. 사도적 삶을 통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임무를 감당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일상을 벗어나 하나님을 추구하는 경건의 삶도 필요합니다. 수도원은 신앙이 가지는 한 극단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이 추구했던 노동에 대한 신성의 부여는 일반 가톨릭교회가 아니라 수도원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도원의 전통과 역사를 살피면서 현대교회가 잃어버린 거룩과 단아한 생활을 발견하게 됩니다. 칼빈의 소명론은 극도로 타락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동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정의한 것입니다. 세상과 너무나 닮아버린 현대교회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우리가 수도원을 설립한 필요는 없겠지만 일상 속에서 수도적 삶은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삶을 다시 점검하고 난잡하게 벌려진 삶은 단조롭게 정리하고, 방만한 생각과 일들을 내려놓고 가난과 청빈(淸貧) 함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메테레오(Meteora) 수도원
메테오라는 테살리아 북서부, 동쪽으로는 핀두스 산맥을 배경 삼아 비옥한 평원이 흐릿하게 보이는 푸른 하늘에 닿도록 멀리 펼쳐져 있으며, 그 땅을 가르며 피니오스 강이 흘러갑니다. 산 중턱에는 마치 돌로 된 숲처럼 울퉁불퉁한 회색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솟아 있는 절경입니다. 그 솟아오른 바위산 꼭대기에 수도원들이 서 있는데, 이를 메테오라 수도원이라 부릅니다.
수도사들이 바위틈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에 처음으로 살러 온 것은 9세기였으나, 수도원 건물이 건축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이 무렵에 비잔틴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적대 세력인 튀르크 족은 계속해서 수도원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고립되어 있고 안전한 곳을 찾아 한 무리의 수도사들이 칼람바카 근처의 바위산에 작은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은둔자와 수행자들은 11세기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12세기 말에는 파나기아 두피아니라고 하는 공주수도단지( 수도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마을)와 작은 교회가 ‘하늘의 기둥’에 있는 한 기슭에 들어섰는데, 이곳에는 이미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정치가 상당히 불안했던 14세기에 테살리아의 수도원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봉우리 위에 조직적으로 건축되었고, 15세기 말에는 그 수가 24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수도원은 17세기까지 계속 번성했습니다. 현재는 아기오스 스테파노스(Aghios Stephanos) 수도원, 아기아 트리아스(AghiaTrias) 수도원, 발람 수도원, 메테오론(Meteoron) 수도원 네 곳에서만 종교 공동체가 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의 수는 점차 늘어났고, 이곳은 ‘메갈로 메테오로’, 즉 ‘거대한 메테오로’라 불리며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수도원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이 공동체는 스물네 채의 수도원을 포함하는 규모로 성장했는데, 로프로 된 그물을 늘어뜨리고 접을 수 있는 나무 사다리를 이용해서 접근할 수 있었기에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수도원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저마다 재산과 농작물, 양이나 염소 떼 등을 관리하였다고 합니다. 이 수도원들을 통해 그리스의 전통이 튀르크 족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로 스며들어 보존할 수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 하에서 소멸되어 영원히 사라질 위기를 벗어나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메테오라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테살리아” 지방에 위치해 있습니다. 198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으로 메테오라라는 말은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기둥 모양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사암들로 이루어진 바위산들과 그 정상에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들이 있는 기이한 곳입니다. 이 곳은 그리스 정교도의 성지순례 코스이기도 한데, 수도원들은 평균 300m, 가장 높은 것은 550m 높이로 솟아있는 바위 위에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은 박해자들을 피해, 그리고 하나님과 끊임없는 대화를 하고 싶은 수도승들에 의해 14세기에 처음 세워졌으며, 전성기인 16세기에는 24개의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속세와 차단된 생활을 하기 위해 올라가는 길을 만들지 않았고, 물자 보급과 사람들의 출입은 도르래를 이용해 끌어올리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수도원들은 비좁은 터에 세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사들의 개인 기도실, 교회당, 휴게실 등이 마련되어 있고, 심지어는 도서관까지 있는 곳도 있습니다. 각 수도원 성당에 있는 오래된 이콘과 벽화들은 역사적 자료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현재는 수도원 5곳과 수녀원 한 곳만이 남아있으며, 1925년부터 바위를 깎아 진입도로를 만들기 시작해 지금은 차량으로도 쉽게 출입이 가능합니다. 수도원도 일부를 개방하여 제한된 지역 내에서 일반인의 관광이 가능합니다. 다만, 여자들은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어야만 관람이 허용됩니다.
현재 남아있는 수도원들은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파손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으로, 대 메테오라 수도원, 바를라암 수도원, 로사노 수도원,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수도원, 트리니티 수도원(007 시리즈에 나온 수도원), 성 스테파노 수녀원이 남아 있습니다. 사암의 중간 중간에 난 구멍은 기도하기 위해 수도사들이 들어가 있던 장소라고 합니다.
* 대 메테오라 수도원 메갈로 메테오로 수도원 – 1337년 최초의 수도원 그랜드 메테오라 수도원
수도원 중에 가장 큰 암봉위에 세워졌습니다. 올라가는 길은 바위를 뚫어 올라가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수도원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운영된다고 하는데 정교회는 천주교처럼 수직적 조직이 아니라고 합니다.
* 바를라암 수도원 – 1518년 발람 수도원
메테오라에서 두번째 큰 수도원 1542년에 은둔한 발람에 의해 세웠졌습니다. 비쟌틴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기의 복음서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 루사누 누네리 수도원 – 성바바라 사원
비쟌틴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자인 막시모스와 이오안니나에서 온 이아사프에 의하여 1545년에 건설 구릉지대가 있는 그리스 테살리 평원 지역에 솟아난 바위군 정상에는 루사누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비교적 낮은 봉우리 위에 지어진 루자노 수도원은 현재는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메테오라 수도원 중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영화 7인의 독수리에서 납치된 가족이 감금되어 있던 장소로 나오는 곳이라고 합니다.
1868년에 나무다리를 설치하였다가 1930년대에 철제교량으로 대체하였는데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때에 파손된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나중에 고고학적 고증을 거쳐 수리된 뒤, 1988년 이 후부터는 13명의 수녀들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에 의해 사용되고 있고 현존하는 6개의 수도원 중 스테파노 수도원을 포함하여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성 스테파노 수도원, 아기오스 스테파노 수도원 – 현재 수녀원으로 사용
차가 다니는 길가에 위치하여 메테오라에서 가장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수도원으로 14세기 중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안드로니코스가 머무르기도 해서 황제 수도원으로도 불렸습니다.
칼람바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라 칼람바카의 전망대라고도 불리웁니다.
14세기에 수도원이 형성되었고 많은 수도사들이 있었으나 1961년도부터 수녀원으로 바뀌어 비쟌틴 성화, 성가 등을 제작 판매하고 있습니다.
85m 높이의 바위위에 세워졌으며, 1388년에 세워져 1628년에 확장되었습니다. 뛰어난 프레스코화와 성화가 가득합니다.
* 성 트리니티 수도원, 아기아 트리아다 수도원, 홀리 트리니티 수도원ᆞ
Monastery of Agia Triada 건물 중 방문하기가 가장 힘든 곳 10평 남짓한 작은 교회가 유명합니다.
이 곳에는 당대 최고 화가인 수도사 테오파네스가 그렸다는 성화를 비롯하여 비쟌틴 시대를 대표하는 프레스코화가 가득 차 있습니다. 가장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아기아 트리아다 수도원은 메테오라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수도원으로, 현재 잠실에 건축중인 롯데슈퍼타워(555m 예정) 보다 10m가 더 높은 565m 절벽 위에 지어진 건물로 ‘영화 007 포 유어 아이즈 온리’를 촬영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 높은 바위기둥들의 꼭대기에는 거짓말처럼 지붕이 붉은 비잔틴 양식의 수도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수 등반 장비를 갖춘 전문 산악인들조차 올라가기 힘들다는 이 높은 바위 꼭대기에 도대체 어떻게 수도원을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분분하다고 합니다. 괜히 세계 10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게 아닌 듯합니다.
김용강 · 김선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