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역사란 영원한 자유의 저변 확대사(擴大史)다
(헤겔이 추구한 자유와 환희를 찾아서)
들어가는 말
1963년, 제가 대학에 들어간 첫 해 교양과목으로 수강한 ‘문화사 개론’ 첫 시간이었습니다. 대형 계단식 교실에 들어선 30대 초반의 젊은 김동길 선생님은 첫 말문을 이렇게 열었습니다. ‘제 과목에 수강신청을 하고 함께 자리한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영원한 자유의 저변 확대사입니다. 이는 철학자 헤겔이 한 말입니다. 역사는 지난 날 오직 한 사람만의 자유에서 출발하여 몇몇 사람들의 자유를 거쳐 마침내는 온 인류의 자유를 향하여 확대 전진되어 왔습니다. 나는 이번 학기 강의를 통하여 인류의 역사란 자유의 저변 확대사라는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역사를 이해하고, 또 역사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반짝이는 눈빛에는 이슬이 서려있었고 강의는 피를 토해 내는 열변처럼 들렸습니다. 55년 전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들었던 ‘역사는 영원한 자유의 저변 확대사’라는 선생님의 선언은 당시 군부독재가 대학을 비롯하여 온 나라를 얽어매던 마당에 저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고 고민하게 했습니다. 그 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자유’라는 단어는 저의 사유의 틀을 형성시켜 온 중심개념 중 하나가 되어왔습니다. 이제는 90이 넘으셔서 선생님도 예전 같지는 않으시지만 사실 ‘젊은 날에는 진취적이고 혁명적이지 않은 지성인이 어디 있겠으며 늙어서는 보수적이고 사려 깊지 아니한 인생이 어디 있으랴!’ 하는 말을 상기하면서 지금도 가끔은 그 때 그 젊은 시절로 돌아가곤 합니다. 오늘 후반부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사실 헤겔은 역사학자는 아닙니다. 그는 칸트로부터 이어져 온 독일 관념론의 전통 위에 서있는 철학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자기 나름으로 세계와 인류의 역사를 꽤뚫어 보고 해석해 내는 독특한 사관을 지닌 역사철학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려는 공부는 주로 헤겔의 ‘절대정신’을 포함하는 그의 관념론과 철학하는 방법론으로써의 변증법에 대한 것이 되겠습니다만 끝 부분에 가서는 그의 역사철학을 중심삼아 ‘영원한 자유를 향한 역사 순례 이야기’도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인물과 삶
헤겔(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1770년 독일 Stuttgart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일은 그 때까지도 이웃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아직 독립된 근대 민주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영주들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봉건 영주들은 백성들을 마치 농노처럼 부리고 수탈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르네상스가 일어난지도 3백여년이나 지났고 한 때는 종교개혁과 각종 근대적인 사상, 예술, 교육 등에서 가장 앞서 갔던 나라였지만 당시 독일은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이나 시민 혁명에 성공한 프랑스에 비해 정치, 경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한참이나 뒤쳐진 후진국 중 하나였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30년이나 되는 긴 전쟁을 치루었고 국토는 작아지고 인구는 3분지 1로 줄어들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슈투트가르트는 뷔템베르크 공작에게 속한 영지였습니다. 물론 오늘날 슈투트가르트는 벤츠와 포르쉐의 본사가 들어선 과학 기술 도시가 되었지만 250년 전 만 해도 근대화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고 여전히 영주들은 가톨릭과 루터교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자기 이익을 위해서 왔다 갔다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헤겔이란 사람은 이런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Jared Diamond가 ‘총 균 쇠’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모든 문화와 문명과 사상은 그 시대의 환경이 만들어 낸 작품들입니다. 1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서 틴에이지를 보낸 헤겔은 아버지가 결정해 준 대로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 그곳에 있던 김나지움에서 고전어를 공부한 후 18살 때 Tubingen 신학대학에 들어가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다음 석사 학위 까지 수료했습니다. 이 때 튜빙겐에서 룸 메이트로 만난 친구들 중 시인 Hoelderlin과 철학자 Schelling이 있습니다. 억지로 신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목회자가 되는 데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헤겔은 그 후 Bern과 Frankfurt에서 6년 동안이나 가정교사로 일을 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침내 Jena대학에 들어가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 대학의 시간 강사로 채용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Schelling과 함께 ‘철학비판잡지’를 발간하다가 드디어 1807년 그의 대표작이요 독창적인 첫 저서라고 할 수 있는 ‘정신현상학’(Phenomenologie des Geistes)을 출간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 이어서 Napoleon이 예나를 침공하고 대학이 폐쇄됨으로 헤겔은 그곳을 떠나 잠시 Bamberg에서 신문 편집일을 하다가 이듬해인 1808년 Nurnberg로 옮겨 1816년까지 긴 시간을 거기에 있는 짐나지움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근무했습니다. 여기에서 그에게는 두 가지 큰 일이 있었는데 하나는 1811년, 41살이 된 헤겔이 22살의 Marie von Tucher와 결혼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그의 두 번째 명저인 ‘논리학’(Wissenschaft der Logik, 1812)을 출간한 것입니다. 1816년에는 Heidelberg 대학의 철학교수로 취임하여 1년 만에 ‘철학백과사전’(Encyclopae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n Grundrisse)을 내고 2년 후인 1818년에는 마침내 Fichte의 후임으로 Berlin 대학 교수가 되어 1831년 사망 때까지 13년 동안 교수로 일했습니다. 죽기 1년 전에는 Berlin 대학의 총장이 되었고 18년 전에 썼던 논리학 개정판을 준비하던 중 콜레라에 걸려 61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평생 존경했던 스승 Fichte의 곁에 안장되었습니다.
대표적 저술들
앞에서 잠깐 말씀드렸지만 여기서는 헤겔 자신이 쓴 저서 중 우리말로 번역된 책들 가운데 주요한 것들만 몇 가지를 추려서 소개합니다.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 (Differenz des Fichteschen und Schellingschen Systems der Philosophie, 1801) 임석진 역, 지식산업사, 1989.
정신 현상학, (Phaenomenologie des Geistes, 1807) 임석진 역, 한길사, 2005, / 김양순역, 동서문화사, 2011.
대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 1812) 임석진 역, 지학사, 1991.
철학강요, (Enzyklopaedie 1-3, 1830) 을유문화사, 1998. 서동익 역(1983) 김계숙 역(1955).
법철학,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0) 임석진 역, 한길사, 2008.
종교철학, (Philosophie der Religion) 우리말 번역은 ‘헤겔의 종교론’ 정대성 역, 한들출판사, 2001.
역사철학강의, (Vorlesungen u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1-3) 권기철 역, 동서문화사, 2008.
미학, (Vorlesungen uber die Aesthetik) 두행숙 역, 은행나무, 2010 / 서정혁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헤겔의 예술철학, (Vorlesungen uber die Philosophie der Kunst) 한동원 역, 2008.
철학사, (Geschichte der Philosophie) 임석진 역, 지식산업사, 1996.
역사속의 이성, (Die Vernunft in der Geschichte) 임석진 역. 지식산업사, 1992.
(참고: 위에서 소개한 대로 헤겔의 저서와 논문들 11편중에서 6권이나 우리말로 번역한 임석진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196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헤겔의 노동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헤겔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요, 국제 헤겔연맹 회원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헤겔학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을 지내면서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내고 후학들을 양성해 왔습니다. 독일에 있을 때는 북한 노동당원으로 입당했으며 두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1967년 동백림사건의 중심에 있었고 마침내 국내로 체포, 압송되어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윤이상 작곡가, 이응로 화백, 천병상 시인 등이 이 사건과 연류되어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에 연류된 사람들이 200여명이나 된다고 발표했지만 결국 기소된 사람은 30여명이었고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간첩죄로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석방 후 명지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2018년 86세로 별세했습니다.)
헤겔철학의 기본적 틀
1) 독일 관념론의 최고봉 – 헤겔은 칸트 이후 이어져온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입니다. 독일철학은 칸트로 부터 시작하여 Fichte와 Schelling을 거쳐 Hegel까지 인간의 이성을 거의 절대화해 왔습니다. 관념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이나 사유를 현상이나 경험보다 더 우위의 것으로 여깁니다. 물론 지난 시간에 공부한대로 칸트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드린 철학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최고의 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사유나 판단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순수 이성’과 우리의 삶과 행위까지도 지배하는 ‘실천이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실천이성’을 ‘순수이성’보다 상위의 개념이라고 하면서 ‘인간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존재’이며 또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할 존재’이기에 ‘바로 이 이성적 행위를 할 때 비로소 우리의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서구철학의 전통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칸트의 ‘모든 것 위에 이성을 앉혀두는’ 관념론 위에 서있기 때문에 서구인들은 인간의 ‘감정까지도 이성적으로 조정하고 조절하는 사람들’이며 ‘인간의 모든 행위는 반드시 합리성과 이성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후 피히테와 셸링을 거쳐 헤겔에 이르러서는 이런 인간 이성을 최고의 ‘절대 정신’(Absolute Geist)으로 이해한 것이 독일관념론의 역사입니다.
2) 관념론이란 무엇입니까? 영어로는 Idealism, 독일어로는 Idealismus라고 부르는 觀念論이란 글자 그대로 관념, 즉 머리로 생각하는 것, 이성적인 것, 나타난 현실 뒤에 있는 것, 플라톤이 말한 현상계 뒤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우주의 본질이요,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물론 관념론에도 여러가지 갈래들이 있습니다만 좀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관념론은 이성과 정신과 마음과 사유가 눈에 보이는 현상계와 물질계의 기초이며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입니다. 우리 눈 앞에서 펼치어지는 현실세계는 모두 다 이성이나 정신이 겉으로 혹은 밖으로 나타난 표상일 뿐이며 따라서 물질의 세계는 인간과 역사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생각’을 앞세우는 관념론적 사람들과 그 반대로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실재론(Realism, Realismus)자들을 보게 되고 또 그 둘 사이에서 시의와 환경에 따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우리 남편은 구름잡는 사람 같아요! 쌀 값이 얼마인지 렛투스 한 통 값이 어떻게 되는지는 하나도 몰라요! 꼭 공기만 먹고 사는 사람 같아요!’ 하는 부인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말로는 ‘내 남편은 관념론자’란 말입니다. ‘양심대로 살아야한다’ ‘감옥에 가더라도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해야한다’ ‘마침내는 정의가 이기고 진실이 승리한다’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무기는 반드시 없애버려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원칙주의자들이요, 이상주의자들로써 꿈과 관념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이 지닌 생각이나 하는 말이 옳은 것이긴 하지만 ‘현실성은 거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런 사상이나 그런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일종의 뜬 구름을 잡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관념론자’라고 부릅니다. 그런가 하면 결과적으로 주어진 현실에다 발을 딛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콩나물 한 봉지라도 싼 것을 찾아 다니며, 10원이래도 더 깎으려고 하며 ‘양심은 무슨 얼어 죽을 양심이야!’ ‘목숨 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딨어!’하면서 몸으로 부딪치며 열심히 살아가는 ‘현실주의자’들을 우리는 철학적으로 ‘실재론자’라고 부릅니다. ‘나는 관념론자인가? 아니면 실재론자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나는 그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사람인가?’ 나의 철학적 정체성을 한번 질문해 봅니다. 역사상 ‘모든 경험계는 정신계에 기초한다’는 관념론적 생각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거쳐 중세의 스콜라철학은 물론이고 인도의 Hinduism이나 조선시대의 ‘理氣 二元論’에서도 주창되었던 것으로 형이상학과 존재론과 인식론의 기본 이론 중 하나였습니다만 그것이 가장 철저화된 것이 독일관념론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독일의 관념론에 대해서는 훗날 니이체나 쇼펜하우어, 포이에르바하와 칼 마르크스의 반대 이론이 등장합니다만 하여튼 당시까지만 해도 칸트는 독일 관념론의 ‘창시자’요 헤겔은 그 ‘완성자’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3) 칸트를 넘어서서 – 관념론자로써 헤겔은 당연히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것’을 최고로 신뢰한 사람입니다. 칸트와 헤겔은 인간의 이성을 가장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칸트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그에게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주장과 논리에는 그 자체 속에 이미 모순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 헤겔의 논리요, 변증법의 출발이 됩니다.
첫째로 헤겔은 칸트의 인식론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헤겔은 칸트가 대 스승이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의 철학에서 문제점을 찾아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앞 선 사람의 논리나 주장, 스승이 세워 놓은 체계나 방법론을 비판이나 이견없이 그냥 받아드리고 수용하는 것은 모든 부분에서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가 됩니다. 훗날 헤겔이 주장한 대로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 앞선 사람들의 생각과 이론과 주장에서 모순을 찾아내어 이의를 제기함으로 변증법적 발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반항하라! 부정해라! 그래야 역사는 발전한다!) 헤겔은 칸트가 그의 ‘순수이성 비판’에서 ‘물자체’(Ding an sich)는 알 수 없다, 곧 ‘나타난 현상 뒤에 있는 본질은 알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서 이는 ‘이성의 능력에 대한 평가 절하’라고 지적했습니다. 그 무엇이든 우리 인식의 대상이 못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며 결국은 관념론과 합리주의의 논리적 모순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헤겔은 말합니다. ‘만약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이성으로는 나타난 현상만 알 수 있고 실재하는 물 자체는 알 수 없다고 주장했던 칸트에 대해서 헤겔은 결별을 선언합니다. 헤겔은 선언합니다. ‘현상과 실재는 다른 것이 아니다. 실재란 모든 나타난 현상계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실재가 현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상이 실재를 만든다’ ‘인식되지 않는 실재란 없다. 모든 실재하는 것은 반드시 인식된다. 그리고 그 실재는 현상 속에 있다’ 물론 모든 현상계는 부분적이고 제각기 다른 모습들로 나타나지만 실재계는 그런 다양한 현상계들의 ‘모음이고 집합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의 주제인 ‘정신현상학’은 정신, 이성, 사유, 실재를 현상, 경험, 실물, 현실과 다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것들은 ‘하나’라는 생각을 묶어서 ’정신현상학’이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경험이 반복되거나 넓어지면 우리의 지식 또한 커지게 된다’ ‘경험을 통한 지식의 증가는 합리성의 증가를 가져 온다’ ‘그러므로 경험이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다’ ‘정신은 현상이고 현상은 정신이다’ 헤겔은 현상과 실재를 구별하지 않은 것처럼 이성과 경험도 분리시키지 않았습니다. 경험이 커지면 커질수록 지식도 늘어나는 게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의 모든 경험에는 합리성이 내재 되어있다고 보았습니다. 지난 날 칸트는 ‘물 자체’는 우리 눈 앞에 나타난 현상계와는 다른 실재라고 보았습니다만 헤겔은 실재와 현상은 하나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의 유명한 선언이 나타납니다. ‘모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모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Whatever is Reasonable is Ture, Whatever is True is Reasonable) 헤겔은 이성과 경험을 종합한 총체적 지식을 추구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세계와 모든 주어진 현실은 실재하는 진리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철학자는 그 어떠한 현실도 지나쳐서는 않된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성=경험, 머리=손발, 본질=현실, 하늘=땅, 내세=현세라고 본 헤겔은 현실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모두 다 철학의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경험하는 현실적인 일들(정치적 불의, 경제적 불평등, 문화적 충격, 종교적 독선이나 위선 등등에서 보여지는 현실 모두가 다 철학적 주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 자체가 이미 ‘물 자체’요 ‘우주의 실재’를 다루는 근본과 하나이며 손바닥의 양면이요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나 김정은, 문재인이나 시진평의 정치적 행동은 물론이고, 인도의 한 부자가 아들 결혼식에서 수십억 달라를 쓰면서 인도를 포함하여 지구촌 모두의 경제적 불평등의 극치를 드러내는 모습이나, 다문화 사회(Multi Cultural Society)라고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문화적 우월주의를 지지하면서 나와 다른 문화를 차별하는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이나, (제가 이 원고를 쓰는 날 아침 N.Z,의 Christchurch에서는 호주 국적의 Brenton Tarrant이 이슬람 모스크에 들어가서 50명이나 총기로 난사해서 목슴을 빼앗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Global Village 운운하면서도 America First를 외치며 Brexit를 강행하는 일 등은 물론이고 호주의 한 추기경이 성추행 문제로 인하여 구속되는 등 범세계적으로 종교의 도덕적 권위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일들을 포함하여 우리네 작은 가정에서 벌어지는 경제문제, 부부갈등, 자녀교육, 인간관계, 건강문제, 종교적 의견 차이, 오늘도 바쁘게 일하면서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인문학교실에 오는 일까지 모든 ‘현상은 정신’과 연계된다고 보는 것이 헤겔 철학이 발견해 낸 ‘절대적 관념론’입니다.
둘째로 헤겔이 칸트와 차별되고 칸트를 넘어서려고 했던 것은 칸트가 제기했던 실천이성에서 인간의 행위를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위상에서 보려고 했던 점입니다. 칸트나 헤겔은 공히 인간의 행위를 도덕성 위에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그것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 안에서만 보려고 했는데 헤겔은 이를 역사와 사회의 지평으로까지 확대했습니다. 칸트는 그의 실천이성에서 개인의 도덕적이며 양심적 행동에다 방점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양심과 선한 태도, 정직하게 말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 돕고, 인내하며, 주어진 일에 성실하고 책임성있게 사는 것 같은 것들을 강조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칸트의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헤겔은 이를 아주 넓게 확대 해석하면서 개인적 도덕율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공동체적 삶과 행위를 더 중요한 행위의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함께 추구해 나가야 할 공동체적 덕목으로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정치적 자유를 확대하고 경제적 평등, 문화적 다양성, 국제적 평화정착 등에 이르도록 외연을 넓혀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개인윤리를 넘어서는 사회윤리, 개인적 책임과 도덕성을 넘어서는 공동체적 책임과 도덕성을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인간 행위로 본 것이 헤겔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가능하면 Reinhold Niebuhr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함께 읽고 토론 할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칸트와 헤겔은 똑같이 ‘모든 것을 이성적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고 심지어는 인간의 행위까지도 ‘이성적 행동’이라고 규정하면서, 우리는 이성적으로 행동해야만 도덕적 가치를 확보하게 된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칸트에게서 논리적 모순과 한계를 찾아내고 이를 넘어서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후에 그의 ‘변증법의 기초’가 됩니다.
4) 절대정신(絶對精神, Absolute Geist)을 찾아서 –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로서 헤겔이 바라보았던 이성의 최종적 목적지는 어디였을까요? 모든 사물의 본질인 ‘물자체’까지도 인식해 내고 일체 인간 행위의 범주를 개인을 넘어서 세계정신으로까지 확대해 본 헤겔이 正反合, 正反合, 正反合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도달해 보려고 시도했던 종착점은 무엇일까요? 절대정신, 絶對精神, Absolute Geist였습니다. 절대정신은 헤겔철학의 key word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의미로 쓰이는 말이 아닙니다. 단순히 변치 아니하는 최고의 진리라든가 불변의 법칙이라고만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헤겔의 절대정신은 ‘신’(Gott) 혹은 ‘하나님’ ‘하느님’이라고 단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은 어떤 특정 종교의 신이 아닙니다. 물론 신은 영원 불변하고 어디나 있는 분으로 참된 진리이긴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들은 ‘개인’에게 속하거나 ‘특정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신은 우주적 보편타당성을 지녔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신들은 지엽적이고 부분적일 뿐입니다. 그는 믿지만 나는 믿지 않을 수도 있고 그 종교에서는 인정하지만 다른 종교에서는 받아드리지 않는 ‘개별성’을 지닌 것이 신 개념일 수 있습니다. 흔히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란 역사 이후 ‘모든 지역과 모든 시대에 걸쳐서 모든 인간들이 똑같이 동의하는 보편적 절대정신은 아니라’는 것이 헤겔의 주장입니다. 만약 신을 절대정신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중세 보편논쟁에서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가 주장했던 유명론(Nominalism)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하여튼 신 개념에는 인류 모두가 함께 지향해 나가야 할 보편성이란 없고 개별성만 있다는 것이 헤겔의 입장입니다. 그럼 무엇이 과연 시대와 지역과 문화와 관습과 전통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함께 추구해 나갈 보편성을 지닌 절대정신일까? 헤겔은 그것을 ‘이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절대정신은 절대이성이다!’ ‘이성만이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추구하고 마침내 반드시 도달해야 할 불변의 진리요, 최고의 목표요, 최종적 목적지다!’ 그러나 여기 아주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헤겔은 이 절대이성을 목표로만 보지 않고 과정 자체로도 받아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이성은 우리가 추구해 나갈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목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이기도하다’ 이성은 목표이며 동시에 그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으로써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라고 봄으로 ‘절대성’을 지닌 절대이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좀 더 부연 설명을 해볼게요. 헤겔은 그 이전의 모든 철학자들이 추구해온 ‘그 어떤 실재’ – 그것을 아르케(Arche), 진리, 말씀, 道, 神, 하나님, 하느님, 實體, 實在, 이데아, 만물의 본질, 자연, 단자, 모나드 등등 무엇이라고 부르던 간에, 그런 것들은 우리의 현실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실재란 우리가 경험을 통하여 보고, 듣고 만지고 부딪치는 현상과 현실 ‘속에’ 혹은 그 현상이나 현실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상과 현실 속에 함께 공존하는 실재를 찾아나서는 그 과정 자체가 절대이성이라는 겁니다. 헤겔이 말한 ‘최고의 이성’으로써의 ‘절대이성’은 ‘과정’이며 동시에 ‘목표’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최종적 목표는 절대이성이지만 그 길로 가는 과정 자체 또한 절대이성이고 절대이성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헤겔의 주장입니다. 그는 인간 이성의 금자탑을 세운 사람입니다.
자, 그런데 보십시요. 헤겔에 의해서 이렇게까지 높이 쌓아졌던 이성의 시대가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엽을 거치면서 인간의 이성은 여지없이,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개인적 인간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더 이상 이성적 존재가 아님’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상하게 복잡한 존재’라는 것이 심리학과 실존철학을 통하여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헤겔이 그렇게 열렬하게 부르짖었던 세계정신, 혹은 절대정신으로써의 인간 이성은 나폴레옹 시대를 출발로 하여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아름다운 이성이 아니라 짐승 같은 인간의 민얼굴을 보면서 서구의 정신사는 얼마나 당황하고 당혹했을까요?
변증법(辨證法 / Dialectic / Dialektik)적 방법론
1) 모든 일에는 방법론이 있고 그 일의 분야에 따라 제각기 다른 방법론들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정치, 경제, 과학, 사회, 통계, 문화, 예술, 스포츠, 종교 등 모든 인간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그 분야에 적합한 어떤 수단이나 방법이라는 과정(process)를 통하여 그 일의 목표를 이루어 가게 됩니다. 경제학의 방법론을 종교에 대입하거나 과학적 방법론을 그냥 그대로 정치에 응용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방법론의 차이가 마침내는 목표의 달성을 그르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같은 학문이나 동일한 분야에서도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2) 고대 그리스철학 이후 전통적으로 철학이나 인문학에서는 ‘논리’라고 하는 방법론이 사용되어 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질문법’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반성과 생각을 유도함으로 진리를 찾아가도록 이끌었고 제논이나 플라톤은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논리적 과정을 이론화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확대 발전 시켰습니다. 우리는 인문학교실이 시작 될 무렵 연역적 방법론과 귀납적 방법론에 대하여 공부해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학문의 발달과 함께 다양해진 세계는 이런 전통적 방법론에 이의를 제기하며 추가적인 다른 방법론들을 제시하기도합니다만 그래도 대세는 여전히 논리적, 이성적, 합리적 이론 전개를 기본 틀로 하고 있습니다. 헤겔이 다듬어서 세우고 사용했던 방법론도 여기에 준합니다. 그런데 그의 방법론은 특별히 ‘변증법적 방법론’(Dialectical Methodology)이라고 부릅니다.
3)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론도 당연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 전개를 해 나갑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지배적이었던 전통적 방법론과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헤겔 이전의 서양철학에서는 진리와 거짓, 영원한 것과 변하는 것, 이데아와 현상, 로고스(道 혹은 말씀)와 현세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한번 진리는 언제나 진리이고, 한번 영원한 것은 항상 영원하고, 한번 이데아는 영원한 이데아이고, 한번 로고스는 불변하는 로고스인 반면에 한번 거짓된 것은 영원히 거짓되고, 한번 변하는 것은 언제나 변하고, 한번 나타난 현상계와 현실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지닌 보수주의자들이나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런 논리에 반대했습니다. 그의 변증법적 방법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대로부터 출발합니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도, 이데아도, 로고스도 변하고, 정치도, 경제도, 과학도 쉬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헤겔의 주장입니다.
4) 헤겔의 변증법은 3단계의 연속적 변화와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는 절대정신을 향하여 나아가는 인간 사유의 진보과정 중 제일 첫 번째를 ‘정립단계’라고 했습니다. 어떤 실재나 그 실재가 현상으로 나타난 것에 대하여 ‘정설을 만드는’ 단계입니다. 이 定立을 그는 These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 ‘정치의 목표는 국리민복에 있다’ ‘이데아는 변치 않는다’ ‘종교의 최종적 목표는 사람들에게 영생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수학이나 과학적 진실은 변치 않는다’ ‘자연이 가장 아릅답다’ ‘진보적인 사람은 모든 일에 진보적이고 보수적인 사람은 모든 일에서 보수적이다’ 많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이런 정설로 굳어진 명제, These란 ‘부분적 진실’이며 ‘일시적 사실’일 뿐이지 전체적 진실이나 영원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때는 굳게 믿었던 정설도 시간적 및 공간적 한계가 있고 따라서 그 자체에는 모순이 담겨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정언 명제는 부분적이며 모순을 지닌 명제’라는 점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생각하게 되는 두 번째 단계로 나가게 됩니다. 지난 날 정설이나 진리처럼 굳어진 명제에 대하여 No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주장을 펼치게 됩니다. 그것이 ‘반정립 단계’입니다. These에 대하여 반대 깃발을 든 Antithesis Step 입니다. ‘인간은 감성적 존재다’ ‘정치는 정치인들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데 더 큰 목표가 있다’ ‘이데아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한다’ ‘종교의 최종적 목표는 현실에서 고통을 이기고 잘 살게 해주는 데 있다’ ‘수학이나 과학이 발견해 낸 진리도 계속해서 새로운 이론으로 대치된다’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다’ ‘진보적 생각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경우에 다 진보적인 것도 아니고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일에 다 보수적인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앞에서 세우고 확신하고 따라갔던 테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안티테제로 이를 대치하게 됩니다. 그럼 그 안티테제는 도전받지 아니하는 영원한 테제로 자리매김을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테제와 안티테제 역시 서로 충돌하면서 티격태격하며 싸우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둘은 타협을 하게 되면서 세 번째 단계를 마지하게 됩니다. 처음 테제 속에서 발견했던 모순과 두 번째 안티테제 속에서 다시 찾아낸 제2의 모순을 동시에 제거해 내면서 그 두 명제를 결합하고 종합하여 제3의 명제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헤겔은 ‘종합단계’ Synthesis Step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은 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감성적인 존재다’ ‘정치란 국리민복을 목표로 하지만 동시에 정치인들의 이해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이데아에는 변하는 요소도 있고 불변하는 측면도 있다’ ‘종교는 영원한 세상과 함께 현실의 문제도 같이 취급한다’ ‘자연도 아름답지만 인간 역시도 아름답다’ ‘인간이란 자기의 편의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적당히 왔다갔다하는 존재다’하는 식으로 비판적 종합의 단계를 거쳐서 한 단계 씩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진보해 나간다고 본 것입니다.
5) 이상에서 살펴 본 헤겔의 변증법은 두 가지 기본적 전제 위에 서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모든 것은 변한다’ 전제입니다. 물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에 대한 또 하나의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식논리학을 체계화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A는 A이고 B는 B라는 서술에서 무모순의 원칙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헤겔은 A는 B가 되고 B는 C가 C는 다시 D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기존의 명제 속에는 그 자신의 모순을 이미 지니고 있기에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는 정치도, 경제도, 과학도, 문화도, 사회도, 종교도, 전통도, 사상도 모두 다 계속해서 변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들은 다 자기 모순의 함정을 지닌 유한한 이성이기에 절대이성을 찾아서 끊임없는 순례를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나타난 현상 그 자체를 실재와 동일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상 뒤에 있는 실재 또한 변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나타난 현상이나 숨겨진 실재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거듭해서 A는 B로, B는 C로, C는 다시 D가 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 헤겔의 입장입니다. 한번 ‘테제’(正, Thesis)는 결코 변하지 않는 영원한 테제가 아닙니다. 한번 내린 명제는 아무런 모순도 없는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한번 내렸던 테제 속에서도 그 자체의 모순이 발견되고, 이어서 그에 반대하는 ‘안티테제(反, Antithesis)가 다시 등장하게 되고 또 시간이 더 흘러가면 그 ‘안티테제’ 역시도 자기 속에 있는 또 다른 모순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또 다른 ‘안티테제’를 통하여 ‘진테제’(Synthesis)로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논리적 전개에 이어 헤겔이 제시한 변증법의 두 번째 기본 전제가 나타납니다. ‘모든 역사는 진보한다’ ‘모든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테제, 안티테제, 그리고 진테제의 과정을 거듭해 가면서 인간의 모든 역사는(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화, 예술, 사상, 종교 등등) 쉬임없이 보다 나은 상태를 바라보며 진보와 발전을 향해서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것이지 결코 뒤로 퇴행하는 부정적 역사 변화가 아니라는게 그의 주장입니다. 역사는 지양(止揚, Aufheben)한다! ‘역사는 발전한다!’
역사철학
아쉽게 생각하는 점이지만 저의 개인적 역량의 부족으로 우리 인문학교실은 헤겔의 다른 사상들, 예컨데 그의 법철학이나 정치철학이나 종교철학이나 예술철학이나 미학 같은 분야를 모두 섭렵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작 할 때 ‘들어가는 말’에서 운을 뗀 것처럼 그의 역사철학 이야기를 함께 나눔으로 헤겔 공부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1) 역사에 대한 몇 가지 다른 이해들
랑케 이전에는 역사를 ‘사건의 연대표’(Chronicle)로 이해했습니다. 몇 년에 무슨 일이 있었고 또 몇 년에는 무슨 사건이 생겼고 하는 식으로 역사를 일종의 ‘연대표’ 식으로 정리 정돈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궁중의 史官이나 글 잘 쓰는 문장가들이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비교적 차례로 기록하여 남겨놓은 것 그 자체를 역사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는 그 이전의 역사 기록이란 사실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적 史料’일뿐이라고 하면서 역사란 지난날의 사료를 고증하고 그 眞僞와 기록자의 의도를 밝혀 가면서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랑케의 이런 사료비판에 기초를 둔 ‘역사 객관주의’와 ‘역사 실증주의’는 역사학을 현실의 주류 사상이나 정치적 권력 등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를 받습니다. ‘랑케 사학’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높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후 무솔리니의 파시즘치하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 역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는 랑케가 주장했던 ‘있는 그대로’의 역사란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있는 그대로’란 지난날의 사건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기록해야 하는 것인데 그 어떠한 기록자에게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역사의 사료를 모으고 기록하는 사람은 부득불 어떤 것은 선택하고 어떤 것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선택 행위는 그 자신의 판단이 개입되는 것이고 거기에는 어떤 사상이나 입장, 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개입되게 마련이라는 것이 크로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크로체는 말합니다. ‘모든 역사는 현재사다. 따라서 역사란 그 시대의 정치적 지배집단의 정치적 도구가 되기 쉽다’ 모든 역사를 현재의 역사요, ‘당대사’(현대사, Contemporary History)라고 규정했던 상대주의 역사관을 지닌 크로체의 선언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크로체의 뒤를 이어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 H. Carr, 1892-1982)는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의 첫 문장을 자신의 책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는 주장합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무슨 뜻일까요? 歷史란 과거를 현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역사가란 과거를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를 평가하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랑케는 역사의 무게를 과거에 두었고 크로체는 역사의 중심을 현재에다 두었는데 카는 바로 그 중간 지점인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다 역사의 중심축을 두었다고 하겠습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라는 선언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역사를 기록이 아니라 평가라고 본 카는 역사를 철학, 인문학, 정치학, 사회학 등과 연계해서 보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역사는 사회학이다, 역사는 정치학이다, 역사는 경제학이다, 역사는 인문학이다 하면서 헤겔까지도 역사철학자라고 부르게 되는 연유는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 역사를 보는 다양한 안목들
직선사관, 윤회사관, 종교사관, 구속사관, 세속사관, 실증사관, 식민사관, 민족사관, 유물사관, 대륙사관, 긍정 사관, 부정 사관 등등은 생략.
3) 헤겔의 역사철학
헤겔의 주저 중 하나인 ‘歷史哲學講義’(Vorlesunggen uber die Philosophie der Weltgeschichte)는 정신과 이성, 역사 발전의 여러 단계들, 개인, 국가, 세계, 민족문제 등을 포함하여 심지어는 중국, 인도,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스까지 굉장히 넓게 취급하고 있지만 핵심은 두 가지로 집약이 됩니다.
첫째로 역사는 발전해 나간다는 입장입니다. 한 때는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던 것(正, 主觀的 精神)에서도 모순이 발견되고, 다시 그 모순과 대립하여(反, 客觀的 精神) 투쟁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결국은 보다 더 나은 상태(合, 絶對精神)로 전진한다는 역사 발전론이 그의 변증법적 역사발전의 핵심입니다. 때로는 모순도 발견되고 또 때로는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종잡기가 어려워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사는 절대정신 – 절대 이성을 향하여 줄기차게 그 걸음을 멈추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발전하고 전진한다는 신념 위에서 흔들리지 아니한 사람이 헤겔입니다. 물론 역사를 보는 눈에는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 처럼 어두운 시대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을 예언하면서 역사란 결국 죽음과 파멸을 향하여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 처럼 ‘역사의 연구’(Study of History)를 통하여 역사란 탄생-성장-쇠퇴-붕괴의 과정을 거치긴 하지만 그래도 순환의 과정을 통하여(역사의 순환설) ‘도전과 응전’을 하면서 발전해 나간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헤겔은 토인비에 앞선 긍정적 역사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는 역사는 자유의 확대사이다라는 신념입니다. 그는 고대 동양의 군주시대는 오직 한 사람 만이 자유를 누렸고 그리스-로마 시대는 소수의 권력자들만 자유를 누렸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헤겔은 프랑스혁명을 통해 자유가 어떻게 확대되어 가는지 그 구체적 현실을 보았습니다. 물론 헤겔의 안목에도 한계가 있었고 심지어는 나폴레옹을 넓은 의미에서 자유를 확대해 온 정치가로 평가하는 어리석음도 있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그는 어떻게든 세계사를 ‘자유가 넓혀지는 역사’로 이해하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절대정신이란 이성이고 그 이성의 본질은 자유라는 확신을 지닌 역사철학자였습니다. ‘자유는 환희다’(Die Freiheit ist Freude) 오늘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Ode to Joy, 원작사자 Friedrich Schiller는 괴테와 쌍벽을 이룬 18세기 독일의 시인, 극작가, 역사가, 철학자)를 들으면서 강좌를 마치고 싶습니다. ‘태초에 하느님은 자유를 창조하시니라’(싸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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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넘어서’ – ‘자유’(정치, 사상, 종교, 양심 등)와 ‘평등’(경제, 성, 인종, 문화 등)은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일까요? 자유스럽게 총기를 소유하면서도 아무도 미워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평등한 세상은 불가능할까요? 최근 N.Z. Christchurch의 모스크에서 벌어진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은 백인 우월주의에 뿌리를 둔 유럽의 반난민, 반무슬림적 극우기독교 사상을 지닌 사람들의 행동이 국경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염려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난날 유대인과 흑인을 지상에서 쓸어버려야한다고 주장했던 극우 기독교 파시스트가 극단적 인종주의로 부활하고 있다고 염려합니다. ‘기독교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다. 그들로부터 우리 기독교를 지키지 못한다면 유럽과 미국은 지구상에서 살아지고 말 것이다’ ‘우리들의 자유를 위하여 그들을 우리와 함께 평등하게 살게 할 수는 없다’는 이 이기주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역사가 가르쳐준 자유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동시에 더불어 함께 사는 평등한 인간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