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우리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기적 DNA와 싸운 신영복, 베버, 조지, 소로 이야기)
들어가는 말
우리는 2019년 전반기 마지막 시간에 카를 마르크스를 중심하여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근대 자본주의와 대결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사상과 운동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초기 마르크스의 사상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낙관적 기초 위에서 출발했던 마르크스주의는 처절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눌 수 있는 이상적 꿈의 사회’를 그렸던 그의 실험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본인의 처음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려간 후기 마르크스주의를 바라본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마르크스이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 I am Marx, not Marxist. (2천년 전 예수도 오늘의 기독교회를 본다면 비슷하게 말씀하리라 생각합니다. I am Christ, not Christian)
물론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하게 된 원인은 그 자체가 지녔던 이론적모순을 비롯하여 이를 추진해 나가던 과정에서의 여러가지 잘못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만 저는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한 가장 크고 결정적인 원인은 인간의 본성을 잘못 진단한데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잘못 짚었고 결국 인간성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시인들은 달리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주의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탐욕적 존재라는 것이 인문학에서 보는 인간이해입니다. 종교에서는 그것을 인간이란 죄성을 지닌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이성적존재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부분적이고 일시적일 뿐입니다. 인간은 동물중 하나이고 그 밑바닥에는 동물적 본성이 있습니다. 지적 교육이나 도덕적 훈련이나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어느 정도는 그 동물적 본성을 자제하거나 조절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본성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본성을 지나치게 나이브하게 보면 실패하게 됩니다. ‘본성에 어긋나는 일은 반드시 실패한다’ ‘인간은 그의 네이처(nature)에 반(反)하는 일은 절대로 이루어 낼 수 없다’
새로운 인문학적 접근
후반기를 시작하면서 지난날 마르크스주의의 실패가 가르쳐준 교훈을 기억하면서 오늘은 또 다른 실험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도대체 우리 인간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눌 수 있는 이상적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이미 제기되었던 질문입니다만 우리 자신에 대해 거듭 물어봅니다. 이 질문은 오늘도 우리가 함께 토론하려는 마지막 주제입니다. ‘과연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의 본성을 이겨낼 수 있을까?’ ‘내가 피땀 흘려서 번 것들은 반드시 내 것인가? 아니면 내가 번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모두의 것인가?’ 오늘 살펴보려는 신영복과 막스 베버와 헨리 조지의 이론 및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실험적 삶의 스토리는 마르크스와는 다른 측면에서 인간성속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이기적 DNA와 싸운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마르크스와 같이 노동자들의 단결을 통한 외부적 투쟁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지닌 내적 모순을 드러내고 인간성 안에 존재하는 탐욕적 이기주의와 치열하게 투쟁한 또 다른 전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난 시대나 지역에는 차이가 있지만 이들은 제각기 다른 땅, 다른 역사 속에서 인간의 탐욕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최소화하려고 몸부림 쳤던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문제를 풀어가는 접근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마르크스식의 정치-경제적 접근 방식을 통하여 인간성 속에 도사리고 있는 개인주의적이며 이기적인 탐욕의 문제를 푸는데 한계를 발견하고 실패했다면 이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그것을 인문학적 접근 방식이라고 봅니다. 정치나 경제 문제는 꼭 정치나 경제 문제로 풀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신영복과 막스 베버, 헨리 조지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함께하는 삶, 근검과 절약, 나눔과 베품, 공동체의 회복, 자연으로의 복귀와 같은 인문학적 접근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적 문제에 도전한 예가 된다고 봅니다.
이에 앞서서 저는 너무 크고 방대하여 정의하기가 무척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두 가지 개념부터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둘째는 ‘자본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숙제입니다.
인문학적 시각에서 보는 인간의 본성(本性)
인간의 본성이란 배우고 훈련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나오는 성품이나 성격을 말합니다. 다분히 도덕적 기질 같은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본성(本性)과 본능(本能)은 구별됩니다. 본성이란 Nature로써 태어날 때부터 지닌 도덕적 성품을 지칭하는 것이고 본능이란 Instinct으로 인간이 죽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취하는 육체적이며 생리적인 행위를 이르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본성을 판단하기에 앞서서 먼저 나 자신의 도덕적 본성을 스스로 진솔하게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극단적으로 선한 사람들, 예컨대 슈바이쳐 박사나 손양원 목사나 마더 테레사나 이태석 신부나 홀트씨 가문 같은 분들이나, 혹은 그 반대의 극단적 악한 성품을 지녔다고 여겨지는 히틀러나 김대두나 IS같은 경우를 상정하지 말고, 평범하게 볼 때 ‘나’라는 인간은 본성상(本性上) 선한 편인가요, 아니면 악한 쪽에 가까운가요? 아니면 종잡기가 어렵게 왔다갔다 하는 편인가요? 나의 본성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봅시다.
동양과 서양의 정신사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의는 아주 길고 깊게 탐구되어 왔습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과 연계됩니다. 기독교는 히브리성서를 바탕으로 완전하게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과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이라는 두개의 인간관과 인간의 모습이 섞여 있습니다. 우파니샤드는 인간과 인간의 본성이란 알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인간들이 고독하고 고립된 자아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이유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유교를 비롯한 동양의 종교들은 인간을 운명적 존재로 봅니다. 공자는 인본주의를 주장했지만 동시에 이 우주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운명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본 것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규정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아레테, 곧 덕을 통하여 행복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존재라고 설명했습니다. 에피큐로스 학파는 인간을 영혼의 쾌락을 좇아가는 존재로 보았고 중세 기독교는 인간을 신앙하는 존재라고 했지만 그 후 근세 철학자들은 인간을 회의하는 존재, 의심하는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다시 시간이 흐르면서 칸트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인문학사는 인간을 절대이성을 지향하는 존재로 보았지만 그후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나 다윈은 물질이나 무의식적 본성이나 규정하기 어려운 다양성으로 인간의 본성을 다시 해석했습니다. ‘자유다!’ ‘태초에 자유가 있었다!’ 사르트르를 중심한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 ‘자유를 지향하는 존재’ ‘자유로워야 할 존재’로 규정합니다(‘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레슬리 스티븐슨과 데이비드 헤이버먼 공저, 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2006을 추천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부터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논의해 온 몇 가지 다른 견해들을 정리해 봅니다.
그 첫째는 성선설(性善說)입니다. 이 주장의 대표자는 맹자(孟子)입니다. 성선설에서는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도덕적으로 선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봅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인간과 짐승의 본성은 다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타인과 공감하며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성품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때 느끼게 되는 원초적인 기쁨도 그 중 하나라고 봅니다. 맹자는 인간성 속에 있는 도덕적 잠재성을 선하게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맹자가 주장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 같은 사단(四端)입니다. 그러나 맹자는 이런 타고난 사단도 후천적으로 계속 배우고 훈련하여 최고의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에 이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선하게 태어난 인간도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다. 본성은 선해도 주어진 환경이 얼마든지 악한 인간으로 만들수도 있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이었습니다.
서양에서는 하바드대학의 인지과학자이며 진화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가 쓴 대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4),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같은 책이 지난날 인류는 우리 속에 있는 악한 본성을 어떻게 선한 천사들이 물리쳐왔던 지를 잘 서술해 주고 있는 성선설 지지 논리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성악설(性惡說)입니다. 순자(荀子)가 이 주장의 대표자입니다.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을 악한 것으로 봅니다. 인간은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욕망의 노예로 태어난다는 주장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성품을 지니고 태어난다’ ‘인간이 선하다고 보는 것은 위선(僞善)이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먹을 것을 먼저 자기 입으로 가져가고 자기 것을 먼저 챙기며 가르쳐주지 않아도 거짓말을 배우는 등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순자는 만약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이라면 인위적인 교육이나 훈련이란 사실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선한 본성을 지닌 인간은 교육이나 훈련이 없어도 그냥 선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한 사단과 사덕이란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이 악한 것이기에 그 악한 본성을 선하게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고 그것은 헛된 수고일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욕망이라는 측면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들과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 홉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성악설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셋째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입니다. 인간의 성품이란 본래부터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데 다만 주어진 환경과 받는 교육에 따라서 선해지거나 악한 방향으로 나누어진다는 주장이 성무선악설입니다. 맹자와 동시대의 고자(告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단수설(湍水說)을 통하여 ‘사람의 본성이란 마치 연못에 있는 물과 같다. 동쪽과 서쪽이 없이 그저 출렁거릴 뿐이다. 동쪽을 터놓으면 동으로 흐르고 서쪽을 터놓으면 서로 흐르듯이 인간의 본성 자체는 그 어느 쪽도 아닌 무선무악(無善無惡)이다. 인간성은 혼재되어있다’고 보았습니다. 영국의 경험론자였던 존 로크나 데이비드 흄도 인간의 본성이란 생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백지’(tabla rasa)라고 보고 ‘인간은 백지와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했습니다.
넷째는 성선과 성악의 내적 대결론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선한 본능과 악한 본능이 서로 대결하고 충돌한다는 주장입니다. 거룩해지려는 욕망, 하느님을 향한 신앙, 이타적으로 살려는 노력 같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그 똑같은 본능 속에도 동시에 자신의 욕망과 명예, 성공과 출세를 지향하는 집착 같은 것들이 공존한다는 주장입니다. 한 인간성속에서 이 모순되고 대립되는 두개의 배타적 욕망의 싸움을 가장 잘 그려준 작품 중에는 쾨테의 ‘파우스트’(Faust)가 있습니다. ‘아 내 마음 속에는 두개의 혼이 있구나! 나는 강한 집념과 애욕에 사로잡혀 있도다. 그러나 나는 이 더러운 세상을 떠나 천상의 나라로 가고 싶도다! 나는 이 두개의 틈바구니에서 오늘도 방황한다!’
인문학적 각도에서 한번 살펴봅시다.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이는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히브리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와서 처음으로 물은 질문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잖습니까? 이 질문은 바로 ‘인간아 너는 누구냐? 너는 어떤 존재냐? 너의 본질과 본성은 무엇이냐?’하는 질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담’이란 ‘사람’입니다. ‘아담’(Adam)이라는 말은 ‘아다마’(adamah)에서 온 말이고 그 뜻은 ‘붉은 흙’입니다. 라틴어에서는 인간을 ‘호모’(Homo)라고 하는데 그 뜻 역시도 흙이라는 단어 ‘후무스’(humus)에서 왔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흙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흙으로 규정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자신을 가르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의 자리에 오르기 까지는 homo sapiens, homo erectus, homo habilis 등등 여러 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만 그 중 제일 결정적인 요소로는 인간성속에 있는 ‘이기적 유전자’의 덕이라고 말합니다. 경쟁적이고 이기적이며 동시에 개인주의적인 이 이기적 DNA가 사람을 만물의 영장 자리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key word는 ‘이기적 유전자’라고 합니다. 인간의 이 이기적 유전자는 흔히 4-F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싸워서 이기려는 Fighting, 빼앗아서 먹으려는 Feeding, 불리하면 도망쳐서 살려고 하는 Fleeing, 그리고 종족을 보존하여 자기를 번식해 나가려는 Fxxxing, Reproduction이라는 겁니다. 싸우고 먹고 도망하고 번식하기 위해서 경쟁하는 인간이 바로 이기적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다윈은 이를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론으로 뒷받침했습니다. 인문학에서는 인간을 ‘수수께끼요 이상한 존재요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이성적이면서도 감정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비합리적이고, 인격적이면서도 동물적이고, 이타적이면서 이기적인 존재가 사람입니다.
인문학적 시각에서 보는 자본주의의 성격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하나 발견됩니다. 그것은 이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제도와 장치가 가장 잘 발달된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결국 자본주의적 인간’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자본주의와 인간이 지닌 이 공통된 이기적 유전자는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 매커니즘이며 동시에 생존전략입니다. 곤충 생물학자이며 하바드대학의 교수를 지낸 Edward Wilson(‘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개미언덕’ 등의 저자)에 의하면 인간들이 베푸는 이타심이나 협동심 같은 것까지도 사실은 그의 행동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 타인을 구하고 피땀 흘려 번 것도 아낌없이 선듯 기부하고 희사하는 것도 사실은 죽은 다음에라도 칭찬과 명예와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이기적 심리가 그 안에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에게 어떤 이익과 혜택이 돌아오리라고 기대하고 베푸는 이타심을 그는 ‘호혜적 이기주의’(altruistic egoism)라고 이름 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도 이기적이라는 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물론 자본주의란 경제학의 여러가지 이론중 하나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먹고 살기위해서 사냥도하고 물매도 하고 무엇인가 필요한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자급자족의 시대였습니다. 그 다음은 물물교환의 시대가 왔습니다. 서로 서로 필요한 것을 바꿔서 먹고 입고 쓰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의 시대를 지난 후 사람들은 무엇인가 이윤을 보기 위해서 사냥도 하고 농사도 지어 그것들을 팔아서 돈을 벌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그것들을 가공하여 여러가지 제품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무엇인가 만들어서 팔면 돈이 생기는구나! 돈만 있으면 필요한 것들은 다 살 수 있구나! 거기에서 화폐, 즉 돈이라는 것이 발명되었고 사람들은 점점 더 돈의 위력과 그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돈으로 필요한 물건들만 샀습니다만 얼마 지나서부터는 돈이 정치도 권력도 명예도 지식도 신앙도 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을 중심한 역사와 인간 삶의 모습은 이렇게 출발되어 점점 확대되어 갔습니다.
자본주의란 이렇게 돈, 즉 화폐를 중심한 인간 삶의 모습을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통하여 만들어 놓은 이론중 하나입니다. 이 자본주의 경제학의 이론에는 고전주의니 신고전주의니 마르크스주의니 하는 것부터 오스트리아 학파니 슘페터 학파니 케인스 학파니 행동주의 학파니 제도주의 학파니 등등 여러가지 이론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두 권의 책만 읽었거나 한 두 사람의 말만 들었거나 그래서 너무 일찍 자신의 믿음을 결정하고 확증편향성에 경도된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정의’에 대해서 말하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정의는 학자에 따라 여러가지이며 자본주의의 역사는 무척이나 깁니다. 초기의 사적 소유권에서부터 출발하여 현대의 금융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역사는 길고 그 개념을 한 두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산업자본주의, 상업자본주의, 독점자본주의, 수정자본주의, 후기자본주의를 지나 오늘날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자본주의의 색깔은 옅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잘 알지도 못하고, 또 좀 공부를 한다고 해도 그 깊이에 있어서는 무식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정의와 그에 따른 이론보다는 오히려 오늘 우리 인문학교실에서 공부하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 문제와 연결하여 자본주의의 종말과 그에 따른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생각 이면에 있는 천민자본주의와 황금만능주의 이야기를 중심하여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저는 조금 단순화하여 자본주의를 두 가지 각도에서 이해합니다. 첫째로 자본주의는 ‘개인’을 우선시한다고 봅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주의다’라는 것이 제가 이해하는 자본주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자본주의 사상의 밑바탕에는 집단이나 공동체 보다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능과 능력, 노력과 성취를 소중하게 여기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당신이 노력해서 번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사용하거나 처리할 권한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개인주의라고 봅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에서는 개인이 지닌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본주의는 돈을 최고로 여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본주의는 돈도 중요하게 여기기는 하지만 그 보다 앞서서 개인의 자유를 최고로 소중하게 여깁니다. 자유주의는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자유를 무한대로 인정하려는 입장입니다. 자본주의의 밑바탕에는 이런 자유주의 이념이 깔려있습니다. 자유주의는 사상과 종교의 자유, 학문과 연구의 자유, 예술과 표현의 자유, 정치와 경제의 자유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자본주의자들은 인간 개개인의 자유가 인간의 삶의 목표요, 지향점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그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만 행복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긍정적인 면들이 있습니다. 연구, 발명, 발견, 창조, 건설 등은 대부분 개인의 자유에서 더 크게 신장되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자본주의는 역사의 경험으로 보아 개인의 자유가 이와 같은 인간의 행복과 가치를 실현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는 자본주의든 개인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모든 이데올로기는 인간사회의 향상과 개인의 행복을 지향해 나가는 방법론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다만 인류가 현재까지 발견하고 실험해 본 것들 중에서는 그래도 자본주의를 대치할 만한 다른 이데올로기는 아직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둘째로 자본주의의 핵심은 그래도, 역시 ‘돈’이라고 봅니다. ‘자본’ ‘자본금’ ‘밑천’이란 결국 ‘돈’이요 ‘화폐’를 말하는 것이며 그 변형된 형태를 총칭한다고 하겠습니다. 돈을 떠나서는 자본주의를 설명할 길이 없다고 봅니다. 경제의 영역에서 볼 때는 자본주의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개인의 경제활동에 대하여 정부의 간섭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모든 경제 활동은 시장의 메카니즘에다 맡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경제활동에 대한 개인의 자유와 불간섭을 핵심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정직하고 분명하게 드러내놓고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본주의란 결국 돈이 인간 개개인의 행복과 가치를 포함하여 인간 역사의 모든 것들을 지배하고 규정하고 결정한다고 믿는 이데올로기입니다. 물론 이 돈이란 오늘날 단순히 화폐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금융은 물론, 신용이나 인기, 광고를 통해 만들어진 가치, 인간을 심리적으로 정복한 온갖 무형의 재화까지를 모두 다 포함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현금이든 아니면 변형된 모습의 자본이든 어찌되었던 간에 돈이 자본주의의 ke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money다!’ 이것이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자본주의라고 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화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자본주의와 가장 잘 결합되는 것이 이기적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개인주의적 DNA는 인간과 자본주의라는 두 개체가 지닌 공통분모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자본주의를 극복해 낼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또 그럴 생각이나 의지도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인간의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을 멸절시켜버리기 전에는 하느님도 인간의 탐욕을 꺾어버릴 수는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느님과 맘몬, 그 둘 중에서 인간은 확실하게 맘몬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더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에게는 이 개인주의적이며 탐욕적 인간의 본성을 극복해 내고 진정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이상적 세계는 불가능 할까요? 개인의 소유와 자유를 넘어서서 공동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진정 인간은 인간의 본성을 이겨 낼 수가 없을까요?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탐욕적이며 야수적 인간성과 천박한 자본주의를 넘어서 우리 모두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고 몸부림 쳐온 사람들은 정말 없을까요? 오늘 우리는 마르크스의 경제적 접근과는 달리 인문학적 접근을 통하여 이 이상적 꿈의 세계를 추구해 본 사람 몇을 만나보기로 하겠습니다.
신영복(1941–2016)의 인문학 세계
대한민국 경남 의령에서 출생하여 밀양에서 성장한 신영복은 서울대 경제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육사에서 경제학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류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8년 20년 만에 출소한 후 성공회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습니다. 주요저서로는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1988) ‘강의(나의 동양고전독법 2004)’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2015)를 비롯하여 유고집으로는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1017) ‘손잡고 더불어’(2017) 등이 있습니다. 신영복이 인간의 이기적 유전자를 이겨내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개인에 앞서서 공동체, “나”에 앞서서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과 정신입니다. 거창하게 인간의 본성이니 자본주의 모순이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신영복은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하여 때로는 침묵으로 또 때로는 자신의 온몸을 다하여 몸부림을 쳤습니다. 지난 5월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의 인간에 대한 통찰력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신영복 선생의 인문학적 삶과 사상에 대해서는 주경식선생의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 큰 사람”을 위시한 강의안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진 선생은 신영복의 ‘서예 세계’가 지닌 몇 가지 특징들을 소개하셨습니다. 서구 인문학의 전통인 사문철(文史哲)과 동양 인문학의 특징인 시서화(詩書畵)가 어떻게 그에게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여 어떻게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지, 그의 삶과 사상과 서예, 이 세 가지가 어떻게 한 인격속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는지를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영복의 사상, 삶, 그리고 그의 서예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로 가능하겠지만 저는 신영복을 서구의 개인주의적 인간 이해를 동양의 공동체적 인간 이해로 극복해 보려고 노력한 사람 중 한 분으로 평가합니다.
개인주의적이며 이기주의적 DNA를 지녔다고 여겨온 서구 인문학적 인간의 본성을 신영복은 ‘서로’ ‘함께’ ‘더불어’ ‘손잡고’ ‘여럿이서’ 살아가는 연습을 통하여 상호이해, 생활 감정의 동질성 세우기, 관계 맺기의 훈련 같은 것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했다고 보는 겁니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 따라 흘러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냇물이 강물을 만나면 강물이 되고 강물이 바다를 만나면 바다가 됩니다’ ‘함께 맞는 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여는 새날’ ‘사랑은 먼 길을 함께하는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여럿이 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겁습니다’ ‘더불어 손잡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신영복 선생의 ‘어깨동무체’를 읽으면서 개인주의와 탐욕에 찌든 인간의 본성을 거부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정치-경제학에서의 실패는 인문학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볼수 있고 서구에서의 실패는 동양에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어디 까지나 개인(個人), 즉 하나 하나의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개개인 즉 individual로 만 보고 이해했던 서구인들은 함께 협력하고 더불어 같이 사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양인들은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사람이란 근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요 따라서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이 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협력하고 도와 가면서 하나가 되어 함께 살아 갈 때 드디어 인간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함께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신영복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해는 ‘홍길복의 인문학 강좌 6번 ‘인문학의 주제-사람 2’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신영복선생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만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적 인간 이해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왔고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는 뜻에서 말씀드립니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 4장에는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을 찾아와서 질문을 던지는 하느님이 나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물론 모든 지초지종을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은 지금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몰라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질문은 우리 인류가 이 세상에서 서로 싸우거나 죽이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여기면서 ‘더불어 함께 손잡고 같이 살아야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예인 우리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 때 그 가인과 똑같은 목소리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검은 피부의 케냐 이민자 아버지와 하얀 색깔의 미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 이민 2세인 버락 오바마는 2004년 일리노이주에서 아주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장과정과 오늘날 미국 사회가 직면한 빈부와 인종과 문화와 언어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다음 마지막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은 저의 신념입니다. 우리는 여럿으로 구성된 하나입니다’ 오바마는 이날 직접 가인과 아벨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는 제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라는 귀절을 성서 그대로 인용함으로 이웃에 대한 우리 모두의 책임,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해 주었습니다. 오바마가 말한 이 ‘형제를 지키는 자’와 ‘여럿으로 구성된 하나’가 바로 이 팽만해진 개인주의와 탐욕의 노예로 전락된 인간을 구원하는 인문학적 노력이라고 봅니다.
한국의 신영복을 저는 미국의 젊은 정치인 오바마에게서 다시 보았습니다(우리가 그 후임 대통령이 멕시코 장벽을 쌓고 이민자들을 차별하며, 편가르기를 하면서 America First를 외칠 때, 슬퍼하는 이유는 바로 이 탐욕스러운 인간과 이 사회를 더욱 더 악화시켜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막스 베버의 인문학 세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 봅니다. 막스 베버는 인간성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인 개인주의와 탐욕과 이기심을 이겨내기 위한 처방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직업은 돈이 목표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맡겨진 일에 부지런 하십시오. 많이 버십시요 그러나 검소하게 사십시오. 아끼고 절약해서 모은 것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사실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심지어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계속해서 인간의 탐욕적 본성에 저항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또 다른 인간의 본성인 겸손, 근검, 절약, 그리고 나눔의 정신을 끊임없이 일깨워 나가야만 합니다. 막스 베버는 이것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본이고 자본주의 정신의 기초라고 말합니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본명은 Maximillian Carl Emil Weber입니다. 그는 독일의 부유한 법률가이며 정치가의 가문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당시 국민자유당의 부유하고 유력한 정치가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받았지만 무엇보다도 절대적 도덕신념을 지닌 개신교 신자이며 칼뱅주의자였던 어머니의 인생관과 종교적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하이델베르크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법률, 철학, 역사및 경제학을 공부하고 변호사를 거쳐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베를린대학으로부터 시작하여 프라이부르크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 뮨헨대학 그리고 빈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한국어 번역판 박문재 역, 현대지성, 2018) ‘경제와 사회’(Wirtschaft und Gesellschaft 한국어 번역판 박성환 역, 나남, 2009) ‘직업으로서의 정치’(이상률 역, 문예출판사, 2017, 같은 책이 ‘소명으로서의 정치’로 번역됨 박상훈 역, 후마니타스, 2013) ‘직업으로서의 학문’ 등이 있습니다.
베버의 사회학과 그 방법론, 정치학과 관료체계에 대한 뛰어난 연구는 생략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그의 주저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나타난 사상입니다. 이 책은 본래 ‘프로테스탄트 윤리학’과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두개의 다른 논문을 수정하여 하나로 묶은 책입니다(지나가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Protestant 혹은 Protestantism이란 ‘개신교’ 혹은 ‘개신교정신’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합한가하는 문제를 검토해 볼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란 끊임없이 자기 밖과 자기 안을 향하여 저항하는 정신이요 반항하는 정신이기에 우리는 ‘저항하는 교회’라는 말로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Reformed Church라는 단어도 ‘개혁교회’라고 하는데 그 뜻은 ‘형식을 바꾸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Reformed Church는 ‘개혁교회’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 개혁이 아니라 form, 즉 ‘형식’만 바꾼 교회이지 ‘내용과 근본’은 그대로 둔 교회입니다. ‘개혁교회’가 아니라 ‘변형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번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여튼 베버는 이 책을 통하여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을 연결시킵니다. 물론 이 책의 많은 분량을 근대의 합리적 자본주의가 가톨릭 지역보다는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왜 더 잘 작동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제 프로테스탄트가 차지하고 있는 북부 유럽이 가톨릭이 자리하고 있는 남부 유럽 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된 이유를 심도있게 논의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 책의 촛점을 거기에다 두지 않겠습니다. 그의 저서가 밝혀보려는 핵심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밑바탕에는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그 윤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자본주의 정신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무분별하게 이윤만 추구하는’ 경제 논리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 자본주의는 비합리적이고 천박한 자본주의라고 하면서 실제 자본주의는 노력과 근면, 검소함과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 자본주의라고 보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에서 말하는 ‘직업소명론’입니다. ‘모든 직업은 성직이다’ ‘모든 직업은 하느님이 주신 책임이다’ 독일어로 직업은 Beruft인데 이는 영어로 Calling입니다. 그 뜻은 직업이란 하느님의 소명(召命), 즉 부르심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Beruft란 루터가 처음으로 독일어 성서를 번역할 때 쓴 단어로써 이 한 단어 속에는 ‘직업’과 ‘소명’이라는 뜻이 함께 묶여 있습니다. 그는 모든 세속적 직업에도 종교적 의미가 있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칼뱅주의의 핵심과 연결해 보면 ‘모든 사람은 그의 직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사명이 있다’는 논리가 됩니다. ‘직업은 하느님이 주신 소명이고 우리는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이를 성직으로 받아드려야 하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한다’는 것이 베버가 제시한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제 1차적 핵심입니다. 그 다음 베버가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근검, 절약, 나눔, 베품 같은 청교도적 윤리입니다. 그는 수도원적 금욕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초기 퓨리탄들이 추구했던 ‘세속속에서의 금욕주의’는 진정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초라고 보았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것, 철저하게 재산을 관리하고 증가시키는 것,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하고 함부로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지 않는 것, 금욕적인 생활습관을 만들어 가는 것,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을 역설했습니다. 탐욕적인 유사 자본주의로부터 합리적인 자본주의를 구별해 내고 그것이 바로 인간성 속에 있는 또 다른 인간의 본성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마르크스를 중심한 초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론도 초대 그리스도교회 공동체의 유무상통하는 삶의 모습을 근거로 하는 데 베버의 이론도 근대 종교개혁 이후의 청교도 정신과 기독교적 근검, 절약, 나눔, 베품의 정신에 근거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의 소스(Source)에서 나타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현상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기초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물질인가? 정신인가? 물질과 정신, 현상과 이상, 세상과 하나님, 이 둘을 조정, 통합, 지향해 나갈 수 있는 제 3의 길은 무엇일까?
헨리 조지의 인문학 세계
개인주의와 인간의 탐심을 이겨내는 또 하나의 다른 길을 찾아본 사람이 있습니다. ‘자본의 핵심은 토지다. 토지는 개인의 소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토지는 우리 사회 모두의 것으로 남겨 두어야한다. 나는 토지의 공개념을 주장한다.’ 이는 헨리 조지의 핵심 사상입니다. 그는 토지를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것으로 이해하는 토지 공개념이라는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 또한 우리가 직면한 개인주의적이며 탐욕적 인간 본성을 극복해 보려는 노력중 하나라고 봅니다.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정치-경제학자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하고 성장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호주 멜본과 인도 콜카타로 항해하는 배를 타고 선원일을 했습니다. 그 후 고향을 떠나 서부 캘리포니아로 옮겨 금광에서 일하다가 인쇄공을 거쳐 신문산업에 뛰어들어 기자와 편집인을 거쳐서 San Francisco Daily Evening Post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여러 경험들을 통하여 명저 ‘Progress and Poverty’(진보와 빈곤, 김윤상 역, 비봉출판사, 2016)를 저술했습니다. 정규적 학교교육은 별로 받은 것이 없었던 조지가 썼던 책이지만 이 책은 당시 미국에서 19세기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토지와 자본을 같은 것으로 본 마르크스와는 달리 개인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얻은 생산품은 사적 소유물로 삼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토지란 개인의 노동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토지와 자연은 사람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임으로 모든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서부개척 시대 철도산업과 광산개발의 현장을 목도하고 경험하면서 부동산 투기와 부패한 정치의 결탁을 보면서 모든 토지가치의 상승이란 토지 소유자들이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님을 발견하고 토지공개념 사상을 펼치게 됩니다. 핵심은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오는 요소 중 하나는 불공정한 토지 제도에서 비롯된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강력한 토지세금제도를 주장합니다.
헨리 조지는 그의 저서 ‘진보와 빈곤’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토지를 공공의 재산으로 만들어야한다’(We must make land common property.) ‘세상은 진보하는데도 여전히 빈부의 격차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토지의 사유제도에서 온다. 이 문제는 정부가 강력한 ’토지단일세’(Land Only Tax)와 ‘지대세’(Rent Tax)를 통하여 해결해야한다’ 조지의 이 사상을 토지공개념(土地共槪念), 지공주의(地公主義), 혹은 Georgism이라고 합니다. 토지를 사회나 국가의 공적인 재화로 보고 토지의 사유재산으로 인한 이익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 그린벨트, 공공택지, 공공임대주택, 부동산 종합세 같은 것들입니다. 노동으로 얻은 생산물은 개인에게 돌아갈 수 있지만 자연에 의해서 주어진 것, 즉 토지와 환경을 통하여 생겨나는 이익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공평하게 돌아가야만 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생산에는 3가지 요소가 들어갑니다. 첫째는 토지, 둘째는 노동, 셋째는 자본입니다. 토지는 지대(Rent)를 통하여 이윤을 만들고, 노동은 임금(Wage)를 통하여 이윤을 만들고, 자본은 이자(Interest)를 통하여 각기 이윤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토지를 통한 이윤은 불로소득이라고 보는 것이 조지의 입장입니다. 한국만 해도 2015년 토지불로소득이 346조 2천억이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조지는 모든 토지는 정치는 물론이고 일체의 인간 삶을 불평등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토지는 인간 생존의 기본적 필수요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늘 토지를 조금이라도 더 소유하려고 경쟁했고 이에 따라 수많은 갈등, 분쟁, 영토 싸움을 계속해 왔습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럽의 열강들은 식민지 쟁탈전쟁을 이어왔고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침공하여 인디안들과 인디오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내쫓아 가면서 그들의 땅을 점령했습니다.
호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780만 평방 킬로미터나 되는 이 땅은 본래 아무도 살지 않던 빈 땅이 아니었습니다. 엄연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이들 아보리진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이 땅을 강제로 점령한 후 Crown Land라고 했습니다(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해 낸 개척자 일까요? 아니면 그 땅의 주인인 아메리카 인디안들을 죽이고 침탈한 정복자일까요? Discover? or Invader? 제임스 쿡은 빈 땅 호주에 첫 발을 디딘 항해사일까요? 아니면 호주 원주민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이 땅을 빼앗은 강도일까요? Navigator? or Robber? 누녜스 델 발보아나 프란치스코 피사로는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발견해 낸 위대한 영웅일까요? 아니면 남미대륙을 피로 물들인 살인자들이까요? Hero? or Murder?) 가까운 역사만 보아도 미제국주의자들은 ‘필리핀은 우리가 먹겠다, 조선은 일본이 먹어라. 북한은 소련이 점령해라 남한은 우리가 통치하겠다’는 식으로 남의 나라 땅을 자기들 마음대로 나눠 가졌습니다. 그런 제국주의적 속성이 지금도 법적 구속력은 하나도 없는 성서라는 종교적 문서를 들이대면서 그 옛날 아브라함이 헷족속에게서 팔레스틴 땅을 샀던 것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땅의 영토분쟁을 부추기며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쪽에다 높이 10여 미터(m)도 더 되고 길이는 730여 km도 더 되는 분리 장벽을 쌓고 그 연장선에서 멕시코 장벽도 쌓는 것입니다.
식민지 제국주의자들은 지금도 우리 같이 작은 나라에 대해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남북을 갈라서 자신들의 국익에 유익이 되게 할까만을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토지문제요, 땅 싸움의 계속입니다. 뿐만 아니라 호주에서는 20세기 연방정부가 탄생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큰 땅을 소유한 대지주들에게는 그 토지의 넓이에 따라 투표용지를 여러 장씩 주곤 했습니다. 도대체 땅을 가지고 이렇게 정치-경제에 있어서 마음대로 장난을 쳐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만 조지는 모든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공사주의 방식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토지의 공공제도화’를 주창한 것뿐입니다. 그는 지대를 통해서 얻어드린 이익은 완전하게 세금으로 거두어드릴 것을 요구합니다. 토지를 통한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것은 빈부의 격차도 줄이지만 사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도 제대로 세우는 길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조지의 이런 사상은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년 사상에 근거한 것입니다. 희년(Jubilee) 사상이란 안식년이 7번 지난 다음해, 곧 50년 째가 되는 해엔 토지를 포함하여 사람들의 처음 소유물과 신분 상태를 본래대로 다 되돌려 놓으라는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토지는 영영히 팔지 못할 지니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위기 25:23). 물론 근본적으로는 토지만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포함하여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종교에서 토지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소유권에 속합니다. 그러나 조지는 이런 과격한 고대 종교의 교훈을 글자 그대로 실천할 것을 요구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자연의 선물인 토지(Unimproved Land Value)의 소유에 대해서 다만 세금으로 환수하자는 주장입니다. 조지의 이런 주장은 훗날 슘페터, 존 듀이, 톨스토이, 손문 같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한국에서는 그 보다 앞서 18세기 말 다산 정약용의 주장과도 흡사합니다.
다산은 38세 때 이미 그의 전론(田論)에서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주장했습니다(‘다산 정약용과 Henry George의 토지사상에 관한 비교연구’ 임용진, 이창석 공저 참고) 20세기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Archer Torrey) 같은 사람은 실제로 이를 실천해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헨리 조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러시아의 문호 레오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서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How Much Land Does A Man Need)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됩니다. 평범한 농부 바흠은 늘 조그만 땅이라도 자신의 토지를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악마는 ‘네가 하루 종일 걸어서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면 그 안에 있는 땅은 다 너에게 주겠다. 그러나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이 약속은 무효가 된다’고 합니다. 땅에 대해 한이 맺혀있던 바흠은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걷고 뛰며 하루 종일 더 멀리, 더 멀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지 조금씩 해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바흠은 되돌아섰습니다.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력을 다하여 출발 지점을 향하여 뛰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가 도착하던 그 순간 해는 지면서 그 역시도 탈진으로 그 자리에 쓸어져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꼭 필요한 땅은 그가 묻힐 6피트(약 1.8m)의 땅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토지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땅은 오직 1.8 m x 0.5m이면 충분합니다(저는 20여년 전 톨스토이가 1910년 11월 7일 정처 없이 가출하여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아스따뽀보 기차역과 빽빽한 숲속 야스나야 뽈랴냐에 비석조차 하나 없는 그의 무덤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이 가장 소중한가? 거룩한 인도주의자 톨스토이는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게 해 줍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오늘의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간단하게라도 소로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 분 역시 이 앞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며 탐욕으로 물들어 있는 인간의 이기적 DNA를 인문학적으로 극복해 보려고 노력한 사람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소로도 마르크스와는 다르게, 정치-경제적 사회 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성 내부에 깃들어 있는 탐욕적 인간본성과 치열하게 싸운 사람입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면 길이 열린다. 인위적인 것들로 부터 벗어나라’ 이것이 소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또 하나의 길입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주로 거기서 살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친 사상가요 철학자이며 문필가입니다. 하바드 대학을 졸업했지만 교사, 연필 제조업, 측량기사 등으로 일하며 평생 한 가지 직업에는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토록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물욕과 싸웠고 사회적 전통이나 인습과 대결했습니다. 그는 자연과 인간의 진실을 찾아 자신의 삶을 실험한 사람입니다. 고향 콩코드 근처 월든 숲속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자급자족하는 삶을 실험하면서 노예제도의 폐지를 부르짖고 멕시코 전쟁에 항의하고 인두세 거부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감옥에 갇혀 기도하면서 ‘시민 불복종’(Resistance to Civil Government, 1849, 한글번역 강승영 역, 이레, 1999) 같은 명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훗날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나 흑백 차별의 철패를 외치며 시민운동을 벌인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정신적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소로의 다른 주저인 ‘월든’(Walden–The Life in the Wood, 1854, 한글번역 양병석 역, 범우사, 1999 / 강승영 역, 이레, 1993 / 은행나무, 2011)을 통하여 ‘무릇 모든 위대한 것들은 다 자유스러운 자연에서 온다’는 그의 자연주의와 생태주의 사상 및 그 삶의 실험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소로와 그의 책 ‘월든’은 앞서 말씀드린 간디나 킹 목사 이외에도 톨스토이나 넬슨 만델라나 우리나라의 법정스님에게까지도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소로는 주어진 현실과 대결한 사람입니다. 그는 당대의 주류세력에 대하여 강력하게 ‘NO!’라고 외친 사람입니다. No를 말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YES를 말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모든 면에서 Yes Man은 가장 나쁜 아부꾼이요,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는 미국의 주류 세력에 대하여 비판할 줄 알았고 실제로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주류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소로는 1845년 월든에다 손수 5평짜리 오두막을 짓고 2년 2개월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면서 사는 실험을 했습니다. 호두, 감자, 옥수수, 완두콩, 순무 등을 심고 거두면서 생활했습니다. 필요한 돈은 때때로 막노동이나 목수일을 하면서 벌었습니다. 때로는 친구들을 맞이하여 이야기를 하고 책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산책도 하고 수영도 하면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왜, 무엇을 위하여 하바드를 나온 엘리트 소로는 이런 실험을 했을까요? 그는 월든에서 1년에 약 6주만 일을 해도 먹고 사는 문제는 넉넉히 해결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가? ‘빨리 빨리’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 한시도 스미트폰에서 손과 눈을 떼지 못하는 현대인들, 우리는 ‘미친 사람들이 아닌가?’ 반문하게 해 줍니다. 소로는 우리가 바쁘게 사는 이유를 탐욕에 끌려서 살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이기주의, 탐욕, 성공주의, 경쟁심이 인간을 불행의 길로 인도한다고 본 것입니다. ‘월든’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욕심을 내려 놓아라’ ‘간소하게 살아라’ ‘자연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고 도시에는 악마가 역사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자유롭지 못하게 산다’ ‘자연은 우리를 해방시키지만 사회는 우리를 구속한다’ ‘자연은 모든 것을 무화(無化)시킨다. 자연에서는 사회에서 쓰던 것들이 필요없게 된다’ ‘내 오두막에는 3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 하나는 우정을 위해, 그리고 나머지는 또 다른 세상을 위해서이다’ 소로는 흔히 서양의 노자(老子)라고 합니다.
나가는 말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해와는 다른 각도에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어떻게 인간인 우리 자신이 지닌 이기적 본성을 이겨낼 수 있을까?’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신영복, 막스 베버, 헨리 조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생각과 삶은 또 하나의 새로운 대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함께’ ‘더불어’ ‘손잡고’ ‘소명’ ‘근검’ ‘절약’ ‘나눔’ ‘베품’ ‘필요한 만큼만’ ‘자연’ ‘자족’–이런 개념들이 오늘 그들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해 낸 새로운 숙제요,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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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