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홍길복 목사의 ‘잡기장과 라틴어 인문학’ 중에서
황금분활 / Divide et Impera /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 Quae sunt Caesaris Caesari et quae Dei Deo / 외로움과 고독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82) _ 11월 2일
황금분할
‘아름답다’는 말은 대단히 폭넓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자연이나 인물, 예술작품이나 예술활동을 넘어서, 한 사람의 삶의 아름다움, 말의 아름다움, 행위와 인격의 아름다움, 내적, 정신적 아름다움, 그리고 더 나아가 영적, 종교적 아름다움 까지, ‘아름답다’는 말은 대단히 넓은 영역에 걸쳐 적용할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사람에 따라 달리 판단할 수 있는 정신적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어놓고, 흔히 말하는 외형적 아름다움, 겉으로 들어난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판단하는 미의 기준이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해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입니다. 그래서 미에는 절대적 기준이 없다고 합니다. 예컨데, 여성의 아름다움만 하더라도 과거에는 하얀 피부색 만을 기준해서, 세계미인대회에서는 늘 백인 여성들만이 진선미를 차지했었지만, 오늘날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도 미스 유니버스에서 당당히 1, 2, 3등을 합니다. 지난날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둥근 얼굴에 넓은 이마, 초승달 같은 눈섭, 둥근 코, 작은 입술에다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몸매의 여성을 아름답고 복스럽다고 했습니다만, 지금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나리자나 김홍도, 신윤복 시대의 풍속화 속에 담겨있는 미인상은 절대로 절대적 미의 기준이 못됩니다. 헤어 스타일 하나만해도, 짧았다 길었다, 길었다 짧았다 하면서 춤을 춥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미를 인공적 아름다움 보다 높이 쳐주었습니다. 꾸불 꾸불한 시골길, 사람이 손대지 아니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아름다움의 원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와 아기자기하게 가꾸어 놓은 인공정원과 기기묘묘하게 다듬어 놓은 위험스런 산등성을 더 아름답게 여깁니다. 자연적 아름다움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아니한 것이어서 인위적으로 만든 아름다움 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입니다. ‘곡선 보다는 직선이 더 어름답다’ ‘아니다. 직선 보다는 곡선이 더 아름답다’ 이어지는 싸움입니다.
화가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숲을 화폭에 담아냅니다. 물론 그것은 인위적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미술이란 사실 자연미를 인공미로 재탄생 시킨 것이라도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무리 뛰어난 화가나 사진작가라 하더라도 사실 그들의 작품이란 자연미의 모방이며, 자연미를 개조, 첨가한 것이기에 인위적 아름다움은 결코 자연적 아름다움을 앞설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자연미나 균형미를 거부하고, 파격적 아름다움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기존 질서를 흩어놓고, 안정감을 뒤집어놓고, 불안한 모습으로 건축물을 거꾸로 세우며, 이상야릿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을 그리면서, 이제까지의 전통과 역사에 대하여 ‘No!’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전통적 미의 기준을 옹호하는 이들은 이런 스타일의 파격미 역시도 사실, 그 기본틀은 이미 있었던 ‘격에 대한 파격’ 이라고 봅니다. ‘격이 있기에 파격도 있다. 격이 없다면 무슨 파격이 있을수 있겠는가?’ 하면서, 안정과 균형, 조화와 배려가 기본격으로 모든 아름다움의 원형이라고 옹호합니다.
제 딴에는 스스로를 열린 보수요, 퍽 진보적이라고 착각하지만, 저도 어쩔수 없이, 기성세대요, 보수적 사고를 지닌 사람임이 확실합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여전히 자연미와 균형미와 안정미에 더 끌려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균형잡힌 것을 아름답게 여깁니다. 그림, 음악, 건축도 균형잡힌 것을 아름답게 보고, 생각, 말, 글, 행동, 신앙도 균형이 잡혀야 아름답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과는 달리 저는 집안도 테이블, 의자, 액자, 가구들이 질서있게 놓여져야 안정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맛도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이 적당히 조화된 것이 좋다고 여기고, 음악도 찢어지게 높은 소리나 음악인지 잡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노래에는 잘 적응하기가 쉽질 않습니다. 음악도 높고 낮은 소리와 길고 짧은 음이 적당히 균형과 조화를 이룬 것을 고전아라고 여깁니다. 그림도 빛과 어두움, 먼 것과 가까운 것이 잘 배치된 것을 편안하게 보게 되지, 거꾸로 보나 뒤집어서 보나, 잘 모를 것 같은 추상화는 어딘가 편하질 않습니다.
오늘날은 포스트 모던 시대입니다. 자연미 보다는 인공미를, 균형미 보다는 파격미를 더 좋아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는 늙고 보수적이고 낡은 세대여서 그럴 것입니다만, 자연미와 균형미를 더 좋아합니다.
‘황금분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황금비율’이라고도 합니다. 영어로는 Golden ratio, Golden cut라고 씁니다. 본래는 수학에서 쓰던 말인데 지금은 일상적으로 넓리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알맞은 상태, 즉 길고 짧은 것과 높고 낮은 것, 밝고 어두운 것과 크고 작은 것 등이 적당하고 안정적으로 나누어져 자리잡힌 상태를 말합니다. 가정 아름답고 안정감을 주는 황금 비율, 황금분할은 흔히 1 : 1.618 이라고 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밋을 비롯한 건축물들과 조각품들은 물론이고, 그후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들과 바흐나 헨델,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작품들도 모두 이 황금분할이 낳은 걸작들이라고 합니다. 미술 역시도 고전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등등 여러 시대를 거쳐 왔지만 그 바탕에는 늘 황금분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건축, 음악, 미술 같은 예술의 세계만이 황금분할이 있겠습니까? 인생살이 모두가 다 황금분할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일과 쉼, 말과 행위, 이성과 감성, 가는 것과 멈추는 것,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갖는 것과 버리는 것, 나와 너, 이것과 저것, 남편과 아내의 역할, 대통령과 국민의 일, 여당과 야당의 역할, 목사와 교인들, 부모와 자식, 육체와 정신 – 이 모든 것들 사이에도 황금분할이 필요합니다. 황금 같은 나눔과 보석같은 균형과 조화가 있는 곳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이루어지리라고 봅니다.
Harmony & Balance! 조화와 균형! 참 아름답습니다. 인문학이 추구하는 ‘중용’ Moderation 역시 이 황금분할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내 인생은 모든 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황금분할 까지는 못되어도, 지나치게 한 쪽으로 치우쳐져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모든 게 보기 싫게 되진 않았는가? 이 아침 다시한번 저를 되돌아봅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오늘도 아름다운 하루가 되시길 빌며…
라틴어 인문학 (55) _ 11월 3일
Divide et Impera.
(디비데 에트 임페라)
divide, 원형, divido. 나누다, 구별하다, 쪼개다, 분리하다, 영어도 divide
impera, 원형, impero. 통치하다, 다스리다, 지배하다, 명령하다. 영어의 Imperator는 여기서 나옴, rule, conque.
Divide et impera.
디비데 에트 임페라
Divide and rule.
Divide and conque.
나누어서 지배하라.
갈라쳐서 통치하라.
카이사르가 한 말로 전해지는 이 라틴어는 그리 좋은 뜻으로 사용되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근세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식민지 지배국과 그 통치자들의 통치수단이 바로 식민지 땅을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갈라치고, 나누고, 분열 시키어 서로 분쟁하고 싸우게 만들어서,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와 통치를 쉽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일찌기 카이사르가 일러준 대로 Divide et impera, Divide and rule, Divide and conque, 분할하고 갈라치고 분열시켜서 그들의 지배력과 통치력을 강화했습니다.
벨기에는 아프리카 르완다를 피부색에 따라 분리 통치했습니다. 피부가 조금 밝은 Tutsis 족에게는 토지를 나누어 주고, 피부가 더 검은 Hutu 족은 Tutsis족의 노예가 되게 했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후 르완다는 벨기에로 부터 독립 후 거이 100만이나 되는 인종간 대학살,massacre가 벌어졌습니다.
영국도 인도를 종교로 갈라쳐서 분할통치 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독립 후 힌두교를 중심한 인도와 무슬림을 중심한 파키스탄으로 나누어져 한 혈통의 두 나라를 만들게 했던 것입니다. 인종, 부족, 종교, 습관, 전통을 하나로 묶어 통일하게 한 것이 아니라 그런 차이들을 이용하여, 갈라치고 분열 시켜, 싸우게 한 후, 그들을 통치함으로, 민족 단결을 통한 해방과 독립, 자주와 자유를 가로 막았던 것이 바로 이 고전적 라틴어 Divide et impera, Divide and rule 에서 비롯되었다 하겠습니다.
통치권자들의 이런 사악한 수법은 지금도 이어져서 국제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국내 정치에서도 악용되곤 합니다. 권력자들은 지금도 이 Divide et impera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권을 강화하려 합니다. 강대국들은 우리나라를 남과 북으로 갈라서 분할하여 지배했고, 우리 안의 권력자들은 우리를 동과 서, 영남과 호남, 종교와 종파, 부자와 서민, 배운자와 못배운자, 남자와 여자,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하면서 서로 대립 시켜 갈라치기하면서 그들의 권력을 강화해 왔습니다.
진정한 리더는 분열이나 분리가 아니라 통합과 일치를 통하여 그 사회를 이끌어 갑니다.
Unitas et obduco !
United and lead !
하나로 묶어 이끌고 가라 !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오늘 아침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말 50가지’를 큰 소리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83) _ 11월 4일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대한제국은 왜 멸망했나? 우리나라는 어떻게 일제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겠는가?
대한제국의 진짜 멸망의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크고 깊은 원인은 국력이 허약해서였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고종황제가 국제 정세에 무지하고 조정이 무능해서 였다고도 합니다. 정말 그게 멸망의 원인이었을까요? 백성들이 어리석고 우매무지해서 나라를 빼았겼다고도 합니다. 정말 그게 전부일까요?
‘땅의 역사’를 쓴 박종인 님의 글에서 최근 강석찬 목사님이 한 기독교신문의 시론 ‘희망은 어디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다시 옮겨봅니다. 을사조약이 만들어지기 약 1주일 전 당시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이토 히로부미의 심부름으로 고종에게 2만원 (지금 돈으로는 약 25억)을 가져다 받칩니다. 물론 뇌물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또 뇌물이라고 생각지도 않고 주고 받았습니다. 대한제국의 국고가 매말랐던 잘 알고 있던 일본의 선심이요, 원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직후인 1904년 3월에 이토 히로부미는 다시 ‘메이지 천황께서 한일 의정서 체결을 축하하시며 하사하시는 선물’ 이라며 고종에게는 30만엔을 주고 을사 5적을 비롯한 각료들에게는 별도로 300만원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런 글을 읽고 나니 머리와 가숨과 온몸이 멍하고 쓰라렸습니다. 짐작이 갑니다. 상상이 되고 알것 같습니다.
나라나 단체, 가정이나 개인에게 있어서 제일 약한 것이 돈이고 제일 강한 것도 돈입니다. 흥하게 하는 것도 돈이고 망하게 하는 것도 돈입니다. 늘 그렇긴 하지만 요즘 한국사회도, 특히 정치인들을 향한 우리네 서민들의 한숨도 돈, 돈, 돈 문제입니다. ‘돈 때문에 큰일 나겠구나!’ 걱정이 많습니다.
전에 빌 클린턴이 선거운동 구호로 내걸었던 말,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It’s the economy, stupid!)가 그래서 우리 시대의 진리(?)로 자리를 잡았나 봅니다.
경제를 모르면 현대는 살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경제학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참 어려운 학문입니다.
경제학 용어 가운데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이라는 게 있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 너무 많아지면 그 효과가 점점 줄어드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적당하고 알맞게 수요와 공급이 맞아 떨어져야지 수요를 잘못 계산하여 지나치게 공급을 많이하면 그 효용성이 급감하게 됩니다. 산해진미도 너무 많이 먹으면 몸을 해치게 되고 다이아몬드도 너무 많으면 돌맹이 취급을 받게 됩니다. 경제학자가 아니드래도 우린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 물량이 부족하여 값이 오르게 되고, 반대로 공급이 너무 많아 수요를 앞지르게 되면 물건이 너무 많아져서 가격이 폭락하게 되지요.
그럼 누가 이 수요와 공급, 공급과 수요를 알맞게 만드는 것일까요? 수요와 공급은 사람들이, 시장이 자연스럽게, 물흐르듯이 알아서 맞추어가게 되어있으니, 시장의 흐름에다 그냥 맡겨야한다고 주장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론자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수요와 공급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통제하고 조정하여 맞추어가야만 안정적으로 흘러가게 된다고 말하는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도 여러가지 절충과 조화, 균형과 타협점을 제시하는 여러가지 이론과 논쟁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렵기만 합니다. 장하준 교수님이나 최진 선생님 같은 분들에게 좀 쉽고 간단하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을 해도 우리가 그리 쉽게 알아듣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문이나 구글에서 검색해 본 경제학 용어들 중에는 들어본 단어들이 참 많습니다만 그래도 도통 알수 없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자본, 노동, 사유재산, 천연자원, 물가, 물가지수, GDP, GNP, 생산자, 소비자,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스테그플레이션, 기축통화, 내수경기, 수출경기, 금융정책, 재정정책, 자유무역협정(FTA), 신자유주의, 콜금리, 통화, 화폐, 환율, 유동성, 증권, 주식, 채권, 펀드, 유가증권, 외채, 외환시장, 모라토리움, 디폴트, 경상수지, 국제수지, 평가절상, 평가절하, 기축통화, 코스피, 재무제표, 현물, 선물, 옵션 등등 한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경제 용어들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양 그냥 막 써내려가는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서, 그동안 우리 목사들이나 신학자들도 보통 사람들이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종교적 용어들을 얼마나 남발해 왔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식한 서람이 용감하다고,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 그져 인문학적 소양을 위해서 가끔 만나서 책 읽고 토론하는 우리들은 이런 것을 훨씬 단순화 시킵니다. 경제학자들 보다 더 경제적일지도 모릅니다.
‘경제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리 대답합니다.
‘오늘 콜스나 울워스에서 무엇을 몇 프로나 세일하는지 알아서 싸게 살줄 아는 걸 경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자기 능력이나 취미에 따라 일하면서 돈벌어 나와 가족이 먹고 살면서 욕심 부리지 않고 사는 것이 경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가 뭐 별건가요? 성실하게 일해서 세금내고 여유가 생기면 불쌍한 나라나 어려운 사람이나 단체도 좀 도우면서 사는 거지, 하나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물론 이런 이야기는 어려운 문제를 피하고 싶어서 만들어내는 ‘단순화의 오류’를 불러올 위험성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하는 시대 속에서 우린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싶습니다.
‘나는 정직하게 일하고 알맞게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날마다 감사하며 순간 순간 자족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우리 인간의 진짜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 자신의 문제요 나 자신이 그 모든 문제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바보야 ! 문제는 경제가 아니야! 돈도 아니야! 사람이 문제야! 인간이 문제야! 내가 문제야!’
경제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 아침은 이런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언젠가 읽었으면 하는 책 : 땅의 역사 1, 2권 세트, 박종인 지음, 상상출판사, 2018)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오늘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말 50가지’로 시작해 봅니다.
라틴어 인문학 (56) _ 11월 5일
Quae sunt Caesaris Caesari et quae Dei Deo.
(쿠아에 순트 카에사리스 카에사리 에트 쿠아에 데이데오)
quae, 원형, quaero. 묻다, 청하다, 질문하다, 구하다, 추구하다, 탐구하다, 영어동사 quest, 명사는 question.
sunt, 이다, 있다, be동사
Caesaris, 소유격, 가이사의 것
Caesari, 목적격, 가이사에게
Dei, 소유격, 하나님의 것
Deo, 목적격, 하나님에게
Quae sunt Caesaris Caesari et quae Dei Deo.
쿠아에 순트 카에사리스 카에사 리 에트 쿠아에 데이 데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려라 (구하라, 청하라, 물어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드려라 (구해라, 청해라, 물어보아라)
Give to the emperor the things that are the empero’s, and to God the things that are God’s.
기독교 교인이 아니드래도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귀절로 신약성서 마가복음서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통적해석 중 하나는 가이사가 불의한 세속적 독재자라 하더라도 기독교는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복종하여 세금을 내는 등 국민으로써의 의무를 다해야한다는 해석입니다. ‘교회와 정치는 분리된다. 교회는 세속 정치에 개입해서는 않된다’는 식의 정교분리를 주장했던 보수적 한국교회는 이런 논리를 지지하면서 유신시대나 군부독재를 옹호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해석은 세속 (정치)역사에 대한 교회의 불개입을 통하여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좀 진보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드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 Quae sunt Caesaris Caesari et quae Dei Deo 는 이 말씀의 진의는 오히려 후반부에 더 큰 강조점이 있다고 하면서 교회의 세속적 책임에 방점을 찍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이 말은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은 말이고 설명을 들어도 그리 기분좋게 이해가 잘 않되는 귀절입니다.
Quae sunt Caesaris Caesari et quae Dei Deo.
저는 신학적 논쟁이 있는 이 말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해 봅니다.
이 말의 시작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던져진 시험, 올무, 테스트에 빠지지 않고 피하는 방법을 택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악의에서 던져진 질문에 직답을 피함으로 인문학도들에게 시험이나 올무를 피해가라는 지혜를 보여주신 것아라고 봅니다. 인생이란 모든 질문에 직답하기 보다는 기다리거나 은유나 상징이나 피해가는 길을 통하여 지혜롭게 대처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멀더라도 직행 보다는 돌아가는 길이 오히려 더 빠른 길이 될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질문에 그 자리에서 직접 모두 다 답하지 마라’
둘째는 ‘섞지 말아라.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데 섞지 말아라. 이것과 저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근본이 다른 것을 같은 차원에서 보는 것은 발생학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일깨운다고 봅니다.
셋째는 ‘인간이란 영과 육으로 되어있는 존재다. 이원론적이긴 하지만 이 또한 사실이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하늘과 땅, 정신과 몸, 세상의 통치와 하늘의 통치가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여기에서 쓰인 라틴어 동사 ‘quaero’의 의미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본래 신약 성서가 사용하고 있는 Greek에서 ‘아포도테’로 쓰요진 이 단어가 Latin Vulgata에서 quaero, 즉 구하다, 묻다, 질문하다, 청구하다는 다양한 뜻을 지닌 단어로 번역된 역사를 잘 알수는 없습니다만 이 단어 quaero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quaero 의 의미를 대입하여 텍스트를 다시 해석해 보면 이렇게 풀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한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 것인가 아닌가 묻지 말고, 가이사의 것, 세속적인 것,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는 가이사 한테 가서 물어보고 하느님에 대한 문제, 영적이고 정신적인 문제, 진리와 생명에 대한 문제는 하느님 한테 찾아가서 물어 보거라. 이게 정답이다” 라틴어 quaero는 영어에서 render to, give to, give back to, pay to 등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역사에는 많은 우문현답들이 있었습니다만 우리는 성서신학적 해석을 떠나서 인문학적 시각에서 이 문장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Quae sunt Caesaris Caesari et quae Dei Deo.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물어보고 하느님에 대한 것은 하느님께 물어보시오.
시험과 울무에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누가 무슨 말을 했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이것저것 모두 다 하나로 섞어놓지 마시오.
여러가지 렛슨을 얻을 수 있는 귀절입니다.
Quae sunt Caesaris Caesari et quae Dei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말 50가지 – 이 아침도 너무 큰 소리는 아니지만 조용히 소리내어 읽어봅니다. 내 마음에 감사와 행복이 묻어납니다.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84) _ 11월 6일
외로움과 고독
비슷한 것은 비슷할 뿐이지 사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린 아주 쉽게 ‘비슷한 것은 똑같은 것’ 이라고 판단하곤 합니다. ‘어쩜 저렇게 비슷하지? 정말 똑같아! 똑같애!’ 라고 말할 때가 그렇습니다. 내가 보기에 비슷하게 보이고, 내가 보기에 똑같은 것 처럼 보일 뿐이지, 내가 보고 있는 대상 그 자체는 결코 똑같은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린 ‘똑같다. 비슷하다’고 주관적으로 판단합니다. 언어적으로도 ‘비슷하다’는 것은 사실 ‘똑같은 게 아나라’는 뜻을 함축합니다.
저는 쌍둥이 딸도 있고, 쌍둥이 손녀도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우리 아이들을 늘 ‘비슷하게 생겼다’ ‘똑같이 생겼다’ ‘일란성인가 보다’라고 말을 하지만, 저와 저희 식구들이 보기엔 비슷한 것 보다는 다른 것이 더 많고, 똑같은 것 보다는 판이한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비슷한 것이나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아이들 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비슷한 것은 다른 것이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과 ‘고독’이 그렇습니다. 우린 아주 쉽게 외로운 것과 고독한 것은 비슷한 것이고,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둘은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영어로 ‘외로움’은 loneliness 라고 쓰고 ‘고독’은 solitude, solicitude 라고 씁니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다같이 ‘혼자 있는 상태’이며 ‘쓸쓸하게 보이는 모습’ 이지만 시인들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이 둘을 다른 것으로 보고 달리 해석합니다.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로 부터 거부당하거나 왕따를 당하여 단절되어 ‘혼자있다’ 는 느낌인데 반하여 ‘고독’이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를 외롭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나 자신을 타인으로 부터 떼어놓고 단절시켜 자기 자신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과 사귀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외로움은 타인과 공동체로 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심리적 상처인데 반하여, 고독은 스스로 자기가 홀로 있음으로 자아를 성찰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자발적 외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설리반은 ‘외로움이란 관계가 끊어짐으로 혼자되는 부정적인 것’이고 ‘고독은 스스로 선택하여 나를 찾아가는 긍정적인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외로움이란 너도 잃고 나도 잃어버리는 것’ 이고 ‘고독이란 너는 멀리 두지만 나는 가까이 두어 나를 만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사회성’은 잃어버리고 ‘개인적 동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Socialize가 아니라 Individualize를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1인 가족, 혼밥, 혼술만이 아니라 혼자 여행하고 혼자 낚시하고 혼자 등산하고 혼자 살다가 아무도 없이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 우리 시대는 외로움만 남고 고독은 잃어버린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 중 제일 많이 하는 것이 각종 SNS, Tweeter, Face time, Katok 들과 smartphone 입니다. 특히 스마튼폰은 현대인들을 외로움에서 구출해 주는 구세주 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24시간 끼고 살다싶이 합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 앞에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스마트폰을 먼저 받는 것은 보통이고 일하고 먹고 놀고 화장실에 갈 때, 잠자리에 들 때도 머릿맡에 두고 잡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스마트폰을 들고 텍스 메시지를 보내면서 다가오는 자동차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외로와서, 그거 하나라도 친구삼고 싶어하는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 입니다.
어제는 온 종일 늦은 봄비가 내렸습니다. ‘금년 봄엔 비가 자주 내리는 걸 보니 bush fire 는 적게 일어나겠군!’ 아침에 혼자서 중얼거리며 늘 하던 대로 ABC FM을 틀었습니다. 비는 계속 내렸습니다. 이내 음악 CD로 바꾸었습니다. 목포의 눈물, 타향살이, 굳세어라 금순아, 황성옛터로 부터 시작하여 모닥불, 꽃반지 끼고, 긴머리 소녀, 하얀 손수건, J에게를 지나 내님의 사랑은, 한 사람, 네 꿈을 펼쳐라, 세노야 세노야를 거쳐 조개껍질 묶어, 우리들의 이야기, 마리아, 축제의 밤, 목장길 따라,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로 이어졌습니다. 좋았습니다. 외로움과 고독, 과거와 현재, 어제와 오늘, 거룩함과 속됨이 내 마음 속에서 조화를 빗어내는 듯 했습니다. 외로와서 좋았고 고독해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곤 지난 10월 전현구 시인이 우리 카톡방에 올린 시, “인생”을 천천히 다시 읽었습니다.
인생
외로움은
나를 묶어놓는 구속
고독은
나를 풀어놓는 자유
반복되는 구속과 자유는
그림자와 같은 운명이 된다
밀려오는 파도 처럼
하나의 파도로 낮아지면
낮아진 위에 또 다른 높은 파도로
밀려오다
산산히 뷰서지는
포말이 되기도 한다
외로움이라는 날실과
고독이라는 씨줄로
곱게 엮어 문양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앞서거니
뒷서거니
화사한 길동무가 된다
그 어떤 인문학적 솔명 보다 훨씬 더 진솔하고 아름답게 외로움과 고독을 풀어주었습니다.
아! 시인은 외로움과 고독을 이렇게 나누면서, 또 이렇게 하나로 엮어 내는구나! 마음을 따뜻하게 만져 주었습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3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