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홍길복 목사의 ‘잡기장과 라틴어 인문학’ 중에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 제 장례식에 놀러 오실래요 / 아프리카 속담들 1, 2 / 다시 보기, 다시 듣기, 다시 읽기
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136)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며칠 전 아내가 ‘아침성경읽기’ 후에 물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절에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서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라고 쓰여 있는데 그 ‘사흘째’가 언제부터 사흘째를 말하는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궁금해서 그 앞 1장 끝 부분에 나오는 나다나엘을 만난 후 사흘째인가 싶어서 찾아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제가 한 10여분에 걸쳐 그 어려운 불트만의 ‘공관복음 전승사’ 까지 들춰가면서 한 이야기는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같은 비유대인들에게는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사흘째 되는 날’이라고 말하면 알기가 어렵지만, 그 때 요한복음서를 편집한 요한이나, 또 이 복음서의 제 1차적 독자들은 모두 다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냥 ‘사흘째 되는 날’이라고만 말해도 그것이 ‘안식일 후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시간과 날짜의 기준과 표준을 안식일로 삼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들 끼리는 ‘4일 후에 만나세’ 라고 말해도 그게 오늘 부터 4일 후가 아니라, 안식일 후 4일째 되는 날을 뜻하는 것이니 지금 우리 요일로 치면 수요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여튼 요한복음서 2장에 나오는 갈릴리 가나에서의 혼인잔치는 ‘사흘째 되는 날’에 열렸으니 ‘안식일’은 지금 우리로써는 토요일이고, 사흘째인, 일, 월, 화, 화요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은 안식 후 사흘째 되는 날인 화요일을 길일로 여겨서 결혼식을 거행하는 풍습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이 시간이나 날짜 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생활을 만들고, 이끌고, 또 규제하는 기준이요, 표준이요, 준거가 됩니다.
무슬림들도 시간으로써의 금요일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들은 오히려 특정한 장소로서 메카를 그들 삶의 표준과 중심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구촌 어디에 가서 살든, 어디로 여행을 하든, 늘 메카를 향하여 하루 5번씩 기도를 하고, 메카순례를 평생의 과제요 목표로 삼고 살아갑니다.
종교적 삶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일상적 생활 속에는 여러가지 ‘생활의 표준들’이 있습니다. 숫자의 기준은 ‘0’ 입니다. 0을 중심하여 플러스와 마이너스 방향으로 무한히 펼쳐지는 것이 수의 세계입니다. 온도도 빙점인 0도를 중심하여 영하와 영상으로 나누어지지요. 지구의 위도도 런던에 있는 그리니치 (Greenwich) 천문대를 중심하여 동경과 서경으로 나누고 거기에 따라 각 나라나 지역에 따른 표준시가 형성되지요. 오래 전 런던에 갔다가 호기심으로 테임스강을 따라 가다가 그리니치 천문대와 천체 박물관을 둘러보았는데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곳이 세계의 시간을 지배하고 관리, 통제하는 곳임을 실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네 일상적 삶에는 여러가지 기준과 표준치들이 있습니다. 표준어, 표준말, 무게나 거리를 재는 표준 하나치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표준과 기준들은 넓은 땅에 흩어져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을 어떤 때는 규제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편리하게 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학생 때, 체육 시간에 운동장에 모이면 선생님이 가운데 있는 학생 하나를 지명하면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경식이 기준! 전후좌우로 양팔 간격으로 벌려!’ 또 얼마 후엔 다시 호령하셨습니다. ‘경식이 기준! 원위치로 다시 모여!’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인생살이에는 그 어떤 중심, 표준, 기준이 있습니다. 종교인들 중에는 그것을 어떤 날짜로 정하거나, 장소로 정하는 이들도 있고, 일반 사회에서는 법률이나 사회적 전통, 혹은 관습으로 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양반 기준, 사대부 기준, 남자 기준, 어른 기준, 백인 기준, 혹은 물질, 돈, 권력, 명예 같은 것들을 인생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아니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기준, 표준, 중심으로 삼아야 할 것을 생각도 해 보고 이것저것 찾아도 봅니다. 생활의 standard, mean, criterion을 그려보다가 오늘은 2백 쪽도 않되는 작은 책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 로보트 폴검 지음, 박종서 옮김, 김영사, 1989)를 다시 펼쳤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제 1장 13쪽 부터 15쪽 사이에 쓰여진 글 몇 개를 옮겨 봅니다.
“내 신조는 이렇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지혜는 대학원이라는 산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는 것이다. 내가 배운 것들이 바로 아래에 있다.
* 무엇이든지 나누어 가져라.
* 정정당당하게 행동해라.
* 남을 때리지 말아라.
* 물건은 항상 제 자리에 놓아라.
* 네가 어지럽힌 것은 네가 깨끗이 치워라.
*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말아라.
* 남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땐 미안하다고 말해라.
* 밥 먹기 전에는 손을 씻어라.
* 화장실을 쓴 다음엔 꼭 물을 내려라.
* 균형잡힌 생활을 해라. 배우고, 생각하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기도 하고, 일도 균형 있게 해라.
* 밖에 나가서는 차조심하고 손을 꼭 잡고 서로 의지해라.
* 경이로운 일에 눈을 떠라. 컵에 든 작은 씨앗을 기억해라. 그것이, 뿌리가 나고 싹이 돋고 자라나는 것을 아무도 왜, 어떻게 그리 되는 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의 삶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 금붕어, 애완용 흰 쥐, 그리고 컵 안에 심어놓은 작은 씨앗 조차도 다 죽는다. 우리도 꼭 마찬가지다.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이 속에 들어 있다. 황금률과 사랑의 법칙과 공중도덕, 그리고 생태학과 정치학과 인간의 평등과 건강한 생활까지!
Carpe diem !
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137)
‘제 장례식에 놀러 오실래요’
어제 소개한 책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를 쓴 로버트 풀검 (Robert Fulghum)은 본래 미국 북서부에 있는 시애틀에서 목회하던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교회 근처에 있던 한 유치원에서 이런 저런 행사가 있을 때엔 그 유치원 원장이 풀검 목사를 청하여 아이들에게 그져 ‘좋은 이야기’를 좀 들려달라고 해서 가끔 가서 아이들 앞에서 그야말로 ‘짧고도 좋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자리에 그 지역 출신의 연방 상원의원이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상원의원이 풀검 목사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풀검 목사의 스토리 원고를 받아, 그걸 복사해 가지고 가서 워싱턴 의회 연설 때 그걸 낭독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풀검목사의 ‘유치원 스토리들’은 일약 CBS를 비롯한 여러 언론에 보도 되었고, 수천만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나온 책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이고 그후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는데 오늘 잡기장의 제목으로 붙인 것도 그 가운데 하나 입니다.
‘제 장례식에 놀러오실래요?’ (로버트 풀검 저, 이계영옮김, 김영사, 2000)의 본래 영어책 이름은 ‘From Beginning To End’입니다. 곧이 곧대로 직역하면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듯 제목만 보면 죽음에 대한 엣세이 같이 보이지만, 실제 영어 표제에 나타난 것 처럼 우리의 출생과 성장, 교육과 일, 만남과 헤어짐, 결혼과 이혼, 그리고 병고와 죽음을 모두 아우르는 글입니다.
그러나 폴검이 이 책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장례식 입니다. 이제 까지 살아오면서 우리는 가까운 친척들과 이웃과 친구들을 주로 초청하여 생일 파티도 했고 결혼식도 치루어 왔는데 이제는 미리 장례식 자리도 한번 마련해서 그런 이들을 초청해서 신나고 흥겨운 ‘장례식 파티를 열어 보자’고 제안 합니다. 눈물이 아닌 웃음, 아픔이 아닌 기쁨, 아쉬움이 아닌 진정한 감사가 넘쳐나는 ‘미리 해 보는 장례식’을 통하여 인생의 반전을 일으켜 보자는 이야기 입니다.
좀 안목을 넓혀서 보면, 이 책은 목사로서의 폴검이 입학식, 졸업식, 동창회,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 등등 인생의 크고 작은 경조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이해해 보려는 ‘새로운 가정의례준칙’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참 로버트 풀검 이란 사람은 인생을 따뜻하게 보고, 또 따뜻하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는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행복했던 생일 파티나 결혼식 만이 아니라, 실패와 절망, 이별과 죽음 까지도 아울러, 인생살이에서 일어나는 온갖 모든 일들을 따뜻하고 온화하고 그래서 아름답게 만들어 보자는 주장을 펼치어 나갑니다. 그의 말대로 모든 사람은 거의가 종교적이고,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이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어떤 형식의 종교이던, ‘종교적 통과의례’의 연속 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들의 내면에는 인간에게 희망과 기쁨, 사랑과 아름다움을 주려는 목표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공장에서 30분에 한개씩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내듯이 결혼식을 거행하는 것 보다는, 그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이 훨씬 더 많은 생각과 준비를 거쳐서 이루어지는 이혼식은 우리 인생을 한 단계 앞으로 나가게 해 주는 희망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혼식은, 같이 하든, 따로 따로 하든, 그들이 지니기 쉬운 당혹감이나 수치심이나 죄의식을 벗어버리는 종교의식이 되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출생, 세례, 성장, 결혼, 이혼, 질병, 사별 등, 인생의 모든 통과의례란 차별이나 구별 없이, 똑같이 거룩한 것이며 축복 받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 합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 나를 알고 싶은 사람은 거울을 보면 된다. 그리고 그 거울은 아주 큰 거울이어야 한다 !’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인생의 큰 거울은 무엇일까요? 그는 일러줍니다. – ‘가족입니다. 이웃입니다. 친구들 입니다. 그들을 쳐다보고, 그들을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안아줄 때, 그들에게서 내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는 것은 나를 비춰주는 가족이라는 거울, 친구와 이웃이라는 거울이 없거나, 있어도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가끔 공동묘지에 가 보곤 하십니까? 당신은 당신이 죽은 후에 뭍히게 될 당신의 묘자리에 가서 오후 한 나절을 보내 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지금 늙었거나 어떤 치명적인 병에 걸려서가 아닙니다. 아직은 젊고 건강한 편이지만, 그래도 가끔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럼 거기서 당신은 인생의 활기 찬 새로운 오후를 만나게 될 것 입니다’
–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코로나가 풀리면 우리 부부도 우리가 죽으면 묻힐 공동묘지, 우리 묘자리에 점심을 싸들고 가야지, 그리고 거기서 감사와 기쁨을 노래하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묘지는 나를 만나기에 제일 좋은 자리이며 동시에 나를 새롭게해 주고, 나를 깨끗케 해 주는 성지와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 추가 : 로버트 풀검 자신이 정한 그의 6가지 신념
1. 나는 지식 보다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2. 나는 신화가 역사 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있다고 믿는다.
3. 나는 꿈이 현실 보다 더 강하다고 믿는다.
4. 나는 희망은 언제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
5. 나는 슬픔의 유일한 치료제는 웃음이라고 믿는다.
6. 나는 사랑이 죽음 보다 강하다고 믿는다.
Carpe diem !
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138)
아프리카 속담들 (African Proverbs) 1
우리는 모두 편견이나 차별 없는 세상을 희망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물론, 우리 마음 속에는 늘 수많은 편견과 차별의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도 그 중 하나입니다.
미국에서 한인으로 오랫동안 인권과 차별 철폐를 위해서 일해 오셨던 교회 지도자 중 한분으로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아왔던 제 선배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아들이 어느날 흑인 처녀 – 물론 요즘은 ‘흑인’ 이라는 말을 쓰면 않됩니다. 그냥 ‘아프리카 출신의 미국시민’ (African American) 이라고 합니다.- 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해서 갈등을 빗었던 고백적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공부재료를 가지고 ‘필라델피아 인문학 모임’을 이끌고 있는 제 후배의 케이스도 비슷합니다. 그 친구도 남달리 사회정의와 미국내에서의 각종 차별 철패운동 – Anti Discrimination Movement – 을 위해서 뛰어 다니는 사람인데, 어느 날 아들 녀석이 African American 처녀를 대리고 와서 인사를 시키더니 결혼을 하겠다고 하더라는 것 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그 목사님과 같이, 그 후배도 고민하며 아들과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그 결혼을 만류했지만 결국은 허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두 케이스에서 그 이들이 모두 자식들에게 승복하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저희는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가르치시고 살아오신대로 아무도 그 어떤 인종도 차별하거나 구별하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이 두 가지 케이스를 예로 드는 것은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심리적 편견이나 차별의식을 걷어내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함께 노력하자는 생각에서 나누는 이야기 입니다.
흔히 ‘아프리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검은 대륙’ ‘미개한 나라들’ ‘가난한 후진국들이 모여 있는 대륙’ 이랄 수 있습니다. 지저분하고, 더럽고, 야만적이고, 미신과 주술이 널려있고, 부족전쟁, 정글, 원시인, 그리고 ‘동물의 왕국’을 연상합니다. 말도, 토인이니, 깜둥이니, 시커먼 놈들 이라고 함부로 내뱉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여튼 아프리카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은 아주 극심하여, 내전, 빈곤, 기근, 분쟁, 군사독재 등으로 가득하여 지금도 옷은 입지 않고 벌거벗고 살면서 밥은 손으로 먹는 원시인에 가까운 야만인 취급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아프리카에 대한 객관적 정보는 이렇습니다. 세계 6대륙 중에서 세 번째로 큰 땅을 지녔으며, 인구도 12억 이상이 되며, 그 안에 있는 나라만 해도 54개국이나 됩니다. 아프리카는 현존하는 인류문명 가운데 가장 오래된 발상지 입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Australopithecus)는 바로 아프리카에서 출발되어 유라시아와 퍼져 나갔습니다. 아시다싶이 ‘오스트랄리피테쿠스’란 지금부터 약 5백 만년 전 부터 아프리카에 살았다고 추정되는 인종입니다. 원숭이를 닮은 유인원과 ‘호모 사피엔스’ 사이의 중간 쯤 되는 형태의 ‘남방 원숭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인류의 조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 ‘오스트랄로’는 ‘남쪽’이고, ‘피테쿠스’는 원숭이라는 라틴어입니다) 하여튼 아프리카는 인류의 먼 선조 중 하나가 뿌리를 내렸고 다양한 문화와 전통, 언어와 민족을 안고 있는 대륙입니다. 그런 아프리카를 우리들에게 부정적 생각을 갖도록 해 준 곳은 15, 16세기 이후 유럽 사람들 입니다. 지난 5백년 이상 아프리카 사람들은 유럽인들에 의해서 침략과 약탈을 당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제 36년의 식민지 지배와 그에 따른 각종 약탈, 능멸, 성노예, 강제 노역 등의 문제를 놓고도 해결의 실머리를 찾지 못하여 갈등을 거듭하고 있는데, 아프리카인들은 언제나 그들이 당해 온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노예무역을 비롯한 다이아몬드와 금을 찾겠다면 초토화 시킨 원한의 땅을 회복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아프리카에 대해서 얻어듣는 지식과 정보라는 것은 거의가 서구인들에 의해서 해석된 ‘서구적 information’들 입니다. 거기에는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 예를 든 것처럼, 아무리 편견과 차별을 외치고 부르짖는 사람이라고 해도 인간성 속에는 극복해 내기 어려운 차별의식이 엄존함이 보여 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이나 편견을 조금 이라도 덜어내고 싶어서 여기 그 대륙에서 수 천, 수 만년 동안 살아온 사람들이 오래 전 부터 전해 준 속담들 몇 개를 추려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우선 널리 알려졌고 익히 잘 아시고 계신 것들 몇 개를 나누어 봅니다.
*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If you want to go quickly, go alone;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
* 애기 하나를 키우는 데도 온 마을이 힘을 합해야한다.
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
* 노인 한 사람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에 타 사라지는 것과 같다.
When an older dies, it’s a library burning.
* 자원 봉사자 한 사람이 억지로 일하는 열명 보다 낫다.
One volunteer is better than ten forced men.
* 혼자 하면 누구나 1등 한다.
He who runs alone celebrates.
* 키가 작다고 어리다고 보아서는 않된다.
Don’t mistake a short man for a boy.
* 지혜 없는 지식은 모래무지 속에 담긴 물과 같다.
Knowledge without wisdom is like water in the sand.
Carpe diem !!!
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139)
아프리카의 속담들 (African Proverbs) 2
사전적 풀이로 속담이란, 예로부터 한 민족이나 공동체 안에서 오랫동안 널리 전해져 오는 짧은 말로 속담이라고도 하지만, 그냥 ‘옛말’ ‘격언’ ‘잠언’ 이라고도 합니다. 영어로는 proverb 혹은 saying 으로 표기합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잠언’이라는 책도 영어로는 Proverb로 되어 있습니다.
속담은 그 속담을 만들고 전해 온 공동체의 집단적 생각, 사상, 전통, 철학 그리고 의식구조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짧은 몇개의 단어로 되어 있기에 기억하고 외우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짧고 단순한 문장이라고 해서 너무 빨리 읽고 생각 없이 지나가면 그 속담이 전해 주려고 하는 깊은 뜻을 놓치기 쉽습니다. 같은 글이라고 해도 소설과 시를 읽을 때와 논문과 수필을 읽을 때가 다르듯이 속담 역시 짧은 문장이라고 해서 그냥 한꺼번에 쭉 읽고 덮어버려서는 않된다고 말합니다.
어제와 오늘 나누는 잡기장의 아프리카 속담들은 ‘하쿠나 마타타 – 아프리카의 지혜’ (차승정 엮음, 에르디아, 2013)에 소개된 80개의 아프리카 속담들을 중심하고, 그외 다른 곳에서 찿은 것들을 좀 더 보태서 추려 본 것 입니다.
본래 ‘아프리카의 지혜’는 스와힐리어로 된 속담들을 소개한 책 입니다. 스와힐리어는 아프리카 동부에 자리한 해안국들인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의 공용어이고, 그외에도 아프리카 여러나라의 부족들 사이에서 넓게 사용되는 토착 언어 중 하나 입니다.
책의 표제 앞에 붙여놓은 ‘하쿠나 마타타’란 스와힐리어로 ‘걱정하지 마라’ ‘걱정 할 것은 없다’는 뜻으로 영어로는 No problem, 혹은 No worry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 달걀에도 언젠가는 발이 달릴 날이 온다.
* 무명 인사로 지내는 것을 감사하라. 유명 인사가 되면 무명 시절이 그리워 진다.
* 친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기 위해서 불을 밝힐 필요는 없다.
* 두꺼비가 뛸 때는 무엇을 쫓거나, 무엇에 쫓길 때 뿐이다.
* 코끼리들이 싸우면 들풀이 죽는다.
* 노인은 골짜기 아래에서 보는 것도, 아이들은 산꼭대기에 올라가도 보질 못한다.
* 거미줄도 모이면 사자를 묶는다.
* 잔잔한 바다는 노련한 사공을 만들지 못한다.
* 우기에는 모기도 많은 법이다. (물이 귀한 아프리카에서는 우기가 오면 물이 많아져 풀도 잘 자라고 농사도 잘 지를 수 있어서 참 좋지만, 동시에 우기에는 모기도 많아져서 말라리아를 비롯한 여러가지 수인성 질병도 창궐해 집니다)
* 선장이 많으면 배가 요동친다. (우리 속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 간다)
* 빈 깡통이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우리 속담 : 빈 수레가 요란하다)
* 발톱이 있다고 모두 사자는 아니다.
* 돌을 깨트릴수 없으면 그냥 들어올려라.
* 1000도 1 부터 시작된다.
* 너를 때리는 사람은 너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 벌을 따라가는 사람은 꿀이 있는 곳을 놓치지 않는다.
* 길을 잃은 사람이 길을 찾는다.
* 친절은 썩지 않는다.
* 계속하면 실끈으로도 돌을 자를 수 있다.
* 쓴 것을 먹은 사람이 단 것도 먹게 된다.
*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 익은 과일을 먹는다.
* 용서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다.
* 자물쇠 마다 열쇠는 다 다르다.
* 주술사도 자기 병은 못 고친다.
* 벽을 치는 사람은 자기 손만 아프게 할 뿐이다.
* 세상에 적 (원수)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 눈은 자기 눈을 못보다.
* 두 사람이 알면 그것은 비밀이 아니다.
* 침몰하는 배에는 선장이 필요없다.
* 먼 길에는 반드시 모퉁이가 있다.
* 부드러운 혀가 단단한 이빨 보다 더 상처를 준다.
* 묻는 것은 무지가 아니다.
* 아래 있는 가슴이 위에 있는 머리 보다 더 멀리 본다.
* 닭의 기도는 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 말을 더듬는 사람도 아버지라는 말은 똑바로 한다.
* 달팽이를 죽이려고 칼을 뺄 필요는 없다.
Carpe diem !!!
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140)
‘다시 보기’ ‘다시 듣기’ ‘다시 읽기’
우리는 이미 여러 번 읽었던 경전이나 고전도 가끔은 거듭해서 다시 읽곤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읽을수록 새롭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똑같은 성경도 20대, 30대, 60대, 70대, 나이에 따라, 읽을 때 마다,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쳤던 새로운 것, 다른 것이 보였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나이나 경험, 환경이나 상황의 변화는 우리의 이해나 느낌, 감동이나 적용을 새롭게 해 줍니다. 젊었을 때, 신학생 때, 처음 목사가 되었을 때, 이민목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 그리고 은퇴한 지금, 똑같은 성경이지만 읽고 또 다시 읽으면 새로운 세계가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런 안목의 변화는 성경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책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는 잡기장에서도 그렇지만 다른 때도 가끔 책 소개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전에 벌써 읽었는데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도 저는 그리 말씀하시는 분들에게 다시 한번 또 읽어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종교적 경전과 마찬가지로, 논어나 맹자, 노자나 장자, 대학이나 중용, 그리고 세익스피어나 유고, 톨스토이가 토스토옙스키 등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다시 읽으면’ ‘새로운 교훈과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책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똑같은 ‘소크라테스의 변명’도 학생 때 읽었던 경험과 가르치는 나이가 되어서 읽었던 렛슨이 아주 다른 것을 깨우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독서는 나이와 경험, 상황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의미와 중요성을 전달해 줍니다. 그래서 ‘다시 읽기’는 참 중요합니다.
음악과 미술도 마찬가지 입니다. 바하, 헨델, 베토벤, 모짜르르, 슈베르트, 차이콥스키, 와그너, 브람스, 슈만, 쇼팡, 멘델스존, 리스트, 베르디, 슈트라우스, 비발디, 푸치니, 로씨니, 그리그, 비제, 구노…. 수없이 거듭 들어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따른’ 새로운 위로와 교훈과 용기와 깨우침을 줍니다. 그래서 ‘다시 듣기’는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미술의 세계 역시 똑같습니다. ‘다시 보면 볼수록’ 감추어 있던 새로운 세상이 보여집니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다빈치, 라파엘로, 루벤스, 렘브란트, 샤갈, 달리, 모네, 마네, 고호, 고갱, 마그리트, 피카소,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 박수근, 이중섭, 천경자, 김기창, 백남준 등등… 모두 마찬가지 입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유투브를 통해서 다시 찾아 봅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달라졌기에, 그들의 작품들도 달리 보입니다.
영화도 그렇습니다. 퀘바디스, 사운드 오브 뮤직, 미션, 인생은 아름다워, 엘 시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로마의 휴일,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 벤허, 십계, 쉰들러 리스트, 춘향전, 서편제… 처음 보았을 때, 젊었을 때, 그리고 나이들어 보았을 때, 그 느낌과 감명은 결코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영화인데도 슬플 때, 힘들 때, 기쁠 때, 행복했던 순간에 따라 마음에 와 닫는 장면과 그 감명은 한결같질 않습니다.
똑같은 ‘사운드 오브 뮤직’도 초등학교 저학년인 우리 작은 손녀들은 폰 트랩 대령의 막내 딸, 5살 짜리 그래틀이 다친 손가락을 내밀 때 울적입니다. 하이 스쿨 손녀들은 우편 배달하는 랄프를 좋아하는 맏딸 리즈에게 눈이 꽂힙니다. 3,40대 여성들은 주인공인 수녀 마리아를, 50대 남자들은 남자 주인공 폰 트랩대령의 말과 행동과 줄거리를 따라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6,70대에 들어서면 마침내 에델바이스를 넘어서서 새로운 자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인생이라 무엇인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까?’ 그러면서 우리는 그 영화 한편을 통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인생과 역사 안에 있는 사랑과 희망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나이를 더해가고 경륜을 보태가면서, 똑같은 것도 달리 보게 되고, 높이 보게 되고, 깊이 볼 줄 알게 되고, 또 넓게 보는 눈과 마음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그래서, 우린 책도 ‘다시 읽고’ 음악도 ‘다시 듣고’ 그림도 ‘다시 보아야’합니다.
요즘은 세월이 좋아져서 ‘다시 보기’ ‘다시 듣기’가 아주 손쉬워졌습니다. TV에서는 뉴스, 연예, 다큐, 영화, 뮤지컬 등등 거의 모든 것을 ‘다시 보기’로 안내해 줍니다.
코로나 팬데믹과 럭다운이 길어지면서, 이렇듯 꼼짝 못 할 때는 ‘다시 보기’ ‘다시 듣기’ ‘다시 읽기’가 어떨까 싶어서 드리는 말씀 입니다.
지난 해,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우리 시드니 인문학 교실이 제대로 모이질 못하고, 모였다 쉬었다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늘까지 저는 인문학 라틴어 60번에 잡기장 140번, 그래서 모두 200 쪽의 어줍잖은 글들을 우리 카톡방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몇몇 아는 분들에게 ‘전달’해 왔습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은 법’이라 ‘그만 둬야지’ 하면서도, 평생 말하는 것으로 먹고 살아온 재주 밖에는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인지 끝내질 못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참고 읽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다시 읽어보니 진짜로 부족하고 부끄러운 글들이 수두룩했습니다.
말은 뱉어버리면 내 말이 아니고, 글은 써버리고 나면 내 글이 아니라고 하는데, 정말 부끄럽기도 하고, 수습 불가능한 것들도 있어서 한숨이 나옵니다.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저를 포함한 우리네 한국인들은 대체로 말이 많은 편입니다. 조선시대, 주자학을 중심한 당파 싸움 후에는 말싸움이랄 수 있는 공리공론으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실력은 부족하면서도, 큰소리 치고, 목소리 크고,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득세하던 시대적 경험을 해 왔습니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서양사람들은 총으로 싸운다는데, 명분을 쫓아가는 우리 한국인들은 주로 말과 글로 싸우는데 익숙한 사람들인지라 자꾸 뒤로 밀린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남 말 할것 없이 저부터 이번 주말에는 ‘다시 읽고’ ‘다시 보고’ ‘다시듣고’ 다시 생각하리라, 또한번 더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Carpe Diem !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