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인문학과 미술 : 후기 인상주의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후기 인상파 세잔, 고갱, 고흐
후기인상주의는 대략 1880~1905년 사이에 프랑스미술의 경향이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영국의 평로가 로저 프라이(Roger Eliot Fry, 1866~1934)인데 이 명칭을 인상주의 이후의 흐름이라는 가벼운 뜻으로 썼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신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주의까지 다 포함되는 의미로 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후기인상주의’라는 말은 대체로 고흐, 고갱, 세잔으로 대표되는 경향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
마네를 시작으로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등의 젊은 예술가들은 인상주의가 눈으로 본 그대로의 자연을 묘사하고자 지나치게 순간적인 시각 세계에만 사로잡혀 있다고 보고, 보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들의 활동은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들 모두가 인상주의에서 출발했고 인상주의의 성과를 발전시키고자 했다는 점이 ‘후기 인상주의(Post Impressionism)’라고 불린다.
우리가 현대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들의 기존 화풍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실험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모색했던 여러 가지 방향은 결국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세잔은 인상주의가 순간순간의 감각에만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자연의 굳건하고 변함없는 형태는 도외시했다고 느꼈으며, 균형과 질서 감각을 되찾고자 했다.
세잔의 해결 방식은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입체주의’를 낳게 했고, 고갱은 유럽적인 삶과 예술에 대한 총체적 불만 속에서 보다 단순하고 솔직한 어떤 것을 열망했고, 그것을 미개인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고갱의 해결 방식은 ‘야수파’ 등 다양한 ‘원시주의’로 이어졌으며 반 고흐는 인상주의가 시각적 인상에 너무 빠져 빛과 색의 광학적 성질만을 탐구한 나머지 강렬한 정열을 상실할 위험에 처했다고 느끼고, 이 강렬한 정열을 통해서만 예술가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 고흐의 해결방식은 독일 중심의 ‘표현주의’를 일으켰다.
1. 세잔
인상주의에 모두들 빠져있던 시기에 인상주의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문제점을 분명하게 의식한 최초의 인물은 세잔이었다.
인상주의자들은 사물이 아니라 망막에 비친 그 인상을 그리려 했다. 그러다보니 화면은 아주 추상적으로 견고한 구성적 요소가 빠지고 물그림자 같이 되어갔다.
세잔은 인상주의의 강렬하고 밝은 색채를 그대로 살리면서 깊이감을 부여하고 명료하고 조화로운 화면의 짜임새를 통해 질서있는 구도를 추구했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외양 뒤에는 본질적이고 변하지 않는 구조가 있다고 믿고, 눈에 보이는 외관만을 모방하는 대신 자연의 본질적인 기하학적 구조를 통찰하고자 했다.
여러가지 그릇과 과일, 식탁보 등을 늘어놓은 그의 ‘정물’(1890~94년) 연작들에서 그의 정물화는 물체들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단순화하고, 윤곽선은 짙은 색으로 처리하여 견고한 형태를 만들어 내며, 강한 원색을 대비시켜 입체감을 살리고 있다.
물체들은 각기 다른 시점에서 묘사되어 있고 원근법을 무시함으로써 곧 굴러 내릴 것 같이 불안해 보인다. 세잔은 이러한 그림을 통해 사물의 배후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속성과 그들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했다. 또한 자연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본질적인 형태를 찾아내고 주관적인 질서 감각으로 이를 재배치함으로써 조화로운 화면 구성을 이루어 냈다.
세잔 근대미술의 아버지
세잔 근대미술의 아버지(1839년 1월 19일~1906년 10월 22일), 선구적 역할을 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19세기 인상주의에서 20세기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데에 가교역할을 한 사람이다.
회화에서 드로잉으로 대상의 윤곽을 그리고 채색은 대상의 색채를 따라 그렸었던 기존의 방식에서 마티스는 색채를 해방시켰고, 피카소는 형태를 해방시켰다면, 이 두 가지 해방의 시작이 세잔이었다.
우리는 이미 피카소나 브라크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들을 통해 복합 시점과 평면적인 그림들을 접해서 이런 그림이 어색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파격 그 자체였다. 이 작품은 그들 이전에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사진 같은 정물화만 봐 온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설 수밖에 없었을 테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가장 사과다운 사과
아담과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와 더불어 회자되는 세잔의 사과는 도대체 무엇이 특별한 걸까.
사과 한 알로 파리를 깜짝 놀라게 하다고 공언한 세잔은 그의 말대로 파리뿐 아니라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고 미술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세잔은 각 소재가 지닌 형태적 특성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다중 시점을 사용했고 그림이란 3차원 입체가 아닌 2차원적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원근감을 없앴다. 낯선 것에 대한 비난이 일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대상을 복사하듯 똑같이 그리지 않는 그의 시도는 미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세잔은 그리려는 대상을 천 번을 보고, 백 번을 그리고, 백 번을 고치는 화가다. 그가 자화상을 많이 그리거나 사과나 오렌지, 혹은 레몬과 같이 외피가 단단한 소재를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그림을 완성하는 동안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아야 하고 변치 않아야 하니까.
원근이나 시점은 의미가 없다. 대상을 똑같이 그리지 않고 사과를 가장 사과답게 보이게 하는 색채와 각도, 그리고 안정감 있는 구도만이 그에게 중요하다. 극히 ‘주관적인 방식’으로. 이렇게 그의 특별한 사과가 탄생했다.
세잔은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모자 가게 상인인 아버지와 점원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으며 밑으로 두 누이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모자로 돈을 벌어 당시 그 지역에 하나뿐이던 은행을 인수했다. 덕분에 세잔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부르봉 중학교에 입학한 13세 무렵, 그곳에서 한 살 아래인 에밀 졸라를 만나 우정을 키운다. 두 소년은 바늘과 실처럼 항상 함께 동네 뒷산을 산책하고 수영을 하고 책을 읽으며 ‘절친(절친한 친구)’으로 40여년을 보낸다. 그 무렵 세잔은 엑스의 미술학교에서 조제프 지베르니에게 그림을 배운다.
졸라는 18세에 파리로 이사하면서 둘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세잔은 그림을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바람대로 엑스의 법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졸라의 제안과 설득에 힘입어 3년 후 세잔은 화가의 꿈을 안고 파리로 향한다.
1861년, 6개월 동안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Academie Suisse)’에서 그림을 배우며 피사로, 기요맹 등의 인상파 화가들을 만난다. 하지만 국립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 낙방하자 크게 상심해 낙향한다. 엑스로 돌아온 세잔은 아버지 은행에서 일했지만, 화가의 꿈을 도저히 접을 수 없어 다음 해 다시 파리로 간다.
십여 년 동안 세잔은 파리와 엑스를 오가며 그림을 그린다. 국선인 살롱전에 번번이 낙선했고 외골수적인 성격 탓에 동료 화가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이 시기를 ‘세잔의 암흑기’라 하는데, 그림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주제도 죽음, 강간, 살인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의 그림이 변화를 겪게 된 것은1872년 그보다 9살 연상인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고 부터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알려진 피사로는 세잔의 천재성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봤다.
피사로는 세잔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퐁투아즈로 초대했다. 퐁투아즈는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풍경 화가들을 위한 소재가 풍부한 곳이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돼 있던 세잔은 피사로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자신의 예민함과 까다로움을 모두 받아준 그에 대해 세잔은 이렇게 회고했다. “피사로는 내게 아버지와 같다. 거의 자비로운 신과 같다.”
‘자연을 주의 깊고 성실하게 관찰하라’라고 강조한 피사로는 세잔의 팔레트에서 어두운색을 제거하고, 3원색(빨강, 노랑, 파랑)과 이에 파생된 색 사용을 권장했고 그를 독려했다.
“우리의 친구 세잔은 우리의 기대를 높인다. 나는 괄목할 만한 활력과 힘이 느껴지는 그의 그림을 보아왔다. 바라건대, 그가 오베르에 얼마간 더 머물게 된다면, 그를 성급하게 비난했던 많은 예술가를 놀라게 할 것이다.”
세잔은 피사로의 옆에서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며 줄곧 작업했다.
1874년 파리의 관행적인 미술풍토에 대항하던 젊은 작가들이 모여 하나의 전시를 기획하였다. 제 1회 인상주의전이지요. 모네, 르느와르, 드가, 시슬레, 피사로 등이 참여했었는데 이런 모임에서도 세잔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마네의 경우는 세잔이 참여한다는 말에 자신의 작품을 철수했다고 한다. 세잔은 그런 일엔 신경도 안썼고 ‘목맨 사람의 집’, ‘풍경’, ‘모던올랭피아’ 등을 출품을 하였고 몇 점의 그림을 팔기도 하였다. 많은 비난 속에 끝난 전시였는데 오히려 세잔은 이 전시를 통해 자신감을 얻었고 전시 후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 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주변에 의해 좌우되지 않은 그의 성격이 자신만의 그림을 탄생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 전시에 참여했던 친구 에밀 졸라는 침묵했다. 인상주의자 편에서 미술평론을 써온 그는 세잔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졸라는 그의 차기 소설 ‘작품’에서 주인공인 클로드 랑티에를 성적으로 자신이 없으며 성격은 괴팍하고 결국 실패한 화가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인물로 묘사했는데, 세잔은 이를 자신이라고 받아들였다. 세잔은 오랜 시간 졸라와 나눈 비밀의 대화들이 우롱당한 것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고 그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다.
“친애하는 에밀에게. ‘작품’을 막 받았네. 친히 한 권을 보내주다니 정말 친절하군. ‘루공 마카르’ 총서의 저자분께 추억의 증표로 감사하다고 전해주게나. 또한, 과거를 생각해서 그에게 그의 손을 꼭 붙잡아도 좋은지 여쭤봐 주게나.” – 과거 속에 살고 있는 당신의 폴 세잔
40여 년 우정은 이렇게 끝이 났다. 세잔은 사람들과 더 멀어지고 그림 속으로 침잠했다. 마침 아버지로부터 많은 유산을 상속받은 세잔은 돈 걱정 없이 작품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 1894~1895 연작을 그린 게 바로 이 시기다. 세잔의 많은 정물화와 초상화가 이때 탄생했다.
그의 그림은 만국박람회에 전시됐고, 56세라는 늦은 나이에 첫 전시회도 열었다.
상징주의 화가 모리스 드니는 “평범한 사과는 먹고 싶지만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라며 ‘세잔에게 바치는 경의’라는 작품을 헌정했다.
고향 엑스로 돌아와 생트 빅투아르 산이 보이는 곳에 작업실을 만들고 그의 평생의 걸작이자 추상 미술의 길을 열어준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을 줄줄이 탄생시켰다.
“나는 자연에서 원통, 구, 원추를 봅니다. 적절히 배치된 사물의 면과 선은 구심점을 향해 움직입니다.”
세잔이 유명해지면서 그에 관한 책이 출간됐고, 그를 보기 위해 엑상프로방스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세잔은 이들의 방문이 기쁘긴 했지만, 인간관계가 서툰 그로서는 이들을 맞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잔은 사전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한 붓질은 한 획도 없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눈을 시원하게 하는 절묘한 색채감으로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색채의 마술사였다.” – 에밀 베르나르 ‘폴 세잔에 대한 회상’
1906년 그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 소나기를 흠뻑 맞아 폐렴에 걸려 사망한다.
세잔의 초기 – 파리, 1861~1870, 어둠의 시기
세잔의 초기는 들라크루아와 쿠르베의 영향아래 주로 어두운 그림을 그렸다.
1863년, 나폴레옹 3세는 Salon des Refusés라는 법령을 만들어 Académie des Beaux-Artswere에 전시되어야 하는 작품들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작품 전시가 거부된 작가들 중에는 당시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던 어린 인상파 화가들도 있었다. 세잔은 그들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사회적인 관계는 좋지 않았다(세잔은 불손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들은 어두운 색깔의 사용과 검은색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1859년 Aix-en-Provence에 있는 École Spéciale de dessin에서 그리던 수채화들과 스케치들과는 크게 대조된다. 표현의 격렬함 또한 그의 전 작품들과 크게 대비되었다. 1866~1867년에, Courbet의 예시에서 영감을 얻은 세잔은 palette knife를 이용하여 작품 몇 개를 그렸다.
세잔은 대부분이 인물화인 이 작품들을 두고 une couillarde(“비싼 에너지를 나타내기 위한 거친 단어”)라고 불렀다. Lawrence Gowing은 세잔의 palette knife 작품들을 두고 “이것은 현대 표현주의의 발명이기도 했지만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으로서 활용되는 예술의 첫 등장이기도 하다.”라고 평가했다.
Couillarde 작품들 중에서는 세잔의 삼촌이었던 Dominique의 인물화를 통해 “단편적인 인상으로 정의 될 수 있는” 스타일을 발견하였다. 어둠의 시기 후기의 작품들 중에는 ‘Women Dressing’(c.1867), ‘The Rape’(c.1867), 그리고 ‘The Murder’(c.1867–68) 등 폭력적이거나 에로틱한 작품들도 있다.
인상파 시기 – 파리와 프로방스, 1870~1878
1872년 피사로와 교분이 생기면서 피사로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당대의 예술언어에 접근했다고 느끼게 되었다. “삼원색이나 거기서 조금 벗어난 색만 사용해라, 윤곽선도 쓰지 말라했고 윤곽은 색의 조절로 나타내라.”
1870년 7월 보불전쟁이 발발하고 세잔과 그의 부인이던 Marie-Hortense Fiquet는 파리를 떠나 마르세유 근처에 있는 L’Estague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잔의 작품 테마는 대부분이 풍경화로 변하였다.
1871년 1월에 세잔은 병역 기피자로 낙인 찍혔지만 그 다음 달인 2월에 전쟁이 끝나면서 세잔과 그의 부인은 1871년 여름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1872년 1월, 그들의 아들인 Paul이 출생하였고 그들은 파리 근처에 있는 Auversin Val-d’Oise로 이사를 갔다. 세잔의 어머니는 가정사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지만 세잔은 아버지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세잔은 아버지로부터 100프랑 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카미유 피사로는 당시 Pontoise에 살고 있었다. Auvers와 Pontoise에서 세잔과 그는 함께 풍경화를 그렸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세잔은 피사로의 제자로 소개했으며, 그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며 “우리는 모두 피사로의 가지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사로의 영향 아래 세잔은 어두운 색을 탈피하여 그의 캔버스는 한층 더 밝아졌다.
마르세유 지방에 Hortense를 벗어나 세잔은 파리와 프로방스 사이로 이사하여 그의 첫 개인전시회(1874)와 인상파 전시회(1877)을 열었다. 1875년, 그는 Victor Chocquet의 관심을 끌어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비평가 Louis Leroy는 세잔이 그린 Chocquet의 초상화를 보고 “이 이상한 머리와 오래된 부츠를 보고 임신한 여자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황달에 걸릴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878년 3월, 세잔의 아버지는 Hortense에 있는 것을 알아내고는 세잔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그 해 9월에 세잔의 가족을 위해서 400프랑을 주었다. 1880년대 초반에 세잔을 위해 Louis-Auguste가 스튜디오(Jas de Bouffan)를 지어주기 전까지 파리와 프로방스 지방을 계속 돌아다녔다. 이 스튜디오는 윗 층에 있었는데 매우 큰 창문이 있어서 처마 사이로 불빛이 들어왔다. 이 형태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세잔은 L’Estaque에 정착하였다. 1882년 그는 르누아르와 함께 작업을 하였고 1883년에는 르누아르와 모네를 방문하였다.
성숙기 – 엑상프로방스, 1878~1890
1880년대 초반 세잔의 가족이 프로방스 지방에 정착한 후 얼마 동안 체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지역에서 계속 살았다. 이 이동은 파리 중심적이던 인상파들이 세잔의 고향이 있는 남쪽으로 중심을 옮기는 역할을 하였다. Hortense의 형제 중에 Estaque에 Montagne Sainte-Victoire가 보이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1880~1883년 사이에 산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들과 1885~1888년 Gardanne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종종 ‘건설기’(The Constructive Period)라고 불리기도 한다.
1886년에는 세잔의 가족들에게 터닝포인트가 되는 해였다. 세잔은 Hortense와 결혼하였다.
이 해에, 또한 세잔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잔에게 1859년에 산 사유지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 47세였다. 1888년에 가족은 편리를 제공하는 넓은 땅이 있는 대저택 Jas de Bouffan으로 옮겼다. 이 저택은 현재 땅이 줄어들었지만 시 소유로 공공을 위해서 개방되어 있다.
또한 이 해에 세잔의 친구이던 에밀 졸라와의 친분도 깨어졌다.
마지막 시기 – 엑상프로방스, 1890~1905
실존주의와 현상학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프랑스인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스타일적인 접근법과 화법을 분석하여 에세이로 남겼다.
1945년 “세잔의 의심”(Cézanne’s Doubt)이라는 에세이에서 세잔이 눈에 비친 상에서 살아있는 지각을 얻기 위해 전통적인 미술의 기법(상의 정렬, 색을 구분하는 바깥 테두리, 단일 관점 등)들을 어떻게 포기했는지 서술했다.
[그는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보고 느끼고 싶어 했다. 궁극적으로, 그는 보는 것이 곧 만지는 것이 되는 경지를 추구했다. 그는 붓으로 한 획을 긋고 몇 시간을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유는 한 획, 한 획마다 “공기와, 빛과, 물체와, 구성과, 테두리, 그리고 스타일”을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세잔은 100여개의 작품을 한꺼번에 작업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세잔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이미 지나가버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잡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환경은 그림을 그리는 현실의 일부분이 되었다.]
세잔은 이렇게 말했다. “미술은 개인적인 통각이며, 자신이 이해한 것을 그림에 구성하여 그려 넣을 수 있어야 한다.”
– 위대한 종합 : 세잔은 드로잉이 회화의 기초라 믿었고 이것을 인상주의의 외광효과와 결합시키려 했다. 그리스의 조각처럼 견고하면서 바로크의 회화처럼 색채의 화려함을 가진 회화를 만들어내고 싶어 했다.
“나는 인상주의로 부터 박물관에 있는 미술처럼 뭔가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산의 풍경, 목욕하는 사람들, 사과가 있는 정물, 주변의 인물초상들을 주로 그렸다. 하나의 모티브를 잡으면 수없이 반복해서 그렸는데 조금만 자리를 바꿔도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자연의 걸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무한한 다양성’이라고 대답한다.
인상주의화가들도 하나의 모티브를 반복적으로 그렸는데 인상주의자들은 계절, 시간,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효과를 포착하기 위해서였고 사물에 고유색이란 없다고 보았다. 이와 비교하면 세잔은 자연의 표면이 아니라 그것의 깊숙한 본질에 접근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모델들을 한자리에 수없이 앉히곤 했다. 가장 큰 희생자는 부인 마리 오르탕스 피케였다. 26점의 부인 초상화를 남겼는데 그때마다 몸을 못 움직이고 수십 번을 앉아있어야 했다.
“이런 빌어먹을! 당신이 포즈를 망쳤어요. 제발 사과처럼 앉아있으라고요. 또 얘기해야겠어요? 사과가 어디 움직이던가요?” 세잔이 화상 볼라르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고 한다.
– 감각을 실현하라 : 세잔의 위대함은 미술을 시각적인 것에서 촉각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데에 있다. 선, 원근법에 기초한 르네상스화화부터 빛의 효과에 기초한 인상주의회화까지 모두 광학적 성격의 예술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지각이 시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주위환경을 우리는 몸 전체로 지각한다. 이렇게 신체로 체험하는 원근법에는 하나의 장면안에 다수의 시점이 애매모호하게 결합한다. 이런 촉각적인 공간을 화면속에 표현하기를 노력했는데 이것은 500년 이상 지속된 고전미술의 가장 중요한 원근법을 파괴한 것이다.
1906년 아들에게 보낸 편지내용에 “눈이 점점 더 날카로워 지고 있지만 아직 느낀 것을 실현하는 데에 항상 어려움을 겪고 있어.” “감각들 앞에 전개되는 저 강렬함에 도달할 수가 없어.” 볼라르와의 대화에선 “나는 자연의 존재 속에 있을때 정신이 맑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 감각의 실현은 내 안에서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내 감각들 위에서 고동치는 저 강렬함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거든요. 저는 자연을 생동적으로 만들어주는 저 색채의 놀라운 색채의 풍부함을 아직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체험된 원근법 : 사실 원근법적으로 재현한 것과 자연적 감각으로 본 세계는 차이가 많다. 원근법적 재현은 한눈으로 본 것을 고정된 시점에서 평면위에 투사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평면이 아닌 구면으로 되어있는 두개의 눈으로 안구를 움직이며 시점을 바꿔가며 스캔을 하듯이 본다.
세잔은 아무도 의심치 않았던 이런 지각의 관습을 의심했고 체험된 원근법으로 보고 표현했다.
– 감각의 실현 : 500년 전통의 관습을 깬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세잔은 자신을 두뇌없는 동물이라 불렀다. 진정한 회화는 문명에서 배운 모든 것을 머리에서 지우는 데서 출발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예술가의 의도, 편견의 목소리들을 침묵시켜야 한다. 그러면 풍경전체가 그의 존재의 예민한 판위에 새겨질 것이다.’ 이것이 세잔의 감각의 실현이고 이렇게 감각이 실현될 때 자연과 예술은 나눌 수 없는 하나가 된다. 이것이 세잔이 그 많은 회의를 겪으며 도달하려고 한 목표였다.
인상주의는 스펙트럼의 7색을 주로 사용했고 신인상주의는 그것을 삼원색으로 환원시켰고 세잔은 6가지 빨강, 5가지 노랑, 3가지 파랑, 3개의 녹색, 그리고 검정 등 18가지 색일 사용했다. 명암으로 촉각적 실체감을 주기위해 검정을 쓴 것이 인상주의 신인상주의와 다른 특징이다.
– 마지막 고전주의자, 최초의 현대주의자 : 세잔 작품들의 색채의 풍부함과 기하학적인 단순한 형태, 그리고 체험된 원근법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초석이 된다.
세잔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을 때 피카소는 세잔의 작품 ‘목욕하는 사람들’을 보고 곧바로 모티프를 가져와 20세기 최고의 걸작이라 불리는 ‘아비뇽의 여인들’을 그렸다. 피카소는 그에게서 형태의 기하학적 단순화와 고전적 원근법의 파괴를 배웠고 세잔을 자신의 유일한 스승이라 칭했다.
마티즈는 세잔에게서 색채의 효과를 배웠으며 그를 회화의 신이라 불렀다.
세잔은 다양한 색채를 실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색채의 해방을 이끌었다. 이는 색채 중심인 야수파에 영향을 끼쳤고, 원근과 시점 파괴는 큐비즘을 탄생시켰다. 더 나아가 그가 말년에 그린 작품들은 추상의 형태를 띠었고, 이는 추상 미술의 선구자인 피카소, 브라크, 몬드리안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그는 20세기 현대 미술의 아버지가 됐다.
예술가들의 성공의 네 가지 요소
첫째, 열정 좋아하는 일을 해야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열정과 재능은 관련성이 높다. 잘하는 일을 하면 좋아하게 되고, 좋아해서 자꾸 하면 잘하게 된다. 열정과 능력이 있어도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에 의해 어느 수준 이상 작품성이 올라가야 한다. 축적은 처음에는 수준이 늘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급격히 증가하는 그래프를 그리기 때문에 경험곡선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축적의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모짜르트나 피카소 같은 젊은 천재들은 매우 짧고, 늙은 대가인 세잔은 아주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축적이 되어 높은 수준에 도달해도 성공을 위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 바로 시대적, 사회적 여건이 그 예술가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년 7월 10일~1903년 11월 13일)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 피사로는 쿠바에 가까운 생 토마섬(지금의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며, 12세 때에 파리로 나가 도화(圖畵)를 익힌 다음 회화에 뜻을 두고 1855년에 재차 동경하던 파리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코로와 도비니(Charles-François Daubigny)의 풍경화에 매력을 느꼈고 연구소에서 모네와 세잔을 알게 되며 그 후에도 야외에 나가 햇볕 아래에서 풍경 그리기에 열중한다. 그는 루브센에 주거를 두고, 보불전쟁이 시작되자 전화(戰禍)를 피하여 런던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금 모네를 만난다. 두 사람은 런던에서 터너를 만나서 빛의 표현에 대한 지도를 받고 인상파의 표현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전후 귀국해 보니 그의 집은 전화로 황폐되어 있었다. 피사로는 얼마 동안 퐁토아스에 살며 거기서 세잔을 만나 그를 인상파로 끌어들였다. 거기에서 1874년에 친구들과 더불어 인상파 전람회를 결성했다. 피사로는 인상파전(印象派展)의 중심인물이 되어 그의 생애는 인상파적인 그림 제작으로 일관했다. 만년에는 루앵 항구나 파리의 오페라가(街) 등의 풍경을 그렸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장으로써 최선을 다했던 그는 모범적이고 소박한 생활을 하며 그림도 그의 삶처럼 평범한 풍경만을 그려내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거짓 없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의 작품들 중 대표작으로 불리는 ‘빨래 너는 여인’은 보고만 있어도 평온하고 부드러우며 따뜻한 느낌까지 들게 합니다.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그만의 기법으로 색을 입혔고, 섞지 않은 색 본연 그대로 하나하나가 합쳐져 조화를 이루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항상 성실한 자세로 작품활동을 했던 화가로도 유명했고, 그의 다섯 아들 모두 그의 뒤를 이어 화가가 되었습니다.
2. 폴 고갱(Paul Gauguin)
폴 고갱(Paul Gauguin, 1848년 6월 7일~1903년 5월 8일)은 프랑스의 후기인상주의화가이다. 파리에서 태어났다. 생전에는 그리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채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생의 마지막 10여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생활하며 작업하였고 이 시기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갱 사후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두 번의 유작전을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그제서야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갱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저술 등의 다방면에서 작품을 남겼다.
고갱의 화풍은 클루아조니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들의 주제는 원시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고갱은 유럽적인 삶과 예술에 대한 총체적 불만 속에서 보다 단순하고 솔직한 어떤 것을 열망했고, 그것을 미개인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다.
고갱은 1848년 파리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당시의 파리는 2월 혁명을 겪으면서 혼란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혁명을 지지하던 신문기자였던 폴 고갱의 아버지는 혁명이 실패할 것으로 예측되자 가족들과 페루로 망명을 갑니다.
그러나, 망명 길에서 아버지가 사망하고, 페루에 도착한 사람은 엄마와 고갱의 누이, 그리고 고갱 뿐이었다. 이 후 다행히 외삼촌의 도움으로 페루에서의 고갱의 인생은 아주 윤택했다. 또한, 어찌보면 파리에 비해 비교적 덜 문명화된 페루에서의 삶은 고갱의 화가인생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54년 말, 고갱의 어머니는 고갱과 그의 누이를 잠잠해진 파리로 돌아가, 고갱은 파리에서 정규교육을 받았다.
1865년, 해군이 되고 싶어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하지만 1년 유급을 당했던 일로 고갱은 나이 제한에 걸려서 입학거부를 당한다.
해군사관학교 대신, 상선대 사관후보생으로 입학해서 선원이 될 수는 있었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한 고갱은 결국 1868년, 원하던 해군에 입대한다.
해군이 되기 1년 전, 1867년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보불전쟁을 일으키고 대 패배를 하게 된 프랑스,,,
전역을 한 고갱은 일자리도 잃고 불에 다 타버려서 폐허가 된 자신의 집을 마주하여 절망에 빠졌다. 그래도 그때 어머니와 인연이 있던 고갱의 후견인, 귀스타브 아로사가 고갱을 주식 중개업에 취직시켜 주었고 그는 유능한 증권맨으로써 회사에서 자리를 잘 잡았다. 뿐만 아니라 1873년, 고갱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삶이 안정적이 되자, 고갱은 취미생활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그림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인상주의 작품들을 좋아했던 고갱은 인상주의 작품들을 수집하며 자연스럽게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그림을 수집하며 고갱은 자신의 작품을 그리고 싶은 열망을 품게 됩니다.
그리하여, 1874년 고갱은 피사로에게 미술 수업을 받게 됩니다. 이를 통해 화가의 삶이 시작되었다. 고갱은 화가 초창기부터 주목을 받아 고갱이 가장 존경했던 마네에게서 칭찬을 받았고, 우연히 지원하게 된 살롱전에 입선하여 살롱전에 전시를 하게 된다.
살롱전에 출품했던 작품, 파리의 센느강(The Seine In Paris), 1875
1879년에는 인상주의전에 초청까지 받으며 승승장구하게 되니, 고갱은 전업을 화가로 바꿀까 고민을 한다.
그러던 중, 1882년, 프랑스의 주식시장이 붕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18893년 고갱은 직업을 잃게 되고, 전업화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부인은 극구 말리지만 고갱은 다 무시하고 혼자 덴마크로 떠나 고갱이 전업화가가 되면서 모든 불행은 시작되었다.
덴마크로 떠난 지 2년 만에 고갱은 모든 돈을 다 날리고 우울함에 찌들어 살아간다.
당시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용기와 돈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다락방에 올라가 목을 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매일 엄습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우울한 삶을 살았지만 그 와중에도 미술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간신히 인상주의전을 통해 그림을 팔며 연명했지만 고갱은 금전적 문제로 쫓기듯이 퐁타방(Pont-Aven)이라는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고갱은 퐁타방과 이후 들린 마르티니크 섬에서 열대의 색들과 자연의 색깔들을 접했고, 원주민들의 이국적인 삶의 모습을 보며 추상화와 단순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술에 철학을 배제하고, 과학적으로만 접근하는 인상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그림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인상주의 기법들을 다 없애버립니다.
망고따기(Mango Pickers), 1887
당시 그렸던 작품은 ‘망고따기’(Mango Pickers, 1887)입니다(이 작품은 반 고흐가 굉장히 좋아했던 작품이라고 한다).
화풍이 완전히 바뀐 고갱의 작품들은 화제가 되었고, 괜찮은 가격에 팔리게 됩니다.
구매자는 바로, 반 고흐의 동생 테오. (불행의 시작2)
그 무렵, 퐁타방에서는 고갱을 추종하는 젊은 화가들이 생겨났는데, 이를 나비파(Nabis; 히브리어로 예언자라는 뜻) 이들은 고갱의 화풍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이후, 이들은 아르누보의 발전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금전적으로는 풍요롭지 않았던 고갱은 이 때에, 테오에게 반 고흐가 만들려고 했던 공동체에 관한 편지를 받게 되고, 고갱은 고흐가 있는 아를로 떠납니다.
고갱은 2개월 만에 둘의 관계는 파경에 이르렀고 결국 고갱은 파리로 도망쳤다.
이 당시, 모네와 고흐뿐만 아니라 고갱 또한 일본미술의 영향을 받았는데, 고갱의 그림은 특히 추상적인 선과 단순한 색채가 절정에 이른다.
황색 그리스도(Yellow Christ), 1889
이쯤 되면, 초기의 인상주의 영향을 받았던 고갱의 화풍은 전혀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갱은 상상과 기억 속의 이미지를 신비롭고 초자연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작업을 했다(원급법을 아예 무시해버렸습니다).
1889년에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는 고갱에게 일본미술 뿐만 아니라 타히티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는 타히티를 문명이 닿지 않은 원초적인 땅이라고 생각하여 얼마 남지 않은 전 재산을 다 털어서 타히티로 떠난다.
언제 결혼하니?(When Are You Getting Married?), 1892
타히티에서의 작품 ‘언제 결혼하니?’(When Are You Getting Married?, 1892)들의 제목들은 의문문이거나 서술적이었다. 이는 당시 문학에서 유행했던 상징주의가 회화에서도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런 식의 제목을 쓴 것으로 보여진다.
타이티에서 총 2년을 머물며 그린 그의 그림들은 파리로 돌아와 전시를 했는데 그림이 너무도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년 동안 열심히 그린 그림들이 야만적이라는 말을 듣고 상처를 받은 고갱은 그 후 타히티로 다시 돌아가 죽을 때까지 고독하게 그림만 그렸다.
안그래도 가난하고 고독한데 어머니와 똑같은 이름을 붙일 정도로 사랑했던 그의 딸 알린이 이 무렵 20대의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죽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고갱의 대작이 탄생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Where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Where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는 1.4m x 4m의 대작으로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철학적인 작품으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고갱의 말에 의하면, 오른쪽에서부터 그림을 감상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태어나고 죽기까지의 과정이 보인다고 합니다.
아기는 탄생, 열매를 따고 있는 남자는 한창 잘 나갈 때의 모습, 마지막 갈색피부의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작품의 해석에 대해서는 아주 해석이 다양하고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갱은 이 작품에 대해 특별히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곳에 본질이 있다고 설명했답니다.
고갱의 추상적인 그림의 화풍과 상징주의적인 경향은 후대의 현대미술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칩니다.
고갱과 반 고흐
고갱이 지금과 같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화가가 된 것은 그의 그림이 매우 뛰어나다는 사실 외에도, 반 고흐의 명성에 따른 반사이익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반 고흐가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지방 ‘아를’로 내려왔을 때 고갱은 반 고흐가 가장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반 고흐는 고갱을 화가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고갱은 반 고흐도 화가 공동체도 원치 않았지만 반 고흐의 동생인 테오가 고갱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면서 결국 반 고흐와 함께 지내기를 수락했다(반 고흐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고갱이 자신의 초대에 응한 것으로만 알고 고갱이 아를로 온다는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888년 10월부터 그해 12월까지 고갱과 반 고흐는 약 2달간 같이 생활하며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림에 대한 견해 차이로 점점 다투는 일이 잦아졌고 급기야 반 고흐가 고갱과 다툰 후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됨으로써 고갱과 반 고흐는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화를 남기는 장본인이 되었다.
화가가 된 증권맨
그러나 화가가 되기 전에 고갱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런 비극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고갱은 전직 증권 브로커로 업무에 뛰어났고 상당한 사회적, 재정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화가로 본격적으로 전업하기 전 그는 미술과 관련하여서는 취미삼아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로 지금의 인상파 화가들로 불리는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는 후원자이자 수집가이기도 했다.
인간적인 면에서의 고갱은 계산에 밝고 냉철한 판단의 소유자였다. 고갱이 본래 직업을 버리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도 자신이 화가가 되는 것이 성공할 확률이 아주 높을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고갱을 모델로 한 서머셋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에서는 주인공이 순수한 예술 혼에 불타는 인물로 묘사되었으나 이는 실제 고갱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에 반해 반 고흐는 계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화가가 되기 전 목사가 되고자 한 사람이었다. 정식 목사 안수는 받지 못했지만 전도사의 신분으로 한 선교단체의 파송을 받아 벨기에의 보리나주 광산이라는 곳에서 선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곳에서 선교하는 동안 반 고흐는 자신의 최소한의 건강조차 돌보지 않은 채 가진 음식과 입을 것 모두를 광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반 고흐의 타인을 위하는 순수함이 결벽증처럼 지나친 정도였던 것에 비해, 고갱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고갱이 35세에 정식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처자식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으며 후에 어린 여자들과의 여러 관계 속에서도 책임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반 고흐가 불같이 뜨거운 사람이라면 고갱은 얼음같이 차가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토피아를 찾아서 타히티로 가다
고갱은 화가가 된 이후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그 정도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으며 애초부터 그보다 큰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대작을 내놓아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자 했다. 하지만 초기에는 생각만큼 대단한 작품을 내놓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조르주 쇠라’라는 화가가 ‘점묘법’이라는 독특한 화풍으로 미술계에 반향을 일으키자 쇠라의 점을 가리켜 저주받은 점들이라 비난했다.
1891년 고갱은 유럽을 벗어나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제공할 이상향으로 남태평양의 고도 타히티 행을 결정한다. 2개월 동안의 항해 끝에 도착한 타히티에서 그는 문명에 물들지 않은 원시적인 삶과 마주할 것을 기대하였으나 예상과는 달리 이미 그곳은 고갱이 상상하던 그런 낙원이 아니었다. 타히티에 정착한 첫 해 그려진 ‘타히티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을 보면 그림 속 여인 중 핑크색 옷을 입은 여인은 이미 당시 유럽인들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문명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곳에서 고갱이 마주한 것은 열강에 의해 자행된 무계획적인 식민지 문화로, 천박하고 기이하기까지 한 유럽의 모방이었다.
고갱은 깊이 실망했으며 경제적인 어려움과 맞물려 약 2년간의 체류 후 다시 파리행을 택하게 된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새로울 것이 없다는 듯 냉담했고 그림 제목으로 타히티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도 유치하다고 비꼬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나오 투파파우(Manao Tupapau – 죽은 자의 영혼이 지켜보다)
오늘의 작품 역시 고갱이 타히티에 머무를 때 완성한 것으로 ‘마나오 투파파우’라는 타히티어 제목이 붙여져 있다. ‘투파파우’는 타히티의 전설 속 죽었으나 잠들지 못하여 밤만 되면 나타나는 귀신같은 존재로 ‘마나오 투파파우’는 우리말로 ‘죽은 자의 영혼이 지켜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 속에서 침대에 엎드려 누워있는 여성은 43살 고갱의 현지 처였던 14살 원주민 여성 ‘테후라’를 모델로 한 것이다. 고갱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느 날 그가 외출을 나갔다가 한밤중에야 집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테후라가 벌거벗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었고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는 것이다. 이처럼 실제로는 어둠 속에 갑자기 나타난 고갱의 모습에 테후라가 놀란 상황이었으나 고갱은 귀신 투파파우에 대한 테후라의 두려움으로 대체함으로써 죽음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고갱은 이 그림을 아주 만족해했고 이를 배경으로 자신의 자화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마나오 투파파우’에 대해 고갱은 다른 자리에서 전혀 다른 말을 하였는데 그녀가 어쩌면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며) 성교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가 음란하고 수치심을 모른다며 불과 14살에 불과한 소녀를 욕보였다. 그림 속 여성 테후라의 ‘성’은 이렇게 고갱의 시선으로 제멋대로 해석되었다.
미술사가인 ‘그리젤다 폴록’은 그의 저서 ‘고갱이 타히티로 간 숨은 이유’에서 이 그림에 나타난 고갱의 환상을 지적하였다. 고갱은 타히티를 원초적인 본능이 살아 숨쉬는 ‘원시적 에덴동산’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 곳의 여인들 또한 때 묻지 않은 원시적 관능미를 가진 여자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은 식민지 유색인 여성에 대한 백인 남성들의 환상일 뿐이며, 그 환상으로 원주민의 처지를 바라보는 것은 ‘인식론적 폭력’임을 주장하였다.
어디에도 없는 곳, 유토피아
‘유토피아(utopia)’란 토머스 모어의 저서에서 등장한 용어로, ‘없다’와 ‘좋다’라는 뜻이 같이 들어 있는 ‘u’와 장소를 뜻하는 ‘topia’가 합쳐진 단어이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는 곳(no-place)이기도 하고 좋은 곳(good-place)이기도 한 이중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그의 야망을 실현시켜줄 유토피아를 찾았지만 그곳에 그가 꿈꾼 유토피아는 없었으며 결국 자신의 환상만을 좇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고갱의 인간적 한계와 결점과는 별도로 그가 미술사에 공헌한 점은 또 다른 면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고갱은 당시 인상파가 빛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내고자 한 것과 달리 자신의 감정에 따라 실제 자연의 색과는 다른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었는데 이는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갱의 이러한 기법은 타히티에서 마침내 완성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어마어마한 대작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시간이 흘러 고갱의 유토피아는 결국 이렇게 실현된 것이다.
3. 빈센트 반 고흐의 표현주의
홀랜드 시기
1881년에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와 아인트호벤 근처의 작은 마을 뉘넨에서 주로 정물이나 농민들의 삶을 기리면서 지냈다. 1881년-1885년 사이의 작품들에서는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여준다. 뉘넨시절의 고호는 램브란트와 밀레를 존경했다고 한다. 이 시기엔 다양한 갈색조, 회색조, 흑색조의 색채, 음영이 뚜렷한 회화 기법의 특유의 스타일이 만들어진다. 눈에 그대로 보이는 거친 붓자국이 있는 진하게 칠한 채색 기법과 더욱 강렬한 전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세부적인 묘사를 생략하는 것을 배웠다. 반 고흐는 언급할만한 가치를 지닌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경탄했던 옛 화가들의 그림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그 중의 몇 개의 작품들을 모사함으로써 미술에 대한 지식과 재주를 독학으로 익혔다.
내용적으로 고흐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주제, 즉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를 다루었다. 반 고흐는 ‘홀랜드 시기’에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 그들의 가난한 오두막, 수공업자들을 그렸다. 정물화에서는 특이하게도 감자가 자주 발견된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그림에 진실될 것과 분위기, 감정 혹은 생각을 전달할 것을 요구했다.
이 시기에 제작된 가장 야심차고 유명한 1885년에 그려진 ‘감자먹는 사람들’이다. 그 그림에서는 소박한 식사를 하는 농부 가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반 고흐는 그 그림으로 시골 사람들이 땅과 맺고 있는 상태와 가혹한 삶을 묘사하고자 했다. 그는 이 그림에 상당한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는 사람들을 집단으로 묘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빠듯한 생활비에도 불구하고 모델들을 고용했고, 여러 장의 습작을 그렸다. ‘감자먹는 사람들’ 이후로 반 고흐는 더 이상 여러 인물들이 배치된 작품을 그리지 않았다. 이 그림에서 고흐 후기의 화려한 색채는 보이지 않지만 인물의 형태는 이미 표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이는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느끼는 대로 그린 것,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인상 impression이라기 보다 안에서 밖으로 나간 expression에 가깝다.
발전의 시기 – 안트베르펜과 파리 시장
그림이 전혀 팔리지 않자 색채없는 그림은 인기없다는 동생의 말에, 자신이 뒤떨어졌다고 느끼고는 1885년 안트베르펜으로 이주를 한다. 거기에 사는 동안 색채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카민레드와 코발트블루, 에메랄드 그림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안트베르펜에 머무는 동안 예술 아카데미에서 그림공부를 했는데 그리는 방식이 너무 거칠고 야성적이라 선생들과 갈등이 커져 학교를 포기하고 1886년 파리로 이주한다. 1886-1888년에 걸친 파리 체류기간 동안 인상주의 화가들 피사로, 쇠라, 시냐크, 에밀베르나르 폴 고갱 등을 만나고, 그 이후, 화면은 네덜란드에서 보다 좀 더 밝고 순수한 색채를 사용했고, 가는 선으로 그은 듯한, 점 모양의 특징을 지닌 붓놀림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그는 인상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 한 가지 크게 영향을 준 것은 일본 판화이었다. 1853년 일본이 국경을 개방한 후 몇 년 동안 판화를 찍은 종이가 유럽으로 전해졌다. 많은 유럽의 미술가들이 새로운 일본미술에 열광을 했고, 반 고흐도 매혹되었다. 그는 일본 채색 판화를 모으기 시작했고, 몇 개의 소재를 유화 작품으로 옮겨 제작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는 ‘일본적’ 형상이 나타났다.
1887년 파리의 근교 아니에르로 이주를 하고 거기서 시냐크를 만나 점묘법이나 보색대비와 같은 신인상주의 기법을 받아들인다.
아를(Arles) 시대
1888년파리 시절에 이론적으로 발전시켰지만 파리에서 염증을 느끼고 아를로 이주한다. 그 곳 아를에서 반 고흐의 전형적인 화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흐는 편지에서 아를로 이주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붉은색과 초록색, 푸른색과 오렌지색, 짙은 노랑색과 보라색의 아름다운 대조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야.” 실제로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전체적인 효과에서 상호상승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보색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나란히 사용했던 순수하고, 강력한 색채로 그림을 그렸다. 각각의 그림을 위해서 자신만의 색채 체계를 만들고 적용했다. 반 고흐의 그림에서는 초록색 하늘, 분홍색 구름, 짙은 청색의 길이 있다. 그 자신도 그것에 대해서 적고 있다.
눈부신 색과 강렬한 대조에도 불구하고 고흐의 그림은 결코 야하거나 벽보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머지 색을 약화시키거나 결합시키는 중간 색조를 사용함으로써 조화로운 전체 효과를 만들어낸다.
고흐는 재빠르게, 즉흥적으로 그리고 나중에 커다랗게 수정을 하지 않은 채로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그의 그림에 더 많은 생기와 강렬함과 직접성을 부여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좀 더 커다란 전체 효과를 위해서 소재를 단순화했다. 비록 그가 재빠르게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충동적으로 그리거나 도취해서 그리지도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는 머릿속으로 그려보거나 여러 장의 스케치를 통해서 준비를 했다. “나는 색채의 위치를 정하는 것에 있어서 자연으로부터 일련의 순서와 정확성을 받아들였어. 나는 무의미한 짓을 하지 않고,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세세하게 관찰하지. 내가 사용한 색이 내 그림에서 훌륭한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것이 사물의 색과 동일한 색인지하는 문제는 더 이상 내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그는 늘 그리는 대상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기억이나 생각에 의해서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눈으로 본 것을 심하게 변형을 시키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연에 충실한 상태였고, 추상으로 통하는 경계선을 넘지는 않았다.
고흐는 물감을 희석하지 않은 채 걸죽하게 칠했으며, 가끔씩 물감을 튜브에서 직접 화폭에 바르기도 했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것을 인해서 그의 붓 자국이 입체적이면서 고흐 특유의 붓놀림을 만들어낸다. 매끄럽고, 윤곽선이 둘러쳐진 일본풍의 채색면 이외에도 반 고흐는 이미 파리 시절에 색을 짧은 선 모양으로 나란히 칠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자신의 그림을 좀 더 생생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형상화하기 위해서 그는 생 레미 시절에는 이런 선을 율동적으로 구성하고, 물결 모양, 원 모양, 나선형 모양으로 배열하기 시작했다. 1889년에 제작된 자화상이나 1889년에 그려진 ‘별이 빛나는 밤’이 그것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반 고흐는 각각의 화법을 소재와 연관지어서 선택했다. 짧고 굵은 스트로크로 화면을 채우는 고호의 기법은 신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신인상주의는 색의 분할로 화면에 원색들만 남게 되는데 후기로 갈수록 색 자체가 자기주장을 하면서 화면이 강한 표현성을 띤다. 고호에게도 색채는 그저 재현의 수단이 아니었다. 고호는 “색은 그 자체로 뭔가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고흐는 노랑을 좋아했는데 노랑이 진실의 상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그림에서 노랑은 태양과 신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이런 색의 상징주의는 현대미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흐의 작품속에는 다양한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오베르의 밀밭-고호가 느끼는 슬픔과 극도의 고독, 아를의 카페-그저 풍경이 아닌 격렬한 인간성의 격정, 실측백나무-죽음의 상징).
고흐는 회화를 가시적세계의 재현에서 비가시적인 감정이나 관념의 표현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가시적 세계의 재현을 거부하고 자연의 비가시적 본질로 침투함으로써 훗날 독일표현주의의 출범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반 고흐와 스케치
반 고흐는 유화만이 아니라 아주 훌륭하고 생산적인 소묘 화가였다. 소묘 작품은 초기에서부터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제작되었다. 1888년 여름 몇 주 동안은 값비싼 유화 물감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전적으로 소묘만을 그리기도 하였다.
고흐는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소묘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아야만 한다고 확신을 했다. 1880년, 선생이 없었기 때문에 교본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형상 묘사의 법칙을 소묘를 통해서 습득하기 시작했다. 홀란드 시대에 그는 무엇보다 평범한 농부와 풍경, 그 중에서도 그가 잠시 머물렀던 장소인 헤이그의 풍경을 표현했다. 그는 연필, 펜, 부분적으로는 백묵이나 흑연을 사용해서 대규모로 소묘 작품을 그렸다. 안톤 마우베가 1881년 말 고흐에게 수채화 기법을 알려준 이후로 그는 불투명한 그림 물감으로 채색한 그림을 완성했다. 파리 시절에는 유화에 비해서 소묘가 뒷전으로 물러났다. 1887년 이후부터 반 고흐는 다시 소묘를 점점 많이 그리게 되었다.
아를에서 그는 아를에서 자란 갈대로 직접 만든 펜을 즐겨 썼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표현 기술을 개발했다. 연필로 미리 그린 밑그림 위에 갈대펜을 사용해서 아주 다양한 선, 점, 곡선, 나선으로 소재가 표현되었다. 소묘는 유화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용되었거나, 그려진 그림의 소재를 소묘로 다시 완성하기도 했다.
이남순 강사
(AKATA 선임연구원, KWASS 자문위원, Concord Art Studio 개인레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