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5주년 기념 ‘여성특별모임’ 개최
기조강연으로 ‘시드니인문학교실 5주년 여성초청 특별모임에 즈음하여’ [강연 전문포함]
시드니인문학교실은 (The Humanitas Class For the Korean Community in Sydney)은 5주년을 맞아 지난 5월 16일(일) 오후 ‘여성특별모임’을 개최했다.
이날 모임은 기념촬영, 백문경 대표의 인사, 홍길복 목사의 강연 (시드니인문학교실 5주년 여성초청 특별모임에 즈음하여), 참석자의 자기소개, 회원의 노래 공연 (제임스 강) 만찬, ‘남성백서’ 낭독 (남성 대표로 최진, 김용강), 여성에게 선물 전달 (남성들이 전달), 여성들의 소감 및 우리가 바라는 것, 폐회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강연을 맡은 홍길복 교수는 이날 모임을 목적을 언급하며 “첫째는 감사의 마음과 미안한 심정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성들의 인문학 공부를 좀 더 격려하고 자극 하려는 데에 오늘 모임의 또다른 숨겨진 의도가 있습니다.”라며 이어 “‘세계사와 인문학의 역사는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어 보려는 사람들과 여전히 이 세상을 불평등한 채로 유지해 보려는 세력 간의 투쟁사입니다.’ 이것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물론 남성들의 각성과 열린 자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여성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아온 이런 잘못된 전통이나 관습과 대결하려는 의지와 자세가 아주,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모임을 마치며 관계자는 “물심으로 후원하고 순서를 담당해준 분들에게 감사했으며 특별히 초청에 응해준 여성분들이게 특별히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2017년 2월 ‘시드니인문학교실’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해 금년에 5주년을 맞았다. 2017년 2월 부터 2021년 5월까지 Lindfield 한글사랑 도서관 (김동숙 관장)에서 주강사 홍길복 교수는 총 30회 강연을 이끌었고, 특강으로 (고) 박정신 교수, 구미정 교수, (고) 한상대 교수, 주경식 교수, 김춘택 선생, 권기범 변호사, 정동철 변호사, 최진 선생, 이남순 선생, 김동숙 관장, 강기호 소장, 김삼오 박사, 양지연 박사 등의 특강으로 그간 56회 강연이 있었다.
특별행사로 인문학수련회 (2017년, 주제 ‘동과 서’, 1박 2일), 인문학여행 (2019년 그리스와 터기, 한국, 14박 15일), 매학기 종강모임 및 매해 송년모임 등을 진행해 왔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우리 시대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함께 그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하는 분들을 초청합니다. 2월부터 5월까지, 8월부터 11월까지 1년 8달, 매달 첫째와 셋째 목요일 저녁 7시부터 함께 자리(1년에 모두 16번 모임)합니다. 이 자리에 여러분을 초청합니다.”라고 했다.
다음은 시드니인문학교실 5주년 기념 ‘여성특별모임’의 기조강연 전문이다.
시드니인문학교실 5주년 여성초청 특별모임에 즈음하여 [기조강연 전문]
일요일 오후 가족이나 친한 사람들 끼리 같이 모여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갖을 수도 있는 시간일 텐데 부족한 저희들의 초청에 기꺼이 응해 주시고 함께 자리해 주신 여러분 한분 한분께 진심을 담아 감사를 드리며 거듭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이런 모임이 가능하도록 분에 넘치도록 물질적으로 크게 협력해주시고 늘 인문학교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백문경, 김용강, 최진, 계응준 선생님께는 그 성함을 불러 마음속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외 크고 작은 관심을 담아 선물과 꽃과 사진촬영을 통해 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들께도 고마운 말씀을 드립니다. 비록 작은 모임이지만 이런 행사 하나도 누군가의 헌신적 섬김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법인데 우리 교실을 위해 늘 정성을 다하여 섬겨오시는 주경식, 임운규님께서는 여러날 째 몸과 시간을 내어 이일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 집안일 같은 행사이지만, 그래도 이런 공식적인 자리를 빌려 기억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사회자께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 모임의 타이틀을 저희는 <시드니인문학교실 5주년 여성초청 특별 모임>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서예가 최진 선생님께서 정성스럽게 써서 보내주신 초청장에 응해 주신 여성분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조금 후에 각자 자기 소개의 시간이 있으리라고 봅니다만 함께 자리해 주신 여성분들의 성함을 신청해 주신 순서대로 한분씩 불러드림으로 예를 갖추고 또 저희 교실의 자료로 남겨 놓으려고 합니다. 정성미님, 이길남님, 김선희님, 김안나님, 김신영님, 김동숙님, 클라라님, 김마리아님, 박혜경님, 임현명님, 진영희님, 천옥영님, 천순자님, 최부옥님, 이순희님, 최혜순님, 전소현님, 양문자님, 이선아님, 한행숙님, 조혜옥님, 강지영님,- 여러분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와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주시면 저희 남자들이 일어나서 큰 박수로 환영하겠습니다.
저희들이 인문학 모임 5년 째를 기념하여 특별히 여성분들을 초청하여 식사 한끼라도 대접하고 작은 선물 하나와 장미꽃 한송이라도 드리자고 한 데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거창하게 강연이라 하셨습니다만 선후배 여성친구들을 모셔놓은 자리에서 남자인 제가 잘난척 하면서 거창하고 딱딱한 인문학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보다는 그냥 친구 같이 편안한 마음으로 몇 말씀 드리고져 합니다.
첫째는 감사의 마음과 미안한 심정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적 혹은 개별적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남성공동체 모두의 마음을 대표하는 뜻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남자들은 정서적으로 좀 무디기도 하고 표현력 훈련이 잘 않되어 있어서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나다’ 하는 짧고 진솔한 말 조차도 제대로 잘 못하는 작자들입니다. 용서해 주시고 저희들의 진심어린 감사와 미안한 마음을 접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침 이즈음, 저희 인문학교실에서는 현대실존주의 사상을 공부하는 중 ‘시몬 드 보브아르를 중심한 Feminism’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페미니즘’이라고 하는 말은 ‘여성주의’ 혹은 ‘여권주의’, ‘여남평등주의’라고 번역하는 여성의 권리 찿기에 대한 이론적, 학문적 및 사회-정치적 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요즘 일부에서는 ‘페미니즘이 너무 나간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 일부, 특정 지역이나 특정한 계층에서 할수 있는 말일지는 몰라도, 사실 지난날 인류가 걸어온 역사는 지구촌 어디를 불문하고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남자들은 여성들을 마치 하나의 물건 처럼 소유해 왔고 지배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Friedrich Engels가 쓴 The Origin of the Family, the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와 Judith Plaskow의 ‘릴리스의 탄생’을 중심하여 ‘역사상 마지막으로 남은 식민지는 여자’라는 시각에서 여성의 Civil Right, Political Right, 그리고 Social Right 같은 담론을 통하여 ‘여남평등’에 대한 이해와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인문학 공부의 목표로 삼아온 저희들은 여기에 이르러 깊이 자각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지금 까지의 인문학이란 거의 다 남자들이 주도해 왔고 남자들을 중심으로 한 남성의 시각에서 본 인간과 그 세계’였다는 사실입니다. 여자가 될 수도 없고 또 여자가 되어 보지도 못한 남자들이 여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신체를 바꾸어 볼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여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당신 여자 되봤어? 당신 애기 낳아봤어? 당신이 여자를 어떻게 알아?’ 마치 Having group이 Have–nothing group을 이해할 수 없듯이 남자들이란 백번, 천 번을 죽었다가 되살아나도 결코 여성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여자는 제외한 남자인간들>을 공부해 왔을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공부해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남자를 공부해 온 것입니다’ 이것이 이즈음 우리의 고백이며 우리 속에 있는 죄책감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그런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저희 남정내들에 대한 silent-supporter들인 여성 여러분들에 대한 감사의 자리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날 독단과 편견에 가득 찼던 인문학역사에 대한 참회를 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참 부끄럽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둘째는 여성들의 인문학 공부를 좀 더 격려하고 자극 하려는 데에 오늘 모임의 또다른 숨겨진 의도가 있습니다. 솔직하게 까놓고 말씀드리는 것을 저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성분들을 특별히 초청하는 이 자리는 시드니인문학교실을 여성분들에게 홍보하고 선전하여 좀 더 많은 분들이 이 모임에 join 하셔서 같이 공부하자고 말씀드리려는 데에도 그 뜻이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이렇듯 작은 대접이라도 받으신 여성분들은 약간의 심리적 부담감을 지니시길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한 사회의 남녀 성차별 문제는 법적, 제도적, 이성적, 합리적 판단으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법적-제도적-정치적으로는 양성평등이 보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한 사회나 공동체가 오랫동안 만들고 지키고 유지해 온 관행, 전통, 습관, 문화, 사회적 취향 같은 것이 한쪽으로 치우쳐져서 여남 불평등이 자리잡게 되면 그 집단과 공동체는 불평등한 사회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세계사와 인문학의 역사는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어 보려는 사람들과 여전히 이 세상을 불평등한 채로 유지해 보려는 세력 간의 투쟁사입니다.’ 이것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물론 남성들의 각성과 열린 자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여성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아온 이런 잘못된 전통이나 관습과 대결하려는 의지와 자세가 아주,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런 말조차도 남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봅니다만 ‘여성에 대한 최대의 적은 여성’이라든가 ‘페미니즘에 대한 제일 큰 반대자는 페미니스트’라는 말도 우리 스스로가 한번쯤은 안에서 새겨보아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의 사회 통계에 의하면 2015년 이후 한국사회는 여성인구가 남성인구를 앞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선호 사상은 무너지고 이미 여초시대에 들어섰습니다. 그 무렵부터 대학 진학율도 여학생의 숫자가 남학생들 보다 확연히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활동에서 남녀의 비율은 아직도 75:25로 여성들은 남자들에 비해서 4분지 1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여성의 평균임금은 남자의 68% 정도입니다. 초등학교 교사의 약 70%가 여성들인데 교감이나 교장 같은 행정적 책임자의 자리는 30% 미만입니다. 100인 이상의 기업체에서 부장급 이상의 여성은 14%, 남성이 86%입니다. 한국의 30대 대기업에서, 여성의 임원은 불과 3%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국 174개 4년제 대학의 여성 총장은 여자대학 총장 6명을 합해서 겨우 13명입니다. 깨트려야 할 유리 천정은 여전히 두껍기만 합니다. 시드니인문학교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인문학교실의 매월 정기 모임의 여성 참석율은 25% 미만입니다. 보통 약 20명에서 25명 정도가 참석하는데 여성은 6-7명 정도입니다. 한국사회의 통계이긴 합니다만 교회, 성당, 사찰 등 종교단체에는 여성의 참석율이 75%이상이고 남자는 25%미만이라는데 왜 인문학교실은 그 반대일까요? 왜 그럴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냥 당신이나 갔다와요!’ 같이 교회나 성당에 가자고 말하는 여성들에게 남자들이 던지는 이런 말이 왜 인문학교실에서는 여성들이 남자들에게 하는 말이 되는 걸까요? 정말 이런 상태가 이어진다면 여남평등의 세계는 요원하지 않을까요? 혹시 결혼한 이후 책읽기와는 담을 쌓고 있지는 않은가요? TV의 연예프로나 유투브나 카톡은 열심히 보면서도 1년 내내 책 한권도 않읽고 지나갈 때는 없는가요? 우리네 여성들도 이제는 Silent supporter에서 active engagement, positive involvement로 전향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2016년 후반기에 준비하여 2017년 2월부터 시작한 저희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여러 남성 인문학 친구들도 함께 하셨지만 첫해부터 김동숙님을 비롯하여 천옥영님, 강지영님, 김클라라님, 김마리아님, 공윤정님, 주은혜님, 윤지애님, 김수애님, 이성미님, 최혜순님 등등 여러 여성 인문학 친구들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시작할 때 함께 해 주신 분들을 저희는 잊지않고 기억합니다. 이분들은 늘 공부방을 정리, 준비하고 회비를 받고, 명찰을 만들어 달아 드리고, 다과를 차리고, 뒷처리까지 감당해 오셨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초창기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시드니인문학교실의 주춧돌을 놓아주신 여성 인문학 친구들입니다. 이제 부터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께서 그 뒤를 이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기에서 잠시 지난날을 되새겨 봅니다. 초창기 저희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주제를 설정한 후, 인문학의 목적, 방법론, <생각>과 <생각하는 것>의 차이, 생각에 대한 생각, 한국어에서의 ‘사람’의 의미, 동양에서의 인간 (人間) 이해, 서구에서의 Homo가 지닌 다양성으로 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우리는 긴 시간에 걸쳐 서양철학사를 중심한 다양한 인간공부의 역사를 살펴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밀레투스 학파의 탈레스와 아낙시메네스, 아낙시멘드로스로 부터 시작하여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제논을 지나 소피스트들 중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트라시마코스, 리시아스를 거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거물들을 지나, 디오게네스, 키케로, 세네카, 에피큐러스, 에피크테투스, 마아커스 아우렐리우스와 테리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로스켈리우스,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의 보카치오, 마키아벨리, 토마스 모어, 토마스 홉스, 몽테뉴, 에라스무스, 루터, 칼뱅을 지나, 데카르트, 데이비드 흄, 록스, 스피노자, 라이프니치, 몽테스키외, 룻소, 칸트, 피히테, 쉘링, 헤겔, 칼 마르크스, 막스 베버, 헨리 죠지, 소로, 니이체, 프로이트, 라캉, 키에르케고올, 하이덱거, 야스퍼스, 한나 아렌트, 시몬 드 보부아르에 이르기 까지 70여명의 철학자들, 인문학자들의 생각과 삶을 함께 나누어 왔습니다. 저희는 그 동안 모두 56회에 이르는 긴 인문학 여정을 통하여 300여권에 이르는 서책을 소개하고 소개 받아 왔으며, A4 종이로 500여 쪽에 이르는 글을 써오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작은 소그룹 모임을 비롯하여 전체 인문학교실 수련회도 했고, 또 그리스와 터키와 강진과 안동으로 인문학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별로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정신적으로 많이 황량한 우리 이민자의 땅에서 이렇듯 작은 독서모임을 이어온 저희는, 오늘 같은 날, 이미 지나간 시간은 뒤로 하고 앞으로를 위한 인문학적 자기 반성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가다듬습니다. 이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의해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이야말로 인문학적 방법론의 출발이요, 기초라고 보기에 저희는 이쯤해서 다시 한번 더 우리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지난날 우리의 목표와 방향은 정당하고 옳바렀던가? 우리의 공부는 방법론에서도 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동시에 과학적이면서 또한 상식의 바탕위에 굳게 서 왔던가? 혹시 우리는 전체적 균형감각을 상실함으로 숲과 나무를 함께 보는데 실패했던 적은 없었던가? 전체를 보면서도 디테일에 성실하고, 디테일에 충실하면서도 전체를 잘 보아왔던가? 우리는 과학적이 아니라 미신적이거나 종교적 신앙 같은 태도로 억지 논리를 펼쳐온 적은 없었던가? 혹시 논리 전개에 있어서 감정적으로 흥분하는 것이 마치 진리를 수호하는 것인 양 의기양양했던 적은 없었던가? 다양성과 타인에 대한 관용을 그렇게도 강조하면서 나 자신은 막상 타인의 생각을 무시하고 감정적으로 대해온 사람은 아니었던가? 나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질문하는데 익숙한 사람인가? 인문학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부정하라고 가르치는데 나는 마치 인문학도 종교적 신앙 중 하나인양 생각하여 ‘묻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교리식 태도로 ‘의심하고 질문하면’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이 생각해 온 적은 없었는가? 나는 옹졸한 심보를 지닌 비열한 지식인은 아닌가? 나는 확증편향성을 거부한다고 하면서도 그 어떤 편견이나 확증편향성에 빠져버린 사람은 아닌가? 나는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에 빠져 마치 사이비 종파에 빠진 사람처럼 어떤 특정한 유투브만 보고, 어떤 특정한 SNS나 댓글 달기에 빠져버린 사람은 아닌가? 우리는 흔히 우리 시대의 잘못된 종교나 부패한 정치나 언론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이면서도, 그 보다 훨씬 더 썩어가고 있는 부패한 인문학,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있는 정신문화계, 아니 ‘나’를 포함하는 인간 그 자체의 탐욕과 사악함에 대해서는 왜,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가? 다른 모든 인간 삶의 영역에 있어서와 꼭 마찬가지로, 우리 인문학이야 말로 사실은 쉬임없이 자기를 성찰하며 스스로를 살펴가며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그 기본이거늘 나는 이 기초공사가 전혀 않된 채 지금까지 조그마한 지식, 누구나 Google이나 Naver을 열기만 하면 다 알 수 있고 얻어들을 수 있는 정보들을 가지고 마치 나 혼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양 허세를 떨어 온 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 어떠한 논리나 이론이나 비판도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게 보이고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이해와 애정,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설득도, 정당성도 동시에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는가? 인문학의 주체는 언제나 ‘인간 자신’이요, 더 나아가서는 ‘나 자신’ 임을 한시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거늘 나는 이 진리의 핵심을 잃어버리거나 간과 할 때는 얼마나 많았던가? 나는 지난날의 내 인생과 내 생각에 대하여 거듭하여 철저하게 나 자신을 배신할 용기가 있는 사람인가? 나는 어제까지의 인간 역사와 내 생각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No라고, Nein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인가? 좀 긴 질문들이었지만 이런 물음들 앞에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다시 아프게 자신에게 묻고 또 물으면서 스스로를 반성합니다.
뜻있는 인문학자들로 부터 우리는 오늘날 타락한 인문학, 거짓말하는 인문학, 옹졸한 인문학, 그리고 빈곤해진 인문학을 향한 쓰라린 절규를 듣게 됩니다. 삼겹살 인문학, 치맥 인문학, 온갖 먹거리 인문학, 의상 인문학, 돈벌이 인문학 등등 별별 것들에다 다 인문학이란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이 타락한 인문학 시대 속에서 우리는 지난날에 대한 반성, 성찰, Reflection을 거듭하면서 또한 앞으로를 향한 숙제, 문제제기, 자신의 정체성 가다듬기를 위한 몸부림을 계속합니다. 저희는 이제 조금, 아주 조금 왔습니다. 가야 할 길은 아주 멀고도 멉니다. 그래도 이렇듯 마음을 함께 하며 이 인문학 여행길에 동행해 주시는 여러 인문학 친구들과 좋은 Enabler들이 계셔서 참 감사합니다. ‘낄끼빠빠’ –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쓰는 신조어라고 합니다. ‘낄데 끼고 빠질 때는 빠져라’ ‘나설 때는 나서고 물러설 때는 물럿거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생각 많이 하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낄 때가 되셨고 저는 이제 빠질 때가 가까워옵니다. 다시 한번 더 머리 숙여 충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우리 모두 언제 까지나 미완성으로 남게 될 이 인생길의 길동무들이 되어 주시고 오랫동안 함께 동행해 주십사 부탁드리면서 말씀을 매듭 짖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