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Desidero ergo sum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인간 이성에 대한 또 다른 도전자 프로이트와 라캉 이야기
되새김하기
원래 ‘되새김질, Ruminate’이란 소, 양, 염소 같은 반추동물들이 한번 먹었던 음식물을 위장에서 다시 입으로 올려와 되씹는 것을 말합니다만 사람의 경우에는 자신이 이미 배웠던 것을 다시 떠올린다는 뜻으로 ‘깊이 생각한다’ ‘심사숙고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꼰대의 걱정
나이든 제가 잊을 만 하면 다시 말문을 여는 화두는 우리 인문학교실의 목적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계속하는 데 있습니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자연과학과 그에 따른 여러가지 응용과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사회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태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神이란 무엇인가?’ 하는 종교적 질문은 인간들로 하여금 영원을 그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문학교실이 던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이 모든 질문의 주체인 인간 자신, 나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모든 질문의 핵심은 결국 인간 문제로 돌아온다는 것이 우리 교실의 잠정적 가설입니다. 정치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언론이 벌리는 행태를 보면서, 교회가 벌리는 추태를 보면서, 대학과 소위 학자라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를 보면서, 우리는 ‘정말 정치란 무엇이고 언론이란 무엇인가?’ ‘정말로 교회란 왜 필요하고 대학과 교수들은 이렇게 놔두어도 괜찮은가?’를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가 마지막으로 부딪치는 질문은 ‘참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데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일반적 이해나 객관적 지식의 습득에서 끝나질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질문은 언제나 ‘나’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나란 존재는 누구인가?’ 자아 발견, 자아 성찰, 자아 극복이 우리의 최종 목표입니다. 우리가 인간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남 이야기 하듯 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은 다 내 이야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미 읽었던 스토리이지만 다시 고전으로 돌아갑니다. 소크라테스의 충고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앞선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하나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다시 반추하게 됩니다. ‘오이디푸스’ 스토리부터 생각해 봅시다. 테베에 전염병이 돌게 되었습니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아폴론신전에 가서 그 이유를 묻습니다. 신탁이 들려왔습니다. ‘이 전염병은 너의 선왕이신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잡아낼 때 까지 그치지 아니하리라.’ 오이디푸스는 선왕을 죽인 범인을 잡으려고 장님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를 불러서 라이오스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를 물어 봅니다. 그러나 테이레시아스는 그 범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전염병은 더욱 더 창궐해지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몹시 나빠지고 있던 어느날 오이디푸스의 아내요, 왕비인 이오카스테가 남편인 오이디푸스에게 지난날을 이야기해 줍니다. 당신의 선왕인 라이오스는 어느날 아폴론 신에게서 신탁을 받았습니다. ‘장차 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낳은 그 아들이 너를 죽이고 너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맞아드릴 것이다.’ 그런데 이 무섭고 섬짓한 신탁을 받은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진짜로 얼마 후에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라이오스는 자기 아들이었지만 아폴론의 신탁을 믿고 그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깊은 산 속에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한 양치기가 그 버려진 아기를 주워다가 길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아풀사!, 그 이름이 바로 당신 오이디푸스였습니다. 다 성장하여 어른이 된 오이디푸스는 어느날 테베성을 향하여 가다가 한 길 잃은 노인을 만나서 말다툼을 하다 그만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노인이 바로 사냥을 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테베의 왕이요, 자신의 생부인 라이오스왕이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르고 테베성으로 들어갑니다. 테베성 입구에는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을 지닌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이디푸스에게 수수께기를 냅니다. ‘내가 내는 수수께기를 맞히면 성안으로 들여보내지만 못 맞히면 여기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아침에는 네발로 걷다가 낮에는 두발로 걷고 저녁이 되면 세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인간이다’ 수수께기를 맞힌 오이디푸스는 모든 테베성 사람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고 성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테베의 왕으로 추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그는 전례에 따라 선왕이요, 자신의 아버지의 아내이며 동시에 당신의 어머니이기도 한 저, 이오카스테를 자기의 아내로 맞아드렸습니다. ‘그러니 선왕 라이오스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맞아드린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이 테베성에 전염병을 끌어드린 범인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스토리는 ‘오이디푸스’의 2부작인 ‘안티고네’입니다. 내용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비극적 신탁에 의해서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과거에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이자 지금은 아내가 된 이오카스테에게서 이미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딸의 이름이 이 작품의 이름인 ‘안티고네’입니다. 지난날의 비극적 사실을 다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스스로 자기의 눈을 찔러 실명한 다음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살아지고 맙니다. 그러자 그의 두 아들들은 서로 왕권을 놓고 싸우다가 서로를 찔러 둘 다 죽게 됩니다. 왕권은 자연스럽게 안티고네의 삼촌인 크레온에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새로 왕이 된 크레온은 오이디푸스의 죽은 두 아들 중에서 작은 아들의 장례식만 성대히 치러주고 큰 아들의 시체는 들에다 버렸습니다. 그러자 큰 오빠를 더 좋아했던 안티고네는 몰래 큰 오빠의 시신을 거둬 잘 매장을 하게 됩니다. 이를 알게 된 왕 크레온은 이것이 안티고네가 자기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화를 이기지 못하여 안티고네를 생매장해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안티고네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이었습니다. 안티고네를 미치도록 사랑했던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을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칼을 휘둘러 그 자리에서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는 것으로 이 비극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안티고네 뿐입니다. 텅빈 무대 위에서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세상에는 이상한 것이 참으로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것이 인간이로구나!’ 등장인물들을 살펴봅니다. 아들을 버리는 아버지,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 아들과 성관계를 하는 어머니, 형제를 죽이는 형제들, 조카를 죽이려는 삼촌, 다시 아버지를 살해하고 자기는 자살하는 아들 – 라이오스, 이오카스테, 오이디푸스, 크레온, 안티고네, 하이몬, – 이 모든 등장인물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리스 신화를 다루는 연극에서 인간은 배우로 등장합니다. 출연자들은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가면, 마스크를 쓰고 무대로 올라와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에 따라 ‘연기’를 하다가 그 배역이 끝나면 무대 뒤로 돌아가 다시 다른 가면을 쓰고 등장합니다. 라틴어로 가면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합니다. 이 페르소나라는 말에서 사람, person, 인격, 개성 personality 같은 말이 나왔습니다. 페르소나는 인간, 인격, 개성, 그 어떻게 이름을 붙이던 모두 다 ‘가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가면을 쓴 ‘인생극장’에서 7-80년 짜리 연극을 하는 배우들로서 하회탈을 쓰기도 하고 봉산탈춤을 추기도하는 놀이패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Homo
지난날 인간은 무엇이라고 불리워 왔나요? homo sapiens, homo habilis, homo erectus, homo sexual, homo ludens, homo movens, homo demens, homo academicus, homo aestheticus, homo consumes, homo duplex, homo viator, homo technicus, homo symbious, homo solus, homo religious, homo nomad, homo hundred 지난날 우리 인간들은 참 여러가지 이름들로 불리워왔고 앞으로도 여러 이름들로 불리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가면을 쓴 인간을 homo sapiens, 즉 ‘생각하는 존재’ ‘이성적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 후 이어진 기독교 시대는 거의 천여 년에 걸쳐서 인간을 homo religious, 즉 ‘신앙하는 존재’ ‘신을 찾아가는 종교적 존재’로 인간을 규정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근세 이후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 칸트와 헤겔은 다시 인간을 homo sapiens로 재규정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인간은 ‘이성적 존재’요 ‘이성적 동물’로서 ‘절대이성’을 지향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반동이 일어났습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homo economicus, 즉 경제적 동물로 보았습니다. 그런가하면 니체는 인간을 homo dyonisius, homo aestheticus, homo resistans, homo demens, homo negans, homo duplex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춤추는 존재요, 취하는 존재요, 정열의 존재요, 감성과 의지의 존재요, 저항하는 존재요, 광기의 존재요, 부정하고 no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요, 이중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 대한 이런 반동적 도전은 인간을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인간이란 어느 한 두 사람의 주장에 따라서 간단하게 한 두 마디로 서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인간은 다양성을 지닌 존재다.’
욕망하는 인간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드디어 20세기 초엽 프로이트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을 homo desiderium, homo lubido, homo appetentia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요, ‘욕구하는 존재’요, ‘그리워하는 존재’라고 본 것입니다. ‘Desidero ergo sum’ 이것이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작으로 데카르트를 거쳐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이어온 ‘Cogito ergo sum’에 대한 도전이요, 반항으로 지난날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요, ‘이성적 존재’로만 보아왔던 전통적 시각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라 하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시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결정적인 요소는 ‘이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이성을 통하여 자신과 세계를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특히 헤겔에 이르러서는 이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이성숭배의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헤겔 이후 새로운 기운이 돋아났습니다. 방향과 각도는 다르지만 프로이트 역시 칸트나 헤겔 이후 줄기차게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만 규정해 온 서구의 정신사에 도전해 온 마르크스(Karl Marx),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Ernst Schleiermacher), 그리고 니체 처럼 반항하고 부정하는 인문주의자요, 무너트리고 다시 세우려는 철학자였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오직 욕망에 이끌러가는 존재일 뿐이다’ homo desiderium이요, Desidero ergo sum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듯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규정한 프로이트와 그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인 라캉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보통 일반 철학사나 철학백과사전에서는 프로이트를 철학자들의 명단에 잘 올리지 않습니다. 그의 학문적 전공과 직업이 정신분석학이요, 심리학이며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를 묻고 그에 대답해 보려고 시도한 인문학자 중 하나라는 것이 우리의 시각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출생과 삶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의사 겸 의학자요, 생리학자 겸 심리학자였으며 철학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최초로 정신분석학을 창시하고 인간의 무의식을 연구한 학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처음으로 그의 정신분석학을 인간의 성적 욕망과 연결하여 이론화하였습니다.
그는 오늘날 체코 공화국의 작은 마을인 프라이베르크(현재는 프르지보르 Pribor라고 불리움)의 모라비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유태인이었고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편이었습니다.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프로이트는 5살 때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김나지움을 거쳐 빈대학 과학부에 입학했으나 곧 의과대학으로 옮겼습니다. 빈대학에서 생리학을 공부한 후 1881년 26살 때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수련의를 거쳐 파리로 유학을 떠나 최면술과 히스테리를 연구하고 돌아와 1886년, 30세 때 빈에서 개인병원을 열고 신경증 환자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1886년 마르타 베르나이즈와 결혼하여 6남매를 낳았는데 그 중 막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동정신분석학자로 명성을 얻은 안나 프로이트입니다(빈에는 프로이트가 처음 문을 열었던 병원자리에 현재 프로이트 박물관이 있습니다). 개업 중에도 꾸준히 실어증, 히스테리, 정신분석 같은 연구를 계속하였으며 1900년에 유명한 ‘꿈의 해석’을 출간했습니다. 1908년에는 그가 최초로 사용한 ‘정신분석’ 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잘츠부르크에서 ‘국제 정신분석학회’를 창설하고 그 첫 대회를 열었습니다. 1915년부터는 빈대학에서 정신분석학을 강의하기 시작했고 그 강의를 바탕으로 1917년에는 ‘정신분석학 입문’을 출간했습니다. 1938년에는 니치의 유태인 학살을 피하여 런던으로 망명하였으며 거기에서 ‘정신분석학 개론’을 집필하던 중 이듬해인 1939년 런던의 햄스테드(Hampstead)에서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런던에 묻혔습니다. 오늘 우리의 화두에서 본다면 프로이트는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다른 사상가들과 더불어 인간의 이성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면서 인간의 다른 본성과 모습을 찾아내려고 몸부림을 쳤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욕망이다. 인간 심연의 밑바닥, 인간의 무의식에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프로이트의 주요저서
그의 전집은 총 24권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지만 그 가운데 단행본을 중심하여 중요한 저서 몇 가지만 소개합니다.
‘히스테리 연구’ Studien Uber Hysterie, 1895.
‘꿈의 해석’ Die Traumdeutung, 1900, 김양순 역, 동서문화사, 2017.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엣세이’ Drei Abhandungen zur Sexualtheorie, 1905, 김정일 역, 열린책들, 2004.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 Meine Ansichten uber die Rolle der Sexualitat in der Atiologie der Neurosen, 1906.
‘토템과 터부’ Totem und Tabu, 1913.
‘무의식에 관하여’ Zur Einfuhrung des Narzissmus, 1914.
‘정신분석 강의’ Vorlesungen zur Einfuhrung in die Psychoanalyse, 1917, 김양순 역, 동서문화사, 2016 / 임홍빈 역, 열린책들, 2004.
‘문화 속의 불쾌’ Das Uehagen in der Kultur, 1930, 변학수 역, 세창출판사, 2019.
‘새로운 정신분석 입문’ Neue Folge der Vorlesungen zur Einfuhrung in die Psychoanalyse, 1932, 서석연 역, 범우, 2017, / 김양순 역, 동서문화사, 2017.
‘정신분석학 개론’ Abriss der Psychoanalyse, 1940 (사후 출판).
그외 편집본들로는 ‘정신분석의 탄생’ ‘늑대인간’ ‘종교의 기원’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예술, 문학, 정신분석’ ‘정신병리학의 문제들’ ‘정신분석운동’ 등.
프로이트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풀이 – 그의 정신분석학을 중심하여
1. 최면(催眠, Hyponosis) – 사람의 의식을 희미하게 만들어서 의식의 밑바닥에 있는 무의식을 드러나게 만드는 것을 통칭하여 최면, 최면상태 혹은 최면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최면은 사람을 혼수상태로 만들어 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催眠’이라는 영어 Hypnosis는 그리스말 hypnos에서 왔는데 그 뜻은 ‘잠을 자다’입니다. 최면은 마치 사람을 졸리거나 잠에 취한 상태로 만들어서 그를 그런 상태로 만든 사람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최면에는 집단 최면과 자기 암시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집단최면에 대해 가장 예를 많이 드는 것은 1930년대 미국에서 ‘뽀빠이’가 유행하자 아이들이 좀처럼 먹지 않던 시금치를 많이 먹게 되어 그 소비량이 30%이상이나 급증한 것을 예로 듭니다. 자기 암시는 ‘밤에 출출할 때 라면을 생각하면 침이 고이거나’ ‘지난 날 끔찍했던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불안해지는 것’이나 ‘지난 날 행복했던 순간을 상상하면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생겨나는 것’도 자기 암시에 따른 최면이라고 보겠습니다. 프로이트는 의대 졸업 후 파리에 유학 중 ‘안나’라는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하다가 그녀에게 최면을 걸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프로이트는 인간에게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이라는 숨겨진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대화를 통한 히스테리 치료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2. 히스테리(Hysteria) –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의학 개념중 하나입니다. 심리적, 혹은 정신적 갈등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신경증상을 통칭하여 히스테리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비정상적 정신상태로 빚어지는 ‘통제하기 어려운 흥분상태’(ungovernable emotional excess)를 말하는 것입니다. 히스테리는 정신적 증상과 함께 육체적 질병도 가져온다고 봅니다. 그래도 이를 치료하는 의료적 기법은 주로 정신분석학적으로 다루어 집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주목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는 흔히 말하는 히스테리와 강박증세 및 공포감 같은 것들이 모두 포함 됩니다. 원래는 그리스말 Hystera에서 온 개념인데 이는 여성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과거, 이 히스테리 증세는 주로 여성들에게만 나타난다고 생각해서 ‘이건 노처녀의 히스테리야!’ 하는 식으로 말하곤 했는데 19세기 이후부터는 남성들에게도 나타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크든 작든 간에 히스테리 증상을 다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지나치게 자아중심적이거나, 짜증, 예민성, 신경질 등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서 주목을 받고 싶어서 과장된 감정 표현을 하거나, 즉각적 만족을 얻고 싶어서 참지를 못하거나, 불편한 느낌을 그냥 그대로 노출하거나, 감정의 기복이 심한 것 등은 모든 사람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지닌 히스테리적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인간의 마음과 정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 히스테리 개념은 프로이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key word 중 하나입니다. 특히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와 꿈, 두 가지를 인간의 무의식 속에 감추어진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정신분석적 기법으로 치료해 보려고 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앞에서 말한 ‘안나’(Anna O 치료 기법)의 히스테리 치료를 통하여 이를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3. 꿈(독일어 Traum, 영어 Dream) – 사전적으로 꿈이란 ‘사람이 잠을 자면서도 마치 깨어있을 때처럼 여러가지 현상이나 사물들을 보고, 듣고, 만지면서 실재인 것처럼 느끼는 정신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사람이 수면 중에도 뇌의 어떤 부분은 깨어 있어 생시에 있었던 일들 중 저장된 기억들을 무작위로 다시 불러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꿈이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충족시키지 못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일어나는 욕구충족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훗날 그의 대표작으로 저술한 ‘정신분석학’의 기초로써 꿈에 대한 연구를 먼저 진행 하였으며 그 결과물로 1900년에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을 출간했습니다. ‘꿈의 해석’ 이라고 번역된 독일어, Traumdeutung은 영어로 흔히 The Interpretation of Dream 이라고 하지만 그 보다는 ‘꿈의 의미’(The Meaning of Dream)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쉽게 간과해 버리고 별것 아닌 것처럼 여기고 무시해 버렸던 꿈에다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꿈이란 숨겨진 소원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현실적 삶 속에서는 여러 가지 제약, 관습, 전통, 법규, 인간관계 등으로 인하여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억압된 욕망이 거듭하여 무의식의 세계 속에 쌓여 있다가 꿈으로 나타난다고 본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꿈이란 인간의 억압된 욕망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쌓이고 쌓였다가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았습니다. 꿈은 인간의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연속성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꿈은 인간 속에 은폐된 욕망의 성취’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해석입니다. 그는 인간 의식의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무의식의 세계를 수면 위로 끌어 올렸습니다. 특히 프로이트는 이 충족되지 못한 채 인간 의식의 수면 아래 잠재되어 있는 욕구의 핵심을 성적욕구라고 보았습니다.
4. 무의식(無意識, 독일어로는 Unbewusste, 영어로는 Unconsciousness) – 無意識이란 ‘有意識’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두뇌의 활동영역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이론입니다. 프로이트에 의해서 이론화되고 대중화된 이 개념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인간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입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의식의 저변에는 의식하지 못하는 다른 의식의 세계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 속에는 자기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이 따로 있는데 그것은 의식하는 세계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해수면 위에 나타난 빙산은 아주 작지만 해수면 밑에 숨겨진 곳에는 나타난 부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설명입니다. 프로이트는 그의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은 그의 무의식 속에 쌓인 억압으로 인하여 크고 작은 여러가지 외상(外傷, Trauma)을 입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프로이트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무의식은 ‘의식에 의해서 억압된 것’이며 그 억눌려진 무의식의 밑바탕에는 욕망이 깔려있다고 보았습니다. 프로이트는 이 인간의 ‘억눌려진 욕망’ 중에서 가장 큰 것을 ‘성적 욕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초기 프로아트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 심층 심리학에서는 이 무의식적 욕망을 아주 넓게 받아드리고 있으며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 바깥세상으로부터 자동적으로, 혹은 비의도적으로 의식세계 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
5. 욕구(欲求, Need), 요구(要求, Demand, Request), 욕망(欲望, Desire), 억압(抑壓, Repression, 독일어로는 Verdrangung) – 넓은 의미에서 ‘욕구’란 ‘욕망’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욕구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들이 기본적으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충족하려는 것으로써 이를 생물학적 욕구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굶주림이나 목마름을 채우려는 욕구, 밀려오는 위험에서부터 자신의 신변을 지키려는 안전 욕구, 성적 욕구, 수유 욕구, 양육 욕구, 수면 욕구, 배설 욕구, 의존 욕구 같은 낮은 단계의 욕구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 자기를 존중하거나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거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고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욕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욕구는 흔히 사회적 욕구라고 부릅니다.
‘요구’란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행위를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구와 요청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요구는 영어로 demand입니다. 이는 자신에게 그것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을 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요청은 request로 자신에게 원래는 그것을 달라고 요청할 권리가 없는데 ‘도와 달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욕망’이란 넓게는 ‘인간들이 바라는 모든 소원’을 총칭합니다. 순수한 우리말로는 ‘바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구와 요구를 모두 포함합니다. 욕망은 하나를 충족시키면 또 다른 것을 욕구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망은 흔히 욕심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만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욕망’과 ‘욕심’은 구별됩니다. 욕망은 ‘야망(ambition)과 함께 긍정적인 면도 포함합니다. 욕망이나 ‘바람’이 없다면 개인이나 인류의 문명은 발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욕망이나 야망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 측면에서 모두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욕심(greed)은 주로 부정적 요소로만 쓰입니다. 욕심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악과 불의로 끌고 가는 원인이 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됩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억압’이란 위에서 말한 욕구, 요구, 욕망, 욕심 등을 억누르는 것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욕구나 요구, 욕망이나 욕심은 모두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억압’이란 결국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억압이란 자기의 바람이나 충동을 의식의 상태에서 무의식의 상태로 가두어 두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무의식의 심연 속에 가두어둠으로 그 억눌린 바람과 행위가 겉으로는 표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억압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 억압을 ‘억제’(suppression, 독일어로는 Unterdruckung)와는 다른 것으로 보고 이를 구별하였습니다. 억제란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런 행동을 않하겠다고 결심해서 참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억압이란 인간의 본성을 무의식의 세계 속으로 유폐시킴으로 현실화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며 ‘억압된 기억’으로 남게 되지만 억제란 똑같은 본능이라 할지라고 그것을 참음으로 일시적으로 견디고 넘김으로 같은 억제를 반복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6. 성욕, 이드, 리비도 – 프로이트는 인간의 억압된 욕망 중에서 가장 크고 강한 것을 ‘성적 욕망’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인간의 욕망은 억압되어 있다. 이 억압된 인간의 욕망은 자기도 모르는 무의식의 세계에 침잠되어 있다. 이 무의식의 세계에 갇혀있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바로 성적 욕망이다’ 이것이 그의 정신분석학의 기본 틀입니다.
프로이트는 처음 이 무의식의 세계 속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성욕을 독일어의 중성 대명사인 ‘Es’로 표시하여 das Es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Es를 영어로 번역하면 It가 되고 그것을 다시 라틴어로 바꾸면 ‘id’가 됩니다. Es=It=Id입니다. 그럼 중성 대명사로써의 ‘Id’(이드)란 무엇인가? 이는 인간의 마음과 정신 속에 자리잡고 있는 본능과 충동입니다. ‘사람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성적 본능이 인간의 본성이다. 나는 그것을 id라고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한글로는 이 ‘이드’를 ‘원자아’ 혹은 ‘원초아’라고 번역했습니다. 인간성 속에 있는 ‘그것’은 원자아, 원초아입니다. ‘그것’은 충동과 욕망의 덩어리로써 성욕입니다. 다시 정리해 봅니다. Es=It=Id=성욕이 됩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적, 심리적 힘의 원천을 성욕으로 보면서 그 에너지를 ‘리비도’(libido)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래서 리비도는 성욕으로 번역됩니다만 보다 넓은 각도에서 인간의 본능적 에너지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이 개념은 예술, 스포츠, 각종 문화 활동을 포함하는 포괄적 뜻을 담고 있습니다.
7.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컴플렉스 – 오이디프스 컴플렉스(Oedipus complex) 는 앞에서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그리스 신화를 소포클레스가 각색한 ‘오이디프스왕’ 이야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드린 다음 훗날 이를 알게 되었을 때, 이 비극적 운명 앞에서 스스로 자기의 눈을 찔러 맹인이 되고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오이디프스왕 이야기에서 남성이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머니에 대하여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을 갖게 된다는 이론을 그는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라고 했습니다. 프로이트는 모든 남자들에게는 이 오이디프스 컴플렉스가 있는데 5살 미만일 때는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 후부터는 ‘아버지 처럼 되고 싶은 욕망’으로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엘렉트라 컴플렉스는 트로이 원정에서 총 지휘관이었던 아가멤논이 10년이나 되는 원정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지만 왕비에 의해서 살해당한 스토리를 배경으로 합니다. 전쟁에서의 승리자 아가멤논은 오히려 가정에서는 비극을 맛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했던 아내에게 암살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후 아가멤논의 친 딸인 엘렉트라에게 이 사실이 알려집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마침내 자기 어머니이지만 자기 아버지를 죽인 그 어머니를 죽이고 복수를 단행합니다.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여자 아이들이란 어머니를 미워하고 아버지를 좋아하고 무의식적으로 성적 애착을 지니게 된다는 이론을 만들어 이를 엘렉트라 컴플렉스(Electra complex)라고 불렀습니다.
8. 에고와 수퍼에고 – ‘에고’란 라틴어 Ego에서 온 개념으로 우리말로는 ‘자아’(自我)라고 옮겼습니다. 인간의 본성인 ‘이드’ 즉 원초적 자아는 충동과 욕망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에고’는 이런 인간의 본성인 ‘이드’를 합리적으로 통제하고 적절하게 조절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본능적 ‘이드’를 무조건 방출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를 이성적 및 합리적으로 콘트럴 하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인간의 욕망은 각종 사회적, 윤리 도덕적 통제를 받습니다. 에고란 바로 이런 욕망과 억압 사이에 놓여있는 인간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인간들이 계속하여 에고의 콘트럴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스트레스와 히스테리 같은 부작용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초자아’라고 옮겨진 수퍼에고(Super Ego)는 이렇듯 욕망과 억압 사이에서 고뇌하는 自我가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이상과 바람을 무의식의 세계로 내면화한 것을 말합니다.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인간이 자신의 현실과 이상을 비교하면서 자신을 비판하기도하고 스스로는 책망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스스로를 칭찬도 하면서 자존감을 높여간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이드를 우리 속에서 밀려오는 성욕이라고 한다면, 에고는 ‘아니야 그럼 않되! 왜냐하면 이건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잖아!’ 하면서 스스로 억압하고 억제하는 것인데 반하여, 수퍼에고는 ‘우리 사회가 뭐라고 하겠어! 잘못하다가는 사회적 매장을 당하거나 감옥에 갈수도 있잖아!’ 하면서 무의식의 세계로 감싸고 가는 것을 말합니다.
9. 자기방어기제 – 프로이트는 인간이란 ‘이드’와 ‘자아’와 ‘초자아’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불안에 떠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갈등과 불안으로 부터 벗어나 자신을 방어하려는 무의식적 ‘자기방어적 기제’들을 만들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를 더욱 발전시켜 체계화한 사람은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였습니다. 이런 방어기제는 1단계 ‘분리’(Splitting), 2단계 ‘투사’(Projection), 3단계 ‘해리’(Dissociation), 4단계 ‘환상’(Fantasy), 5단계 ‘합리화’(Rationalization) 등의 단계를 거쳐서 이행된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의 자기방어기제에는 ‘도피’ ‘부정’(denial) ‘억압과 억제’(repression) ‘동일시와 승화’(sublimation) ‘보상’(compensation) ‘투사’(projection) ‘전이’(displacement) ‘치환’ ‘고착’(fixation) ‘합리화’(making excuse, rationalization)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중심 사상 – 그의 인간이해를 중심으로
앞에서 살펴본 대로 프로이트는 대부분의 철학개론이나 철학사에서는 철학자나 인문학자로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연구, 발전하기 시작한 심리학과 정신의학자로만 여겨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인문학 교실이 그를 화두로 삼은 이유는 프로이트야 말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만 여겨왔던 지난날의 인간 이해에 회의를 품고 의문을 던진 또 하나의 인문학자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 정말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일까?’ 회의, 의심은 가장 오래된 철학의 방법론 중 하나입니다. 프로이트는 ‘제동을 걸고 의심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 인문학자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인간의 정신을 분석하고 인간의 심리를 연구한 사람이기에 앞서 인문학과 철학이 주제로 삼아온 ‘인간 문제’를 연구의 주제로 삼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만약 인간이 전적으로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오직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 혹은 ‘상황에 따라’ ‘이성적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럼 ‘인간의 진짜 본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프로이트는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욕망’이라고 보았습니다. 특히 계몽주의 이후 서구철학은 중세의 ‘신 중심적 인간 이해’에 대한 ‘이성적 존재로써의 인간’을 회복해 냈다고 기고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에 대해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물론 그도 다른 의사들 처럼 처음에는 히스테리, 최면, 상담, 대화, 정신분석, 무의식 같은 것들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프로이트는 마침내 인간의 본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인간 되게 만드는 인간의 특징은 신앙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고 오직 인간성 가장 깊은 곳, 저변에 숨겨진 ‘욕망’이라는 사실을 들추어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끌고 가는 보이지 않는 힘은 이성인가? ‘아니다!’ 양심인가? ‘아니다!’ 신앙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럼 지성과 교양과 인격인가? ‘천만에! 다 아니다!’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욕망이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다’ ‘인간을 지배하는 원초적 바탕은 오직 욕망일 뿐이다’ Desidero ergo sum!
우선 프로이트는 인간을 결정론(psychological determination)적 존재로 봅니다. 그는 인간의 그 어떠한 행위도 우연히 일어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심리적 원인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인간의 선택, 노력, 반복된 행동, 타인에 대한 반응, 글쓰기, 그림 그리기, 노래하기는 물론이고 꿈, 환상, 망각, 실언, 히스테리 등은 한결같이 숨겨진 심리적 원인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심리적 동기에는 무의식적 동기(충동)와 생물학적 욕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충동과 욕구는 보통의 경우, 사람이 태어난 후 약 5살 이전의 경험에 의해서 결정(determination) 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이미 결정된 존재다’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인간이해에서 큰 전제 조건 혹은 가설이라 하겠습니다. 이성(회의, 생각)은 아주 뒤늦게 발전되지만 본성(충동, 욕구, 욕망)은 이미 애기 때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이 무엇을 깨달아 아는, 즉 의식하는 데는 3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 단계(Conscious step)이고, 둘째는 전의식 단계(Preconscious step)이며, 셋째는 무의식 단계(Unconscious step)입니다. ‘의식’이란 ‘아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자각하는 것인데 프로이트는 이 의식이란 인간의 전체 정신 활동 중에서 지극히 미미할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전의식’이란 자기가 스스로 노력을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단계를 말합니다. 당연히 이는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 혹은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무의식’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생각이나 감정을 이른 것입니다. 이는 일종의 억압된 생각과 감정으로 자기 자신이나 주변에 의해서 받아드려지지 않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이 무의식은 의식의 수면 아래로 침잠됩니다. 우리의 의식 세계에는 생각, 지각, 기억, 지식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무의식의 세계 속에는 두려움, 폭력, 충동, 수치, 비합리적 희망, 수용할 수 없는 성적 욕구를 포함하는 온갖 이기적 욕망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숨겨진 무의식의 세계가 표출되어 있는 의식 세계 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많고 깊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입니다. ‘의식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에 비한다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무의식의 세계 속에 숨겨진 것은 무엇일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 미움, 두려움, 공포, 수치심, 폭력성, 비합리성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무의식을 하나로 정리했습니다. ‘그것은 욕망이다’ 그는 욕망을 보편적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인간 무의식의 심연 속에 숨겨진 본질적 욕망을 밖으로 드러낸 심라학자요, 인문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 초두에 나오는 이야기에는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에 의해서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은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음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았더라’(창 3:7)하는 귀절이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있을 때는 숨겨져 있던 무의식이 인간의 원초적 본성 앞에서는 드디어 그것의 정체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아! 본래부터 우리 속에는 금지된 것을 해 보려고한 무의식적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구나!’ 하는 것이 그 때부터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눈이 밝혀진 인간의 본래 모습을 homo desiderium으로 규정했습니다.
욕망이란 무엇입니까? 욕망의 본질은 결핍입니다. 스스로 느끼는 부족감입니다. 그래서 이를 채우고자 하는 심리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얻거나, 무엇을 하려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욕망은 여러 가지를 내포합니다. Disire, Need, Ambition, Demand, Greed는 욕망, 필요, 야망, 요구, 이상, 신념, 꿈, 희망, 이타심, 사랑, 희생, 탐심과 탐욕등을 포함합니다. 이를 흔히 3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생존적 욕망, 생식과 번성을 위한 욕망, 그리고 그의 생존을 더욱 확고하게 하려는 욕망입니다. 첫째, 생존적 욕망에는 식욕, 배설욕, 수면욕, 휴식욕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둘째, 생식과 번성의 욕망에는 성욕이나 모성애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셋째, 생존을 더욱 강화하려는 욕망에는 수호욕, 공격욕, 도피욕 같은 생태적 욕망을 비롯하여 인정욕, 지배욕, 복종욕, 경쟁욕, 표현욕 같은 사회적 욕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다시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이기적 욕망과 긍정적인 면에서의 이타적 욕망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이기적 욕망은 오욕(五慾)이라고 하여 재리욕, 식욕, 성욕, 수면욕, 명예욕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타적 욕망은 주로 맹자의 사단(四端)으로 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그리고 是非之心을 일컫습니다. 욕망을 긍정적으로 볼 때, 그것은 개인적 성취와 삶의 원동력을 제공하고 더 나아가서는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욕망이 없으면 발전이나 진보, 문화나 문명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욕망에는 부정적 측면도 동시에 있습니다. 그릇된 욕망, 지나친 탐욕이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끝없는 소유욕을 필두로 하여 권력욕, 명예욕, 지배욕, 지식욕 등은 인간과 공동체를 악과 불의, 범죄와 타락으로 떨어트림으로 결국은 불행과 파멸을 안겨줍니다. 대체로 서구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인 면에서 보고 역사 발전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는 면이 강한 편인데 동양(유가, 도가, 특히 불가)에서는 이를 온갖 비극과 불행의 원인이라고 보는 경향이 큽니다. 인간이란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존재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처럼 두 틈바구니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존재입니다. ‘아! 내 속에는 두개의 내가 있구나! 천사와 악마가 이 내 한 몸 속에서 나를 괴롭히는구나!’ 하여튼 Richard Dawkins의 말대로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DNA)를 지닌 존재’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지닌 욕망이란 유전자의 효과적 생존과 번식을 위해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된 인간의 본성이라는 그의 주장을 거부하기가 쉽질 않습니다.
프로이트의 계속된 질문입니다. ‘인간 욕망의 본질은 무엇일까?’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욕망하는 존재인가?’ ‘수 많은 인간 욕망의 제일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원초적 욕망은 무엇일까?’ 그는 이를 性慾(sexual desire, lust)이라고 보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성욕은 인간이 지닌 여러 가지 욕망 중 하나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성욕이야말로 모든 인간 욕망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성욕은 인간 행동의 원초적 동기다. 모든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성욕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 행위는 성욕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입니다. 그는 성욕은 자신과 같은 존재(종족)를 보존하고 번식 시켜나가려는 욕구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육체를 탐하는 것이 더 깊은 동기라고 봅니다. 그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성욕을 libido라고 했습니다. 리비도란 모든 성적 에너지를 분출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여기에는 이성에 대한 밀착욕으로부터 시작하여 입술의 쾌감, 배설의 쾌감, 노출의 쾌감,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적 충동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줄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프로이트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공부하면서 큰 틀 하나를 다루었습니다. ‘인간이란 욕망하는 존재다!’ 이것이 오늘 명제의 촛점입니다.
자크 라캉(Jaques Lacan, 1901-1981)의 생애와 사상
프로이트 이후 그의 이론을 확대해석하고 발전시켜온 정신분석학자들과 철학자들과 학회는 세계 곳곳에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라캉은 프랑스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넓혀온 ‘프로이트의 귀환자’ 중 대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로써 라캉은 철학과 의학을 함께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신병리학을 연구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파리에서 프로이트학회를 만들어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한편 라캉은 프로이트를 해석하고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뛰어넘으려고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언어구조의 각도에서 분석하고 연구한 현대 언어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타인의 조정에 따라 보이지 아니하는 타자가 시키는 대로 말하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내 생각에 따라, 내 입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인간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미 주입된 것을 말하고 타자가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라캉의 복집한 ‘거울 단계 이론’을 다루지는 못하겠습니다만 프로이트가 인간의 본질을 욕망이라는 각도에서 본 것을 ‘영원히 충족 시킬 수 없는 욕망의 환유적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한 부분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욕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력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되려는 욕망과 이루려는 욕망을 지님으로 그의 생존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한 가지 욕망을 이루게 되면 그것은 이미 욕망이 아니다. 우리는 욕망이 아닌 것을 욕망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의 욕망은 사막에서 신기루를 좇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 라캉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는 프로이트가 주장한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욕망’이 미쳐 챙겨보지 못한 다른 측면을 생각했다고 봅니다. ‘인간의 욕망이란 진정한 욕망이 아니다’ 이런 주장을 펼친 라캉의 대표적 저서에는 ‘에크리’(Ecrits)가 있습니다.
오늘 좀 더 심도있게 논의해 보려고 하는 라캉의 주장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영어로 표기해 보겠습니다. “Desire is the desire of the other’s desire. Man’s desire is the desire of the others.” 프랑스어로 ‘타자의 욕망’은 Desir de IAutre 입니다. 라캉은 말합니다. ‘나는 내 욕망의 주인도 아니고 주체도 못된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엄마의 젖을 빠는 순간부터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 더 좋은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어하는 욕망에 이르기까지 욕망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라캉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지닌 욕망이든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욕구이든, 앞에서 말씀드린 그 어떠한 욕망, 야망, 욕구, 요구, 탐욕, 희망, 바람, 꿈은 모두 다 ‘욕망하는 나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라캉에 의하면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내 욕망이 아니라 내 가족의 욕망, 내 부모의 욕망, 우리 사회가 주입시킨 욕망, 심지어는 광고주가 만든 욕망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바드에 가고 싶다’ ‘의사나 변호사가 되고 싶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 ‘운동을 하고 싶다’ ‘여행을 하고 싶다’ 등 등 모든 인간의 욕망이란 자기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실은 타자의 욕망인데 우리는 그것들이 마치 내 욕망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종교에서 ‘순교자로 죽고 싶다’ ‘좋은 신앙인이 되고 싶다’는 것도 실은 내가 스스로 만든 나의 욕망이 아니라 신이라는 타자가, 혹은 목사나 신부나 다른 교우들이라고 하는 타자들이 나한테 심어준 ‘타자의 욕망’을 ‘자아의 욕망’으로 착각하거나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라캉에 의하면 이런 타자의 욕망은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이나 사회 공동체 안에서도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이 목숨 바치겠다. 촛불을 밝혀 나쁜 정부를 갈아 내고 싶다.’ 등등의 욕망들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본래부터 ‘내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었다는 주장입니다. 모든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자기의 욕망이라고 착각하거나 오해 하거나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었습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 긍정적 욕망이든 부정적 욕망이든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욕망은 진정 내 욕망일까?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나는 지금 내 욕망이 아니라 다른 누구의 욕망을 대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을 던져 봅니다.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나에게 기대하고 바라고 지시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거듭 생각해 봅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사업하고, 정치하고, 교회 가고, 심지어는 미용실에 가고, 몸을 치장하고, 맛있게 음식을 먹는 등 모든 ‘나를 위해서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은’ 사실 인간이란 ‘타자의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이 라캉이 보는 인간 욕망의 정체입니다.
종합적 정리
오늘 시드니 인문학교실 26번째 주제인 ‘재도전 – 내 안에 있는 욕망의 정체를 찾아서 : 인간 이성에 대한 또 하나의 도전자 프로이트와 라캉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지금까지 길게 나누어온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종합 정리해 봅니다.
인간의 본성과 본질에 대한 이해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가지로 변해왔다. 인간은 결코 한두 가지로만 정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Homo duplex이다.
인간은 결코 이성적 존재만은 아니다. Homo sapiens 만이 인간의 유일한 정체성은 아니다. 인간은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 편의에 따라 이성적일 뿐이다. 인간은 더 이상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진 존재다. 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인간은 인간들끼리 1,700만을 죽였다. 얼마 후 2차 세계대전에서는 8,000만을 죽였다. 어디 그 뿐인가? 유태인 학살을 비롯하여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범한 살인과 폐륜은 입에 담을 수가 없다.
인간의 본성은 욕망이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 Homo desiderium이다. 인간에게는 수많은 desire, ambition, need, demand, appetentia와 greed가 있다. 인간은 ‘Desidero ergo sum’이다. 인간은 (우리, 나 자신) 이 첨단 기술 시대에도 수렵시대와 똑같이 원초적 본능에 이끌리어 비이성적이며, 가면을 쓴 존재로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거나 소망하는 것처럼 이성적이거나 양심적이거나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늘 속고 속이면서 산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일수록 ‘거짓말하는 능력’과 ‘속이는 능력’이 뛰어난 자들임을 늘 잘 알면서도 또 속는다. 모든 광고의 목적은 물건에 대한 정보 제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의 탐욕을 자극하는 데 있는 줄을 알면서도 자신을 속인다.
인간 욕망의 밑바닥에는 무의식의 세계가 자리잡고 있다.
인간 욕망의 본질은 성욕이다. 인간은 Homo libido요 homo eros이다.
인간이 지닌 욕망의 본질적 성격은 타자의 욕망이다. 우리는 Desire of Others를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거나 해석하는 존재이다. 이는 개인적 욕망에서만이 아니라 집단적 욕망과 광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정체’와 어떻게 싸워야 할까? 다시 처음에 던진 ‘꼰대의 걱정’으로 돌아가면서 최근에 나온 신간 한권을 소개합니다. ‘인간 본성의 법칙’(The Laws of Human Nature), 로버트 그린저, 이지연 역, 위즈덤하우스, 2019. 그린은 이 책에서 우리 속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본성을 다음 18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1. 비이성적 행동의 법칙 – 나를 지배하는 감정 2. 자기도취의 법칙 – 내가 아닌 타인에 집중하는 인간 3. 역할놀이의 법칙 – 가면 뒤에 숨은 실체 4. 강박적 행동의 법칙 – 자기 성격의 강점을 따라가는 인간 5. 선망의 법칙 – 억압된 무의식을 향하여 6. 근시안의 법칙 – 단기적 사고의 신호들 7. 방어적 태도의 법칙 –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으려한다 8. 자기훼방의 법칙 – 부정적 태도의 유형들 9. 억압의 법칙 – 그림자를 따라간다 10. 시기심의 법칙 – 분노에는 시기심이 자리잡고 있다 11. 과대망상의 법칙 – 나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12. 젠더 고정관념의 법칙 – 젠더의 여섯 가지 유형 13. 목표상실의 법칙 – 인생의 소명을 찾아서 14. 동조의 법칙 – 집단으로 부터 벗어나기 15. 변덕의 법칙 – 양면성을 지닌 인간 16. 공격성의 법칙 – 상냥한 얼굴 뒤에 있는 적개심 17. 세대 근시안의 법칙 – 영광스런 과거에서 벗어나기 18. 죽음 부정의 법칙 – 죽음을 통한 삶의 철학, 죽음을 인식하면서 사는 삶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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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