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77년 8월 4일, 양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1885 ~ 1977) 서거 43주기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1885년 7월 8일 ~ 1977년 8월 4일)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에게 영향을 주었다.
–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출생: 1885년 7월 8일, 독일 루트비히스하펜
.사망: 1977년 8월 4일, 독일 튀빙겐
.배우자: Karola Bloch (1934년–)
.영향을 준 인물: 카를 마르크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이븐 루시드, 하인리히 리케르트 등
.학력: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1908년), 뮌헨 대학교(1905년–)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는 1885년 7월 8일 루트비히스하펜 암 라인에서 철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과 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 물리학,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 입학 후 여섯 학기밖에 지나지 않은 1908년 ‘리케르트와 근대 인식론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해명’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탁월한 천재성을 드러냈다.
이후 그는 루카치, 브레히트, 벤야민, 크라카우어, 아도르노 등 동시대의 지성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루카치와의 표현주의 논쟁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으며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왕성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저술 활동에 몰두하여 철학, 정치 경제학, 신학, 문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법철학, 예술 등 가히 백과사전적이라 할 정도로 폭넓은 분야를 섭렵하며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아도르노와 벤야민 등 동시대 지식인들의 청년 시절에 큰 영향을 미친 『유토피아의 정신』을 비롯해 『기독교 속의 무신론』, 『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 『흔적들』,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 『주체 – 객체: 헤겔에 대한 주해』, 『크리스티안 토마시우스』, 『아비센나와 아리스토텔레스 좌파』, 『유물론의 문제들』, 『기독교 속의 무신론』, 『경향성 – 잠재성 – 유토피아』 등이 있다.
○ 에른스트 블로흐의 삶과 철학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는 유대인이지만 독일에 동화된 철도 관리인의 아들로 루트비히스하펜에서 태어났으며, 철학 · 음악 ·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박사학위 취득 이후 우선 자유기고가로서 생활하였다. 그는 강단철학을 경멸하였으며, 비유적이고 표현주의적인 그리고 무아적이고 환상적인 문학 경향을 가졌다. 그리하여 일찍이 유토피아를 마르크주의적인 철학보다는 메시아적인 철학에서 발견하였다.
1933년 그는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하였지만, 1949년 귀국하여 라이프니츠로 갔다. 왜냐하면 동독을 ‘신세계’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레닌과 스탈린을 인권의 선구자로 환영했고 (‘이승에는 레닌, 저승에는 예루살렘’), 서독을 파시즘의 국가로 비판했다. 이러한 확신들로 인해 그는 또한 동독에서 철학 검열에 참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토피아주의는 곧 공개적으로 비판받았다. 블로흐는 퇴직했고, 우연히 마우어바우에 갔던 1961년부터 서독에서 체류했다. 그곳에서 그는 튀빙겐대학의 객원교수로서 커다란 활동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학에) 전개할 수 있었다.
대표작 ‘희망의 원리’에서 블로흐는 존재를 유일한 생성으로, 발전하는 총체성으로 해석한다. 이 총체성은 인식될 수 없는 목적,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는 총체성’에 근거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언제나 실현되려는 아직 – 아닌 – 존재, 가능성 혹은 잠재력이다. 그러나 그것의 현실화는 또한 의문으로 남아 있다. 더 나아가 존재는 물질 내지 ‘세계 물질’로서, 따라서 물질적 세계 과정으로서 규정된다 — 그것은 생성의 열려 있는 일종의 초월성으로 신적이 아닌, 또는 비초월적 절대자이다. 그런 점에서 블로흐는 의식적으로 도덕적, 정치적 유토피아를 근거짓는 형이상학을 고집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알려지지 않는 전체성이 동시에 원해야만 할 최고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 전체성은 단지 희망될 수 있고, 예지될 수만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의 목적은 소외의 지양으로서, 즉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인간의 자연화와 자연의 인간화로서 기술된다. 예를 들어 배고픔과 희망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예고의 표지이다. 물론 이 미래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오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블로흐에 있어서 – 단지 애매모호하게 주장된 유물론을 토대로 – 탈초월성을 의미한 형이상학과 매우 신비적인 유토피아가 ‘희망, 그리고 과정 지식의 통일성을 위해’ 결합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블로흐는 유토피아적인 구원 사유를 마르크스주의에서 소위 말하는 분석적 사유의 보완으로, 또는 주체적 요인의 강조로, 그리고 그런 점에서 공식적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으로 이해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차가운 강물과 뜨거운 강물을 구분하고, 그리고 완전한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을 요구한다.
블로흐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자로 이해하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어떻게 철학이 철학의 현존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해야만 한다. 그에게 있어 이 물음은 계속해서 ’11. 포이어바흐의 테제’의 올바른 해석의 문제로 귀결된다: 철학자는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했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문제이다. 블로흐는 이 ‘암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 그 당시 그에게 있어 이론과 실천의 통일성이야말로 의심할 여지없는 전제이다. ‘개념’은 ‘실천을 위한 지침’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론과 실천의 구별을 강조했던 포이어바흐의 테제를 ‘모독’으로부터, 즉 ‘지성 혐오자들과 실천가들’의 위조로부터 보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블로흐는 마르크스를 그가 철학적 사유 일반을 설명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명상적 인식의 종말을 설명했다고 이해한다.
블로흐가 해석한 것처럼 문제는 계급의 지양, 즉 계급 제한적인 잘못된 의식의 자율성의 지양이다; 현실성의 편견 없는 연구를 위한 철학의 거부는 단지 특정한 철학, 즉 헤겔주의 철학자의 ‘철학적 허풍’에 맞추어져 있다. 이 의미에서 블로흐는 마르크스를 인용한다: 철학의 현실화를 통한 철학의 지양 요구는 오로지 지금까지의(!) 철학을 부정함으로써, 철학으로서의 철학을 부정함으로써 가능하다; 헤겔 자신으로부터 유래된 철학의 부정 개념은 “모든 가능한, 그리고 미래의 부정 일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정’은 진리와 함께 부정 자체 때문에 철학과 관계하고, 따라서 자족적-명상적인 철학, 세계를 단지 낡은 것으로 해석하는 철학과 관계한다. 부정은 세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철학과 관계하지 않는다.”
블로흐는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이상 철학이 아니라는 주장을 불합리하다고 보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체적인 세계 변화에 유일하게 능력이 있는, 그리고 특정한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 – 철학 이상의 것임을 의미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찌하였든 철학의 종말은 아직도 시야에 드러나지 않았고, 소위 자족적, 명상적 철학의 종말만이 나타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해, 또는 비 –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해) 전개된 의구에 찬 ‘마르크스 – 해석’을 기반으로 블로흐는 그후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그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 이념을 명료화할 수 있다: “현실적인 실천은 이론에, 발전하는 이론에 경제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문의하지 않고서는 결코 한걸음도 발전할 수 없다.”
그 이후에 한번 언급한 것처럼 블로흐는 실천의 우위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론의 최우선에서, 즉 (참된) 철학의 논리적 우위로부터 출발한다. “만일 마르크스주의가 변화 이전에, 그리고 변화에 참된 철학의 이론적-실천적 우위가 아니었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참된 의미에 있어서 변화가 아닐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밖에 정치지도자를 통해 철학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다.
선행하는 세계의 철학적 인식은 블로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변화에의 의지를 통해 규정된 상황분석이다. “철학적 변화는 연관성의 끊임없는 인식 변화이다. 왜냐하면 비록 철학이 다른 학문들을 넘어선 고유한 학문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모든 학문들에 있어 총체성의 고유한 지식과 양심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발전하는 총체성의 발전하는 의식이다. 왜냐하면 총체성 자체는 현사실성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아직도 생성되지 않는 것과 생성하는 것의 거대한 연관성 속에 순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블로흐 자신의 최종-관점이 나타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관점으로부터 금지되지 않으면서 마르크스에 근접한다 – 또한 종말론은 이러한 것으로서 서로 주장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철학이 스스로를 지양하지 않고는 현실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단지 “이러한 종류의 완전한 지양이 공산주의의 최종적 행위와 일치함”을 나타낼 뿐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최종적 목표는, 인간의 성취된 자연화와 자연의 성취된 인간화는 철학의 즉시적 지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새로운 철학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철학은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총체성이 반영되고 있는 모든 실천의 지식-양심으로서의’ 철학이다. 그 점에 있어서 블로흐는 마르크스에 의해 ‘추구된 최종의 원근법’이 바로 자신의 철학에 비견된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철학의 청산이 아니라 철학의 변형이다.
블로흐는 과거의 관념론적 전통과 새롭게 정립된 유물론적 마르크스주의와 결합시키려고 했다. ‘지혜 개념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의 고전적 지혜 전통을 정당하게 이어 온 유산으로 표현한다. “또한 지혜는 마르크스주의가 되었다. 지혜는 마르크스주의와 더불어 드디어 공식적-활동적인 기능을 획득한다.” 블로흐가 해석한 것처럼 지혜는 항상 실천적이었으며, 즉 구체적인 목적과 관계했으며, 더욱이 당파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실천, 지혜와 노동이 드디어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고전철학에서 최고의 선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러나 실현될 수 없는 목적으로 파악되었던 것을 공동으로 겨냥하게 되었다. “소외의 지양으로서, 인간의 자연화로서, 자연의 인간화로서의 최고의 선은 오히려 내용적으로나 사실적으로 지혜의 노동, 노동의 지혜를 통해 비로소 형성되는 목적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블로흐는 계속해서 철학을, 지혜와 지식을 동일화시킨다. 물론 여기에서 그는 두 영역을 매우 넓은 의미에서 받아들인다.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은 참된 철학으로서 철학 연관 지식과 본질 지식을 지혜와 만나게 한다.” 따라서 블로흐는 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서로 다른 명제들을 철학을 위한 보완적인 변호인으로서 해석하고, 이로써 다시 한번 철학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증명하려 한다.
엥겔스는 소위 ‘안티 – 뒤링’에서 개별 학문들이 그들의 지위에 관해 일반적으로 확실하다면 전체 연관에 관한 모든 특수 학문은 필요없게 되며, 따라서 철학은 논리학과 변증법으로 환원된다고 본다. 이런 관점을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개별 학문들은 철학의 작업을 적극적으로 계승해야 한다. “엥겔스는 중도에 이미 현존하는 것, 실증과학을 위해 환원하고, 마르크스는 성취될 수 있는 것, 프롤레타리아의 지양을 위해 지향한다. (…) 이와 같이 최후에는 엥겔스에게 철학이 관련 학문들의 기초로서 드러나고, 마르크스에게 철학이 혁명의 정신적 무기고와 빛, 프롤레타리아의 지양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관련 지식, 목적-양심의 지혜와 실천 속에서 그러한 철학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통한 새로운 철학은 특수한 인간성에서 가능하다. 블로흐에 있어서 새로운 철학은 형이상학에 기초한 실천철학이다. “철학은 과정 속에 처해 있는, 그러나 필연적인 하나의 학이다. 즉 수많은 세계 과정과 세계 연관 속에 처해 있는 것의 학이며, 하나의 학이다.”
블로흐는 논문 ‘추구하고 시도하고자 하는 것으로서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에서 그는 우선 철학적 사유의 두 가지 서로 다른 원천을 제시한다: 궁핍과 경이. 플라톤에게 참된 존재로의 사랑과 결합된 경이는, 블로흐에게 (하이데거와 비슷하게) ‘정착되지 않은, 따라서 고향 상실의 경이’이다; 그것은 철학의 고유한 원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유를 위한 사유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철학자들은 사유를 보통보다 더 어렵게 만드는 속성을 지닌다.”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소크라테스처럼 철학자들은 실제로 ‘개념에로의 위험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더욱이 우리가 철학에 관한 서로 다른 구상들을 관찰한다면, 철학은 마치 단순한 ‘단어, 또는 윙윙거리는 신호’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철학이란 개념은 두 가지 종류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철학이 개별 학문 이상이라는 소극적 의미를 갖고 있고, 다른 하나는 철학이 ‘전체적이고 본래적인 특성을’ 지닌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저서에서 계속 서술하고 있듯이, 마르크스철학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설명에 맞게 세계를 해석함으로써 이 철학은 세계를 결정적으로 새롭게 확장시키는 데 오히려 도움을 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창조의 뛰어난 협력자가 되며, 더욱이 세계의 공동 저자가 된다.
물론 오늘날 철학은 더 이상 학문들의 여왕이 아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본래 학문들의 공화국만이 존재한다. “학문들의 여왕 또는 학문들의 개관 대신에 철학은 오히려 자신의 고유한 통일 속에서 학문들의 살아 있는 연관체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체의 의식 속에서 철학은 본질, 짧게 표현하면 본래적인 것에서 현상에 관해 시도된 최고의 통찰이며, 무엇보다도 전체의 과정을 지향한 통찰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자신의 최고 유산을 가진 보편적 · 질료적인 경향 학문 자체, 즉 세계 물질에 법칙적으로 계속되는 진행에서 어디로부터, 어디로, 그리고 무엇을 위해의 연관을 해명하고 밝히는 학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인 변화 의지를 통해 모든 ‘지금까지의 단순한 거대 사유’로부터 구분한다. “그리하여 철학은 비록 개별 학문을 넘어서지는 않지만,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개별 학문들 안에서 이러한 목적을 포괄하는 양심과 지식이다.” 철학은 경험적인 것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 통찰’을 필요로 한다; “철학은 총체적으로 세계의 흐름 속에서 세계를 정확히 알 수 있게끔, 즉 – 고향을 변화하게끔 지향한다.” 여기에서 고향을 상실한 블로흐가 항상 추구했던, 그러나 결코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 표현된다: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고향, “유년기에 모두에게 나타났던,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무엇: 고향.”
그리고 그가 당시에 정치적인 고향 소설뿐만 아니라 수많은 철학적 · 신학적인 고향 소설에 영감을 주었던 고향 추구를 그는 고전적 지혜의 행복과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의지가 결합된 것으로 보려고 했다. “만일 철학이 변증법적-유물론적이 아니라면 철학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며, 만일 변증법적 유물론이 철학이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변증법적 유물론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철학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 철학은 논리학이고, 사적 변증법적 유물론이며,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과정의 윤리학이고 미학이다.”
따라서 블로흐에게 있어서 철학은 우선 현상과 억견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통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저서 ‘주체와 객체. 헤겔을 위한 설명’에서 서술하였듯이 만일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적이 아니라면, 즉 거대하게 열려 있는 지평선으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면 상황분석적 활동은 의미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진입은 소외에 대항하는 이론적, 실천적 작업이다. 희망과 과정의 사유가 서로 결합된 예언적 형이상학은 정치적 세계 변화에 거대한 원근법을 상기시키고, 그리고 이것을 이끌고 있음에 틀림없다; 또는 ‘철학에 있어서 튀빙겐인의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형이상학과 구체적 유토피아는, 초월성 없는 초월적 사유 속에 하나됨과 같은 동의어이다.”
철학은 동화 · 유토피아 · 종교처럼 객체적 가능성들에 관한 주체적 예료의 다양한 형식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철학은 자신 속에서 인류의 희망을 자각시킴으로써 탁월하다. 그런 점에서 철학은 선취하는 의식일 뿐만 아니라 개념상 명확하게 분절된 미래를 희망하는 반성적 자각이다. 블로흐가 ‘희망의 원리’에서 공식화했던 바와 같이 철학은 ‘Docta spes, 이해된 희망’이다. 철학은 존재했던 것의 지식이 아니라 ‘내일의 양심, 미래를 위한 당파성, 희망의 지식’이다. 구원과 고향의 보편적인 요구를 반성하는 철학은 단지 보편적 · 선취적 의식의 개념적 형식이다. 이 의식은 생성하는 실재성의 과정과 상응한다. 철학은 앞서-나타남을 출현하도록 한다. 블로흐에게 있어서 철학은 동경을 자기-스스로-파악하는 것, ‘동경의 해석학’이다. 이로써 철학은 구원 희망을 자신의 주요 동기로서 의식한다. – 출전 : 르너 슈나이더스의 ’20세기 독일철학’, 동문선 간행
○ 저서
*주요저서
희망의 원리
서양 중세·르네상스 철학 강의, (열린책들)
유토피아의 정신
기독교 속의 무신론
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
흔적들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
주체 – 객체: 헤겔에 대한 주해
크리스티안 토마시우스
아비센나와 아리스토텔레스 좌파
유물론의 문제들
기독교 속의 무신론
경향성 – 잠재성 – 유토피아
*Bibliography
– Books
Geist der Utopie (1918) (The Spirit of Utopia, Stanford, 2000)
Thomas Müntzer als Theologe der Revolution (1921) (Thomas Müntzer as Theologian of Revolution)
Spuren (1930) (Traces,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Erbschaft dieser Zeit (1935) (Heritage of Our Times, Polity, 1991)
Freiheit und Ordnung (1947) (Freedom and Order)
Subjekt-Objekt (1949)
Christian Thomasius (1949)
Avicenna und die aristotelische Linke (1949) (Avicenna and the aristotelian Left)
Das Prinzip Hoffnung (3 vols.: 1938–1947) (The Principle of Hope, MIT Press, 1986)
Naturrecht und menschliche Würde (1961) (Natural Law and Human Dignity, MIT Press 1986)
Tübinger Einleitung in die Philosophie (1963) (The Tübingen Introduction in Philosophy)
Religion im Erbe (1959–66) (trans.: Man on His Own, Herder and Herder, 1970)
On Karl Marx (1968) Herder and Herder, 1971.
Atheismus im Christentum (1968) (trans.: Atheism in Christianity, 1972)
Politische Messungen, Pestzeit, Vormärz (1970) (Political Measurements, the Plague, Pre-March)
Das Materialismusproblem, seine Geschichte und Substanz (1972) (The Problem of Materialism, Its History and Substance)
Experimentum Mundi. Frage, Kategorien des Herausbringens, Praxis (1975) (Experimentum Mundi. Question, Categories of Realization, Praxis)
– Articles
“Causality and Finality as Active, Objectifying Categories: Categories of Transmission”. Telos 21 (Fall 1974). New York: Telos Press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