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구원이란 무엇인가? (3)
7. 성화(Sanctification)
7.1 반쪽짜리 구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치르신 속죄와 용서를 믿으면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금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복음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한다. 복음을 듣고 온전한 회심을 하여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칭함(칭의)을 받은 자들이라면 분명히 영적으로 새로 출생(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삶의 모습들은 비신자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이거나 심지어 비신자보다도 더 못한 모습을 볼 때, 복음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든다. 그래서 본회퍼는 그의 책 ‘나를 따르라’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상품 같은 은혜이며, 싸구려 죄의 용서, 싸구려 위로, 싸구려 성만찬 입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도 죄를 용서 하는 설교요, 공동체 훈련도 없이 베푸는 세례요, 죄의 고백도 없이 참여하는 성만찬이요, 인격적인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시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 이것이 값싼 은혜입니다. ···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하나님에게도 값 비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은 받아 놓았으니 제멋대로 살아도 영생을 얻는다는 값싼 은혜에 대해 경고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를 더 많이 지어야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받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대해서도 그러한 생각이 진 리가 아님을 강력히 경고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 6:1)
성경은 구원이 중생과 회심, 칭의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분명히 중생, 회심, 칭의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들임에 분명하지만 자신의 삶에 성화가 없다면 구원에 대해 심각 하게 재고(再考)해 보아야 할 것이다.
7.2 그럼 성화란 무엇인가?
중생이 영적으로 새로 출생하는 것이라면 성화는 영적인 성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적으로 신생(新生: 새롭게 태어남)했다면 계속 자라가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생명을 가졌다면 자라나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 회심, 칭의가 단회적 사건이라고 한다면 성화는 평생에 걸쳐 계속 되어야 하는 점진적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벌코프는 성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화는 성령께서 죄인을 순결케 하시며, 죄인의 전 성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며, 죄인으로 하여금 선행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계속적이고 은혜로운 사역이다.” 온전한 회심을 한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제자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분과 같이 되기로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는 믿음 안에서, 매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가운데 거룩한 품성과 생애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성화)이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7.3 성화의 이중 구조
성경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칭의)을 받았을 때에 성화의 역사 또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칭의)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성화)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성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 8:1-4)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중생)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칭함(칭의)을 받았을 뿐 아니라 주의 영을 좇아 죄를 미워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우리는 현세에서 죄와 더불어 투쟁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이처럼 중생한 자라도 육과 영 사이에서 항구적인 투쟁을 해야 하며 심지어 가장 잘 믿는 자라도 아직도 매일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한다(요일 1:9; 시 32:5). 이처럼 진정한 내적 인간의 변화(중생) 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외적인 생활에 있어서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성경에서 성화를 말할 때에는 늘 칭의와 함께 다루어지고 또 믿음과 진정한 믿음의 결과인 행함을 함께 말하고 있으며, 칭의는 성화를 수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8. 성도의 견인(堅忍)
8.1 Tulip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첫 자들을 따서 만든 단어가 바로 Tulip이다. Total Depravity(인간의 전적타락),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제한 속죄),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인 은혜), Perseverance of the Saint(성도의 견인). 이처럼 5개의 교리들의 첫 글자를 가져오면 Tulip이 된다.
그래서 흔히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약칭해서 Tulip이라고 부른다. 이 교리는 화란의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교수가 창안한 알미니안주의에 반대하여 칼빈주의 학자들이 도르트회의를 통하여 확정한 구원에 관한 교리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비교해서 알미니안주의에서 주장하는 교리들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Free will or Human Ability),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보편적 속죄 혹은 일반속죄(Universal Redemption or General Atonement), 중생에 있어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의지에 제한을 받음(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Regeneration limited by human will),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음(Falling from Grace)”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비교해 보면, 칼빈주의는 “무조건적 선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반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조건적 선택”을 받아들이며,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원하지만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만 궁극적으로 구원하신다?”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칼빈주의는 “제한된 속죄”(그리스도의 죽음은 오직 구원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유효하다)라고 그리스도의 의를 주장하는데 반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보편적 속죄”를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이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칼빈주의는 “불가항력 적인 은혜”를 주장하는데 반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항거할 수 있는 은총”을 주장하여 “인간은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주의는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도의 타락 가능성을 인정하여 “구원받은 성도라도 계속해서 믿음 안에 있지 아니하면 다시 범죄하여 타락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8.2 성도의 견인 VS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음(Falling from Grace)
알미니안주의의 마지막 교리인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음”은 구원받은 사람도 종국에 가서 구원으로부터 떨어질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다. 알미니안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신자들 에게 구원의 길을 계속 유지하라고 권고하는 말씀(마 24:13; 골 1:23; 히 3:14), 하나님을 배반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는 말씀(히 2:1; 10:26; 딤전 1:19-20; 딤후 2:17-18; 딤후 4:10) 등을 볼 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일지도 구원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칼빈주의, 개혁파 교회에서는 한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구원으로 이끌어 가신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뻘콥은 성도의 견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의 계속적 역사”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견인이란 하나님의 선택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악에 넘어지는 경우가 있어도 다시 일어나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이다.
사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개혁파 교회 이외에는 환영받지 않는 교리이다. 로마 가톨릭, 알미니안, 심지어 루터교 조차도 그리스도인이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성도들의 인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성도의 견인교리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반을 둔 교리라고 이해하기 보다는(빌 2:12-13; 롬 9:16; 요 6:37, 44), 성부 하나님의 자유롭고 변하지 않는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선택 작정의 불변성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8.3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에드윈 팔머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신자가 아무리 죄와 불신앙 가운데 떨어져도 안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성부의 유효적 소명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가 내주(內住)하시는 그 성도들은 반드시 끝까지 견딜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그러나 개혁파 교리를 반대하는 교회에서는 견인 교리가 성도들의 신앙을 평안과 태만과 방종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를 범하도록 부추기는 교리라고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여기서 견인이란 신자의 활동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성도들이 참여하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내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 그것을 완성하시는 것을 말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빌 1:6)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던 자가 다시 타락하여 영생에 이르지 못할 수가 있을까? 개혁주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비록 지극히 연약한 신자라도 그 심령에 견인의 은혜를 주시어서 최후적인 배교로부터 확실히 보호하시기 때문이다(살후 3:3; 딤후 4:18).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성(롬 8:30)이 이를 증거하고 성령께서 인(印) 치시고 보증하신 것은 확실하기(고후 1:22; 엡 1:13-14; 4:30)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중도에 배교한 자들이나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들은 참신자였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9. 다시 종합하면
다시 간단하게 구원론에 대해 정의를 해 본다면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신 속죄 사역(객관적인 구원 사건)을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실제로 적용하는 과정을 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직신학적 순서로 볼 때 구원론이 기독론 다음에 위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구원론은 성령의 사역에 귀속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소위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에 맞추어 구원론을 살펴보았다. 유효한 부르심(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성화, 성도의 견인 등이 그것이다.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구원의 서정이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순서는 구원을 받을 때 시간적으로 이러한 순서를 거친다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이것은 시간적 순서라고 보기보다는 논리적 순서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구원의 서정에 대한 안토니 후크마의 묘사는 설득력이 있다. “구원의 서정에 나타나는 여러 단계들은 전자가 후자를 대치하는 일련의 연속적 단계가 아니라, 그것이 시작된 후에 동시적으로 함께 진행되는 구원 과정의 다양한 측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10. 인간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은 본질상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미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였다 할지라도 인간의 죽음을 비롯하여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질병, 한계 등을 볼 때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구원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개입과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과 호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죄로 철저하게 하나님께 반역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창세기에 처음 나오는 첫사람 아담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역한 인간들을 계속해서 찾아오시는가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 때문이다. 그래서 존 칼빈도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출발한다.
성부가 ··· 불쌍하고 곤궁한 인간들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부어 주신 그 은혜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는가?
다시 말해 구원론의 출발은 성부가 인생들을 향해 품으시는 사랑과 자비의 속성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자기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내어주셔서, 희생적 죽음을 치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11.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성취된 구원의 은혜를 개인이 받고 향유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구원론이 중요하다.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강조한 대로 구원에 대한 다른 접근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관계론적 접근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머물러 있고 우리가 그와 분리되어 있는 한, 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받은 고난과 행하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없고 가치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의 구주가 되고 우리 안에 거해야 된다.”(기독교강요 III, I 1)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관점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론의 핵심적인 진리라고 강조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야 말로 구원 적용과 정의 단순한 한 국면이 아니라 구원 적용 과정의 모든 국면들의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구원의 서정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르심,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성화 등은 부분적으로 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구원의 서정에서 보여 주는 이러한 사슬구조는 그리스도를 각 구원 순서의 축복들의 제공자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제 1원인자로만 바라보게 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 모든 영적 축복들 속에서 예수님을 핵심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는 제 1원인자일 뿐이지 구원론은 실제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으로만 인지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뿐만 아니라 구원론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초점은 구원이 개개인들의 경험 속에서 어떠한 순서로 파악되느냐(Ordo Salutis)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진 구원의 풍요로움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자세히 보면 구원에 대해 칼빈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구원의 서정식의 논의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participation in Christ) 방식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에는 이 연합에 대한 개념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행한 사역은 온 백성을 대표하여 행했던 사역이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대표적인 연합관계에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표적인 연합의 관계에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행한 사역들은 그가 대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행동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또한,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당하는 종(사 53장)도 연합의 모습이다. 그는 죄인과 동일시되어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고난당하는 자로 묘사된다. 그밖에 결혼 제도(창 2:24)도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엡 5:22-33),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신부된 우리와의 연합의 모습을 그려준다. 그 밖에도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요 15장)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을 설명한다. 이처럼 구원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되어 있는 그러한 관계의 개념인 것이다.
주경식 교수(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ks.j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