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 (106)
베티 우튼 (본명: 윌킨슨) 부인 (1933. 2. 28)
한국명: 우애진 선생, 서울 1964-69
베티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간호사로 훈련 받았다. 그녀는 1955년 5월 7일에 리처드 우튼과 결혼했고 딕과 세 자녀들과 함께 1964년 6월 한국에 도착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마산에서 후에는 서울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베티는 무엇보다도 가정주부였다. 그러나 그 집은 한국인 이웃들, 지인들, 선교사 동료들 모두에게 관대하게 문이 열려 있었다.
베티는 다른 선교회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가난으로 인해 매춘의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어린 여성들을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 일은 구제하는 일(은혜의 집), 아가씨들의 사회복귀(희망의 집), 미군들을 상대하는 아가씨들을 만나는(믿음의 집) 것과 관계되어 있었다. 종종 세 번째 그룹의 여성들은 치료를 필요로 하는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희망의 집은 상황대처 일꾼들을 고용해서 기차역에서 대기하면서 시골에서 올라오는 기차가 도착할 때 어린 소녀들과 접촉하는 뚜쟁이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였다.
희망의 집은 12-18살의 소녀들에게 한 달 동안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고, 그들이 합법적인 직업을 구하거나 고향의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했고, 장사 혹은 기술을 배울 기회를 주어 자활하도록 도왔고, 그들의 가족들과 연락을 취하도록 했다.
은혜의 집은 매춘 여성들에게 개인적인 애정 어린 관심과 교육을 제공하였다. 15-22세의 15명의 소녀들은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처음 6개월 동안 그들은 기본적인 글 배우기, 셈하기, 요리, 바느질, 예절, 가사를 배웠다. 나머지 6개월 동안 그들은 정부가 인정하는 학교에 등록하여 재봉과 가발 만들기와 같은 무역 일을 배웠다.
믿음의 집은 미군부대 근처에서 매춘에 관계하는 여성들을 위해 필요했다. 군부대는 재정을 지원했고 위원회는 직원과 프로그램을 공급했다.
베티는 미연합장로회의 코트 로빈슨의사(Dr. Court Robinson)와 함께 세브란스 병원의 진료실에서 이 세 기관에서 온 소녀들의 건강을 보살피는데 참여했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기생충, 영양실조, 결핵, 성병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일부는 학대받은 상처와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베티는 호주로 귀국하여 약 20년 동안 로열 디스트릭트 간호봉사(the Royal District Nursing Service)와 알코올 중독과 홈리스를 위한 프로그램에서 일했다. 은퇴한 이후 그녀는 멜번의 한인공동체를 위해 조건 없이 자신을 내 주었다. 공식 비공식적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멜본한인교회의 교인들 및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문을 열고 관대하게 우정을 나누어 왔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