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100)
데스몬드 존 닐 목사 (1932. 6. 28)
한국명: 이태선 목사, 진주 1960-70; 서울 1971-77; 대전 1978-81; 서울 1987-89
데스는 퀸즐랜드 포모나(Pomona)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계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회계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목회를 위해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1959년 그는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고 올 세인트 칼리지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은 후에 1960년 7월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2년의 과정을 마쳤다. 1962년 3월 27일 그는 뉴헤브리데스에서 디커니스 간호사로 섬겨왔던 마저리 하포드(Marjorie Harford)와 결혼했다.
데스는 1962년 6월부터 진주노회에서 전도 선교사로 섬겼다. 그는 진주 농업대학에서 영어성경반을 시작해서 10년간 가르쳤다. 그는 노회 지도력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했고, 진주노회 평신도훈련소의 소장 및 네 개의 농촌교회의 당회장을 맡았고, 함양과 거창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순회 전도활동을 했다. 그리고 노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서 충무 지역의 섬들을 위한 전도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닐의 장남 스테판 존은 1963년 3월 17일생이고, 장녀 엘리자베스 앤(Elizabeth Ann)은 1964년 8월 29일생이다. 입양된 크리스틴 조안(Christine Joan)은 1965년 7월 23일생이고, 헬렌은 1965년 11월 26일생이다. 역시 입양된 필립 제임스는 1967년 8월 31일에 태어났다.
데스는 1966년 3월 14일 휴가를 떠났고, 퀸즐랜드 대학에서 학사(BA)를 취득한 후, 1968년 3월 한국에 돌아왔다. 짐 하젤딘 가족이 1968년 12월에 호주로 떠난 이후, 닐 가족은 부산으로 왔지만 그의 소속은 여전히 진주노회에 있었다. 그 가족들은 1968-69년 건강악화로 고생했다. 데스는 부산에서 진주를 오가는 오랜 여행에서 억압감을 느꼈고 병을 얻었다. 데스는 1969년부터 부산 장로회신학교에서 영어성경 및 그리스도의 생애를 포함하는 과목들을 가르쳤다. 그는 또한 학생들의 현장실습을 지도했다. 그러나 여전히 진주노회의 책임을 감당했다.
데스는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다. 어느 저녁, 그가 머물고 있는 시골 여관방에 14살짜리 아이가 침입했다. 그의 아버지는 재혼을 했는데 계모가 그 아이를 학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돈을 훔쳐서 집에서 도망치려고 결심을 했던 것이다. 데스는 그 아이의 아버지를 만나, 자기 집에서 한동안 아이가 머물 수 있도록 청했다. 데스는 그 아이를 고등학교에 보냈다. 그 아이는 열심히 공부했고,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기 시작했다.
1970년 12월 데스는 장로교 선교회들 간(間) 연합사무실(IPMO: Inter-Presbyterian Mission Office)의 회계로 초빙되었다. 그는 1971년 초부터 일을 시작했고 가족은 서울로 이사해서 1977년까지 살았다. 데스는 1972년 8월에 호주선교회의 대표가 되었다. 데스는 회계로서 호주선교회, 남장로교선교회, 연합장로교선교회, 캐나다연합교회 선교회의 업무를 다루었다. 동시에 그는 영어권 예배자들을 위해 매주일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통역했다. 또한 그는 예장 총회의 상임 총무의 영문서신 작성을 도왔다. 닐은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면서 예장(PCK)과 기독교교회협의회(NCC)의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신뢰와 존경을 받았으며 교회지도력과 관련되는 문제들에도 깊이 관계했다. 동시에 그는 연세대연합신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공부했다. 그는 한국에서 군사정부와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세력들 사이에 충돌이 커지는 시점에 호주선교회를 위해 한국의 정치 사회적 현장을 해석하는데 훌륭한 보고서를 썼다.
1977년 8월부터 1978년 7월까지 데스는 영국에 살면서 버밍햄 대학에서 목회학 디플로마를 공부했다. 이 다양한 학제 프로그램에서 그는 도시목회의 여러 차원들을 탐구했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미 남장로회의 국제 회원 자격으로 2년 반 동안 충남 평신도훈련소와 대전신학교에서 가르쳤다. 1981년 초 그는 서울의 총회에서 영어업무를 도왔다. 그리고 주중 하루는 대전신학교에 출강했다.
1979년 초부터 스테판과 엘리자베스는 투움바(Toowoomba)에서 사립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마저리는 한동안 호주에서 자녀들과 함께 지내야 했다. 데스는 1981년 호주로 돌아와서 브리즈번에 있는 안쪽 사우스 사이드 교구에서 목회를 했다. 1985년 데스는 1987년 초부터 일하기 위해 홀로 한국에 돌아갈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1987년 초부터 3년 임기로 장로회 신학대학 세계선교연구원 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닐 부인은 그와 동행하지 못했고, 브리즈번의 마터병원(the Mater Hospital)의 간호사로 취직을 했다.
그는 1987년 4월 10일부터 신학교와 IPMS에서 각각 하프-타임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또한 영락교회에서 파트타임 부목사로 예배를 영어로 통역하였다. 세계선교연구원에서 그의 활동은 일부 교육, 학생들의 지도와 행정을 포함했고, 12월부터는 해외학생들의 목회적 보살핌도 포함되었다.
세계선교연구원 원장 김용복 박사의 임기가 연장되지 않았을 때 그는 원장(서리)가 되었다. 연구원은 또한 예장 총회의 선교사들을 사전 훈련시키는 과정을 운영하였다. 그는 1988년 4월에 IPMO의 회계(서리)로서 그의 임무를 마쳤다. 그는 헤어져 사는 삶의 긴장이 가족들에게 너무 과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1989년 6월 15일에 그의 선교사 임무를 끝마쳤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