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102)
존 브라운 목사 (1933. 9. 24- )
한국명: 변조은 목사, 마산 1960-69; 서울 1969-72
존 브라운은 넬슨(Nelson)에 있는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해밀턴 고등학교와, 멜번대학교, 오몬드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그는 1957년 8월 31일 노마 비어와 결혼했고, 1960년 호주장로교선교회(APBM)로부터 한국선교사로 부름을 받기 전에 번스데일(Bairnsdale)과 오메오(Omeo)에서 목사로, 깁슬랜드(Gippsland)와 라트로브 벨리(Latrobe Valley)에서 기독교교육 직원으로 일했다. 그와 노마는 올 세인트 칼리지(All Saints Missionary Training College)에서 단기간의 선교훈련을 마치고 1960년 9월 25일에 두 살 된 아들 마이클과 함께 부산에 도착했다.
연세대학교 어학당과 개인교사를 통해 2년간의 언어훈련을 마친 존은 마산노회에서 선교사로서 사역을 시작했고 그 후 7년 동안 주로 거제도, 또한 창원과 김해에서 많은 교회들을 돌보았다. 그는 여건이 허락하는 데로 창신학교에서 가르치며 학교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존은 농부들이 가축개량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1966년도에 호주로부터 많은 수의 대형 흰 돼지와 사넨 염소(Saanen goats)들을 수입했고 그의 동료 권오성의 도움을 받아 번식과 분배 계획을 세웠다.
1964년부터 존은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에서 히브리어와 구약학을 가르쳤다. 그는 격주로 밤기차를 타고 여행했고 이틀간 학교에서 강의했다. 교육에 대한 부담이 점차 증가하자, 존은 1965년 휴가동안 로버트 앤더슨 목사(Rev. Robert Anderson)의 지도를 받으며 대학원 공부를 하였다. 그의 가족들은 1969년에 서울로 이사를 했고 그는 전임교수로 가르쳤다.
브라운은 가르치는 일 외에도 총회의 산하 선교 사역에 협조하면서 총회임원들과 가깝게 일하였다. 그는 선교회의 대표로 일했다. 1972년 브라운은 호주장로교선교회로부터 그 선교회를 계승하는 “에큐메니칼 선교와 국제관계부”(BOEMA)의 총무로 초빙을 받았다. 그와 노마와 가족들은 1972년 7월에 호주로 돌아갔다. 그는 실행 총무로서 1977년 장로교회가 교회 연합에 들어갈 때까지 섬겼다. 그 후에 세계선교위원회(DFWM: Commission for World Mission) 총무 그리고 1992년까지 호주연합교회 선교위원회(the Commission for Mission of 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의 총무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한국교회와 한국의 민주화ㆍ인권 투쟁과 밀접한 연결 고리를 유지했다.
브라운은 호주 안에서 한국인 교회들 및 타 인종 교회들을 발전시키고, 그들이 호주연합교회의 삶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일에 솔선하였다. 연합교회 원주민ㆍ섬주민기독자 회의(UAICC: the Uniting Aboriginal and Islander Christian Congress)의 발전을 지원했다.1]
1] UAICC는 1985년 호주연합교회의 결정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회의(Congress)는 호주연합교회의 일부이지만 자체 목적, 정책, 우선권에 대해 자결 원칙을 갖는다. 이 조직은 호주 전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제자로서 주님을 따르고 섬기려는 원주민들과 고립된 사람들을 하나의 친교로 연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재 이 조직은 호주에서 가장 큰 토착 NGO이다. 모든 주와 북부지역들 안에 조직이 활성화 되어있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