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109)
배리 막스웰 로 목사(1935. 12. 7)
한국명: 노승배 목사, 서울 1965-66; 울산 1967-77
배리 로는 코후나(Cohuna)와 멜번에서 자랐고 코후나와 질롱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그는 장로교회의 목회를 위해 공부했고 1964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1961년에 그는 간호사 조안 와렌(Joan Warren)과 결혼했다. 배리는 선교사 소명을 확신하고 있었고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조안과 두 딸 쉐린(Sherrin)과 안드레아(Andrea)와 함께 1965년 7월에 한국에 도착했다. 두 딸 헤서(Heather)와 지닌(Jeanine)은 한국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한 후, 배리와 조안은 가족들을 데리고 경상남도의 북동쪽에 설립되고 있는 새로운 산업단지 울산에 산업선교회를 세우기 위해 갔다. 그들은 한국인 가옥에 살았고, 딸들은 산업단지에 고용된 외국이주자 가족들을 위해 세워진 미국인 학교를 다녔다.
배리는 울산에서 세 분야의 활동에 참여했다.
첫째로, 그는 지역교회 지도자들, 전도사, 목사, 장로들과 함께 협조하면서 그 지역의 도시화와 산업화에 대응하여 적절한 목회를 하도록 도왔다.
둘째로, 그는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 공동체들과 함께 일하면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학습 프로그램을 지도했다.
셋째로, 그와 동료 신인균―마산에서 소년과 청년 때에 선교사들과 오래 교제해 왔던―은 그들이 활동하다가 만난 장애우들을 위해 자립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소아마비나 척추 결핵으로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도우려는 노력의 결과로 양지실업훈련소가 설립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배리와 조안, 신익현과 그 부인 김명숙은 기술 훈련 코스를 세웠고, 젊은이들은 시계수리, 라디오 및 전자제품 수리, 금은세공, 자개상감제조, 기타 기술을 배웠다. 그들은 또한 자존감과 삶의 독립성과 신뢰성을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훈련생들의 대부분은 직업을 구하거나 작은 전파상을 차렸고 경제적으로 자립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훗날 신익균의 지도력 아래 40년 동안 지속되고 발전되었다. 이 기관은 양지재활센터로 인정되었고 정부의 차원에서 재정적인 지원이 이루어졌고, 수백의 장애우들이 자신감을 갖고 자립하여 공동체 성원이 되도록 길을 제공하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센터에서 배운 깊은 신앙을 가지고 살았다.
그들은 1977년이 호주로 돌아갔다. 배리는 말리(Mallee)의 레드 클리프(Red Cliffs)에서 포도밭과 과수원에서 일하면서 자기 생계를 유지하고 지역교회에서 목회하는 원칙적으로 “노동 사제”의 길을 택했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