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65)
아미 프란시스 토마스 (프랭크) 볼란드 목사(1901. 5.21-1972. 3.28)
한국명: 부오란(夫五蘭) 목사, 진주 1929-33, 1936-39; 마산 1933-35
프랭크 볼란드는 스코틀랜드의 하윅(Hawick)에서 여섯 명의 자녀를 둔 가정의 셋째로 태어났다. 그와 가족은 1912년에 호주에 왔고, 그의 아버지 윌리엄 프랭크 볼란드 목사는 멜번의 스코츠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프랭크는 멜번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석사(MA)를 마쳤다. 그리고 그는 1928년에 스튜어드 교환 학생으로 스코틀랜드로 가서 에든버러 대학에서 교육학 디플로마를 받았다. 그는 1928-9년 호주기독학생 여름대회에서 그웨네스(Gweneth)를 만나, 1929년 7월 20일에 결혼하였다.
프랭크는 해외선교위원회의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고, 청년연합회(Fellowship Union)의 후원을 받았다. 볼란드 부부는 1929년 9월 16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도착 직후 서울에서 3학기 동안 한국어를 공부했다. 프랭크는 한국어에 큰 진보를 보였다. 그는 9개월 후에 인사말을 하고 대표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32년에 프랭크 볼란드는 진주 지역의 많은 교회들을 순회하는 목사로 섬겼고 그 후에는 사천에서 같은 일을 했다.
그 해, 아서 알렌 목사가 사망하자, 프랭크 볼란드는 마산으로 이전하여 라이얼 기념학교(창신)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재능 있는 교육자였다. 그에게 복음이란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고, 그러한 비전의 빛으로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산의 라이얼 학교의 부동산 안에 복음농업실수학교(Gospel Practical Farm School)를 설립하는 것을 감독했다. 상상력으로 충만한 이 계획은 18-25세의 젊은이들에게 예수의 삶과 교훈을 가르치고, 기독교신앙을 농촌의 삶, 농업, 공동체 건강, 농촌경제 등에 적용하는 것을 가르쳐서 농업 공동체들 안에 지도력을 배출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학교는 1934년 4월에 개교했고,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토지사랑”을 표어로 삼았다.
볼란드 가족은 1936년 4월 26일 휴가를 얻어 멜번에 도착했다. 프랑크 볼란드는 1936년 6-7월 멜번에서 “일본과 태평양”을 주제로 네 차례의 공개강연을 하였다.
그는 1936년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진주에 배치되었고 그때부터 1939년 3월에 그가 떠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시골 교회들을 순회하고, 지역교회지도자들을 위한 사경회에서 가르치고, 성경학원에서 가르치는데 사용했다. 그는 또한 목회를 위해 훈련받는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부인의 건강악화로 인해 1939년 3월 호주로 돌아갔다.
선교협의회는 아래와 같이 기록을 남겼다.
“그들 가정의 문화적인 생활과 그들의 어린가족들이 선교회의 사회적 삶에 끼친 결정적인 공헌은 우리가 크게 감사해야 하고 그리워하게 될 요인들이다. 프랭크 볼란드는 그가 맡은 것은 무슨 사역이든지 전심을 다해 일했다. 그는 이 복음농업학교를 통해 이루려고 했던 위대한 비전이 있었고, 아주 실천적인 방법 가운데 그 기초를 놓도록 도와주었다. 언어와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지닌 프랭크 볼란드는 우리가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볼란드는 아라랏 교회에서 목회하였고, 군목으로 일한 후에, 가든베일(Gardenvale)의 존 낙스 교회의 목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15년 동안 애들레이드 대학에서 학생연합(Student Union)의 상담자(Warden)의 자리를 지켰다. 그는 유능한 학생이었고, 목사였고, 그의 삶의 많은 시간을 청년들과 함께 보낸 예리한 관찰자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한 분이고,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의미를 그들의 상황 안에서 발견해야 하며, 특수한 사회정치적인 현실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증언해야 한다고 믿었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