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70)
에스몬드 월터 세실 뉴 목사(1900-1982. 5. 25)
한국명: 유영완(柳永完) 목사, 마산 1934-39
에스몬드 뉴는 잉글랜드에 태어나서 “빅브라더” 운동의 영향으로 호주로 왔다. 그는 깁슬랜드에 있는 한 농장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깊은 종교적인 체험을 경험한 이후에 선교사의 소명을 받은 것을 믿었다. 오몬드 칼리지 신학부를 졸업한 후에 그는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934년 9월 한국에 도착했다.
뉴가 한국에서 섬기는 동안에 점차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교회의 전도와 복음 설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들은 극도의 가난으로 고난을 겪었다. 많은 농민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땅들을 버리고 떠났다. 국수적인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동아시아 신질서를 주장하면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전시체제로 전환하였다. 그것은 모든 국민을 신사참배 요구에 굴종하도록 강요했다. 선교회는 이러한 요구에 응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스몬드 뉴는 두 가지 일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흙 사랑”이라는 표어 아래 젊은 농민들을 기독교 신앙과 사회학과 농업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복음농업학교의 고문(advisor)으로 일했다. 그는 또한 기독교 교육위원회 안에서 경남의 청년들과 함께 일했다. 그는 예술적 재능을 사용해서 삽화가 들어간 인쇄물을 출판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재정적으로 그 일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서 포스터, 카드, 그림들을 팔았다. 그는 탁월한 기획가였다.
그는 1940년 휴가 이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왕립호주공군(RAAF)의 군목이 되었고 1941-46년까지 공군에서 일했다. 그는 1950-51년에 연구와 구조임무를 위한 특수부서에 소환되었고 1952-53년에 말레이시아 버터워스(Butterworth)에서 RAAF의 군목으로 일했다. 그후 그는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아의 클레어몬트, 빅토리아의 알마 로드(Alma Road), 생킬다(St Kilda), 버레귤라(Birregurra), 그리고 에추카(Echuca)의 교구들에서 목회를 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조화를 이를 수 있는 탁월한 커뮤니케이터였고, 친구를 만드는데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선교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1959-68년에 장로교회 해외선교와 원주민 선교회의 총무로 일했던 때였다. 그의 지도력과 수고 아래 서레이 힐스(Surrey Hills)에 휴가-선교사들을 위한 집 “펀사이드”(Fernside)가 발전되고 확장되었다. 그는 또한 예술가이며 작가였고 놀라운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찰스 매클라렌 의사의 전기 ‘한국의 의사’(A Doctor in Korea)와 ‘부진한 순간이 아니었다’(Not a dull Moment)를 저술했다.
아래의 판화들은 유영완 선교사가 매크라렌 의사의 전기를 기록하면서 그 책에 삽입했던 그림으로 자신이 직접 제작한 작품이었다.
에스몬드는 자연과 인생 안에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을 즐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도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생명을 향한 전염성이 강한 열정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창조주와 그의 영광을 깨닫도록 했다. 그는 1982년 5월 24일에 사망했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