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77)
비다 메리 오맨 디커니스(1909. 8. 30)
한국명: 오위다(吳徫多) 선생, 마산 1938-39, 진주 1940-41
비다 오맨은 빅토리아, 드로우인(Drouin)에서 1909년 8월 30일에 태어났다. 그녀는 호필드 학교(Hopefield School)에서 교육을 받았다. 1931년 비다는 멜번에서 공부하기 위해 머토아(Murtoa)를 떠났고, 1933년에 디커니스 훈련소에서 공부하였다. 비다 오맨이 선교사로 선발되기 위해 지원하였다는 사실은 7월 3일 PWMU 4분기 회의에 보고되어 있다. 그녀는 미래의 훈련에 관해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디커니스 훈련소 과정을 마친 후에,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녀는 몇 가지 과목을 어려워했고 수업을 놓치기도 했다. 그녀는 대학을 다니면서 기독학생연합(Student Christian Union)의 해외봉사단(Foreign Service Group)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1937년 말경에 BA학위를 마칠 수가 없었고, 휴가 때까지 학위공부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1938년 3월 15일에 한국에 도착했고 마산에 배치되었다. 서울에서 얼마동안의 언어공부를 마친 수, 그녀는 인문학 과정의 부분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던 일본어를 공부하도록, 일본에서 1년을 보내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1938년 9월부터 1년간을 도쿄에서 보냈다. 한국으로 오는 도중에 그녀는 진주로 파견되었고 거기서 더 한국어 공부를 수행했다. 1940년 말, 그녀는 거창으로 이전했다.
호주선교사들은 철수해야만 한다는 4월 16일 해외선교위원회와 PWMU의 결정에 따라 그녀는 1941년 7월 호주로 돌아왔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으로써 한국에서 그녀의 활동기간은 이렇게 짧아졌고, 이것은 사실상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비다는 호주로 돌아와서 학사학위(BA)를 마칠 때까지 통신으로 학업을 지속했다. 그녀는 18개월 동안 밀두라(Mildura) 장로교회에서 디커니스로 섬겼고 1943년 7월 28일 그녀는 오랫동안 펜팔 관계를 유지했던 코퍼럴 잭 로버츠와 결혼하면서 그 일을 그만두었다.
1917년 8월 호주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은 해외사역위원회(Foreign Service Committee)로 개편되었다. 이것은 SVM의 자원자가 줄어들면서 일반 직업을 통해서도 선교지에서 삶을 헌신하려는 사람들을 포함시키려는 것이었다. 1921년 호주 SVM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