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78)
아일린 플러렌스(린) 와킨스 디커니스(1912. 5. 30-1989. 11. 25)
한국명: 왕영혜(王永惠) 선생, 통영 1940-41, 부산 1952-53, 마산 1953-56
아일린 와킨스는 질롱의 세인트 데이비드 교회의 와킨스 목사의 딸이었다. 그녀는 장로교소녀협의회(the Presbyterian Girls’ Association)의 열정적이고 인정받는 지도자였고, 그녀가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을 때는 이 단체의 부회장이었다. 그녀는 멜번 대학에서 학사(BA)와 교육학 디플로마를 마친 후, 롤런드 하우스에서 디커니스로 훈련을 받았고, 포트 멜번에서 3년 동안 디커니스로 사역했다.
그녀는 1940년 5월 한국에 도착하여 임시로 통영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서울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던 중에 1941년 5월 선교사 철수령에 따라 호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부터 1945년까지 그녀는 장로교여성청년회를 위한 순회총무로 일했다.
1946년 1월, 와킨스는 중국에 파송되는 네 명의 선교사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운남성(Yunnan) 키엔슈(Kien Shui)에서 사역했고 1950년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철수했다.
1951년 그녀는 다시 한국으로 파송되었으나 한국 당국으로부터 입국 허가를 받기까지 8개월을 일본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 후 4년 동안, 그녀는 언어 공부를 더하면서, 대체로 마산 안에서 구호사업과 훈련, 그리고 교양교육을 담당했다. 이 시기는 와킨스에게 좌절의 때였다. 그러나 남편은 감옥에 가고, 길에서 쌍둥이를 낳다가 일신병원에서 간호를 받게 된 한 젊은 여인인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일신병원은 나에게 다시 건강을 주었어요. 왕 선생(와킨스)은 나에게 삶의 목적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휴가를 마친 후 건강악화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그녀는 교사들을 교육했고, 19년 동안 여러 학교에서 가르치며, 퀸 빅토리아 병원과 부인병원에서 디커니스로 사역했다.
그녀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타인을 섬기기 위해 살았던 인생이었다. 그녀는 곤경과 건강악화를 견디어 내었고 실망을 사역의 기회로 바꾸었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