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79)
알비나 아그네스(비나) 맥납(1915. 10. 6)
한국명: 맥비나 선생, 부산 1950, 1952-58, 마산 1958-68
비나 맥납은 1948년 6월 빅토리아 해외선교위원회에 선교사를 지원했다. 1949년 초에 그녀는 선교 훈련을 받도록 허락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멜번성경학원의 과정을 마쳤고, 1년간 롤런드하우스에서 교육을 더 받은 상태였다. 그녀는 전도자와 교육선교사로 부여받은 임무를 따라, 조지 율과 발레리 율, 레인 목사 가족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한국을 향해 떠나 1950년 4월 10일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녀는 즉시 서울에 언어학교로 갔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그녀는 일본으로 철수했고, 영국연방점령군의 휴식처였던 에비수(Ebisu)에서 임시로 살았다. 그 즉시 비나는 가루이자와(Karuizawa)에 있는 한국어 학교에 등록해서 일 년을 공부했다. 비나는 언어를 공부하고 한국의 재입국 허가를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한국인 교회에서 일했다.
비나는 1952년 후반 한국에 입국해서 3년을 부산에서 지냈다. 그 3년은 쉽지 않았다. 장로교회는 여러 개의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비나는 일신병원에서 일하지 않으면서 부산의 집에 남은 유일한 호주 여성이었다. 그녀는 매주 나환자요양소를 방문했다. 그녀는 구제품을 분배하고 통영과 거제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했다. 그녀는 또한 농업실수학교에서 여성들을 위한 강의를 했고, 주일학교 교육을 위하여 시각적 도움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맥납은 1958년에 마산으로 이전하여 수 년 동안 많은 시간을 들여 거제, 고성, 통영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그녀는 조사 하점동 권사와 함께 여행하였고 때로는 배와 지프차를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구제사역은 장애인, 나환자, 과부, 농촌의 빈민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또한 각 지역의 중심지에 있는 성경구락부들을 방문했다. 비나는 주일학교 교사를 훈련시키고 남는 시간에 영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교회 내부의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고, 세계교회협의회 관련 교단에 소속된 모든 선교사들로부터 이전의 친구들이 소외되는 것을 보면서 힘들어 했다.
1960년대 비나는 특히 마산, 통영, 고성, 거제 지역들에 속한 교인들을 위해 성경통신과정을 발전시켰고, 그것을 실행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했다.
비나는 1967에 세이브더칠드런기금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호주선교회정기회(KFC)는 그녀와 그 사역에 대해 감사의 글을 남겼다.
KFC는 미스 맥납의 오랫동안의 충성스런 복음 사역에 감사를 표현하며 이 글을 기록한다. 미스 맥납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 왔고 사람들을 불러 그에게 헌신하도록 했다. 미스 맥납은 한국전쟁의 참혹한 시련을 경험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녀는 부산과 마산시 지역에서 전도 선교사로 섬겼다. 아마도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베푼 자비로운 도움과 특별히 통영지역에서 그녀의 순회사역과 전도부인들을 위해 했던 사역과 여성설교협의회, 그리고 특별히 성경통신과정을 시작하고 수행한 일 때문에 가장 잘 기억 될 것이다. … 우리는 미스 맥납에게 그녀의 이타적인 사랑과 충성된 사역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현하며, 하나님의 축복이 미래의 사역에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비나는 1968년에 한국을 떠났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