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82)
캐서린 마가레트 맥켄지(1919. 11.21-2005. 2.10)
한국명: 매혜영 선생, 부산 1952-78
캐서린 (캐스) 마가레트 맥켄지는 1915년 11월 25일, 선교사 부모인 제임스 노블 맥켄지와 메리 맥켄지 사이에서 다섯 명 중 둘째로 태어났다. 4명의 작은 소녀들은 평양의 외국인 학교를 다녔다. 그들의 막내 동생 지미는 두 살 때에 죽었다. 캐스는 공부를 지속하기 위해 1931년 언니 헬렌과 함께 호주로 돌아왔다.
장로교여학교를 졸업한 후에 캐스는 간호학을 공부했고 멜번의 아동병원에서 기초훈련을 받았고 대학원에서 산과학과 유아복지를 전공하고 자격증을 받았다. 그녀는 퀸 빅토리아 부인병원에서 조산 훈련을 받았고, 훗날 그 병원의 개인지도 간호사(Tutor sister)가 되었다. 캐스는 1940년에 한국의 간호사로 임명되어 요코하마에 도착했으나 전쟁분위기로 한국에 갈 수가 없어서 호주로 돌아왔다.
1945년 그녀는 언니 헬렌 맥켄지 의사와 함께 중국남서부 운남성으로 갔고, 그곳에서 5년 동안 중국그리스도교회(CCC)의 후원을 받아 오래된 도교 사원을 개조하여 병원을 세웠다. 그 병원은 몇 차례 공격을 받았고 그들은 1950년 6월 중국을 떠나야 했다. 그들은 중국을 벗어나 미얀마를 통과하는 동안 도보, 지프, 비행기, 배를 이용해야 하는 4개월 동안의 고문과 같은 여행을 한 후에 호주에 도착했다.
헬렌과 캐스는 1951년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고, 1952년 2월 12일에 도착했다. 그들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 피난민으로 가득 찬 부산, 의료시스템이 중지된 곳으로 돌아갔다.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은 여성들에게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제공하는 것과 조산-간호사들과 산부인과를 전공한 여의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을 할 만한 건물을 찾을 수가 없어서 유치원 건물을 빌렸는데, 그들이 작은 꼬마 때에 다녔던 바로 그 유치원이었다. 그 시설은 아주 불편했고 후에 부가시설들이 건축되었다. 일신부인병원은 그렇게 1952년 9월 17일에 시작되었다. 그렇게 작은 씨앗이 한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바쁜 산부인과 병원으로 자라났다.
일신병원 이야기를 말 하지 않고 캐스의 인생에 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헬렌에 관해 말하지 않고 캐스에 관해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병원의 설립은 그들이 함께 나눈 삶이며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확신에 의해 동기가 유발되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는 겸손하게 겸손한 사람들에게 오셨다. 그는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하고, 고난당하는 사람과 일체가 되었다. 그는 병자와 고난당하는 사람을 치료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예수님의 우선권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따라 자신들의 우선권을 결정하게 되었다.
캐스는 임시변통에 능했다. 그녀는 장비나 사람이나 유효한 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미래를 생각했고, 실력 있고, 헌신적이고 존경받는 조산사들을 훈련해 내는 자신의 주요 목적을 놓치지 않았다. 그 임무에 대해 그녀는 놀랄 만큼 잘 갖추어져 있었다. 처음에 간호사 감독자로서 캐스는 행정과 교육에 관련했으나 그녀는 곧바로 이 분야의 책임들을 위임하였다. 비록 이 모든 영역에서 그녀는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전에는 늘 병원에 있었고, 오후에는 강의실에 있었고, 밤에는 종종 위급상황으로 불려 나갔다. 그녀는 은퇴할 때까지 비정상 조산에 대해 강의했다. 그녀는 이론과 임상 양쪽에서 탁월한 간호교육자였다. 그녀의 지도아래 1034명의 조산-간호사들이 훈련을 받았다. 캐스는 모든 졸업생들을 파송하면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가서 봉사하라고 격려하고 도전하였다. 한국의 조산 간호학에 대한 소중하고 여전히 지속되는 공헌은 한국어로 쓰인 산파학 교본의 저술이었다. 이 책은 그녀가 부산을 떠나는 날 출판되었다.
개인적으로 따뜻하고, 친절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랑스러운 사람인 캐스는 부드러운 매너와 더 부드러운 손을 지니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강한 의견의 소유자였고, 항상 그녀가 섬기는 위원회에 많은 것을 공헌하였다. 그녀는 도전하는 연설가였고 설교자였다. 그녀가 재직할 당시 일신병원에서는 7만 명의 아기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에게 모든 아기들 각자가 새로운 기적으로 보였다.
1962년 캐스는 영국제국메달(BEM)을 수여받았고, 한국의 총리는 인권에 기여한 공로로 그녀를 표창했다. 그녀는 1975년에 간호인들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메달을 포함하여 도합 네 번의 상을 받았다. 그 메달은 그녀가 한국인 간호사의 자격으로 받은 것이기에 특별히 캐스를 감격시켰다.
캐스와 헬렌은 현대 여권운동이 힘을 발휘하기 훨씬 이전부터 여성인권의 옹호자들이었다. 그들은 부자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여성들도,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타종교의 사람들도 동일한 차원의 보호와 전문치료와 간호를 제공받아야 한다고 확신했고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그 당시 자격 있는 여자 의사들이 드물었고 조산사들도 자격을 갖추지 못해 존경을 받지 못하던 때에, 그들은 여자 의사들과 조산사들을 위해 전문적인 인정과 경력을 제공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병원 안에서도 전문기술을 갖춘 조산사들에게 의사들이 마땅한 인정을 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한국정부가 그녀에게 인권에 기여한 표창을 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