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85)
찰스 리치먼드 (딕) 케년 목사(1923. 3. 28)
한국명: 강영도 목사, 부산 1953-54; 동래 1955-58; 서울 1960-64.
딕은 퀸즐랜드 애서튼 테이블랜드(Atherton Tableland)에서 자라났고, 차터스 타워스(Charters Towers)에 있는 쏜버러 칼리지(Thornburgh College)에서 공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그는 북 퀸즐랜드에서 방어 도로와 비행장에 대해 조사했고, 왕립호주공군에서 3년 동안 유럽을 비행하는 승무원으로 복무했다.
그는 1947년에 퀸즐랜드 대학과 에마뉴엘 칼리지 신학부로 이어지는 6년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세계학생원조(World Student Relief)를 촉진시키는데 참가했고, 1947년에 유니세프 자선의 날을 성공적으로 시작했다.
1952년 1월 26일 그는 타이스 슬라티어(Thais Slatyer)와 세인트 앤드류 교회에서 결혼을 하였고, 이듬해 1953년 1월 17일에 브리즈번 노회에서 한국선교사로 안수를 받았다.
케년 부부는 3월초에 화물선 ‘창테’(Changte) 호를 타고 떠나서 1953년 부활절 월요일에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1954년 12월까지 부산진에 있는 선교회 공관에서 살았고 동래로 이주하여 1959년 휴가 때까지 그 곳에 거주하였다.
그 당시 한국에서 언어 공부를 계속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한국어 학교도 없었고, 조직된 수업과 학생을 위한 교재도 없었다. 케년 부부는 1953년의 많은 시간을 북에서 내려온 한 피난민 목사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그는 미국인 선교사를 위해 일을 했었는데 당시 선교사는 휴가를 떠난 중이었다. 그 미국선교사가 1953년 9월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 왔을 때 그 한국어 선생은 떠났고 서울로 들어가서 그 미국선교사를 만났다.
1954년에 자격 있는 선생 없이 5개월을 보냈고, 그 후 서울에 새로운 언어학교에서 전 학기를 공부한 후에, 딕은 동래로부터 농촌 지역을 섬기려는 소망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선생-조사를 잘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다행히 김보라(바울 김)의 도움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그는 교사, 장로, 통역자로서 넓은 경험이 있었고 선교회의 사역에 오랜 이해가 있었다.
동래에서 지내는 대부분 동안, 딕은 경남노회와 함께 일 하는 유일한 목사 선교사였고, 주로 농촌교회들과 성경구락부와 함께 사역했다. 그는 주말에는 상애원 나환자요양소를 포함하여 농촌과 근교의 교회들을 방문했다. 그는 심방을 초대 받았을 때, 기도 혹은 설교를 하였다. 그는 또한 한국전쟁 이후의 시기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품을 나누어주는 일에 참여했다.
그는 경상남도 전역의 농촌과 마을 교회 지도자를 위한 평신도 지도력 훈련 과정을 조직하고 가르쳤다. 그는 “교회의 본성과 선교”라는 주제에 대해 일련의 강의들을 준비하고 여러 차례 강연했는데, 사도들의 기초에 세워진 교회, 살아있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일치와 거룩성, 교회의 선교 등이었다.
1960년 휴가 이후, 케년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고 딕은 대한성서공회의 부총무로 4년간 일했다. 이 기간 대한성서공회는 현대어번역을 출판했다. 그들은 1964년 호주로 돌아왔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