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86)
타이스 윌마 케년(본명: 슬라티어) 부인(1926. 12. 6)
부산 1953-54; 동래 1955-88; 서울 1960-64
타이스는 타운스빌(Townsville)과 투움바(Toowoomba)에서 자랐고, 장로교여학교 ‘페어홈’(‘Fairholme’)에서 공부를 마쳤다. 1945-47년 퀸즐랜드 대학을 다닌 그녀는 인문학에서 우등학위를 받으며 졸업했다.
1950년 타스마니아 교회협의회는 타이스에게 여자대학생들이 머물 수 있는 기숙사인 제인 프랭클린 홀(Jane Franklin Hall)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 홀은 지금은 타스마니아 대학의 일부가 되었다. 타이스는 제인 프랭클린 홀의 창립 교장으로서 두 해를 섬겼다.
1952년 그녀는 퀸즐랜드로 돌아와서 1월 26일에 딕 케년과 결혼했다. 케년이 신학공부를 완료했을 때 그리고 국내선교사로서 교구에서 일하고 있을 때, 카이스는 남편을 지원하였다.
그 커플은 한국에서 섬기는 동안 세 명의 자녀-데이비드 리치먼드 (1954, 부산), 린다 조안(1956, 동래), 피터 브루스(1957, 동래)를 낳았다. 네 번째 앤드류 토마스는 그들이 호주로 돌아온 후 1965년에 태어났다.
1953년 그들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에 경상남도에는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거의 400만명의 난민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미국인, 캐나다인, 영국인 선교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타이스와 딕은 1953년 말까지 호주선교회 공관에서 이러한 선교 일꾼들의 일부와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그해에 딕은 구제 활동을 위한 운전자로 요청을 받고 떠났을 때, 타이스는 퀸즐랜드로 보내는 정기 회보의 출판을 도왔다.
1954년 말, 약 10주 동안 새 아기와 조력자를 포함한 전 가족은 서울에 있는 캐나다 선교 하우스에서 살았고 타이스와 딕은 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를 공부했다.
1954년 말에 그들은 동래로 이사했고, 타이스는 YWCA 농업실업학교에서 외국인 사역자들을 도왔는데, 그것은 그녀가 한국에서 머무는 동안 줄 곳 지속된 연결고리였다. 그 해 타이스는 가정교사를 두고 한국어 공부를 계속하였고, 딕의 구제 사역을 지원했다.
1957년에 첫째 아이가 세 살이 되자 그녀는 아이와 함께 버스를 이용하여 부산진 유치원을 다녔다. 그 건물은 한동안 일신병원으로 사용되다가 그때는 원래의 유치원으로 다시 사용되고 있었다.
1960년 4월, 딕이 성서공회로 파견되었을 때 온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1961년 타이스는 서울외국인학교에서 유치원을 책임 맡게 되었다. 이 학교에는 소수의 한국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부모들이 일 때문에 외국에 데리고 갔던 아이들이었다. 그녀 역시 한 사람의 학부형으로 초등학교의 활동에 참여했다.
그 가족들은 1964년에 호주로 돌아왔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