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89)
프레드 터비 목사(1926. 1. 4∼2002. 1.25)
한국명: 도은배 목사, 한국 1955-61
프레드 터비는 시드니 출신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예농업에서 견습을 했다. 그 후에 세인트 앤드류 신학교에서 목회자 수업을 받았고 안수를 받았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1955년 4월 16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그해의 나머지를 서울의 어학당에서 공부했고, 교회와 시골마을 그리고 농촌의 한국가정을 통해 다른 배움을 얻었다.
그는 비록 심한 시각 장애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훌륭한 지식을 얻었다. 그는 한동안 삽교에 있는 평등공동체개발계획(Coordinated Community Development Project) 안에서 한국교회세계봉사(KCWS)와 함께 한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그 후에 KCWS가 진주에 비슷한 계획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3개월 동안 전임으로 파견되었다.
터비는 마을 교회들의 당회장으로 뽐내는 노회 목사로 일하기보다는 마을의 발전을 위해 일하기를 원했다. 그는 결코 노회원이 되지는 않았고, 마을 교회 지도력 개발을 위한 과정에서 가르쳤다. 그의 사역의 대부분은 엄격하게 교회의 삶의 밖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을 교회 교인들의 삶에 대해 세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프레드는 농촌개발과 관련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농촌의 일터에 참여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그러한 아이디어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교회와는 거의 접촉하지 않았고 교회는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이슈들에 대해 그는 나머지 선교사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는 큰 유머감각이 있었고 마루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플롯을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교회 조직과 거리를 유지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밝혔다.
그는 한 지역에 동일감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착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일은 특성상 지역의 세 노회들과 경남지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만일 한 노회와 너무 밀착하면 노회에 의해 당회장의 임무를 지도록 압력을 받거나 아니면 그 노회 안에서 큰 경비가 드는 기관들을 설립하는데 후원하라는 압력을 받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설사 그가 농업전문가로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누구도 그가 하려고 하는 근거를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는 어떤 화려한 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립할 수 있고, 자전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 힘을 다른 비슷한 지역에 확장시킬 수 있는 수준에서 지역 리더십에게 속한 과거를 지향하는 농촌공동체의 발전이다.
다른 선교사들은 터비가 위의 2번 조항에서 주장하는 바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터비의 가치 있는 노력은 교회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교회지도력을 교육해서 그러한 “풀뿌리” 접근의 필요와 가능성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되어야 하다고 생각하였다.
프레드는 매우 독립적이었고 그의 주장은 오히려 고독한 것이었으나, 그의 노력은 몇 곳의 농촌 지도자들을 격려해서 그가 주장하는 비전과 아이디어들의 일부를 택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지역교회 지도자들은 그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는 1961년 6월 호주로 귀국했고, 채플린 사역을 수행했다. 그는 1965년 12월 10월에 에드나 대쉬(Edna Dash)와 결혼했고 그들은 두 명의 자녀-루스(Ruth)와 알란(Alan)을 두었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