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통해 본 신과 인간 이해
인문학은 성찰하는 삶
인간과 동물들을 구별하는 기준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인간과 동물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차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맹자는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지극히 미미한데,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내버리고 군자는 그것을 보존한다”고 가르쳤다. 아마도 인간이 인간이외의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점은 인간만이 자신을 성찰하는 존재라는 것일 것이다. 인문학의 중요한 목표중의 하나는 인간의 본질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것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게 되면, 보통 사람은 한 번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 시간은 그 동안 자신을 사로잡아 왔던 돈, 물질, 권력, 명예들로부터 자신을 객관화해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일 것이다. 시인 윤동주도 그의 참회록을 통해 그의 인생을 회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속에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 /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거울속에 나타나 온다. _ 윤동주, ‘참회록’
성 어거스틴도 그의 나이 40을 넘어서 어느 날 자신의 죄악된 과거를 참회하며 성찰한다. 그리고 그의 방탕하고 무절제한 인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래서 어거스틴 ‘고백록’의 대가 선한용 교수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단순히 ‘참회록’으로 번역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참회”는 개인의 잘못과 죄를 참회하고 뉘우치는 의미뿐이지만, “고백록”에는 신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깨달음과 자신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 신을 찬양하고, 세 번째는 청중과 독자들에게 신앙과 삶을 권면하는 삼중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파한다.
또한 역사가 헨리 채드윅이 지적한 대로 어거스틴이 스스로 정한 라틴어 ‘Confessiones’에는 찬양과 참회의 이중적인 뜻이 둘 다 담겨있고, 책의 내용 역시 찬양과 고백의 내용 두 가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참회록 보다는 고백록이 더 어거스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인간이 돌이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성찰하고 자신의 인생을 반추여서 후손들에게 교훈과 정신을 남겨 줄 수 있다면 이것보다 의미 깊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 하나로 이미 기독교역사와 세계역사에 큰 공헌을 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어거스틴의 생애
어거스틴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그의 저서인 ‘고백록’(Confessiones)과 제자 포시디우스가 쓴 전기를 통해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한 그가 쓴 책에 대한 자전적평가의 책인 ‘재고록’(Retractiones)에서도 그의 삶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AD 354년, 지금의 알제리에 해당하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는 이교도였으나,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아내 모니카의 영향을 받아 죽기 전 세례를 받았다.
넉넉한 가정형편은 아니었지만 어거스틴의 아버지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성공과 출세를 위해 어거스틴을 교육시켰다. 어거스틴은 고향과 인근도시 마다우라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 후 카르타고에서 상급 과정의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370년에 고향 유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어거스틴은 고향을 떠나 로마, 카르타고 등에서 수사학을 공부했다. 수사학 등의 공부는 그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는 과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르타고에서 어거스틴은 로마의 정치가 케케로의 글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그는 재산이나 명성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철학에 매료된 어거스틴에게 기독교신앙은 ‘문화인’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비철학적인 것으로 비쳐졌다. 그래서 우연히 마니교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원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마니교에 쉽게 빠져 들었다.
하지만 마니교에 대한 열정도 그에게 오래 가지 않았다. 그가 품고 있었던 ‘세상에 가득한 악’에 대한 의문에 대해 대답해 주기에는 마니교의 이론적 체계가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는 마니교를 떠나게 되고, 어거스틴이 28세가 되던 해에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갔다가 로마에서 다시 밀라노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 어거스틴은 그 당시 밀라노 근방에서 가장 뛰어난 성직자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를 만나게 된다. 우연히 그의 설교를 듣게 된 어거스틴은 그의 지혜와 지식에 매료되어 갔고, 점차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벗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암브로시우스에게 빠져든 어거스틴은 그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던 “악”에 대한 의문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당시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 저작들을 읽으며 기독교 사상에 대해 사상적으로 점차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밀라노의 정원을 거닐던 어거스틴은 아이들이 정원에서 놀며 노래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들고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 그 목소리에 이끌려 그는 가까이 있던 성서를 들고 읽었다. 그 때 펼쳐진 성경은 바로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다.
“그 말소리가 소년의 것인지 소녀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계속 반복되었던 말은 ‘그것을 집어 들고 읽어라, 그것을 집어 들고 읽어라’라는 후렴이 반복되는 노래였습니다. 나는 곧 눈물을 그치고 안색을 고치어 어린아이들이 어떤 놀이를 할 때 저런 노래를 부르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전에 그런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성서를 펴서 첫눈에 들어온 곳을 읽어 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경험을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밝히고 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그의 이 고백을 후대에 그가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신학적 서술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어거스틴은 기독교에 대한 확신을 얻었고, 드디어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서른 둘의 나이였다. 그 뒤 어거스틴은 화려한 도시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기도하고 사색하는 공동체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391년 봄, 카르타고 다음가는 도시인 힙포교회의 간청으로 힙포교회의 사제가 되고 그로부터 4년 뒤 주교가 되었다.
그 후 어거스틴은 일흔여섯의 나이로 삶을 마칠 때까지 무려 100여권의 철학, 신학 책, 그리고 논문과 같은 무게를 가진 그의 218통의 편지, 500권 이상의 설교집을 남겼다. 어거스틴은 가톨릭, 개신교 모두에게 존경받는 학자이며, “어거스틴 이전까지의 모든 신학과 사상이 어거스틴에게 흘러 들어왔으며 어거스틴을 통해 후대로 흘러 나갔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전체 기독교에 남긴 그의 공적과 공헌은 가히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섭렵한 사상들 보기
어떤 인간이든 진공상태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존재하는 인간은 없다. 한 인간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정환경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 문화, 친구, 공동체를 통해 어떻게 다듬어지고 발전해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어거스틴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떠한 사상들을 섭렵하며 어떠한 삶의 여정들을 거쳤는지를 바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 의하면 그의 젊은 시절 그리고 그의 평생에 그를 따라다니고 영향을 준 사상들이 있다. 바로 이것들이다.
– 마니교 사상(Manichaeism)
1) 마니교는 마니(Mani)가 창시한 종교로 페르시아의 사산왕조(AD 226-651년) 사이에 세계적으로 융성한 종교였다. 동쪽으로는 중국까지 서쪽으로는 로마제국까지 전파되어 이들 지역에 마니교 교회와 경전이 존재하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영지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2) 마니교는 유대교, 영지주의, 기독교,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모두 복합한 종교로 현실을 부정하고 일방적으로 내세를 지향하는 종교이다.
3) 마니교는 선과 악의 이원론적인 관점을 가르쳤다. 비록 전능하지는 않지만 영원하고 강력한 힘인 선한 힘(최고신 God)에 반(半) 영속적인 힘인 악한 힘(사탄)이 대항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현실세계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대립해 싸우는 공간이다.
4) 마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결함 있는 창조물들에서 발견되는 악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며 사탄이 신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킴에 따른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악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악한 신의 강요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인간들이 선한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악한 신에 의한 육체적 욕구를 억제하고 이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
–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1) 신플라톤주의는 3세기경 플로티노스에 의해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계승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개된 사상체계로 플라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등 고대 여러 학파의 사상을 종합화했다. 기본적으로는 이데아계–현상계라고 하는 플라톤의 2원론을 계승하고 있으며 특히 이데아계를 세분화하여 전 존재를 계층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특징이다.
2) 이데아계를 세분할 때 ‘1자’(一者) – ‘누스’(지성 또는 정신) – ‘프시케’(영혼)의 3원리로 설정된다.
3) 악의 근원은 물질과 육체에 있다. 그러므로 금욕적이고 정신적인 삶을 강조했다.
4) 선과 악은 서로 독립되어 있으면서 대립하는 실체가 아니다.
5) 선의 결핍이 바로 악이다.
– 점성술(Astrology)
1) 점성술은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천문학상의 현상과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믿는 신앙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2) 쉽게 말해 인간의 생과 사와 같은 모든 운명이 하늘의 별자리 운행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운명론이다.
– 회의주의(Skeptism)
1) 서양의 철학적 회의주의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하였다.
2)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소피스트들은 부분적으로 회의론자였다.
3) 인간은 결코 진리를 얻을 수 없으며 다만 진리의 개연성이나 근사치만을 알아낼 수 있다.
4) 인간이 느끼는 일체의 감각이나 언어는 매우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다.
이상은 인간 어거스틴이 젊은 날 몸담거나 섭렵했던 사상들이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 같은 사상은 그의 평생 그를 다듬고 발전해 갈 수 있도록 영향을 준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고백록은 고백록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그의 참회의 자서전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물론 어거스틴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인상적인 기록을 회고하며 고백록을 서술하고 있다. 그가 고백하고 있는 그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은 분명 그의 작품에서 어느 정도 중요한 역할들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고백록’의 중심으로 읽혀져서는 안된다.
어거스틴은 그의 자서전(Biography)을 쓰려고 ‘고백록’을 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의 생애를 살피며 신과 인간에 대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고백을 쓰려고 한 것이다. 바로 어거스틴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사상적이고 신학적인 주제였지 자신의 자서전((Biography)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필요한 경우에는 그의 ‘고백록’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서술을 빼기도 하고 생략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고백록’은 어거스틴 개인이 경험한 그의 인생 사건들에 대한 자전 적인 서술로서의 참회 또는 자서전이 아니라 신학자 어거스틴의 철학적, 신학적 사상이 담긴 그의 신학작품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고백록’의 구조를 따라가면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어느 정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고백록’ 1-9권까지에는 분명 그의 인생 여정이 나타난다. 그의 유년기 어린 시절부터 청년시기까지 그가 저질렀던 악한 행동들, 죄와 방탕으로 얼룩져 있을 뿐 아니라 마니교에 빠지고 어머니 모니카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고백되고 있다. 그러나 10권에서 13권에서는 기억, 시간, 창조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들을 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도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자선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의 ‘고백록’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단순히 참회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그의 ‘고백록’을 통해 자신의 악한행동과 선한행동을 말함으로 공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 하나님께 인간들이 돌아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자서전적인 이야기는 이차적인 것으로 자기도 모른 채 자신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고 신의 경륜을 드러내기 위해 쓴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 이전의 교회는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는 교회였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는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는 실존적 결단을 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이 황제가 되고 나서는 박해가 끝났다. 오히려 기독교는 로마제국 내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는 종교가 되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내적인 결단도 없이 교회에 물밀듯이 들어오게 되었다.
더욱이 380년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347-395)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선포한 후에는 그 정도가 더욱 가중되었다. 소위 기독교시대(Tempora Christiana)가 도래 된 것이다. 이제 로마시민으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이 후로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가늠해 볼 때, 어거스틴에 비추어진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볼 때 그는 제국의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슴속 깊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다.
신의 은총과 관용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보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권부터 9권까지이다. 여기의 내용은 자신이 경험한 회심을 정점으로 지난 살아온 날들을 회고하며 그 방탕과 교만의 그 세월 동안 신이 자기에게 어떻게 관용을 베풀었는지 신의 은총을 찬양한다. 특히 그의 고백록의 백미라고까지 일컬어지는 8권의 무화과나무 아래서 회심하는 장면은 비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무화과나무 아래서의 회심장면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결정적이지만, 그의 고백록을 보면 이에 못지않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회심직전 그가 스스로 자기 성찰을 하는 고백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8권 7장에서 한 장 전체를 아예 ‘자기성찰’이라는 주제로 자신을 신 앞에서 객관적으로 고찰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자기성찰은 한 인간이 종교적으로 변화하는 시점에 서일 뿐 아니라, 자신이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단계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0권에서는 회심의 주체인 자아와 그의 기억을 통한 성찰을 통해 시간과 영원에 대해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통찰하는 내용이다.
마지막 11권부터 13권까지는 창세기 해석을 통해 그 당시 유행했던 다른 사상들을 반박하고 기독교신앙을 변증하고 있다. 이처럼 고백록은 자서전이야기만 있는 참회록이 아니라 어거스틴이 자신의 인생을 신 앞에서 성찰하며 기독교신앙을 호교하기 위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신학적, 철학적 사상집이라 할 수 있다.
자기성찰이 선행되어야
“오, 주님,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나를 나 자신으로 돌이켜 자기 성찰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나를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갈 곳은 없었습니다.”
왜 신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자기성찰을 하도록 한 것일까? 그것은 신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결정적 순간에는 반드시 자기성찰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기 스스로를 대상화 하여 바라볼 수 있는 반성적 시각없이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받은 칼빈도 그의 기독교강요 제1권 1장에서 그 유명한 논지를 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자기성찰을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신 앞에 무릎을 끓고 그동안 이렇게 더럽고 참혹한 자신에게 끝없는 관용과 은총을 베풀어 온 신의 사랑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자기성찰 없이 본래부터 착하게 사는 것은 천진무구한 아이로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고, 자기 성찰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탈을 썼지만 금수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자기성찰을 회피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고 표현한다.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자신의 등뒤에 놓아두었다는 그의 고백은 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성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은 부끄러운 자신을 똑바로 대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어거스틴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자신을 대면하는 편을 선택하겠다고 하며 신이 부여한 성찰의 기회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놓으셨습니다.”
어거스틴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자기 등 뒤에 놓아두었던, 그토록 회피했던 자기성찰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그의 변화된 태도는 무엇 때문일까?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의 시간의 관념에 대한 이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우리 육체가 사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와 영혼이 사는 마음의 시간인 ‘카이 로스’의 시간을 언급한다. 그에게 자기성찰을 가져오게 한 것은 그는 그의 인생이 육체의 시간만 사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그의 회심은 ‘크로노스’적 시간을 보내는 삶으로부터 돌이켜 ‘카이로스’적 시간을 보내는 삶으로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육적인 삶 ‘크로노스’와 영적인 삶 ‘카이로스’ 사이에서
회심하기 전 어거스틴은 끊임없이 유혹에 흔들리는 부끄러운 생활을 한다. 부끄러운 과거는 흘러가고 없기 때문에 순간순간을 즐기면 된다는 그의 시간개념 때문이다. ‘크로노스’ 안에서의 인간의 삶은 단지 흘러가 버리고 마는 삶,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부끄러운 자신은 단지 등 뒤에 놓이면 된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회심하기 전 어거스틴은 ‘크로노스’적 시간속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회심함으로 말미암아 어거스틴은 ‘카이로스’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고백록 10권에서 그는 기억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신 앞에서 들여다보고 현재의 삶을 분석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 11권에서는 시간과 영원이라는 주제를 통해 ‘카이로스’의 시간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통일된 시간으로 사고하며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과 창조의 경륜이 있다고 고백한다.
‘카이로스’는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의 영혼 안에서 나란히 겹쳐 놓임으로써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초자연적인 시간이다. ‘카이로스’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 잃어버린 것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존재의 시간이다.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자신의 내면의 치부를 솔직하고 치열하게 고백한 것은 바로 그가 영원한 신 앞에서 사는 ‘카이로스’적 시간을 보내는 삶을 깨닫고 발견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 교회는 제국의 역사에 동조해야 한다 – 어거스틴의 원죄교리와 그 배경 그리고 비판
어거스틴의 원죄 교리(peccatum originale, Original Sin)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사상은 그동안 교회와 기독교 교리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어거스틴 이후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 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나올 정도로 어거스틴은 서방신학과 기독교 역사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에 반해 펠라기우스는 아담으로 부터의 원죄를 부정하고 율법과 행위에 의한 구원 가능성을 주장했다. 390년 영국에서 로마로 건너온 펠라기우스는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엄격한 금욕주의자로서 ‘세례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지킴으로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합리성이 있어 보였고 솔선수범하는 경건한 태도가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게 되었고 그를 추종하는 명석한 제자들도 얻게 되어 펠라기우스논쟁은 거의 반세기나 지속되었다.
로마가 멸망하면서 펠라기우스는 동방으로 도피하여 어거스틴과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제자 ‘코엘레스티우스’는 펠라기우스보다 더욱 과격하여 어거스틴의 주된 대적자가 되었 다. 명망있는 법률가이자 명석한 두뇌를 가진 ‘코엘레스티우스’는 밀라노교회의 제소를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선언함으로써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대변하였다.
(1) 아담은 죽을 운명으로 지어졌으며 죄를 범했든지 범하지 않았든지 간에 죽었을 것이다. (2) 아담의 죄는 그 자신에게만 해를 끼쳤지 인류에게 해를 끼친 것이 아니다. (3) 새로이 태어난 어린이들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와 동일하다. (4) 아담의 죽음과 범죄에 의하여 전 인류가 죽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하여 모든 인류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5) 복음뿐만 아니라 율법도 하늘나라로 인도한다. (6)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도 죄가 없는 인간들이 있었다. (7) 사람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 (8)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이라도 영생을 얻는다. (9) 세례를 받은 부자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소유한 재산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런 공로가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
사실 원죄(peccatum originale, Original Sin)라는 용어는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교나 동방그리스정교에 비해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원죄교리’가 성서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성서의 내용을 창세기 3장의 기사와 다윗의 시편 기도와 바울의 로마서 5:12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중에서 원죄를 설명하는 단골은 구약성경 창세기 3장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잘 관리하라고 하시면서 다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말았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났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땀을 흘려야 했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흙에서 빚어진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 곧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슬러 범한 죄는 인간 본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즉 인간은 원 초적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상태에서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도록 창조되었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인간 본성이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리고 이 상처받은 본성, 타락한 인간 본성이 인간 번식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된 것, 이것이 원죄 교리이다.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한 아담과 하와의 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특히 아담의 타락한 본성이 성적 출산을 통해서 생물학적으로 유전된다고 생각했다. 죄가 부모로부터 자녀로 전달되는 수단은 죄된 성적욕망에서 나오는데, 어거스틴은 그런 성적욕망을 죄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신학을 받아들인 서방교회는 단 한 사람도, 곧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이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고 가르쳐 왔다.
펠라기우스는 인간 개개인 모두가 죄를 짓든지, 짓지 않든지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며 원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을 강제로 죄에 이르게 하는 인간 본성의 타락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죄를 짓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죄가 없는 것이다.
펠라기우스가 볼 때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 가운데 머물러 있든지,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참여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아담으로부터 원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교회의 세례를 통하여 죄사함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에 반대해 유아는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세례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서 완성을 성취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계속 논의되고 있는 값싼 은혜에 대한 신학적 논의라고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아담으로부터 원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교회의 세례를 통하여 죄씻음(죄사함)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그 당시 제국교회의 입장에서 교회의 권위와 제국의 질서를 방어하려고 했던 의도가 있었다고 후대의 학자들은 지적한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교회의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재단하는 것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킴으로써 완성을 성취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교회사를 통해 살펴본 펠라기우스자들의 원죄교리에 대한 반박
어거스틴과의 원죄교리 논쟁은 펠라기우스보다 그의 제자인 코엘레스티우스에 의해 보다 심화되었다. 코엘레스티우스는 원래 법률가 출신으로 펠라기우스의 친구였다. 그러나 후에 그의 제자가 된 코엘레스티우스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제국안에서 더욱 넓혀나가는 바람에 펠라기우스논쟁이 한층 조직적 형태로 갖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1) 카르타고 종교회의 기록에 나타난 펠라기우스의 제자 코엘레스티우스와의 원죄논쟁(411)
펠라기우스의 제자인 코엘레스티우스가 밀라노교회의 제소를 받았다. 코엘레스티우스는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유전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 태어난 어린이들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와 동일하고, 복음뿐 아니라 율법도 하늘나라로 인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고, 북아프리카와 서방교회들은 유아세례를 중요한 교리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코엘레스티우스를 정죄하고 그의 성직임명을 거부하게 된 것이다.
코엘레스티우스가 원죄는 유전되지 않는다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이야기를 교회 안의 많은 지도자들로부터 들었다고 밀라노교회의 파울리누스 사제가 기소요지를 작성한다. 그 후 코엘레스티우스는 파문되지만 이에 불복하여 로마에 항소한다. 그리고 코엘레스티우스는 바로 에베소로 가고 에베소에 지역에서 아무 문제없이 성직자로 임명을 받게 된다. 이것을 볼 때 지역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 일치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2) 드미트리아스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 펠라기우스의 원죄사상(414)
410년경 로마가 야만족인 동고트족에게 함락되자, 어거스틴이 사역하던 힙포에, 로마로부터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오게 되었다. 피난민 가운데에는 로마의 귀족들과 부호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힙포에서 사역하던 어거스틴에게 과부 프로바가 방문하게 되고 어거스틴은 프로바 가정의 조언자로 사역했다. 그런데 그 프로바의 상속자인 조카손녀 드미트리아스가 있었다. 피난올 당시 드미트리아스의 나이는 14세였고 드미트리아스는 이미 수녀로 서약하고 있었다. 이런 드미트리아스에게 펠라기우스는 공개서한을 보내서 그의 주제들(아담으로부터의 원죄는 수태시에 유전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선하고 친절하며 의로운 사람을 예로 들며 하나님이 인간을 선하게 창조했다는 것 등)의 내용을 설파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에서 라틴성경을 번역하던 제롬이 이 소식을 듣고, 드미트리아스에게 역시 공개편지를 보내서, 이단 신학자 오리게네스(3세기의 이단)에 물들지 말 것을 경고했다.
3) 리디아(디오스폴리스) 종교회의 기록에 나타난 펠라기우스의 원죄사상
펠라기우스에 대한 제2차 종교재판이 열렸다. 415년 디오스폴리스에서 13명의 주교들이 모여 펠라기우스의 의견을 청취한 뒤 그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건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때 퇴임한 두 명의 서방교회 주교 헤로스, 나자루스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졌고, 종교회의는 카이자리아의 율로기우스가 주재했다. 13명의 주교가 출석하여 펠라기우스의 원죄교리를 청취했는데 이 종교 회의에서 펠라기우스는 정통신앙이며 친교회적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여기서 펠라기우스는 율법의 지식이 있으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를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오로시우스를 제롬에게 보내어 펠라기우스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4) 교황 이노센트1세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 펠라기우스의 원죄사상(417)
416년 오로시우스는 당시 종교회의가 열리고 있던 카르타고로 귀환하여 자세한 내용을 보고 하였다. 이때 밀레바스에서 2차 종교회의가 소집되어 이 곳에 모인 399명의 주교들이 만장일치로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오류가 있다고 판단하여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에게 그 결과를 발송하였다. 펠라기우스의 잘못된 주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아담은 원래 죽도록 창조되었으며 그의 범죄 여부와 관계없이 어차피 한번은 죽을 것이다.
b) 아담의 죄는 아담 자신만 훼손하였으며, 인류전체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c) 새로 태어난 아기는 아담의 타락전과 동일한 상태에 있다.
d) 아담의 죄나 그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인류전체가 죽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류전체가 생명을 얻는 것도 아니다.
e) 복음뿐 아니라 율법도 인류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수 있다.
f)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도 전혀 죄가 없는 인간들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노센트 교황은 이 편지를 받아 보기 전에 그만 죽었다. 그리고 후임인 새로운 교황 조시무스는 펠라기우스의 편지를 읽고 그의 제자 코엘레스티우스를 만난 후에, 어거스틴과 북아프리카 주교들이 철저하게 검토하지 않은 것과, 우둔하게도 성경을 너무 지나치게 파고들어 과도하게 논쟁하려는 열망에 대하여 책망하는 교황교서를 보내었다. 조시무스 교황은 오히려 펠라기우스와 코엘레스티우스를 선호하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로마에서 난동들이 발생하였는데 펠라기우스 추종자들이 나이가 많은 로마 관리를 공격하는데 합세한 사실이 밝혀졌다. 분노한 황제 호노리우스는 418년 황제의 칙령을 발표하여 그들을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로 비난하고, 그 후에 펠라기우스와 코엘레스티우스를 로마에서 축출해 버렸다.
5)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펠라기우스주의를 파문(418년 5월 1일)
조지무스 교황은 펠라기우스를 정통신앙이라고 복권시켰다. 그리고 오히려 펠라기우스와 그 제자들을 고발한 두 명의 퇴직 주교 헤로스와 나자루스를 사악한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418년 북아프리카지역의 주교들은 주교회의를 다시 소집하여 조지무스 교황을 압박하게 된다. 이렇게 북아프리카 지역의 주교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어지자 교황 조지스무스는 결국 태도를 바꾸게 된다. 그리고 교황의 서신을 받은 북아프리카 지역의 주교들은 5월 1일 카르타고에서 북아프리카와 스페인까지 포함한 약 2백 명 가량의 주교가 참석하는 확대종교회의를 소집하여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제정하는 규정을 확정하는 것이다. 이후 로마교황청은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토론과 조사없이 펠라기우스와 그의 교리들을 또 다시 정죄했다.
교회는 제국의 역사에 동조해야 한다
초기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았듯이 당시 모든 교회들이 어거스틴의 원죄교리를 만장일치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특히 프랑스 지역에서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을 ‘반 펠라기우스주의자들(semi-Pelasgian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18명의 주교들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정죄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추방당하기도 했는데 이중에서 ‘율리아누스’ 주교는 독설과 인신공격으로 어거스틴의 말년을 크게 괴롭히기도 했다.
이외에도 어거스틴의 원죄교리와 은총교리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아 국교로 성장하는 기로에 서있는 4세기와 중요하게 맞물려 있다. 예수의 정신은 기존 로마질서에 항거하여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개인의 자유와 사회현실에 항거하며 인권을 강조했는데, 이미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제국의 종교로 탈바꿈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질서를 지켜야하는 국가종교의 부담이 컸다. 그래서 ‘아담의 타락’은 곧 ‘인간의 타락’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고, 원래 로마제국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던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통치 원리에 협력하기 위해 아담의 원죄로 인간은 도덕적, 정치적 자유를 가질 수 없다(타락하여 원죄를 타고나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는 논리로 개인을 교회와 국가의 통제하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원죄교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
어거스틴의 원죄교리는 극단적으로 모든 유아들까지도 죄를 가지고 태어나며 지옥으로 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유아들도 타락한 영적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락은 아주 전적인 것이어서 유아들은 자유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선을 행하기에는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에서 성장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교리와 전적으로 대치되는 사상이다. 만약 유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죽게 된다면 그들은 타락한 영적본질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지옥으로 가야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만약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난다면 그 책임은 누구의 것이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낳게 한다.
또한 어거스틴은 아담의 범죄가 그의 자손에게 유전된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그러한 원죄는 인간의 성생활을 통한 혈통으로 유전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인간의 성생활은 종족보전 만을 위한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미 아담의 타락의 본성이 있는 인간은 욕구에 의하여 성생활을 하게 되고 그 불결한 죄성이 자녀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성을 플라톤적인 이원론적 사상으로 죄되고 불결한 것으로만 치부해 버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아담의 타락한 본성이 인간의 욕구에 의해 성생활을 하게 되고 그 불결한 죄성이 자녀에게 전가된다는 교리는 더 진전되어 통일교의 피가름 교리로 이용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 Questions & Comments
▷ Sharing : 오늘의 토의할 제목
(1) 어거스틴의 사상적 편린은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2) 어거스틴의 위대한 점과 그를 따라다녔던 확증편향성은 무엇일까?
(3) 원죄교리는 성서에서 출발했을까? 개인의 경험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것일까?
주경식 교수(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