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72)
헤럴드 윌리엄 레인 목사(1901-1981. 1. 2)
한국명: 나례인((羅禮仁) 목사, 동래 1935-38, 부산 1942, 47-52, 통영 1938-41.
헤럴드 레인은 1901년 북 미르부(Mirboo North)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죽으면서 농장경영과 어머니와 누이들을 보살필 책임을 남겨놓았다. 그는 일찍부터 선교의 소명을 느끼고 있었으나, 28세가 되어서야 오몬드 칼리지에 들어가 목회를 위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는 학부(BA)와 신학을 마치고 1934년에 졸업했다. 그 해에 그는 테랑(Terang) 출신의 간호사 진 맥퀸(Jean McQueen)과 결혼했다. 그들은 1935년 1월에 한국에 도착했고, 동래에 배치되어서 첫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레인 목사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고, 밀양과 김해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보살폈다. 1938-41년, 레인은 통영의 교회들을 돌보았다. 1941년에 그와 진(Jean)은 일본에 의해 감금되었고, 후에 매클라렌 의사와 라이트 목사 부부와 함께 추방되었다.
1942-46년, 헤럴드는 미아미아(the Mia Mia) 교구의 목사로 일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레인 가족은 데이비드 윌리엄과 마조리에 진을 입양했다.
1946년 레인은 한국으로 돌아간 첫 번째 호주선교사였다. 레인과 조지 앤더슨 목사는 한국 상황을 점검하고 한국교회와 재 연결을 시작하고, 호주선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한국으로 떠나 1946년 10월 11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는 1947년 7월 프랭크 커닝햄 목사가 도착할 때까지 6개월을 홀로 한국에 남았다. 그리고 도로시 레거트, 엘리자베스 던, 뮤리얼 위더스가 8월에 도착하였다. 그는 1949년 6-7월의 간단한 휴가를 가질 때까지 부산에서 지속적으로 일했다. 그는 휴가가 끝나고 아내와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왔으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일본에서 1년을 기다리던 가족은 호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헤럴드는 1950년 10월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그때부터 1952년 10월, 차기 선교사들이 한국의 재입국 허가를 받을 때까지, 한국에 머물렀던 유일한 호주 선교사였다.
레인은 이 시기에 경남지역의 교회지도자들과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모든 지역을 방문했고, 부산진, 동래, 마산, 통영, 진주, 거창에 있는 호주선교회 재산의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수고했다. 당시 선교회 재산은 정부나 군대가 차지했거나 피난민들에 의해 단순히 점유된 상태였다. 시드니에 있는 선교위원회는 그의 권고를 따라 재산의 많은 부분을 노회와 지역 교회들과 기독교 조직들이 관리하도록 이전하였다. 레인은 또한 고려신학교에 관련된 그룹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노회지도자들과 함께 일할 때에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다. 그는 최초의 노회-선교회 공동위원회를 위해 일했다.
헤럴드 레인은 매우 포괄적인 신학을 지니고 있었고 그는 축자영감설, 고려신학교 안에서 일반적으로 유행하는 신학적 불관용성, 이 시기에 교회를 분열로 몰고 가는 경남지역의 보수파에 대해 견디기 힘들어 했다. 그는 1952년 5월 7일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교회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엄격한 획일성을 요구하는 것 대신,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다소간 공간을 허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강한 결단력과 탁월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레인은 호주로 돌아가서 알렉산드라(Alexandra)와 와락나블(Warracknabeal)에서 목회를 했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