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투데이
아파트 소동으로 문제되는 시드니 고층화
시드니 시내와 14Km 떨어진 올림픽 파크(Olympic Park)에는 요즘 30-40층의 아파트가 건설되어 있고, 2000년대 올림픽을 치룬 거대한 운동장은 물론 아름다운 공원과 유흥지역으로 지금은 시드니 신도시로 각광을 받고 있는 교통의 중심지지만 2000년도 올림픽을 거행하기 전에는 Home Bush Bay 지역으로 시드니 얕은 바다였다.
환경을 중요시했던 그 당시 노동당 봅 카 수상은 환경을 살리기 위해 바다였던 그곳 640핵타르를 메워서 올림픽 경기장을 만들어 환경올림픽의 모범을 보였다. 하물며 그곳 담수에 살던 개구리까지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 아름답게 지어진 36층, 392가구의 Opal Tower아파트가 10층의 콘크리트 벽이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쪼개짐으로서 300여명의 거주자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사건은 전 세계가 성탄의 기쁨으로 가득 찼던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에 발생하여, 오후 2시 46분경에 이 건물의 안전을 엔지니어들이 검사하기 위해 10일간 전부 퇴거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은 성탄시즌이라 빨리 전해지지 않았다.
엔진이어 조사결과 10층 이외에 4층 콘크리트 팬널도 머지않아 금이 갈 것을 발견했다. 이곳에 정착민들은 본의 아니게 성탄과 신년 등 가족이 모여 즐겁게 보내야할 휴가철에 ‘homeless(무주택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거주자들은 대부분 한달 전에 이곳에 이사해 보금자리로 정착한 사람들이다. 작년 8월경에 완공되었기 때문이다. 깨어진 콘크리트 팬널은 길이가 6미터에, 가로가 4미터가 되는 큰 콘크리트 벽인데 “4층부터 10층 사이에 16개가 있다”고 조사한 엔지니어들은 말하고 있다.
이 건물은 일본회사인 ICON이란 회사에서 공사를 책임지고 건축했으며, 작년 8월에 완공되어 많은 사람들이 입주를 희망해서 다른 시드니 지역에는 방 2개 아파트가 50-60만불 수준이나 이곳은 75만불에 팔렸다.
이곳 담당인 Auburn Council에서도 NSW 주정부가 최고 90m로 제한했던 것을 이곳만은 117m로 높여 주었다. 이곳은 높아 Chatwood가 보이며, 비행장도 볼 수 있는 명소이고, 2030년에는 이곳에 인구가 1만4천명으로 크게 늘어 날 것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자들은 불만이 많다. 20대 Dave라는 청년은 자기 봉급의 50%(세금공제 하지 않는 금액)을 내면서 은행에 90%에 빗을 지고 75만불을 마련해 샀는데 이번 사태로 신문과 방송 등 언론에 보도되어 이곳에 올 사람은 하나도 없다며 개탄하고 있다. 하물며 세를 놓으려 해도 올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사고나기 전에는 모두들 이 집을 사면 바로 가격이 올라가서 이익을 볼 줄 알았다고 한다. 관리비는 3개월에 1,000불이다. 그는 이어 아마도 10만불은 손해를 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드니는 몇 년 사이에 아름다운 주택 단지가 고층아파트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시드니에 10년 전에는 아파트 건물이 6,287개였던 것이 4배가 늘어나 23,637개로 늘어났으며, 호주 전국적으로도 2007년도부터 2015년 사이 3만개에서 9만개로 크게 증가되었다. 양적으로 급성장하는 반면에 건축업자들의 날림 공사는 아파트 거주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특히 방수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물이 새는 경우가 허다하며, 벽에 금이 가는 것, 소음문제 등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엉망의 아파트 건설이 이루지게 된 동기는 NSW 정부가 직접 건물을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축완료 증명은 아파트를 지은 건축주가 개인 엔지니어에게 돈을 주고 검사를 시키기 때문이다. 만약에 건축주에서 돈을 받지 않고, 아파트를 산 주인이 내면 아파트 주인을 위해 엔지니어가 건축주의 잘못된 것을 아파트 주인에게 이야기하겠지만, 건축주가 돈을 주고 시키니 엔지니어가 엄격한 검사를 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만약에 엔지니어가 트집을 잡으면 건축주는 다른 엔지니어를 고용하면 된다. 이런 법을 만든 것은 20년전 노동당 정부다. 노동당은 아파트보다 환경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3층 이상 아파트 건축을 크게 제한하여 왔다. 또한 노동당 정부에서 아파트를 짓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당 정부는 3층 정도에 아파트를 위해 정부가 돈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건축주가 자비로 완공허가를 얻도록 했던 것이다.
자유당 정부는 40층을 건설하게 되어 법을 고쳤다. 2018년 10월에 NSW 의회는 검사할 자격이 있는 엔지니어는 반듯이 정부 공정거래위원회에 등록(Registry)을 해야 한다. 건축협회에서 인정된 것은 무효화했다. 그리고 잘못하는 검사관은 벌금을 3만불 이상 내야하는 엄격한 법이 통과 되었지만 실행하는데 시일이 걸린다고 한다. 다른 주는 모두 이런 식이다. 법이 실행되면 다를 것이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멜본 시위
유럽에서 영국, 프랑스, 소련은 민족 단위로 일찍부터 국가가 형성되었지만 인구가 다수이며 강한 게르만민족은 이들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다수의 소왕국이나 연방 등으로 나눠져 중앙집권의 정부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독일은 통일을 방해하는 영국이나 프랑스, 러시아에 대항하여 통일을 위해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된다. 1차 대전에 패배를 당한 독일은 많은 영토를 프랑스, 러시아, 영국 등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엄청난 전쟁 보상금을 요구해 독일은 2차 대전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보상금을 위해 독일은 상당한 부가 독일내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세금으로 거두기 위해 공산주의와 같은 좌파 사회주의 정당인 NAZI(Nationalsozialism)를 만들어 1920년부터 집권하였다. 1933년부터는 독재자 히틀러가 집권하고부터 인종적인 면을 주장하는 극우파 정당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 백인과 싸웠던 히틀러는 자기들은 “아리안(Aryan)족”이라고 말하고 어떤 다른 민족과 성행위를 일체 금한다고 했다.
“아리안(Aryan)”은 모든 백인의 선조로서 그중에도 독일 민족인 게르만 민족이 가장 우세하다는 것이다. 아리안은 인도와 이란의 최초 구성원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어나 독일어는 인도어계에 속한다고 한다.
히틀러는 600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며 아리안 민족의 위대성을 강조하면서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는 잔인한 살인자로 낙인찍혀 패망 후 시체도 발견치 못했다. 그 후 식민지를 차지했던 유럽 국가들이 편히 살면서 여자들의 지위향상으로 출산율이 크게 줄어들자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다른 나라의 이민자들을 유치하게 되었고, 백인위주 문화정책에서 다국적 문화정책을 채택하여 많은 이민자들을 유치하였다. 이민자들을 위한 방송국도 세워 타국에 살면서도 외롭지 않게 해주기도 하였다.
세계가 자동화되어가고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이민자의 나라이며 이민자 때문에 큰 혜택을 보았던 미국의 대통령 도날드 트럼프가 이제는 “미국우선, 백인우선(?) 정책”을 고수하면서 피난민 배척, 이민 배척의 기수를 들고 극우정치로 돌아서는 경향이 생겼다. 그 후 다른 나라들도 미국의 전철을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동시에 백인우월주의자(Neo-Nazi)들이 모든 나라에서 설치고 있는 시대가 왔다.
호주에서도 지난 1월 12일 토요일에 멜본의 아름다운 해변가인 St Kilda에서 백인 우월주의 시위가 있었다. 경찰 당국은 100명 미만으로 발표하였으나 주최자인 블레어 코텔(Blair Cottell)과 네일 에릭숀 등은 1천여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Fraer Anning 퀸스랜드 상원의원이 정부의 여비를 사용하여 이곳에 참석하여 많은 사람들을 독려했다는 사실이다. Fraer Anning 상원의원은 퀸스랜드에서 2017년 11월 10일 보궐 선거에 당선되어 카터의원의 오스트랄리아당에 입당하였다가, 4개월만인 2018년 10월에 포린 핸슨당(One Nation)에 입당했다. 그는 국회 첫 연설에서 과거 백호주의시대를 찬양하며 모슬렘을 받지 말자는 말을 해서 비난을 받아 왔다.
지난 1월 12일 백인우월주의 시위 모임에서 히틀러 찬양을 비롯해 백인우월과 특히 멜본에 범죄 주범인 남수단 이민자들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남수단” 깡패들에게 주기적으로 상점에서 돈을 빼앗겨온 월남인이 이 모임을 찬양하기도 했다. 그러나 월남 교포단체는 이 모임을 부인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극우단체 모임에 대해 스커트 모리슨 수상을 비롯해 노동당 빌 쇼튼 당수는 극구 비난을 했다. 그러나 국민지지가 낮은 정치가들은 극우팀에 가입해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애쓰고 있다.
특히 이번에 참석한 Frazer Anning 상원의원은 호주는 2차 대전에 독일 히틀러와 대항하기 위해 인구 500만에 100만 명이 참전을 한 실정에 상원의원이 국민의 세를 사용해서 비행기를 타고 이런 모임에 참석한 것을 크게 비난받고 있다.
그러나 Frezer Anning 상원의원은 참석 후 지지도가 높아져 포린 핸슨 정당에서 3위권에 들어갔다. 만약 다음 5월 선거에 극우단체를 만들어 이민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정당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호주의 양당 제도의 선거는 과거 70%의 투표가 이제는 50%이하로 줄어들고 있어, 소수 정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백호주의 잔재를 나타낼 수도 있다.
호주국립대학(ANU) Ian McAllister 교수는 2016년 선거를 분석한 결과 국민들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하여 큰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간 40년 동안 정부와 국회가 일단 당선되고 나면 국민의 의사를 전혀 무시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게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민문제”이다. 정부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증가시켰다는 것이다. 호주에 300만 명은 열심히 일을 해도 충분한 생활을 못하고 있다. 특히 앞으로 이민자들 때문에 직업을 잃게 되는 것을 크게 걱정한다.
2019년 “오스트랄리아 데이”를 맞으며
11척에 죄인선단은 영국 남쪽 항구(Portmouth)를 1787년 5월 13일에 떠나 시드니 보타니 베이(Botany Bay)까지 24,000Km를 250일만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3일이 빨랐다. 뒤에서 늦게 오는 배는 다음날 도착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다. 정착지인 “보타니 베이”는 바다가 열려 있어 배가 정박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물이 얕아서 배가 가까이 닻을 내리지 못했다. 또한 먹을 물도 귀하고 땅도 모래라 비옥하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필립 아더” 선장은 보타니 베이에 배를 내리지 않고 북쪽으로 올라가 해안선이 굴곡이 심해 배가 정박하기 좋고 물이 깊어 해안까지 배를 델 수 있으며, 음료수가 많은 Port Jeckson에 하역을 했다.
이날이 1788년 1월 26일이다. 이날 “아더 필립” 선장이 바로 직속상관이였던 영국 내무상 Sydney경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죄인 753명(여자 188명, 미성년자 17명)과 군인과 그의 가족 277명(여자 34명, 미성년자 6명)으로 총 상륙인원은 1,040명이라고 보고했다. 항해중 48명 죄인이 사망했다. 그리고 보고서에는 말 7마리, 양 29마리, 돼지 74마리, 토끼 6마리, 소 7마리가 있다고 보고했다. 영국기를 게양하고 호주가 영국 영토임을 확인하였다.
이들 죄인들이 상륙한 날에 대하여 영국정부는 기념식을 하지 않았다. 그후 1901년 1월 1일 호주 연방정부 탄생이후 1935년부터 이날을 기념하였다. 그러나 정식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1994년부터 “오스트랄리아 데이”를 공휴일로 정하고 행사를 실시하였다. 1967년까지 국민으로 대우를 받지 못한 원주민들은 별 말을 못했으나, 그후 ‘백인의 침략을 당한 날을 원주민들이 어떻게 축하하느냐? 날자를 바꾸라’고 항의했으나 결코 해결을 보지 못하고 1월 26일을 “Australia Day”로 계속하고 있다.
다만 녹색당 좌파가 다수인 시드니 시내 지방자치 정부(카은슬)에서는 “시민권 수여식”을 거행하지 않고 있어 현 정부는 강제적이라도 실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주류 호주인들에 대한 조사에서 호주의 날은 1월 26일이 정당하다가 75%가 찬성했으며, 76%가 호주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88%가 호주 시민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92%가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며, 종교 역시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답했다.
Exclusive polling Firm Research에서 젊은이들의 생각을 조사하기 위해 18-24세 1,000명을 조사해 본 결과, 55%가 현재 1월 26일을 오스트랄리아 날로 정하는 것을 찬성하며, 40%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않았다. 다만 8%만이 침략의 날이라고 반대했다. 문제는 6만년간 살아온 원주민도 좋고, 1788년 1월 26일 죄인선단의 후예인 백인도 좋고, 백호주의 이후 이민 온 사람들도 좋아하는 날은 그리 간단한 방법이 아닌 것 같다.
근래 “오스트랄리아 데이”는 처음 “이민의 날”이라고 불렀었다. 이민자들이 시민권을 받고 새로운 시민으로 호주에 정착하도록 정부는 다국적 문화주의를 고수하여 왔다. 그러나 시리아와 중동사태로 인해 수백만의 피난민이 정착을 위해 유럽으로 모이다 보니 그간 인도주의적이었던 유럽정책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근래 뉴욕 타임지에 의하면 유럽의 이민 반대여론이 극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체코 대통령은 ‘모슬렘 이민자들은 모두 범죄자들’이라고 말하고, 폴란드 집권당 대표는 ‘피난민들은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이다. 헝가리 지도자는 ‘이민자들은 독버섯같은 존재’라고 비난했다.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극우지도자는 피난민 센터를 방문하면서 ‘세계 2차 대전 당시를 연상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호주의 극우지도자 한나라당 Frazer Anning 상원의원은 이번 멜본 극우단체 집회에 참석하고 지지자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호주가 다국적 문화정책을 실시한 지가 윗틀람 정부가 백호주의를 버리고 이민장관 Aly Grosby을 세우고 다국적 문화로 바꾸었다. 그후 자유당 말콤 후레져 수상도 다국적 문화정책을 주장했다. 그러니까 호주의 다국적 문화정책이 시작된지가 1970년도 중반부터이다. 40년이 훨씬 넘었다.
또한 이민자도 유럽이나 백인이 아닌 이민자 숫자가 이제는 20%가 훨씬 넘고 있다. 그들의 자녀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전문직종으로 호주에 기여한다. 그런데 호주에서 비즈니스 분야에 최고 책임자 중에 유럽인·영국인이 아닌 이민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고작 2.7%라고 하며, 연방정부와 주정부 책임자는 1%미만이며, 대학에 교편에도 2.6%가 넘지를 못한다고 한다. ‘과연 호주 다국적 이민정책이 성공을 했는가?’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남부 수단 기독교인들이 피난민으로 시드니 블랙타운 근처에 정착한지도 벌써 18년이 된다. “빅토리아 켄싱거”라는 남부 수단 피난민은 호주에서 3명의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얼굴이 검고 멜본 갱단으로 오인해서 과연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가 큰 걱정이라고 한다. 이들 모든 이민자들이 큰 꿈이 실현되는 나라가 되길 희망한다.
하명호(SBS 방송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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