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년 6월 27일,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 (姜沆, 1567 ~ 1618) 별세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 (姜沆, 1567년 6월 23일 / 음력 5월 17일 ~ 1618년 6월 27일 / 음력 5월 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이다.
– 강항 (姜沆)
.출생: 1567년 (명종 22년) 6월 17일 / 음력 5월 17일, 전라남도 영광군
.사망: 1618년 (광해군 10년) 6월 27일 / 음력 5월 6일
.국적: 조선, 본관진주
.별칭: 자는 태초, 호는 수은
.학력: 1593년 전주 별시문과 병과급제
.직업: 문인, 의병장
.부모: 강극검, 함평 이씨
본관은 진주 (晉州), 자는 태초 (太初), 호는 수은 (睡隱) 또는 사숙재 (私淑齋)로 불리었다.
좌찬성 강희맹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강극검이고 성혼 (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성리학을 전하였고 귀국을 종용하여1600년 탈출한다.
대구향교 교수, 순천향교 교수 등을 지낸 뒤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 생애 및 활동
강항은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났다.
16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21세에 진사시에 합격, 27세 때인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가주서를 거쳐 1595년 교서관박사가 되었고, 1596년 공조좌랑 (工曹佐郞)과 이어 형조좌랑 (刑曹佐郞)을 역임했다.
1597년 휴가로 고향에 머물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는 남원에서 명의 장군 양원 (楊元)에게 보내는 군량미 수송임무를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육지로 연결되는 길이 뚫려 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와 공격 개시 사흘 만에 남원이 함락되고, 고향 영광에서 종사관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지만 영광마저 함락당하자 강항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순신에게로 가려다가 논잠 (論岑) 포구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에서 도도 다카토라의 수군에 포위되고, 강항은 죽을 각오로 일가족과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얕은 수심 때문에 왜군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건져지고 그 와중에 아들 용과 서녀 (庶女) 애생을 잃었다.
포로로 잡힌 강항 일가는 순천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압송된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10여 일 만에 지금의 일본 에히메현 오쓰 시 나가하마 (長濱) 항구에 도착, 지금의 히지 강을 지나 이요 (伊豫)의 오쓰 (大洲) 성에 이른 강항은 그곳에서 승려 요시히토 (好仁)와 교류하며,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 지리, 과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 (賊中見聞錄)으로 엮어 몰래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강항은 교토에서 도망쳐 온 조선인 포로를 만나 함께 탈출을 의논하고, 5월 25일 밤에 숲길을 따라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 지금의 야쿠시타니 계곡에서 한 노승을 만나 배편을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노승과 함께 숲길을 걸어 내려오다 왜병에게 붙들려 우와지마 성의 처형장으로 끌려갔으나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이후 교토 (京都)의 후시미 (伏見) 성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후지와라 세이카 (藤原惺窩), 아카마쓰 히로미치 (赤松廣通) 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쳤고, 세이카는 일본 주자학의 개종 조사가 된다.
당시 세이카와의 만남에 대해 강항 자신은 ‘간양록’에서 “글씨를 팔아 은전을 좀 벌어서 배를 마련하고자”, 즉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비용을 벌기 위해 그에게 글씨를 써주었는데, 주자학에 대한 세이카의 열의에 감탄해 그에게 성리학을 가르쳐주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세이카와 강항이 필담으로 주고받았던 또는 강항이 세이카를 위해 암기하고 있던 주자학 이론들을 적은 글들은 (총 21권) 현재 일본의 덴리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막부의 귀화 요청을 거부하고 4년간 억류생활을 하던 그는 후시미 성주에게 자신을 조선으로 돌려 보내 달라는 편지를 여러 번 썼고, 1600년에 두 제자의 도움을 받아 가족과 함께 귀국길에 오른다. 일본에 억류된지 2년 8개월만의 일이었다.
1602년 대구향교의 교수 (敎授), 1608년 순천향교의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 전념해, 윤순거 (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 있는 내산서원 (內山書院)에 강항을 모시고 있다. 내산서원 입구의 문은 강항의 부인 함평 이씨에게 내려진 열녀문이다.
4년에 걸치는 일본에서의 포로 생활을 수록한 ‘간양록’은 그가 일본에서 보고 들은 일본의 내정이나 국토의 특징, 당시의 여러 다이묘 (大名)의 정세 등을 세세하게 적은 것으로 왕조에 대한 의견 제출서로서의 측면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행력
.명종22 1567 정묘 隆慶1 1 5월 17일, 靈光 流峰里에서 태어나다.
.선조13 1580 경진 萬曆8 14 모친상을 당하다.
.선조15 1582 임오 萬曆10 16 상을 마치고 對策으로 鄕試에 합격하다.
.선조20 1587 정해 萬曆15 21 鄕試 三場에 합격하다.
.선조21 1588 무자 萬曆16 22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다. – 冠禮를 하고 參奉 金琫의 딸 晉州金氏와 혼인하다.
.선조24 1591 신묘 萬曆19 25 백형 姜瀣가 士禍로 화를 당하다.
.선조25 1592 임진 萬曆20 26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檄文을 내어 軍糧과 軍器를 모아 의병장 高敬命에게 보내다.
.선조26 1593 계사 萬曆21 27 광해군이 全州에 주둔하면서 시행한 庭試에서 丙科로 합격하다.
.선조27 1594 갑오 萬曆22 28 成渾의 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東人의 탄핵을 받아 校書館에 분관되다. – 겨울, 記注官으로 경연에 입시하다.
.선조28 1595 을미 萬曆23 29 文翰을 잘 처리하여 宣祖의 칭찬을 받다. – 박사가 되다.
선조29 1596 병신 萬曆24 30 전적이 되다. – 겨울, 공조 좌랑을 거쳐 형조 좌랑이 되다.
.선조30 1597 정유 萬曆25 31 봄, 휴가를 얻어 귀근하다. – 여름, 李光庭의 종사관이 되어 군량을 모집하다가 南原이 함락되자 靈光으로 돌아가다. – 靈光에서 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다. – 왜적이 靈光으로 돌아오자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나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다.
.선조31 1598 무술 萬曆26 32 5월, 배를 빌려 탈출하던 도중 板島縣을 지나다가 城門에 조선 침략을 비난하는 글을 써붙이다. 3일 만에 佐渡의 부하에게 붙잡혀 大津城으로 돌아오다. – 倭僧 好人에게서 일본의 方輿, 職官을 묻고 佐渡家에 소장되어 있던 ‘倭國地圖’를 베끼어 기록해두고, 아울러 敵情과 方畧을 적어 蔚山人 金石福에게 조정에 올리도록 부탁하다. – 6월, 大阪城으로 옮기다. – 7월, 大阪에서 豐臣秀吉의 새 도읍지인 伏見城으로 옮기다.
.선조32 1599 기해 萬曆27 33 중국의 차관 王建功에게 草疏를 주어 本朝에 보내게 하다.
.선조33 1600 경자 萬曆28 34 봄, 佐渡에게 귀국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다. 倭僧 慶安이 극력 권하여 허락을 받아 귀국하게 되다. – 5월, 釜山에 도착하여 ‘賊中聞見錄’을 올리다. – 선조의 召命을 받고 서울로 가 ‘詣承政院啓辭’를 올리다. – 당시 西人이 실각하여 등용되지 못하고 고향 靈光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다.
.선조34 1601 신축 萬曆29 35 李德馨이 嶺南에 開府하여 倭의 사정을 묻자 ‘禮部絶倭書’를 지어 올리다.
.선조35 1602 임인 萬曆30 36 大丘敎授에 서용되었으나 바로 사직하고 돌아오다.
.선조39 1606 병인 萬曆34 40 回答使 呂祐吉이 일본에서 돌아와 倭人들이 공의 충의와 절개를 칭송한다며 東槎錄에 기록하여 아뢰었으나 北人들이 꺼리어 등용하지 않다.
.선조41 1608 무신 萬曆36 42 선조가 승하하자 方喪 3년을 입고 ‘怨歌行’을 짓다.
.광해군2 1610 을묘 萬曆38 44 尹煌이 靈光 郡守로 부임한 뒤 아들 尹舜擧를 보내 受學하게 하다.
.광해군7 1615 경술 萬曆43 49 부친상을 당하다.
.광해군10 1618 무오 萬曆46 52 5월 6일, 병으로 졸하다. – 11월, 佛甲山에 장사 지내다.
.효종9 1658 무술 順治15 – 문인 尹舜擧가 文集과 看羊錄을 목판으로 간행하다. (宋時烈의 序)
.현종8 1667 정미 康熙6 – 綱鑑會要 17권이 간행되다. (尹舜擧 의 序)
.현종9 1668 무신 康熙7 – 筵席에서 李端夏의 요청으로 堂上官에 追贈하라고 명하다.
.고종5 1868 무진 同治7 – 후손 姜蘭秀가 문집을 활자로 중간하다. (姜蘭秀, 姜日會의 跋)
.1917- 11대손 姜大學이 續集을 간행하다
○ 가족 관계
증조부 : 강향수(姜享壽)
증조모 : 부안 한씨(扶安韓氏)
조부 : 강오복(姜五福)
조모 : 제주 양씨(濟州梁氏)
아버지 : 강극검(姜克儉)
어머니 : 영동김씨(永同金氏)
부인 : 진주 김씨(晉州金氏)
장남 : 강시만(姜時萬)
자부 : 임득지(林得智)의 딸
손자 : 강익주(姜翊周)
손자 : 강숙주(姜䎘周)
손자 : 강휘주(姜彙周)
손녀 : 정이주(鄭以周)에게 출가
장녀 : 나종경(羅宗敬)에게 출가
차녀 : 김기(金夔)에게 출가
외손자 : 김일태(金一台)
외손자 : 김일명(金一明)
외손자 : 김일규(金一奎)
외손녀 : 남전(南琠)에게 출가
외손녀 : 권도전(權道全)에게 출가
삼녀 : 이소(李昭)에게 출가
사녀 : 고두남(高斗南)에게 출가
외손녀 : 박경종(朴慶宗)에게 출가
○ 저서
– 간양록 (看羊錄)
원래 제목은 ‘건거록’ (巾車錄, 건차록)으로서 강항이 저술한 포로 문학의 백미이다 (제자 윤순거 편찬).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강항의 4년간 일본 포로 체험기이다. 그는 1597년부터 1600년 까지 포로생활을 했으며, 제자의 도움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 운제록 (雲堤錄)
– 강감회요 (綱鑑會要)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과 ‘통감강목’을 보완, 정리하여 한 책이다. 인쇄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1권 뿐이다. 강감회요 목판은 숙종 28년 (1702)에 새긴 총 642매으로 1999년 7월 5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 좌씨정화 (左氏精華)
– 문선찬주 (文選纂註)
– 수은집 (睡隱集)
– 성재기 (惺齋記)
– 시상와기 (是尙窩記)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