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6월 16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M. 베어드 (배위량, William Martyn Baird, 1862 ~ 1931) 출생
윌리엄 마틴 베어드 (William Martyn Baird, 1862년 6월 16일 ~ 1931년 11월 29일)는 숭실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 학장이다.
베어드는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로, 1891년에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897년에 평양에 이주한 그는 숭실학당을 개설하고, 이를 1906년에 한국 최초의 근대 대학 (대한제국으로부터 인가)으로 발전시켰다.
– 윌리엄 마틴 베어드 (William Martyn Baird)
.한국명: 배위량(裵偉良)
.출생: 1862년 6월 16일, 미국 인디애나주 클라크 카운티
.사망: 1931년 11월 29일 (69세),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평양
.국적: 미국
.직업: 선교사
.직책: 1891년 미국 북장로교 파견 선교사, 1897년 평양숭실학당 초대 학장
.가족: 배우자, 아들 2명
종교: 장로교
.학력: 하노버 대학교 철학 박사, 맥코믹 신학교 졸업
윌리엄 마틴 베어드는 숭실대학교를 설립한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였다.
1862년 6월 인디애나에서 태어났다. 선교활동을 위해 애니 애덤스와 결혼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1891년에 한국에 도착했다.
개신교 선교사로서 평양 숭실학당을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육사업과 선교에 큰 공헌을 했다.
1931년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개교식에 참여한 지 한달 후에 장티푸스에 걸려 별세했다.
○ 생애 및 활동
윌리엄 베어드 (William M. Baird, 1862 – 1931, 한국이름 배위량 [裵偉良])은 1862년 6월 16일, 베어드는 미국 인디애나 주 클라크 카운티(Clark Coumty)에서 출생했다.
하노버 대학 (Hanover College)과 맥코믹 신학교 (McCormick Seminary)에서 수학한 베어드는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으로 선교사역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1891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4년간 부산에서 사역한 후 서울로 임지를 옮겨 교육 사업에 집중했다.
그는 1897년 10월에 평양 자택에서 숭실학당을 시작했고, 문서선교에 주력하면서 구약성경 개역작업에 힘썼다.
베어드는 장티푸스에 걸려 평양 숭실학교에 묻히기까지 40년간 한국교회를 섬겼다.
그의 아들 리처드 베어드 (Richard H. Baird)은 아버지를 이렇게 평가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베어드 박사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 손을 드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었고, 오늘날에도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항상 각 개인과 교회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가 한국으로 가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이었다. 이런 믿음으로 인해 아버지는 당연히 선교활동으로 네비우스 방법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 북쪽에서 커다란 비약적인 발전의 중심에 계실 수 있었고, 그런 발전은 … 그분의 특징적인 자질들을 발휘토록 했다. 이 믿음으로 인해 한국인들을 신뢰할 수 있었고, 처음부터 그들을 책임 있는 영역에 둘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한국인에 대한 어떤 환상도 없었고,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그들의 약점들을 열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약점은 인간 본성에 타고난 것들이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런 믿음 때문에 아버지는 무너지지 않고 온갖 실패와 좌절을 이겨내실 수 있었다.” [Richard Baird, William M. Baird: A Profile by Richard H. Baird, 김인수 역, 『배위량 박사의 한국선교』 (서울: 쿰란출판사, 2004), 302.]
안정적으로 담임목회하며 선교사를 후원할 수 있었음에도 베어드는 청빙을 거절했다.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부르심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는 본래 중국 선교사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선교부가 조선 남부지방 개척을 요청하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1888년 멕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베어드는 미조리 주 오스세올라 (Osceola)의 장로교회에 임시목회자로 가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중 해외선교사로 가는 것을 포기한다면 공식적으로 담임목사로 청빙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베어드는 이를 거절하고, 콜로라도 주 델 노르테에 있는 더 작은 교회로 옮겨 갔다.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국내전도부 (Home Mission Board)가 운영하는 멕시코인들과 스페인계 젊은이들을 위한 작은 기독교학교인 델 노르테 학교 (Del Norte College)의 교장직을 겸하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라 할지라도 소수 민족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 경험이 후일 숭실학교 설립과 교육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상규, “호주에서 온 제2진 선교사들”, 『부산의 첫 선교사들』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269-70.]
– 부산.대구를 거쳐 평양 선교 개척
베어드 선교사는 1891년 9월부터 1895년까지 5년 동안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담당했다. 당시 그는 부산은 물론 경남 동부 전역과 대구 등 경북지역을 모두 담당했다. 그리하여 1893년에는 부산을 시작으로 밀양, 대구, 안동, 상주 등 경상도 거의 전역을 돌며 선교 대상 지역을 방문했다.
부산 유일의 선교사였던 베어드 선교사는 어린이를 위한 학교를 열어 신학문과 한문을 가르치는 등 선교 초기부터 교육을 통한 선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92년 시작한 부산 최초의 개신교회인 초량교회는 베어드 선교사가 시작한 사랑방예배(영선현교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각 교단별 선교지역 분할 결과 부산을 비롯한 경남 지역을 호주장로교가 담당하게 됨에 따라 베어드 부부는 1896년부터 대구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베어드 선교사는 대구에서 활동한 최초의 선교사인 셈이다. 대구제일교회도 베어드 선교사로부터 시작되었다.
– 평양에 ‘숭실학당’ 설립
베어드 선교사는 1897년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897년 10월 평양 자신의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학당을 열었다. 그는 노동을 천시하던 당시 조선사회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학교 안에 자조사업부를 두어 스스로 작업을 하고 그 수입으로 학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지도했다. 자립정신을 고취하는 것을 교육 제일의 목표로 삼은 것이다.
3년 후 이 학당은 숭실중학으로 성장하였고, 1906년에는 합성숭실대학으로 발전하였다. 합성숭실대학이라는 이름은 미국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선교부가 공동 운영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붙인 이름이며, 이후 미국 남장로교, 캐나다장로회, 호주장로회 등 당시 한국에서 선교하던 교단이 연합하여 운영했다. 또 합성숭실대학은 대한제국 시절 공식 인가된 최초의 대학과정 학교였다. 숭실대학은 1938년 일제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한국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했으며, 105인사건, 3.1운동과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의 요람이었다.
– 노년과 사망
베어드 선교사는 아내가 소천한 1916년 숭실대학 학장을 사임했으며, 그 이후에는 문서선교와 저술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그는 1911년 구성된 구약개역자회에 개역위원으로 선임되어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 (개역)하는 일에도 힘썼다.
베어드 선교사는 1918년 로즈 페트롤프 (R. M. Pettrolf) 선교사와 재혼했으며, 1931년 평양에서 별세했다. 그의 무덤은 앞서 소천한 아내 애니 베어드 묘 (평양 장산묘지) 옆에 마련되었다.
양화진에는 베어드 선교사 부부의 무덤을 평양에 두고 온 것을 안타까워한 그의 후손과 제자들이 1959년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More than conquerors thru Him that loved us.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는 성경 말씀 (로마서 8:37)이 기록되어 있다.
○ 언론소개 : 숭실의 설립자 윌리엄 베어드
– 한국교회사에서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에 비견할 만한 인물
19세기말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조선인의 문명개화와 복음화를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헌신하였다. 서울에서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배재학당’과 ‘경신학당’을 세웠고, 평양에서는 베어드가 ‘숭실학당’과 ‘숭실대학’을 세웠다.
서울이건, 평양이건 이들 교육기관들은 한국 근대교육의 모델이었으며, ‘숭실대학’은 일제강점기 조선선교부 교육시스템의 완결이었다.
숭실 설립자 베어드는 1891년 내한하여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간 한국선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의 사역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1891-1896)는 부산과 대구에 선교지부를 설립하고, 한반도 남쪽의 선교를 담당한 시기이다.
둘째(1897-1915)는 조선선교부의 교육정책인 “우리의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평양에 숭실학당(1897)과 숭실대학(1906)을 세운 시기이다. 이 시기 그는 숭실에서 ‘토착적 기독교교육론’에 입각한 교회와 사회 지도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셋째(1916-1931)는 1916년 ‘대학문제’로 숭실 교장직에서 물러난 후, 1931년 사망할 때까지이다. 그는 이시기 주일학교 공과교재 번역 및 출판, 성경번역, 기독교 문서번역 등 문서선교사역에 전념하였다.
베어드는 한국선교초기 복음전도, 기독교교육, 문서선교에 있어서 탁월한 개척자였다.
특히 기독교교육 분야에서는 그만큼 탁월한 업적과 지대한 공헌을 한 선교사도 드물었다.
그러기에 미국 선교본부 총무 엘린우드는 베어드를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에 비견할 만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김명배 교수, 베어드학부대학, 2017.9.3.)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