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12월 15일, 월트디즈니의 창시자 월트 디즈니 (Walter Elias “Walt” Disney, 1901 ~ 1966) 별세
월터 일라이어스 “월트” 디즈니 (Walter Elias “Walt” Disney, 1901년 12월 5일 ~ 1966년 12월 15일)는 미국의 애니메이터이자 영화 감독, 성우, 기업인이다.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부터 상업 미술에 뜻을 두고 광고 만화 등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미키 마우스’를 창조하여 한층 인기가 높아졌다. 그 뒤 <미키>, <도널드> 등 많은 만화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삼원색 방식에 의한 최초의 천연색 영화인 <숲의 아침>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 뒤에도 <돼지 삼형제>를 비롯하여 많은 걸작 만화를 만들었다.
1937년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제작하여 개봉하였는데 당대에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은 장편 영화 상영 도중 잠시 틀어주는 소품 같은 개념이어서 월트 디즈니의 도전은 무모하다고 여겨졌지만 개봉 직후 모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전함 포템킨의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백설공주를 본 뒤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이 밖에도 자연 과학 영화, 기행 단편 영화, 기록 영화 등 수많은 우수한 영화를 제작하였다. 그는 TV용 영화도 만들어 대호평을 받았다. 1955년 로스앤젤레스 교외에 디즈니랜드라는 거대한 어린이 유원지를 설립하여 영화 제작자 이상의 사업가로서도 자리를 굳혔다.
그가 영화 업계와 세계 오락 산업에 미친 영향력은 아직까지도 방대하게 남아있으며 여전히 대중문화 역사 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는 그를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엔터테이너이자 가장 유명한 비정치적 공인’이라고 일컬었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형인 로이 디즈니와 함께 1923년에 창립했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다. 1966년 폐암 말기로 진단받고 생일이 지난 지 10일 만에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인의 유해는 화장되어 글렌데일의 포리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되었다. 한때 월트 디즈니가 냉동보관되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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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트 디즈니 (Walter Elias “Walt” Disney)
.출생: 1901년 12월 5일,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헤르모사
.사망: 1966년 12월 15일, 미국 캘리포니아 버뱅크 Providence Saint Joseph Medical Center
.배우자: 릴리언 디즈니 (1925년–1966년)
.자녀: 다이앤 디즈니 밀러, 샤론 메이 디즈니
.손주: 빅토리아 브라운, 월터 엘리아스 디즈니 밀러, 제니퍼 밀러 고프, 브래드 룬드, 미셸 룬드 등
.저서: Jungle Book: The Movie Picture Book Collection 등
월트 디즈니는 허모사 지구에서 아버지 일라이어스 디즈니와 어머니 플로라 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원래 북프랑스의 노르망디 공국에서 살았는데, 1066년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할 때 같이 따라가서 링컨셔에 정착했고, 17세기에 아일랜드로 이주했다. 그리고 월트의 증조할아버지 때에 캐나다 온타리오주로 이민왔다가 월트의 아버지 때에 미국 시카고로 이주해왔다.
월트가 4살 때, 월트의 부모는 시카고의 번잡한 도시생활이 아이들의 교육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월트는 형들과 달리 그림에 무척 관심이 많은 듯 하다. 한 번은 집의 벽에 붓으로 돼지그림을 그리다가 콜타르를 뒤집어 쓴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즈음 월트는 아는 의사 선생의 말을 어른 못지않게 잘 그리는 등 그림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학교에 다니고 싶어했지만 당시 그의 집은 가난하여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고, 아버지 역시 반대하였다.
월트가 7살이 되었지만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버지와 함께 신문팔이를 하기 시작했다. 신문팔이를 하다가 신문에 나온 만화를 많이 볼 기회가 생기고, 그는 결국 아버지에게 그림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월트의 노력에 감동받아 이를 허락해 주었고, 근처의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자, 예전에 시카고에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유럽에서는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월트는 군대에 간 형들을 생각하며 해군에 지원을 했지만, 당시 16세이던 월트는 입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친구로부터 적십자사에 구급 부대가 새로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1900년 생까지만 받아준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래서 월트는 원서의 생년월일을 1901년에서 1900년으로 고쳐 지원하여 그곳에 들어갔다. 훈련소에 들어가 부상병을 치료하고 간호하는 법을 배우고 적십자 부대에 끼어 프랑스로 가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월트가 속한 부대는 파리에 본부를 두고 계속 활동을 하였다. 월트는 부대의 상점에서 일하게 되었고,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월트의 그림 솜씨는 온 부대에 알려지게 되었고 군인들은 월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크래커라는 동료의 권유로, 패전한 독일군들의 철모에 그림을 그리고 미국에 와서 기념품으로써 그것들을 팔았다. 적십자사에서 일해 번 돈의 대부분은 어머니에게 부쳤다고 한다.
1919년, 월트는 본격적인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캔자스로 갔다. 그곳에서 만화가나 혹은 그에 관련된 직업을 구하려고 했으나 쉽게 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광고용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인형을 움직이면서 촬영하는 1분짜리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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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