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3월 4일, 싱가포르 점령 일본군이 싱가포르 거주 중국인 화교들을 학살한 숙칭 대학살 (肅清大屠殺) 종료
숙칭 대학살 (肅清大屠殺, 1942년 2월 18일 ~ 3월 4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이 2월 18일에서 3월 4일 사이에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중국인 화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숙칭 대학살 사건 이후, 학살은 말레이시아계 중국인 화교들로 확대됐다. 이 학살로 희생된 사람 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일본 정부 측에서는 약 4 ~ 5천 명이 학살에 의해 희생됐다고 추산하고 있으며,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화교 측에서는 약 10여만명이 학살됐다고 추산하고 있다. 전후 학계에서는 약 2만 5천 명에서 5만 명 사이의 중국인 화교들 및 싱가포르인들이 학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숙칭’ (肅清)의 의미는 ‘일본인의 중국인 숙청’을 의미한다.
– 숙칭 대학살 (肅清大屠殺)
.날짜: 1942년 2월 18일 ~ 3월 4일
.위치: 싱가포르
.참여자: 야마시타 토모유키
.사상자: 싱가포르계 중국인 화교, 말레이시아계 중국인 화교
.피해 – 사망자: 4~5천 (일본), 10만 (싱가포르 화교), 2만 5천~5만 (학계)
숙칭 (Sook Ching)은 숙청 (粛清)을 의미하는데 싱가폴을 점령한 일본군이 거주하는 중국인 저항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헌병을 동원하여 이들을 청소한다는 의미에서 “숙청작전”을 전개하였고 특히 농촌지역에서 자행된 만행이 극에 달하여 전체마을을 완전히 없애기도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일본과 싱가폴의 희생자 통계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데 일본에서는 전체 희생자의 규모를 5,000 ~ 6,000여 명으로 추산하는데 반해 싱가폴과 중국에서는 30,000 ~ 100,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 개요
1942년 2월 15일에 일본군은 영국의 식민지이던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이 때 야마시타 도모유키 (山下奉文)장군의 책임하에 중화민국 국민정부 (장제스 정권)측으로 싱가포르를 지배하고 잇던 영국 및 연합국을 지지했던 중국계 주민을 게릴라 혹은 반일분자로 여겨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배경에는 1937년 7월의 노구교 사건이후 일본과 중국의 전쟁상태가 지속되던 가운데 동남아시아 각지의 화교들에 의한 항일운동이 빈번했는데 싱가포르의 화교가 그 중심이 된 것과 영국의 요청을 받고 성주화교항적동원총회 (星州華僑抗敵動員總會)를 발족하는 등 싱가포르의 화교를 반일적이라고 일본군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각지에 검문소를 설치한 후 18세~50세의 성년 남자를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여 아래의 사항에 해당하는 자를 적성분자로 취급하여 대거 처형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명시한 적성분자는 다음과 같았다.
1. 일본군 및 일본계 주민을 상대로 게릴라 활동을 한 자.
2. 국민정부로 재정지원을 한 자.
3. 동남아시아를 거점으로 항일활동을 하거나 반일행동을 한 자.
4. 레지스탕스 관계자 및 지지자
5. 영국 식민지 시대의 공무원, 법관, 입법회 의원.
6. 흑사회 등 비밀조직과 반사회적 조직에 관여된 자.
7. 중일전쟁 이후 이민한 자.
8. 하이난성 (海南省) 출신자. (일본군은 이들 대다수를 공산주의 활동가로 보았다)
9. 검문시 저항하는 자 및 도망하는 자.
도쿄재판에서 약 6천명의 화교가 살해되었다고 증언되었지만 실제로는 이 보다 더 많은 3만 이상의 숫자가 희생된 것으로 본다.
영국군은 사건 책임자로서 제 25군의 작전참모였던 츠지 마사노부의 체포에 나섰지만, 츠지는 이 때 국외 잠복중이어서 결국 그의 체포는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학살사건은 화교뿐만 아니라 말레이인과 인도네시아인 등에게도 일본군의 공포와 불신감을 안겨주게 되었다.
싱가포르 방면군이었던 제 25군의 간부회의에서 화교학살명령이 토의된 기록이나 증언이 없기 때문에 많은 증거로 유추시 츠지의 독단을 군사령관인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묵인했거나 인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츠지는 숙청의 각 현장에서 혼자 출두하여 <싱가포르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기분을 가져라!>라고 병사들에게 공공연히 명령했다고 한다. 츠지는 전후 국회의원을 몇 개월간 역임했는데 국회에서 싱가포르 학살사건에 대해 몇 번이나 토의하려고 했지만 이러한 토의는 모두 츠지가 1961년에 라오스에서 실종되면서 무산되었다.
대신 국회에선 싱가포르 학살을 실제로 목격한 호리 마사오의 증언이 참고되었다. 결국 최고책임자였던 츠지의 행방불명으로 사건의 책임자로 처형된 것은 쇼난 경비사령관이던 가와무라 사부로 (河村参郎)중장이었다.
○ 부록 : 야마시타 도모유키 (山下 奉文, 1885 ~ 1946)
야마시타 도모유키 (일: 山下 奉文, 1885년 11월 8일 ~ 1946년 2월 23일)는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육군 대장이었다. 별명은 “말라야의 호랑이” (マレーの虎)였다.
–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육군 제25군 사령관으로 말레이 작전을 지휘하였다. 일본의 언론들은 그를 “말레이의 호랑이”라고 불렀다.
싱가포르가 야마시타의 통치 하에 놓였을 때, 중국인 게릴라들과 적군협력자들의 대량 처형 (숙칭 대학살)이 이루어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싱가포르에서는 반일 감정이 드높았다. 한편, 야마시타는 통치할 시기에 “바나나 노트”라고 불린 군표를 발행하고, 복권을 발매해 재산 축적에도 힘썼다. 이 때문에 그의 사후에 그가 싱가포르에 숨겨놓은 보물 찾기에 한동안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말레이 작전의 성공으로 야마시타는 일본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천황이었던 쇼와 천황은 야마시타에게 자신을 방문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2·26 사건 당시에 천황을 앞세워 반란을 정당화시킨 야마시타의 행동이 원인이었다고 하며, 도조 히데키 (東條 英機) 수상이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이 설로 통제파였던 도조 히데키가 황도파였던 야마시타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 필리핀 방어전
싱가포르 공략에 있어서 큰 공을 세운 야마시타였지만, 도조 히데키의 반감에 의해 만주로 좌천돼 큰 작전을 맡진 못했다. 그러나, 패색이 짙었던 1944년, 제14방면군 일본 육군 사령관으로 기용돼 일본제국 육군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한 방위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레이테 섬과 루손 섬에서의 연이은 패전으로 인해 1945년 9월, 필리핀의 바기오에서 항복하였다.
– 군사 재판
항복할 당시에는 포로로 취급받았지만, 곧 전범으로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군사 재판을 받았다. 야마시타는 숙칭 대학살과 마닐라 대학살 등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 두 사건 모두 각각 츠지 마사노부, 이와부치 산지가 야마시타의 지시를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으나,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기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므로 총사령관이었던 야마시타가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사형 판결 후에 미국 육군의 법무 장교가 중심이 된 야마시타의 변호 인단은 판결에 불복해 필리핀 최고 재판소, 미연방 최고 재판소에 사형 집행을 금지하는 인신보호령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미국 최고재판소는 6 대 2의 투표로 소청을 기각하고 야마시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처형은 그가 원하던 군복을 입은 채로 총살형이 집행되는 것이 아닌 교수형으로 결정되었으며 하다못해 교수형으로 하더라도 군복을 착용하는 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인정되지 않고, 죄수복을 입은 채 이루어졌다. 처형된 이후, 그는 다른 B, C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