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김구 (金九, 1876 ~ 1949)를 안두희가 암살
김구 (金九, 1876년 8월 29일 /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대한제국의 승려, 교사,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남북통일 활동가였다. 항일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안두희 (安斗熙, 암살범)에게 살해 당했다.
– 김구 (金九)
.출생: 1876년 8월 29일, 조선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 (現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사망: 1949년 6월 26일 (7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본관: 안동
.국적: 조선 (1876 – 1897년), 대한제국 (1897 – 1910년), 제강점기 조선 (1910 –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 – 1948년), 대한민국 (1948 – 1949년)
.정당: 한국독립당 (1930년, 상하이), 한국국민당 (1935년, 항저우), 통합 한국독립당 (1940년, 충칭)
.배우자: 최준례
.종교: 개신교 (감리회)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9·10대 국무령
.임기: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부통령: 이인성
.전임: 홍진 (제8대) / 후임: 이동녕 (제11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제18·19·20대 주석
.임기: 1940년 3월 13일 ~ 1947년 3월 3일
.국가 부주석: 김규식
.전임: 이동녕 (제17대) / 후임: 이승만 (제21대)
황해도 해주에서 김방경의 25대손으로 태어났다.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하다가 부친 3년상을 탈상한 뒤엔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을 역임했고, 안악양산학교, 재령보강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안악양산학교 재직 중 안악사건에 연루, 조선총독부에 연행되어 5년간 수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 정부 (9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개편)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내무부위원, 내무부 경무국장 등을 지냈다. 임정 내 좌우이념 갈등이 극심했을 때 임정고수파 (현상유지파)의 입장에 있었다. 1924년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다. 이후 임정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노동국 총판, 국무령, 내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등을 거쳤다. 1931년 만주 사변 직후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이후 임정은 일본 제국의 표적이 되어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외무부장, 재무부장 등을 지냈다. 1938년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1940년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고, 1940년 10월 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정 주석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에는 이승만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임정 법통 운동을 추진하였다.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9년 5월 19일 민족진영 3영수 (이승만 · 김구 · 김규식)의 재합작이 태동하였으나,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격에 서거하였다.
본관은 구 안동 (安東), 자 (字)는 연하 (蓮下), 호는 백범 (白凡), 연상 (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 (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초명은 창암 (昌巖)이고, 19세 때 이름을 창수 (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 (1912년)에 거북 ‘구’ (龜)였던 이름을 아홉 즉 9인 ‘구’ (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 (斗來), 임정 이동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 (張震), 장진구 (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 (圓宗)을 얻은 승려였고, 부친상 탈상 후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사후에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 생애 및 활동사항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웠다.
14세에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정문재 (鄭文哉)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 (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 (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 (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 (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 (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 (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 (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 (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 (鴟河浦)에서 쓰치다 [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 (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 (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 (李東寧) · 이준 (李儁) · 전덕기 (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 (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 (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 (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 (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 [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 (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 (金鴻亮)의 동산평 (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 (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 (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 (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 (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 (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 (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 (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 (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 [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 [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 (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 (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 (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 [陜西省] 시안 [西安]과 안후이성 [安徽省] 푸양 [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 · 이봉창 (李奉昌) · 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 (民主議院) ·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 (李承晩) · 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 (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 ·김규식 · 김일성 · 김두봉 (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 (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 (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 상훈과 추모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 (重章)이 추서되었으며, 4·19혁명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 (白凡逸志)』를 남겼다.
○ 평가
-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당시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성사시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것을 높이 평가된다. 김구는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을 비판함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독립국가를 모색했다는 점, 민족과 인류의 현실을 고려하여 문화국가가 되기를 주장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는 반탁투쟁과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한 뒤에, 뒤늦은 행동이었다는 부정적인 시각들도 존재한다.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단국대 사학과 교수 한시준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많은 지도자가 있었고 군대 편성 계획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현시킨 이는 김구 뿐”이라며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국 푸단(復旦)대 교수 쑨커즈(孫科志)는 “혼란스러웠던 중국에서 정치적 난민에 가까웠던 한인 사회를 유지하고 임시정부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갖춘 것은 김구의 면모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보았다.
2006년 9월 22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3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의 학자 12명은 김구에 대해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백범은 민족의 독립만을 생각한 지도자”라며 “청년시절부터 동학, 불교, 기독교에 차례대로 귀의한 것은 모두 독립을 위한 힘을 모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대학교수 리영희는 김구의 장례식때 울려 퍼진 추도곡을 반세기 넘게 기억하며 추모하기도 했다.
박용만(1924)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 외교력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신용하는 “당시 장제스 (蔣介石)를 설득해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한 것은 백범 외교의 진가”라고 평가하였다.
이승만을 통해 미국과도 외교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평가도 있다. 단국대 교수 한시준도 “백범이 광복군의 연합군 OSS부대 참가를 주도한 것은 승전 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려 한 것”이라며 “이는 백범이 외교에서 상당한 전략을 구사했음을 보여 준다”고 평가하였다.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에서 임정에 대한 지원을 줄이자 그는 이승만과 함께 임정을 미국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 당대의 여론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8%의 득표로 33%의 여운형, 21%의 이승만에 이어 3위에 기록되었다.
1945년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293명이 김구를 지목하여 2위로 집계되었다.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56표를 얻어 4위였다.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702표로 전체의 10.5%를 확보했다.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 (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568표로 2위를 하였다.
○ 저서
《백범일지》(1947, 국사원): 춘원 이광수가 윤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왜실기》(1932, 엄항섭 정리)
《백범어록》(2008, 도진순 주해)
〈나의 소원〉: 《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있는 글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 민족 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중략)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強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하략)
○ 가계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자점의 방계 후손인 아버지 김순영은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 중경 거주시,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때 권총을 구입하여 줄 만큼 열심히 아들을 지원했다. 또한 군인 출신 정치인 이후락과도 사돈관계이기도 하다.
김구의 아들 김신이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의 후손들은 자손 대대로 공군 장교로 병역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
- 가족 관계
증조부 : 김영원(金榮元, ? ~ ?)
조부 : 김만묵 (金萬默, ? ~ 1888년 5월 30일 / 음력 4월 20일)
조모 : 장씨(張氏, ? ~ ?)
아버지 : 김순영 (金淳永, 1848년 ~ 1901년 2월)
어머니 : 곽낙원 (郭樂園, 1858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부인 : 최준례(崔遵禮, 1889년 ~ 1924년 1월 1일)
장남 : 입언 김인(立言 金仁, 1917년 11월 12일 ~ 1945년 3월 29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장교, 중화민국 육군 소령
자부 : 안미생(安美生, 1914년 ~ 2007년, 안중근의 조카)
차남 : 서언 김신(瑞言 金信, 1922년 9월 21일 ~ 2016년 5월 19일) 대한민국 6대 공군참모총장, 교통부장관, 주중국 대사, 국회의원 역임, 前 백범기념관 관장
자부 : 임윤연(林胤嬿, 1929년 ~ 1971년 11월 11일), 독립운동가 임학준의 딸, 위암으로 사망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