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년 4월 7일, 훈족 (Huns) 최후의 왕 ‘신의 채찍’ 아틸라 (Attila, 406 ~ 453)가 프랑스 메스를 약탈하고 갈리아 도시들 공격

아틸라 (라: Attila, 독: Etzel, 406년 ~ 453년)는 훈족 최후의 […]

아틸라 (라: Attila, 독: Etzel, 406년 ~ 453년)는 훈족 최후의 왕이며 유럽 훈족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5세경 게르만 민족 대이동기에 동유럽 북부의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신의 채찍이라 불릴 정도로 동서유럽의 모든 국가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453년 아틸라가 죽은후 곧 훈제국은 붕괴되어 버렸다.

서고트의 알라리크 1세, 반달족의 가이세리크에 이어 서로마의 붕괴를 앞당긴 세 번째 인물이며, 서로마 뿐만이 아니라 동로마 등 유럽 전역에 악명을 떨쳤다.

– 아틸라 (Attila)

.출생: 406년

.사망: 453년 3월

.부친: 문트주크

.배우자: 크레카, 일디코

* 훈족 제국의 통치자

.재위: 434 ~ 453년

.전임: 블레다, 루가 / 후임: 엘라크, 에르나크

○ 생애

아틸라는 434년부터 죽을 때까지 18년 정도, 유럽에서 최대의 제국을 지배했으며, 그의 제국은 중부 유럽부터 흑해, 도나우 강부터 발트 해까지 이어졌다. 그는 그의 삼촌 루아가 죽자 그의 형 블레다(Bleda)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설과 블레다가 실질적인 왕이고 아틸라는 2인자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설이있다.

– 즉위

어찌되었건 아틸라와 블레다는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였는데 443년 블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블레다의 죽음에 관해서는 아직 사실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사냥 도중 사고로 인한 죽음이라는 설과 아틸라가 암살했다라는 설이 있다.

블레다가 죽은 뒤 아틸라는 훈족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

아틸라는 동로마를 공격 콘스탄티누스의 고향인 나이서스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한편 동로마의 수많은 도시를 침공하여 동로마 에게서 막대한 돈을 공물로 받게 되었다.

– 호노리아 공주의 청혼

450년,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 공주가 아틸라에게 청혼한다. 호노리아 공주는 동생을 황제 자리에서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동로마로 추방된 상태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폴 궁궐에 감금당하여 수도승 수준의 금욕적인 생활을 강요받고 있었다. 아틸라는 청혼에 즉각 응하며 그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반을 요구한다. 그러나 황실과 사전에 논의된바 없는 청혼이였기에 서로마측은 즉시 거절하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이를 무시하고 서로마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 서로마 침공

아틸라는 451년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현재의 프랑스)로까지 진격, 오를레앙까지 나아갔으나 카탈라우눔 전투(샬롱 전투)에서 서로마 장군 아에티우스를 만나 대패한후 퇴각한다. 이후 452년에 이루어진 2차 원정에서는 이탈리아를 공격하였으며 결국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를 수도 라벤나에서 몰아내기도 하였다. 서로마는 협상단을 파견하여 아틸라에게 강화를 제안했고, 아틸라는 이를 받아들여 퇴각하였다. 협상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전하여 지는 바가 없으나 상당한 금액에 협상금을 제공했을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 사망

아틸라는 453년, 새로 얻은 첩 일디코(Ildiko)와의 결혼식을 치른 날 밤에 사망한다. 사인에 대해서는 일디코에 의한 암살, 복상사, 과음으로 인한 질식사, 동맥에서 나온 피에 인한 질식사 등 추측이 무성하다. 아틸라의 제국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으며, 의미 있는 유산도 남아있지 않다. 아틸라가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 알려진바가 없다. 매장에 참여했던 자들은 모두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 인격

– 사람됨과 인품

후대의 기록에 보이는 아틸라의 성품은 의외의 관대함과 소박함, 그리고 잔혹함과 교활함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후대의 많은 정복군주들처럼 매우 현실주의적인 성격이었으나 세상을 전란에 빠뜨린 장본인인지라 긍정적인 기록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에서도 아틸라가 지닌 의외의 면모를 약간은 찾아볼 수 있다.

‘비잔틴사’ (History of Byzantium)를 편찬한 것으로 유명한 동로마의 역사가인 프리스쿠스는 449년에 동로마의 사절 중 한 사람으로서 훈족에 파견된 일이 있었다. 당시에 프리스쿠스는 다른 사절들과 함께 아틸라의 연회에 초청받았는데, 그곳에서 목격한 아틸라의 모습과 행동거지를 상당히 자세히 묘사한 바 있다.

프리스쿠스의 묘사에 따르면, 아틸라의 용모는 당시 동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추하고 매력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프리스쿠스가 본 그의 몸가짐은 상당히 검소하고 절제적이며 또한 금욕적이었다. 프리스쿠스는 자신이 남긴 기록에서 훈족과 고트족을 모두 스키타이 혹은 야만인이라 칭하며 무시하였으나, 아틸라의 성품과 인격만큼은 의외로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아틸라는 자신의 부하들과 사절단들에게는 값비싸고 귀한 음식들을 베풀었고, 금은으로 만든 화려한 술잔으로 대접하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목기로 만든 접시와 술잔을 사용했으며, 연회 중에는 고기 몇점을 먹었을 뿐 사치스러운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옷차림은 정갈하되 검소하고 소박해서, 옆구리에 검을 차지도 않았고, 또한 다른 훈족이나 고트족들과는 달리 부츠에 걸쇠가 걸려있지도 않았다. 또한 다른 이들이 보석과 귀금속으로 만든 말굴레를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아틸라 자신은 수수한 모양새의 말굴레를 사용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프리스쿠스의 증언에 의하면, 연회에 참석한 다른 이들이 라틴어와 훈족 및 고트족의 언어를 구사하며 재주를 부리던 난쟁이 광대인 제르코의 재미있는 공연을 보고 자지러지게 웃었으나, 아틸라만큼은 그저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다가 자신이 귀여워하는 막내아들인 에르나크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또한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아틸라는 훈족의 통치 체계를 혁신하기 위하여 외국 출신의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에서조차 받을 수 없던 대우를 아틸라에게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충성을 다했다고 하였는데, 이를 보건데 사람을 다루는 능력도 상당히 출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면과는 별개로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동로마 원정 당시에 보여준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적을 천천히 짓밟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는 도시의 약탈과 파괴 및 무수한 살상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아틸라가 벌였던 전쟁의 참상은 그를 증오하던 로마인들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 대부분인지라 과장되거나 왜곡된 내용도 일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당대인들의 시각으로도 아틸라의 전쟁 수행 방식은 매우 참혹하고 잔인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 외모 및 인종

훈족에 사절로 파견되어 직접 아틸라의 모습을 목격했던 동로마의 역사가인 프리스쿠스는 아틸라의 외모 자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은 따로 남기지 않았다. 한편 요르다네스는 아틸라의 모습에 대하여, 작은 키 (150cm 남짓)에 어깨는 떡 벌어졌으며, 머리는 컸고, 눈은 깊이 들어가 박혀 있으며, 피부가 거무스레하고, 코는 납작했으며, 숱이 적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이런 상세한 묘사는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프리스쿠스의 기록을 참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기에도 그다지 잘생긴 용모와는 거리가 있었던 듯 싶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프리스쿠스는 그 외모와는 별개로 아틸라를 검소하고 금욕적이면서도 가족들과 부하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로 묘사하였다.

한편 요르다네스의 기록만 보면 투르크계나 몽골계 중간쯤의 유목민 같아 보이지만 다른 유럽 지역의 여러 기록을 보면 오히려 아틸라와 훈족을 아리아계나 이란계처럼 묘사한 기록도 있다. 훈족을 다룬 서양 측의 기록에는 동양인으로 추측되는 묘사가 많다. 그러나 동양 측에서는 서양인처럼 붉은 머리에 큰 코로 묘사하기도 한다. 훈족이 게르만족이나 로마인들과 싸울 당시 아틸라가 이끌던 훈족 기병들 중에는 훈족에 복속된 게르만족 전사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아틸라를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슬라브 계열의 혼혈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딱히 아틸라를 혼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 공동체에 여러 민족이 뒤섞이는 과정에서도 지배계급 사이에서 교류가 생기는 일은 드물고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보통은 폐쇄성을 띤다.

로마인과 그리스인에 기록에 의하면 악의적으로 묘사하여 왜곡한 부분도 많지만 상당한 기록에 아틸라가 금발이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6세기 이교사가 프로코피우스 등이 남긴 기록에서 훈족과 게르만족의 혼혈성을 짐작할 수 있다.

○ 문화에 끼친 영향

아틸라의 명성과 그에 대한 공포는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갈리아, 게르마니아, 그리스,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를 소재로 한 수많은 소설과 전설, 그림, 연극, 오페라, 조각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후에 유럽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생각되어, 역사가들은 아틸라를 위대하고 고귀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아틸라는 세 편의 노르드 사가(saga)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니벨룽겐의 반지에서는 훈족의 왕 에첼로 등장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에서는 중세 그리스도교의 영향으로 아틸라는 잔인한 야만인 왕으로 기억되어 왔다. 주세페 베르디는 아틸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1846년 아틸라(오페라)를 발표한다.

○ 평가

서구인에게 아틸라는 공포의 대명사다. 무수한 이민족이 유럽을 침략했지만 아틸라가 이끌었던 훈족만한 공포를 선사했던 것은 칭기즈칸의 몽골족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사로서의 그의 자질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훈족의 왕이라는 측면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야만족에 대한 서구의 온갖 편견과 날조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지 몽매한 싸움꾼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민족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신기술을 도입해서 전력을 보강하는 혁신가이기도 했다. 또 황금을 멀리할 정도로 강한 절제력이 있었고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위대함은 유목부족에 지나지 않던 훈족을 거대한 국가로 키워냈다는 점이다. 두려움과 황금으로 부하들을 통제한 점이나, 자신들의 전투스타일에 맞는 전쟁형태를 찾아낸 것 역시 그가 훈제국의 왕으로서 이룬 업적들이다. 자꾸만 뿔뿔이 흩어지려 하는 부족들을 엮어내어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의 전쟁으로 역사에 남은 것 이것이 훈족 왕 아틸라의 진면목이다.

– 유럽에서

로마인들과 게르만족에게 아틸라와 그가 이끄는 훈족은 가히 공포이자 신의 심판이었다. 이전의 유럽에서는 그토록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던 족속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동안 로마인들 또한 수없이 많은 야만족들과 싸워 왔으나, 아틸라처럼 한 지역을 타겟으로 삼아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악질적인 행동을 의도적으로 수차례 일삼는 경우는 흔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틸라와 그의 군대를 신의 심판이 현실화라고 묘사하였으며 아틸라를 공포의 대왕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앙의 확산과 로마 제국의 쇠퇴, 이민족의 침략 등으로 인하여 신음했던 당시 사람들의 사고관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이후 몽골 제국도 동유럽 침공 당시 비슷한 악명을 듣게 된다.

아틸라와 훈족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유럽의 여러 전설에도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게르만 계열 전설에는 위엄 있고 강대한 군주로 묘사되고[25], 바이킹 계열 전설에선 술고래 정도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참고로 바이킹들은 술을 잘 마시는 것과 대단한 전사를 동일시했다. 일례로 북유럽 신화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인 토르는 술을 매우 잘 마시기로 유명하고 이것을 거인왕 로키와 겨루기도 한다. 기독교와 관련된 전설에서는 거의 현세에 도래한 악마들의 군주 정도로 묘사되며 교황 성 레오 1세가 신의 기적과 위엄을 설파하자 알아서 자리를 피했다고도 한다. 당연히 이는 기독교 세계의 프로파간다로 실제로는 위에서 봤듯이 강화 협상으로 물러난 것이다.

한편 아틸라의 공포성이 유럽권에 널리 각인되어 아틸라를 통칭하는 말인 ‘훈족의 아틸라 (Atilla the Hun)’는 대체로 성격이 거칠고 포악한 사람을 이르는 은어나 수식어로 쓰였으니 서양권에서 아틸라의 악명이 얼마나 자자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 헝가리에서

유럽에서의 일반적인 평가와 달리 헝가리에서 아틸라는 국가적 영웅이다. 12세기부터 이미 헝가리 왕족들은 아틸라의 후예라고 자칭했고, Atlakviða, Atlamál 같은 헝가리의 전설에서는 아틸라를 훌륭하고도 고귀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헝가리인인 마자르족과 훈족은 혈통상 별로 연관이 없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학자들의 의견이고, 따라서 다른 유럽 국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헝가리인 중에서도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상당히 어이없어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페니키아와 혈통상 전혀 상관없는 튀니지에서 한니발 바르카를 영웅시하고 중국에서 단순히 중원을 차지했을 뿐인 칭기즈 칸과 쿠빌라이 칸을 중화영웅으로 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 셈이다. 아무튼 다른 유럽 나라에서는 헝가리의 이런 주장을 기이하게 보는 편이지만, 헝가리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뭐라고 왜곡하든 아틸라는 위대한 왕이며 헝가리의 조상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헝가리에서는 지금도 아틸라 (Attila, 어틸러)라는 이름은 지금도 상당히 많이 쓰이는 이름이다. 기독교권에서 가장 흔한 이름인 요한의 헝가리어인 야노시 (János)보다도 많다. 한국도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흔했던 이름들이 현대에는 사장되는 추세인 국가가 많다.

– 터키에서

터키에서도 튀르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아틸라가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아틸라 치세의 훈 제국이 오스만 제국 이전에 유럽 정복에 적극적으로 나선 튀르크계 국가라는 점에서 터키인들에게 아틸라는 튀르크족의 유럽 정복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터키에서도 아틸라라는 성이나 이름이 흔한 편이다.

– 몽골에서

몽골인들은 자신들을 흉노의 후예라고 여기는데 이들은 훈족이 흉노의 후예라는 설도 사실로 여기므로 훈족 또한 자신들의 역사로 여겨 헝가리인들 및 터키인들과 마찬가지로 아틸라를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한다. 다만 아무래도 아틸라가 몽골 초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유럽 땅을 다스렸던 군주인지라 몽골 초원을 다스렸던 묵돌선우, 칭기즈 칸 등에 비하면 덜 존경받는 감이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