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라틴어 인문학 (59) 중에서 _ 11월 17일자
Ego sum via veritas et vita
(에고 숨 비아 베리타스 에트 비타)
Ego sum via veritas et vita.
ego, 나, 나는, 영어 I, Ego, egoism
sum, 이다, 있다, 영어 be, is, am, are
via, 길, 도로, 영어 way, road
veritas, 진리, 영어 truth
vita, 생명, 목숨, 삶, 영어 life
Ego sum via veritas et vita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실제 라틴어에는 정관사 the가 없습니다. 훗날 언어학자들이 번역과정에서 첨가한 것입니다. 물론 라틴어 뿐만이 아니라 고대 언어는, 중국의 한자까지 포함하여,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이 소문자나 필기체나 . , ? ! 등 부호들이 없었습니다. 이것들은 대부분 훗날 언어학의 연구를 통해서 만들어져 오늘날 보태서 넣은 것입니다.)
Ego sum via veritas et vita.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분들도 많이 알고 있는 성경귀절로 신약성서 요한복음서 1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적 전통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로마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책 요한복음서가 기록된 때는 AD 1세기말, 혹은 2세기 초로써 이미 신흥종교인 기독교가 팔레스타인 영역을 벗어난 시기로, 당시의 세계적 중심지인 로마를 배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길’이란 말, via도 당시엔 로마세계에만 있던 개념입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와 로마의 유리우스 카이사르가 군사도로를 만들면서 via, 즉 도로개념이 만들어졌지 그 시대 갈릴리나 예루살렘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에는 via, 길이라는 것이 있질 않았습니다.
Veritas, 즉 ‘진리’라는 개념도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로마의 시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개념입니다. 오히려 히브리적 전통에서는 ‘지혜’라는 말을 더 선호했습니다. 히브리성서, 흔히 기독교인들이 구약이라고 부르는 책, 잠언, 시편 등에서는 주로 ‘지혜’에 대하여 가르치지 ‘진리’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의 요지는 ‘인문학적 라틴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오늘의 글귀인 Ego sum via veritas et vita란 유대적 표현과 그리스-로마적 표현이 합해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입니다. 이는 ‘헤브라이즘’ (Hebrism)과 ‘헬렌이즘’ (Hellenism)이 함께 어울려가며 상호보완하기 시작한 것이 신약의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요한복음서의 특징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Ego sum via veritas et vita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쓰다보니 이 3개의 단어, via, veritas, vita ‘길, 진리, 생명’이 모두 v로 시작되는 것이 흥미로워서 라틴어 사전을 펼쳐 v로 시작되는 단어들 몇개를 추려보았습니다.
viva, 만세! 영어도 viva ! 만세!
victoria, 승리하다, 이기다. 영어, victory
vinum, 술, 포도주, 영어 wine
virtus, 덕, 도덕, 용기, 힘, 영어 virture
villa, 별장
visio, 보다, 직관하다, 영어 vision
voluntas, 뜻, 의지, 자발적, 영어 voluntary
vox, 소리, 음성, 영어 voice
vocatio, 소명, 부르심, 영어 vocation
valor, 가격, 가치, 영어 value
verbum, 말, 언어, 발음, 영어 verbal
victima, 희생, 희생제물, 제사, 영어 victim
virgo, 처녀, 동정녀, 영어virgin
사진을 찍을 때, 요즘은 하트도 그리고, 손가락을 세개 모아 ‘사랑합니다’라고 표시하지만 전엔 주로 V자를 크게 그렸습니다. 그 때 우린 ‘이겨라’ ‘이긴다’ ‘victory’ 를 주로 상징했댔습니다. 앞으론 사진을 찍으실 때, 똑같이 V자를 크게 그리면서 다른 상징을 만들어 볼수도 있지 않을까요?
‘길이다. 진리다. 생명이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말 50가지’ – 오늘도 다시해 보세요. 듣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행복해 지니까요.
○ 고대 ‘로마의 도로’에 대하여
로마의 도로는 고대 로마의 성장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로마 도로 덕분에 로마인은 군대 이동과 물자 교역, 소식 전달을 용이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로마의 도로 체계는 50,000 마일의 포장 도로와 250,000마일의 길을 포괄하였다. 로마가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도시를 중심으로 29개 정도의 거대한 군용 도로가 뻗어있었다. 도로를 놓기 위하여 언덕은 깎고 골짜기는 메웠다. 로마 제국은 372개의 거대 연결도로를 통하여 113개 속주로 구획되었다. 갈리아 한 곳만 해도 21,000m의 도로가 부설되었다고 하며, 브리타니아에서는 도로 길이가 최소 4,000m라고 한다.
로마인들은 도로(via) 건설에 정통하였다. 도로는 한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재화를 옮기는 수단이었다. 누구나 로마 도로로 걷거나 지나가거나 가축, 마차 등을 몰 수 있었다. 도로는 작고 거친 길, 승마길, 터널, 수레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12표법에 따르면 로마 도로의 최소 폭은 직선 구간에서 2.45m였으며, 굽은 구간에서는 4.9m였다.
로마의 도로망은 제국의 안정을 유지하고 확대하는데 중요하였다. 로마 군단은 신속하게 도로를 건설할 수 있었으며, 일부 도로는 수 천년이 지난 뒤에도 쓰인다. 고대 말기에 이러한 로마 도로는 도리어 이민족의 침략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 이탈리아의 주요 도로들
아이밀리우스 도로 (Via Aemilia) : 아리미눔에서 플라켄티아까지.
아피우스 도로 (Via Appia) : 기원전 312년. 로마에서 아풀리아로.
아우렐리우스 도로 (Via Aurelia) : 기원전 241년. 로마에서 프랑스로.
카시우스 도로 (Via Cassia) : 로마에서 토스카나로.
플라미니우스 도로 (Via Flaminia) : 기원전 220년. 로마에서 아리미눔으로.
소금 도로 (Via Salaria) : 로마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 고대 로마의 처음 도로, ‘아피아 가도’ (Via Appia)
아피아 가도 (라: Via Appia)는 이탈리아의 로마 공화정 시대에 지어진 도로이다. 고대 로마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도로이기도 하다. 이 도로는 로마에서 시작되어 풀리아주의 브린디시까지 이어진다.
아피아 가도라는 이름은 로마의 감찰관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삼니움 전쟁 중이었던 기원전 312년에 처음으로 군사 도로로 사용한 뒤에 붙여졌다. 아피우스가 도로 건설을 입안하고 직접 총감독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로마 수도(水道) 중 최초의 수도(아피아 수도) 역시 같은 시기인 기원전 312년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로마 군대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다시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기지에 의존했다. 이 기지는 전장에서 바로 공격할 기회를 기다릴 수 있도록 많은 수의 로마 병사를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지들은 수도인 로마에서부터 연결되어 출입이 쉽고 물자 공급이 수월한 좋은 도로를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기원전 4세기 중반, 아피아 가도는 군사적 물자 교류를 위한 중요 수송로로 건설되었다.
특히 제 1차 삼니움 전쟁 (343–341 BC)에서, 로마인들은 늪지 건너의 삼니움인들에 맞서 평원에서 군대를 지원하거나 재공급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도로의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에트루리아 인들이 지배했던 초기의 로마 시대에 지어진 몇몇 도로들은 대개 로마를 벗어나서 에트루리아를 이어주었다.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인들은 도로 건설의 주역이 되어 이탈리아 내의 도로들을 확장했다. 이 도로는 로마(이는 로마 제국과는 다르며, 초기의 로마 공화국을 말한다.)의 영역을 벗어나서 건설된 최초의 도로다. 이러한 도로들은 이티네라리움 (Itinerarium) 을 통해 목적지가 결정되고 계획되어, 로마 시에서 영토 경계선까지 확장되었다. 이 시대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
.‘아피아 가도’ 언급
아피아 가도의 중요성은 당시 스타티우스가 문헌에 기록했던 이름에서부터 나타난다.
Appia teritur regina longarum viarum.
(아피아 테리투르 레지나 론가룸 위아룸)
“아피아 가도는 도로의 여왕이다.”
아피아 가도는 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부하들의 처형장소이기도 하다.
기원전 73년, 카푸아에서 스파르타쿠스 전쟁으로 알려진 반란이 있었다. 실패로 끝난 이 반란에서 포로가 된 노예 6천 명은 모두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이르는 200km에 달하는 도로변에 그것을 늘어놓았다.
.아피아 가도의 기술적인 특징
로마 가도에는 그때까지의 길과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직선적: 군대의 수송을 목적으로 한 도로이므로 가능한 한 평탄한 직선으로 건설되었다. 예를 들어 길을 평탄하게 유지하기 위해 지반이 약한 습지대에서는 말뚝을 많이 박아 토대를 쌓고 그 위에 도로를 건설했다. 또한 강이나 계곡에서는 길과 같은 높이로 다리를 만들어 도로가 지나가도록 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 군대의 신속한 이동을 위해서 일반인과 수송병력이 도로에서 뒤섞이지 않도록 너비 1~3미터 정도의 인도를 차도의 양 옆에 따로 만들었다.
포장 도로: 중요한 로마 가도의 대부분을 전부 포석으로 포장했다. 놀랍게도 그 포장 구조는 현대의 도로와 거의 비슷하다. 포장 전체 두께는 1.0 ~ 1.5미터 정도이며, 최상층에는 접합면이 맞물리도록 자른 한 변 70 센터미터 정도의 큰 돌을 빈틈없이 깔았다.
용이한 배수: 가도의 유지, 보수가 용이하도록 빗물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다. 도로 중앙부는 높이고 가장자리는 낮게 아치형으로 만들어 (현대의 도로 구조와 유사) 비가 오면 빗물이 가장자리로 고이도록 만들었다. 도로 가장자리에는 움푹 패인 배수구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침입한 물이 고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포장의 최하층에는 자갈을 깔았다.
수목에 대한 대책: 지하로 뻗는 수목의 뿌리는 가도의 차도 부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도로 포석 포장의 바로 바깥쪽에 나무를 심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현재 인도 부분에 있는 나무들은 당시에 없던 것들이다.
.현재의 아피아 가도
현재 아피아 가도는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관광을 위한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로마 시대에는 황제 이외에 성벽 안쪽에 묘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접근하기 편리한 가도 주변에 묘를 만들었는데, 이 묘들은 현재 관광의 대상이 되어있다. 로마 주변의 아피아 가도는 지역 주민을 제외하고는 자동차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