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알렉산더대왕의 궁전 화가’, 아펠레스 (Apelles of Kos)
아펠레스 (Apelles of Kos)는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화가였다. 그 당시 예술가에 대해 소개한 플리니 (Pliny the Elder)는 그를 “이전과 이후의 예술가들보다 우수하게 평가”했다.
– 아펠레스 (Apelles of Kos)
.출생: BC 370년, 소아시아 Colophon
.사망 : BC 306년, 그리스 코스 섬
.부모: Pytheas
아펠레스 (Apelles) 고대 그리스 화가로 소아시아 크로폰에서 출생했다. 알렉산더 대왕 (재위 BC 336~323)의 궁전 화가로서 봉직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 (Ptolemaios Ⅰ Soter, 재위 BC 304~283)의 알렉산드리아에도 체재하였다고 한다.
여러 개의 알렉산더 대왕의 초상을 비롯, 코스 섬 아크레피스 신전을 위해 그린 『아프로디테 아나디오미네 (바다에서 올라오는 아프로디테)』 등 고대 세계에서 절찬을 받은 작품을 많이 그렸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없다.
○ 일화들
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했고 젊고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속 화가, 아펠레스!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벽화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더니 새가 와서 머리를 박고 죽었다는 설이 있듯 아펠레스의 그림에도 기막힌 일화들이 있다.
하루는 동료 화가 두 명과 누가 그림을 가장 잘 그리나 내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당나귀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 어떤 당나귀가 가장 멋지고 잘 생겼는지 평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이미 사람들을 포섭해 놓은 이후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그의 친구의 그림에 탄사를 보냈고 승부는 그렇게 끝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 중 한 명이 데려온 당나귀 한 마리가 아펠레스 그림에 돌진하기 시작했다. 아펠레스가 그린 암당나귀가 너무 사실적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런 아펠레스를 매우 아꼈다고 전해진다. 그의 그림은 시대를 넘어 르네상스 시대까지 이름을 떨쳤고 그의 그림과 비교당하는 일을 큰 영광으로 알았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화가였는지 알 수 있다.
또 다른 일화다. 젊고 패기 넘쳤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겐 정열을 아끼지 않는 애첩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빛나는 얼굴과 완벽한 몸매는 대왕이 경배하기에 마지않을 만큼 황홀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판카스페, 혹은 캄파스페라고 전해진다. 캄파스페의 황홀한 몸을 감상하는 일을 하루 일과 중 가장 즐거운 일로 꼽았던 대왕은 그녀의 몸이 세월에 사그라지는 것을 못내 가슴 아파했다.
대왕은 아펠레스를 불러 첩의 나신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사실적인 묘사, 아름다움의 극치를 달렸던 아펠레스가 그녀의 탐스러운 나체를 그려준다면 평생 그 그림 한 점만 보면서 살 수 있을 듯 했다. 대왕은 조용하고 빛이 잘 드는 방을 골라 화가가 캄파스페를 그릴 수 있도록 해주었고 큰 기대를 하며 그림이 완성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왕이 내어준 방이 화실이 아닌 불륜의 온상지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캄파스페의 나체는 대왕에 대한 두려움도 날아가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고 화가의 자제력을 한계점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리라는 그림은 안 그리고 여인의 탐스러운 살결에 몸을 묻게 되었다. 대왕은 점점 길어지는 화실 작업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캄파스페를 보지 못하는 것도 힘든데 그림에 대한 기대까지 더해지니 하루하루가 일 년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결국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잠깐이나마 호기심을 풀겠다며 화실의 문을 열었다. 당연히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대왕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몹시 당황하게 된다. 사랑하는 애첩과 그토록 아꼈던 화가가 서로 부끄러움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대왕의 여자를 취한 간 큰 남자는 이제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구나 생각 했다. 대왕 역시 몹쓸 화가를 당장 처형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 대왕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동안 그렸던 캄파스페의 아름다운 누드 그림이었다.
대왕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넋을 잃어 버렸다. 화가에게 분노를 할 마음도 사그라졌다. 그림에 매료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대왕은 여인의 그림만 받고 돌아 나왔다. 화가와 캄파스페는 대왕의 허락을 받고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뛰어난 그림 솜씨가 한 남자의 사랑과 목숨까지 지켜 준 것이다. 그의 그림은 이미 모두 유실되어 찾아 볼 수 없지만 이 일화들이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플리니우스는 뒷사연을 이렇게 전한다.
“아펠레스는 판카스페를 모델로 삼아서 ‘바다 거품에서 태어나는 비너스’를 그렸다.”
새벽 별처럼 아리따운 아내를 얻은 화가가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창조했다는 말이다. 판카스페도 세계 제국의 안주인 자리를 놓치긴 했지만 회화의 영토에서 더없는 신성을 꿰찼으니 그리 밑진 장사도 아니었다. 아펠레스 이야기는 조각가 프락시텔레스가 아테네의 정치 실세들을 품에 넣고 주무르던 아름다운 창녀 프리네를 아내로 취해서 ‘크니도스의 비너스’를 조각했다는 일화와도 퍽 닮았다.
아펠레스는 또 붓 솜씨 덕분에 생명을 건진 일화도 있다. 루키아노스의 기록을 보면 그의 재능을 시기하던 화가 안티필로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아펠레스가 왕위 전복을 꾀했다고 위증한다.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이 된 아펠레스는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이 등장하는 우의화를 한 점 그리는데, 이 그림을 본 왕은 그의 결백을 믿고 오히려 위증자를 처벌했다고 한다. ‘아펠레스의 모함’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르네상스 미술이론가 알베르티가 화가들이 마땅히 익혀 두어야 할 시학 주제의 본보기로 꼽으면서 유명세를 탔다.
“아펠레스의 그림은 이랬다고 한다. 커다란 귀를 가진 남자 옆에 여자 둘 이 서 있는데, 하나는 무지, 다른 하나는 시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맞은편에서 모함이 다가온다. 모함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교활해 보인다. 모함은 오른손에 횃불을 들고 왼손으로는 한 소년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끌고 오는데, 소년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높이 뻗고 있다. … 맨 뒤에 따라오는 것은 진실이다. 진실은 부끄러움과 수치로 어쩔 줄 몰라한다. 그림에 대한 설명만 들어도 이렇게 좋은데, 그 유명한 화가아펠레스의 붓으로 그린 그림을 본다면 얼마나 우아하고 사랑스러울지 그저 상상만 해도 즐겁다.” (‘회화론’ 3권)
아펠레스가 제 재능을 믿고 콧대만 높았던 것은 아니다. 다 그린 그림은 대문간에 세워 두고 그 뒤에 몰래 숨어 있곤 했는데, 집 앞을 지나치던 행인들이 그림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요컨대 비판을 달게 수용하는 겸손한 화가였다는 것이다. 또 주문자만 마음에 들어하면 그만이라는 그 당시 화가들의 관례적 사고에 비추어 보면 대단한 파격이었다. 하루는 구두장이가 트집을 잡는 소리가 들렸다. 그림 속 등장인물의 신발에 끈을 매는 고리쇠가 하나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림 뒤에 웅크리고 있던 아펠레스는 비판을 귀담아 두었다가 냉큼 고쳐 그렸다. 그런데 이튿날 그 구두장이가 또 와서는 등장인물의 다리 모양이 어째 부자연스러워 보인다며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아펠레스가 참을 수 없었다. 이래봬도 해부학 전통이 살아 숨쉬는 코스 출신이 아닌가. 아펠레스는 주제넘은 구두장이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고 한다. “구두장이는 구두 깔창에나 신경 쓰시지.” 이 말은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풍자집 ‘아다지오’에 “주제넘게 아는 체하면 몸에 해롭다”는 뜻으로 인용하면서 뭇 예술가들이 즐겨 입에 올리는 격언이 된다.
아펠레스 이야기는 플리니우스가 ‘박물지’ 35권에 써서 전하는 내용이다. 로마제국의 지중해 함대 사령관이었던 플리니우스는 군인 출신답게 근육질의 무뚝뚝한 문체가 특징이지만, 아펠레스만 나오면 사뭇 물기 넘치는 문장을 술술 뽑아낸다. 플리니우스는 이런 재미나는 이야기를 어디서 얻어들었을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속 궁정 조각가 리시포스가 크세노크라테스라는 제자를 두었는데, 글재주가 비상해서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적이 있었다. 이 책을 또 다른 조각가 안티고노스가 읽고 내용을 조금 더 붙여서 예술가의 전기를 다시 펴낸다. 두 책 모두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플리니우스는 아마 기원후 1세기까지 남아 있던 안티고노스의 책을 읽고 정리했을 것이다. 그의 ‘박물지’가 지금껏 살아남은 것은 미술사의 행운이다.
플리니우스는 마찬가지로 없어지긴 했지만 사모스의 두리스가 쓴 책도 참고했을 것이다. 한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한테 늘 기록을 채집하고 분류해서 글로 정리하라고 당부했는데, 헬레니즘 시대에 많은 미술관련 저작이 쏟아져 나온 것은 그런 전통 덕분이다. 심지어 나중에 가서는 하도 많은 예술가의 일화가 잡다하게 뒤섞여서 어떤 것이 원조 일화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화가가 지우개로 쓰던 스펀지를 던져서 헐떡거리는 개의 입 거품을 재현했다는 이야기를 두고 플리니우스는 프로토게네스의 일화로, 디온 크리소스토모스는 아펠레스의 일화로, 플루타르코스는 네알케스의 일화로 소개하는 식이다. 화가 공방에서 일어난 우연찮은 사건이 이름난 화가의 일화처럼 각색되었을 수도 있고, 실제로 말이나 개의 주둥아리 거품을 스펀지를 눌러서 재현하는 방식이 고대 화가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실행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대의 예술가 가운데 아펠레스의 일화는 특히 16세기 이후 궁정 문화가 융성하면서 미술사의 감초 주제로 떠오른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불이 붙었다가 북유럽까지 금세 유행을 타오른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가 티치아노가 떨군 붓을 집어주려고 허리를 깊숙이 구부렸다는 이야기, 뒤러가 작업하는 동안 밑에서 사다리를 꼭 붙들고 시중했다는 막시밀리아누스 1세의 일화도 결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펠레스에게 바쳤던 고귀한 헌사의 후렴구일 뿐이다. 아펠레스의 작품은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데도 그의 명성이 조금도 빛 바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