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지리
힉소스(Hyksos, 히스코스)
힉소스(Hyksos) 또는 히스코스는 이집트의 북동쪽으로부터 이집트의 나일 강 델타 지역의 동부를 침략하여 고대 이집트의 제2중간기를 개창한 아시아 계통의 호전적인 인종이다. 이집트인들에게는 말을 타고 싸우는 그들이 처음이었기에 쉽게 정복되고 말았다[Gerald Leinwand (1986). ‘Prologue: In Search of History’. “The Pageant of World History”. Allyn & Bacon. p.13. About 1800 B.C., the Hyksos came on horseback and invaded Egypt. They were a warlike people from the northeast. Fighting against an enemy on horses was new to the Egyptians, and they were easily defeated by the Hyksos].
기원전 17세기에 세력을 키웠고, 하이집트와 중이집트를 108년간 통치했다(고대 이집트의 제15왕조 및 제16왕조. 기원전 1663년 ~ 기원전 1555년). 그들은 이집트에 새로운 활과 말이 끄는 전차 등 신무기를 들여왔다.
유대인과 창세기, 출애굽기가 바로 이 시대와 연관이 깊다.
○ 힉소스(Hyksos)의 기원
힉소스(Hyksos)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나 관련 문헌이 거의 없어 불분명한 점이 많다. 힉소스 민족의 기원은 셈족(Semites), 히브리인,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하던 후르리인(Hurrian), 인도-아리안계(Indo-Aryans)의 아시아인 등으로 다양하게 추정된다.
요약본이 아닌 마네토의 ‘역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긴 구절은 힉소스와 관련되어 있다. 그 구절은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사람 아피온의 반유대주의적인 저술에 대한 요세푸스의 논박 속에 보존되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투티마이오스. 무슨 이유인지 나는 모르겠지만, 그의 치세에 신의 광풍이 우리를 쳤다. 예기치 않게도 동쪽 지역들로부터 불분명한 종족의 침입자가 승리를 확신하며 우리 땅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주력군으로 쉽게 우리 땅을 점령했다. 우리 땅의 지배자를 제압한 후 그들은 우리의 도시를 무자비하게 불태웠고, 신전을 무너뜨렸고, 모든 원주민을 잔혹한 적대행위로 다루어 일부를 학살하고 그 처자를 노예로 삼았다. 마침내 그들은 살리티스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 구성원 중 한 사람을 왕으로 임명했다. 그는 멤피스에 거처를 잡고, 상 · 하이집트에서 조공을 받아들이고 요충지에 수비대를 항상 남겨놓았고 …… 그는 사이스 주에 한 도시를 건립했는데, 대단히 좋은 위치에 있는 나일 강의 부바스티스 지류의 동쪽에 한 도시를 건립하고 고대 종교 전통에 따라 아바리스라고 명명했다. 이 장소를 그는 재건축하고 육중한 성벽으로 요새화했다. … 19년간 통치하다가 그는 죽었다. 두 번째 브논(Bnon)이 승계하고 44년간 통치했다. 아파크난이 왕위를 잇고, 36년 7개월간 지배했다. 그 후 아포피스가 61년간을, 야나스가 50년 1개월을, 마침내 아시스가 등극해 49년 2개월간 지배했다. 그들의 첫 번째 지배자들인 이 여섯 명의 왕은 이집트 종족을 근절시키기 위해 점점 더 열심이었다. 그들 종족은 전체로서 힉소스(Hyksos)라고, 즉 ‘양치기들의 왕’이라고 불렀다. 힉(hyk)은 신성한 언어로 왕을 의미하고 소스sos는 일상어로 ‘양치기’ 또는 ‘양치기들’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서 ‘힉소스’는 복합 단어이다. 혹자는 그들이 아라비아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사본에서는 힉(hyk)의 표현이 ‘왕들’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복합어는 ‘포로-양치기들’과 관련되었다는 것이다. 이집트어에서 힉(hyk)은 일부러 기음氣音(h)을 내면 학(hak)이 되는데, 이는 ‘포로들’을 의미한다 (Josephus, ‘Contra Apionem’).
이집트학 학자와 고대사가는 이 구절을 이집트 민담에서 이끌어낸 것으로 기술했는데, 이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원문이 몇몇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기원후 19세기 말까지 학자 대부분은 요세푸스가 발췌한 마네토의 서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힉소스를 단 한 번의 폭력적인 침입으로 이집트에 들어왔던 민족으로 보았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은 마네토의 기록과 이집트에서의 성서적 ‘체류’ 또는 ‘포로생활’ 사이의 유사점을 보고 그 침입자는 이스라엘인이거나 원이스라엘인, 어쨌든 셈족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가정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는 대체로 아리아 인종의 방식으로 이집트를 휩쓴 민족이 셈인종으로, 적어도 유대인에 관련된 인종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들은 훨씬 북쪽에서 왔고 아마도 아리아 인종일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점증했다.
– 20세기 이후
.에두아르트 마이어(Eduard Meyer)
1925년 에두아르트 마이어는 초기 인도유럽인의 팽창에 관한 새로운 논문을 발간했는데, 거기에서 그는 인도유럽인이 미탄니인과 카시트인에게 미친 중요한 영향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인도유럽인과 후루인이 셈족인 힉소스가 시리아, 이집트, 에게해권으로 이동하는 데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고대사』의 1928년 판에서 마이어는 널리 퍼진 유물의 발견을 키얀이라는 이름과 연관시키며 힉소스 제국이 크레타와 시리아로부터 이집트와 수단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었다고 추론했다.
.파호르 라비브(Pahor Labib)
1936년 출판된 이집트의 이집트학 학자 파호르 라비브의 논문 「이집트에서 힉소스의 지배와 그 몰락」은 그 주제에 관한 금석학적 · 문헌적 전거에 관한 상세한 연구였다. 라비브는 셈어적 왕의 이름으로 힉소스는 셈족이라고 결론지었다.
.세베-쇠데르베르그(Torgny Säve-Söderbergh)
1951년 스웨덴 학자 세베-쇠데르베르그는 대단히 영향력있는 글을 발표했는데, 거기에서 ‘북쪽 사람들’의 침입은 물론 또는 침입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힉소스의 이집트 지배는 아시아인에 의한 내부 봉기의 결과였는데, 그들은 원주민 이집트인의 도움을 받아 이미 수 세기에 걸쳐 이집트에 정착했던 자들이었다.
.가디너(Alan H. Gardiner)
가디너는 1947년에도 여전히 후루인이 힉소스라는 이집트 침입자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고 믿었지만, 1961년에 펴낸 『파라오들의 이집트』에서는 세베-쇠데르베르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롤랑 드 보(De Vaux), 알브레히트 알트(Alt)
세베-쇠데르베르그는 프랑스 셈학 학자 롤랑 드 보, 독일 셈학 학자 알브레히트 알트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셈어를 말하는 아모리인이 시리아 사막에서 레반트와 가나안으로 이주하면서 생겨난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알트는 이러한 흔적이 제13왕조의 소위 ‘저주의 문서Execratio Texts’에 나타난다고 주장했는데, 그 문서에서 이집트인은 내륙의 시리아-팔레스타인 군주(그들은 그곳의 이집트 세력을 위협했다)의 이름을 저주했다.
– 현대
셈인종의, 세부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지역적 이동으로 힉소스를 보는 견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세하다. 적어도 중부 유럽 밖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제2중간기 전문가인 독일의 위르겐 폰 베커라트(von Beckerath)와 캐나다의 이집트학 학자이자 고대사가인 존 반 세터스(J. van Seters)에 의해, 그리고 ‘캠브리지 고대사’의 윌리엄 헤이즈(Hayes)에 의해서 강력하게 주장되어왔다.
존 반 세터트(J. van Seters)에 의해 널리 알려진 견해로는 힉소스는 고도로 도시화된 페니키아-팔레스티나 문화에 속하는 아모리족 침입자 집단이다. 델타 지역에 사는 셈계 주민 일부의 지원으로 힉소스는 결국 여기에서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볼프강 헬크(Wolfgang Helck)는 기원전 3천년기와 2천년기 이집트와 중동 사이의 관계에 관한 표준서를 썼는데, 그는 새로운 경향에 반대하며 힉소스 중에는 후르리인의 요소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헬크는 힉소스에 관한 마네토의 기술에서 ‘불분명한 인종’ 또는 ‘동쪽의 지역에서 온’이라는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그는 한편으론 동부 삼각주의 셈어를 말하는 침입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힉소스라고 부르는 그들의 소小군주 및 후기 파라오를 날카롭게 구분했다. 그는 지배적인 학파의 반대에 대해 힉소스 파라오의 여러 이름이 셈어 또는 이집트어 관점에서 설명될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고수했다.
○ 힉소스 (Hyksos) : 이집트 제2중간기
이집트 제2중간기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에서 두 번째로 혼란에 빠진, 중왕국의 끝(제12왕조의 끝)인 기원전 1800년경부터 기원전 1570년경 신왕국(제18-20왕조)의 시작 사이를 말한다(고대 이집트 연표는 지금도 여전히 논쟁 중이다).
이집트 제2중간기 동안 힉소스(Hyksos)인이 이집트 역사에 나타나 나일강 동부의 델타(Delta) 유역을 점령하고 이집트 제15왕조를 만들어 통치한 것이 유명하다.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인의 이집트에서의 체류와 출애굽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등장하는 것이 힉소스의 이집트 정복과 이집트로 부터의 축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다. 힉소스의 주류가 가나안 출신으로 서부 셈어를 말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 둘 사이의 연계를 시사해주고 있다.
또한 그리스 신화의 다나오스와 카드모스에 관한 이야기도 힉소스와 관련있다는 주장이 있다.
힉소스(Hyksos)라는 이름은 ‘외국 땅의 지배자ruler(s) of the foreign countries’라는 뜻의 이집트어(헤카 카수트, heqa khsewet)에서 유래한 말로써, 기원전 3세기 이집트 사제 마네토(Manetho)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이 이름의 원형 헤카 카수트는 힉소스 시대만이 아니라 그 전후의 시기에도 존재했음이 입증되었다.
힉소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나 관련 문헌이 거의 없어 불분명한 점이 많다. 주요한 논쟁은 두 부류의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한편은 힉소스는 가나안어를 말하는 인근 팔레스타인 주민만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은 힉소스는 북시리아와 동코카서스로부터 온 북후르리적 또는 아리아적 요소도 포함한다고 믿는다.
가나안인 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힉소스’ 또는 헤카 카수트라는 칭호는 족장 또는 지도자의 의미를 담고 있지 결코 특정 인종에 대한 함의를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대항해 후르리인 설과 아리아인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마네토를 따르고 있는데, 그는 힉소스를 먼 ‘동쪽 지역’에서 온 ‘모호한 종족의 침입자’로서 묘사했기 때문이다.
야만인의 공격이나 정복은 학자에게 항상 혼란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그것은 급격히 발생했다가 사라지거나 빠르게 동화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의 시간적 범위가 짧거나 지리적 범위가 넓게 분산되어 있다면 체계적인 발굴은 어렵다.
야만인의 정복이 갖는 또 다른 특징은 ‘외부의’ 야만인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내부의’ 야만인(그들은 종종 수세기 동안 더 부유한 문명권에 인접해 살아왔다)을 부추겨 부유한 문명권을 침입하게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훈족이나 터키어를 말하는 자들은 로마제국에 침입한 경우가 거의 없지만, 훈족의 출현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고트족과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비슷하게, 비록 인도를 정복하고 지배했던 무굴인의 지도자가 터키어를 말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침입으로 인도에 도입된 문화는 터키나 중앙아시아의 문화가 아니라 페르시아 문화였다. 그 문화는 수세기 동안 인도의 북서쪽에 살았던 고도로 문명화된 사람들의 문화였다.
이러한 ‘축적된 자극cumulative impulses’의 모델은 시리아-팔레스타인 및 하이집트에서 발굴되는 기원전 1750-1570년 사이의 고고학적 증거와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마네토의 전승, 스페오스 아르테미도스 비문, 기원전 18세기 시리아로 후루인의 팽창, 미탄니의 말과 전차에 대한 관계, 기원전 15세기 팔레스타인에 후루어와 인도유럽어를 쓰는 자들의 현존에 대한 증거 등을 고려하면, 후루리어와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자들이 힉소스의 이집트 침입에서 한 부분을 형성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 힉소스 (Hyksos) 파라오
.셰시 (재위 기원전 1674- ?; 1 또는 3년 통치)
.야쿠브헤르 (재위 기원전 – ? )
.키얀 (30-40년 텅ㅊ;)
.아페피 1세 (40 년 또는 그 이상 통치)
.아페피 2세
○ 부록 : 모세의 출애굽 : 기원전 16세기?
모세(Moses)의 출애굽(The Exodus, “going out”)은 이스라엘의 건국신화이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출애굽기(出埃及記, 탈출기, 脫出記)는 구약성경의 두 번째 부분인데, 야훼가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출애굽이라는 명칭은 ‘이집트에서 나옴’을 뜻한다. 히브리어로는 쉐모트(שמות)라고 한다.
출애굽 이야기의 역사성은 오랫동안 지속된 논쟁의 주제였다. 성경의 내용에 의문을 표하거나 거부하는 학자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내세운다.
(1) 이집트와 시나이에서의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의 부족
(2) 출애굽 이야기는 신화, 전설, 이야기로 간주
(3) 출애굽이 실제로 일어난지 수백 년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역사로 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신학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형태가 변형되었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증거는 성경의 ‘출애굽기’에 서술된 내용을 지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집트의 역사기록에도 히브리 민족의 출애굽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 또한 성경의 저자들도 역사적인 배경을 알 수 있는 세부적인 자료들을 남겨두지 않았다. 파라오의 이름조차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버나드 바토 (Bernard Batto)는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에 이르는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기 보다는 고대 근동의 전승에 더 가깝다.”라고 주장하며 동의하는 다수의 학자들을 대변한다.
많은 학자들은 출애굽 이야기가 ‘바빌론 유수기’ 이후에 최종적으로 현재와 같은 내용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고있다. 역사가 캐롤 레드마운트(Carol Redmount)에 따르면 “추측하건대 원래의 출애굽 이야기는 이후의 모든 개정revisions과 변경alterations의 내부 어딘가에 숨겨져있는 듯하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친 전승은 오랫동안 그 존재와 그 본질과 정확성을 모호하게 만들었고 현재는 그 시기를 결정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였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모세의 출애굽에 대한 연구를 ‘헛된 노력’으로 간주하며 이를 피하고 있다. 또한 증거 부족으로 인해 출애굽 이야기를 역사의 특정 시점에 연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되었다.
출애굽의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16세기까지…. 대체로 많은 학자들이 기원전 13세기 설을 지지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의견일 뿐 꼭 맞는 답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사실 중심이 되는 이집트 연대기 조차도 논란이 많으니…
본 연구에서는 이집트의 힉소스 추방과 관련있는 이집트 제18왕조의 초기인 기원전 16세기를 선택했다. 힉소스의 지배 시기를 이집트에서의 성서적 체류나 포로생활에 대한 직접적 또는 간접적 근거로 그리고 힉소스의 축출을 출애굽의 근거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제일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출애굽 시기에 대한 여러 주장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기원전 16세기
출애굽의 시기가 BC 16세기라는 주장은 BC 3세기의 이집트 헤리오폴리스 제사장이자 역사가였던 마네토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단지 요세푸스와 같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그에 대한 자료가 인용되어 전할 뿐이다. 요세푸스가 인용한 마네토의 주장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은 힉소스와 더불어 이집트에서 축출되었고, 그것은 구약의 출애굽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마네토에 의하면 요셉이 이집트에 도착한 것은 힉소스 왕조 아포피스 제4년이며, 그가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아포피스 제17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네토의 주장에 따르면 출애굽의 시기는 BC 1550년경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 역사가 아브데라의 헤카타이오스(Hekataios)는, 이집트인의 힉소스 추방과 이스라엘인의 이집트 탈출, 그리고 다나오스의 아르고스 상륙이라는 전승이 동일한 이야기의 세 가지 변형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집트학 학자인 도널드 레드퍼드는 힉소스 족이 이집트를 점령한 사실과 그들이 삼각주에서 무력에 의해서 추방된 대규모 사건들의 반향이 여러 세기 동안 전승되어 가나안 주민들의 공통적인 기억의 핵심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출애굽기」,「판관기」, 「사무엘서」, 「열왕기」에서 언급된 연도를 함께 고려하면 출애굽의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554+α년 전, 즉 기원전 16세기로 책정된다.(Rowley, 1950, pp.87-88)
팔레스타인에서 행해진 기원전 16세기와 15세기의 파괴는 이집트 원정(우리는 이집트 기록을 통해 이 원정을 알고 있다)의 결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은 13세기 설에 반론을 제기한다.
– 기원전 15세기
열왕기 기록에 따르면, 솔로몬 성전 건축을 언급하면서 그때를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480년’, 곧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왕상 6:1)이라 하고 있다. 솔로몬의 즉위 제4년은 B.C. 966년경이며, 그때부터 480년 전에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다면 출애굽 연대는 대략 B.C. 1446년경이 된다. (기원전 13세기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애굽 땅에서 나온지 480년’은 유대 관습상 12대를 가리키므로 실제는 1대를 25년으로 보아 25년 × 12대 = 약 300년간으로 본다.)
– 판관기 기록에 따르면, 사사 입다가 암몬 왕에게 길르앗 지역의 법적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이스라엘이 이 모든 성읍에 거한 지 300년’(삿 11:26)이라 하고 있다. 사사 입다는 사울이 왕으로 즉위한 때로부터 약 50년 정도 앞선 B.C. 1100년경 활동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길르앗 점령 곧 가나안 정복은 B.C. 1400년경이 되고, 여기에 광야 40년 간의 방황 기간을 더하면 전기 연대설 입장에 다다른다.
존스 홉킨스 대학의 이집트 연구가 한스 게딕은 홍해가 갈라진 기적은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에게 해의 화산섬 산토리니 섬의 대폭발로 인해 그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출애굽은 산토리니 섬의 대폭발 시기와 맞추어 기원전 15세기라는 것이다.
투트모세 3세 때에 출애굽이 일어났고, 하트셉수트가 모세를 양육했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설은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모순점도 지니고 있어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15세기 이집트 탈출설을 가정하는 것은 성경에 묘사된 당시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또 고고학적으로 이스라엘이 1400-1250년대에 가나안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투트모세 3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인물인 아멘호테프 2세는 출애굽 7∼11장에 나오는 10가지 재앙으로 장자를 잃은 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승인한 파라오로 주장된다. 그가 장자를 잃었다는 것은 이집트 기자의 스핑크스 사원에서 발견된 석판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다른 기록과 정황에 관하여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들면 히브리 노예들이 노역에 시달렸다는 비돔(Pitom)과 라암셋(Ramses)(출1:11)은 델타 지역의 아름다운 목초지의 도시로써 당시 이집트의 수도인 테베(Thebe)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이러한 정황은 오히려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1290-1224 B.C.E.)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Djahy로 알려져 있는 가나안은 당시 이집트 제국의 일부분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인은 이집트에서 이집트로 도주한 것이 된다. 그리고 당시 가나안의 도시는 성벽이 없었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일련의 파괴를 보여주는 흔적이 없다. 예를 들어 여리고(Jericho)는 “규모가 아주 작고 유물도 별로 없어 거의 의미없는 장소이며 무방비의 상태였고 어떤 파괴의 흔적도 없었습니다”(Finkelstein and Silberman, 2002).
– 기원전 13세기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만약 출애굽이 사실이라면 그 시기는 기원전 13세기였을 것으로 믿고 있다. 다만 홍해가 갈라졌다는 기적은 가공의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다.
출애굽이 람세스 2세 때라는 설과 그의 아들 메르넵타(Merneptah) 때에 일어났다는 설이 있다.
「출애굽기」에는 ‘식량창고 도시’인 피톰과 라메세스의 건축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이는 기원전 1308년과 1194년 사이의 제19왕조를 가리킨다. 이 후기의 연대가 모세의 증손자가 기원전 1150년경에 생존했다는 기록과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출애굽기」에 필리스틴인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필리스틴인은 이집트 사료에서는 기원전 12세기가 되어야 언급되고 있다.
출애굽의 연대를 메르넵타 치세로 설정하는 것은 메르넵타 석비의 발견으로 인해 배제되는데, 그 석비는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에 이미 정착한 민족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20 세기 중반의 성서 고고학자 중 한 사람인 윌리엄 F.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는 이른바 이스라엘인의 증거로 주택 유형, 옷깃이 달린 병 등을 제시하며 기원전 1250-1200년을 제안했으나 그것은 가나안 문화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기원전 13세기에 가나안의 정복 가설을 뒷받침할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는 빔슨과 리빙스턴의 기본적 비판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 학자 하와스는 출애굽의 파라오에 관한 이슬람 코란의 기술이 람세스 2세가 통치했던 18왕조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 2번의 출애굽 또는 지속적인 이동
일부 학자들은 출애굽이 한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원전 15세기에 시작되어 기원전 13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5세기에 출애굽 사건이 있었고, 기원전 13세기에 다시 또 일어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마네토와 요세푸스
『아피온 반박문』에서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Josephus Flavius)는 성경의 출애굽기(Exodus)와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가 언급한 2개의 Exodus와 비슷한 사건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네토가 실제로 말한 것과 요세푸스나 아피온의 새로운 해석 사이의 차이를 현재로는 알기는 어렵다.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Exodus와 마네토가 언급한 첫번째 대규모 이동인 약 48만명의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내용을 동일시했다. 힉소스에 대한 언급에서 첫번째 대규모 이동과 힉소스의 시대가 동일하다고 본 것이다.
아피온은 마네토가 언급한, 종교적으로 변절한 Osarseph라 불리는 이집트 신관이 8만여명의 이집트에 저항하는 문둥병자들을 이끌고 이주했다는 두번째 대규모 이동을 Exodus와 동일시하였다. 마네토는 기원전 14세기의 아마르나(Amarna) 시대와 19왕조 말(기원전 12세기)의 사건들을 혼합한 것 같은데 아피온은 여기에다 성경의 Exodus를 추가적으로 혼합하였고 또한 이교도 Osarseph가 이름을 모세(Moses)로 바꾸었다고 단언했다. 많은 학자들은 문둥병자라고 언급된 사람들을 이교도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