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 What Is History?
E. H. 카 (Edward Hallet Carr)
작가 및 작품 해설
The Historian and His Facts (역사가와 사실)
Society and the Individual(사회와 개인)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역사와 과학과 도덕)
Causation in History(역사의 인과관계)
History as Progress(진보로서의 역사)
he Widening Horizon(넓혀지는 지평선)
○ 작가 및 작품 해설
E. H. 카 (Edward Hallet Carr)는 1892년에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난 정치학자 역사가로서, Cambridge대학을 졸업했다. 1916년 영국 외무성에 들어가 1919년에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파리에서 열린 국제강화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 후 피는 영국 외무성에서 러시아 혁명 (1917)이 일어난 뒤의 소련문제를 다루는 전문위원이 되었는데 이 경력이 소련을 연구하는 사학자가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대표저작들은 대부분 소련에 관한 것이다. 외무성 근무중 Riga (소련 라트비아 공화국의 수도)주재 영국공관, 국제연맹 등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1936년 외무성에서사임하고 Wales대학의 국제정치학 교수가 되어 1946년까지 재직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정보성 외교부장(1939-40), 런던 타임즈 논설위원(1941-45)을 역임했고 1953-1955년 사이에는 Oxford대학에서 정치학 강의를, 1955년 이후에는Cambridge 대학에 서 강의를 했다. 그의 저서로는 본서 외에도 』Dostoevsky(1931), Karl Marx(1934), Michael Bakunin(1939) 등의 전기물과 The Twenty Years’ Crisis 191-1939 (1939), Nationalism and After (1945) The New Society (1951) 등과 최대의 역자 The Bolshevik Revolution(1958)이 있다. 본서는 1961년에 있었던 Cambridge대학의 연속강의 (TheGeorge Macauly Trevelyan Lectures)에서 발표된 것으로서 후에 다시 책으로 편집된 것이다.
본서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역사의 본질을 묻는 역사철학서이다. 19세기에는 역사란 곧 사실의 열거라는 등식이 성립되었고 또 역사란 진보를 향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역사가 무엇이냐고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두 번의 대전을 거치고 또 「서구의 몰락」이라는 말이 인용부호가 필요없을 정도로 흔하게 되어버리자,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여 노석학인 Carr교수가 역사에 대하여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한데 모아 6차례의 강의로 풀어나갔는데, 본서는 그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우리들이 역사철학이라고 하면 철학을 연상하기 쉬운데 이 책은 전혀 각도를 달리하여 아주 평이하고 대중적인 태도로 역사이론을 풀어 나가고 있다.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어 나갈 때에도 이론을 펼쳐 보이겠다는 현학적인 태도라든가 추상개념 을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따위의 고답적인 자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역사가와 사실」, 「사회와 개인」, 「역사의 인과관계」 등의 제 문제를 다룸에 있어 역사상의 구체적인 사실을 적절히 인용하며 자세하게 설명할 때는 마치 그의 육성을 들으며 강의를 듣고 있는 듯한 친근감을 느끼게 해준다. 저자는 “역사책을 읽으면 거기에서 나는 소리에 항상 귀기울여라.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당신이 음치이거나 그 역사가가 재미없는 녀석이다. “라고 말했는데, 본서를 읽으면 반드시 그 소리가 들릴 것이니 한 자 한 자 정독하여 그 깊은 뜻을 음미해 보기 바란다. 편집상 일부 내용을 생략하였으나 본서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줄 안다.
– 차례
The Historian and His Facts (역사가와 사실)
Society and the Individual(사회와 개인)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역사와 과학과 도덕)
Causation in History(역사의 인과관계)
History as Progress(진보로서의 역사) T
he Widening Horizon(넓혀지는 지평선)
○ 역사가와 사실
역사란 무엇인가? 누구도 이 질문을 무의미하다거나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나는 주제로 「재임브리지 근대사」의 제 1차와제 2차의 간행에 관련된 두 개의 문장을 인용하고자 한다. 여기에 액튼이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의 평의회에 보낸 1896년 10월의 보고서가 있는데 그는 이 보고서를 통해 자기가 편집하기로 한 작업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것은 19세기가 남기려고 하는 모든 지식을 가장 많은 사람에게 유용한 방식으로 기록할 수 있는 좋은 한 기회이다. 현명하게 작업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해낼 수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최근의 문서와 국제적 연구에서 얻어진 가장 원숙한 결론을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세대에는 궁극적인 역사를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재래의 역사를 청산하고 하나의 역사에서 다른 하나의 역사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도달한 경지를 보여줄 수 있다. 이제 모든 정보가 입수될 수 있고 모든 문제가 해결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의 정확하게 60년 후에 제 2차「케임브리지 현대사」의 서문 속에서 죠지 클라크 교수는 액튼과 그의 공동작업자들의 신념에 대해 언젠가는 궁극적인 역사를 제시해낼 수 있으리라고 언급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후 세대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전망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작업이 계속되어 새 작업에 밀려나리라고 기대한다. 그들은 과거에 대한 지식이란 한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인간의 생각을 통하여 내려왔고 그들에 의해 가공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과거에 대한 지식이 아무도 바꿀 수 없는 기본적이고 비개성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탐구는 끝이 없기 때문에 일부 조급한 학자들은 회의주의로 도피하거나 적어도 다음과 같은 학설로 도피하는 것이다. 즉 모든 역사적 판단이라는 것은 사람과 그 사람의 관점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역사적 판단들이란 것은 이래저래 서로가 마찬가지이며 “객관적” 역사의 진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학들이 이와 같이 명백하게 의견이 대립되어 있으니 이 분야는 연구의 대상이 된다. 나는 1890년대에 쓰여진 것은 모두가 헛소리임에 틀림없다고 인식할 정도로 충분히 현대적이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나는 1950년대에 쓰여진 것이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다는 견해를 가질 만큼 진보한 사람도 아니다. 정말로 이러한 연구는 역사의 성질이라는 주제보다는 좀더 광범위한 주제로 빠져들기 쉽다는 것을 여러분은 벌써 생각했을 것이다. 액튼과 죠지 클라크 경 사이의 의견대립은 이 두 주장간의 시대차이에서 오는, 사회를 바라다보는 전체적 시각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액튼은 빅토리아여왕 후기시대의 적극적인 신념과 명석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죠지 클라크 경은 짓밟힌 세대의 당혹함과 혼란한 회의주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린가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려고 하면, 그 대답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우리들의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게 되고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하는 더 광범위한 질문에 대한 답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주제가 자세히 검토해보면 사소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하지 않는다. 단지 이와 같이 광대하고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 아닌가 하고 걱정될 뿐이다.
19세기는 사실을 탐구하는 위대한 시기였다. 서적 어려운 시절 에서 그래드라인드 씨는 말하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만이 인생에서 필요하다.” 19세기의 역사가는 대체로 그러한 생각이었다. 랑케는 1830년대에 도덕적 역사학에 대해 근거있는 항의를 하며 역사가의 임무는 “단지 실제로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별로 신통하지 못한 이 경구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근 90년 동안 독일과 영국 심지어는 프랑스의 역사가들까지 이 마력적인 말 “단지 실제로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을 주문처럼 외치며 진군하였는데, 대부분의 주문이 그런 것처럼 이 주문은 스스로 생각하는 지겨운 의무로부터 그들을 구제하려는 것이었다.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열렬히 주장하던 실증주의자들도 이 사실학파들에게 자기들의 영향력을 보태어 주었다. 실증주의자들은 말했다. 먼저 사실을 탐구하라,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라. 영국에서는 이러한 역사관이 록크로부터 버트란드 러셀에 이르기까지 영국 철학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경험론적 전통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지식의 경험론적 이론은 주체와 객체사이의 완벽한 분리를 전제조건으로 한다. 사실이란 감각적 인상과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관찰자에게 부딪쳐 오는 것이며, 그의 의식과는 별개의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과정은 수동적인 것이다. 자료를 받아들여야만 그는 그 자료에 반응한다. 「옥스포드 영어 소사전」은 유용하기는 하지만 경험학파의 영향력이 스며 있는 사전인데, 사실을 “결론과는 별개인 경험의 자료”라고 정의하여 두 과정이 서로 별개의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상식적인 역사관이다. 역사는 검증된 사실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실이란 생선장수의 널판지 위에 놓인 생선처럼, 문서나 비문이나 기타 등등으로부터 역사가들에게 제공된다. 역사가는 그것을 수집하여 집으로 가지고 가서 요리를 하여 자기 마음에 드는 방식대로 대접하는 것이다. 식성이 까다로웠던 액튼은 그것을 평범하게 대접하기를 원했다. 초판「케임브리지현대사」의 기고가들에게 보내는 지시 서한에서 액튼은 요구사항을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워털루 전투를 기술한 것이 프랑스, 영국, 독일 그리고 화란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저자들의 명단을 점검하지 않고는 아무도 옥스포드 주교가 어디서 붓을 놓았고 페어베언, 가스켓, 리버만 또는 해리슨이 어디서 그 붓을 계속했는지를 모르게 해야 한다. ” 액튼의 태도에 비판적이었던 죠지 클라크 경조차도 역사에 있어 “사실이라는 딱딱한 씨”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해석이라는 의심스러운 과육을 대조하였다. 아마도 그는 과일의 과육 부분이 딱딱한 씨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먼저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나서 해석이라는 움직이는 모래 속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라-이것이 경험론적 상식적 역사학파의 궁극적 견해였다. 이것은 위대한 자유주의적 언론가였던 C.P. 스코트의 유명한 문구를 연상시킨다. “사실은 신성하고 의견은 제멋대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이제 분명히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거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본질에 관하여 철학적 토론을 벌이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의 목적을 위하여 시저가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사실과 방 한가운데 탁자가 있다는 사실을 같거나 유사한 사실이라고 가정하자. 이 두 사실은 같거나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들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동일한 객관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이 대담하고 별로 그럴 듯하지 않은 가정에서조차도 우리의 주장은 곧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된다. 즉 과거에 대한 모든 사실이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며 또 역사가가 그렇게 취급해 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실 중에서 역사적 사실을 구분해내는 기준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좀더 면밀하게 살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상식적 견해에 따르면, 모든 역사가가 동일하게 취급하고, 말하자면 역사의 중추를 이루는 기본적인 사실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헤스팅스 전투는 1066년에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두 가지의 고찰을 요구한다. 먼저 역사가가 일차적으로 관심이 있는 것은 이와같은 사실들이 아니다. 그 유명한 전투가 1065년이 나 1067년이 아니고 1066년에 벌어졌으며 이스트번이나 브라이튼이 아니고 헤스팅스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중요하다. 역사가는 이러한 사실을 틀려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문제가 제기될 때 나는 “정확은 의무이지 미덕이 아니다”라는 하우스만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정확하다고 해서 역사가를 칭찬하는 것은, 집을 짓는데 건축기사가 잘’말린 나무를 썼다거나 잘 반죽된 콘크리트를 사용했다고 칭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작업상 필요한 조건일 뿐이지 본질적 기능은 아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역사가는 역사학의 “보조학문”인 고고학, 금석문학, 고전학, 연대학 따위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도자기나 대리석파편의 출처와 연대를 결정하고, 불분명한 비문을 해독하고, 정밀한 천문학적 계산을 하여 정확한 날짜를 확립하는 전문가적인 특별한 기술을 역사가는 가질 필요가 없다. 모든 역사가에게 동일한 소위 기본적인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가 사용하는 가공되지 않은 재료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 역사 그 자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고찰은 이러한 기본적 사실을 확립해야 하는 필요는, 사실 그 자체의 성질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내리는 선험적인 결정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C.P. 스코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모든 언론인들은 언론에 영향을 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적절한 사실의 선택과 배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이 스스로 말한다고 얘기된 적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역사가들이 사실을 찾아줄 때에만 사실은 발언한다. 어떤 순서로, 또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인 것이다. 사실이란 자루와 같아서 그 안에 무엇을 넣기 전에는 서지 않는다- 라고 말한 사람은 피란델로의 작중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헤스팅스 전투가1066년에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자 하는 유일한 이유는 역사가가 그것을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시저가 루비콘이라는 작은 강을 건넜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결정한다. 한편 그전 또는 그후 수백만의 사람이 루비콘 강을 건넜어도 그것은 아무런 흥미도 끌지 못한다. 여러분이 30분전에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혹은 차를 타고 이 건물에 도착한 사실은 시저가 루비론 강을 건넜던 것처럼 과거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아마도 역사가에 의해 무시될 것이다. 탤코트 파슨스 교수는 과학을 “실재에 대한 인식방향의 선택적 체계”라고 말했다. 이것은 아마도 좀더 쉽게 표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역사는 다른 학문들보다도 선택적인 학문이다. 역사가는 선택적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딱딱한 씨는 역사가의 해석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은 앞뒤가 맞지 않는 오류이지만 이 오류를 뿌리뽑기는 매우 어렵다.
과거의 단순한 사실이 역사적 사실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자. 1850년 스탤리브릿지 웨이크스라
는 곳에서 한 생강빵장수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성난 군중에 의해 의도적으로 밟혀 죽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가? 일년 전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아니다.” 라고 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회고록 속에서 목격자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이 역사가에 의해 가치있다고 판단 되리라곤 예상하지 않았었다. 일년 전에 키트슨 클라크 박사가 옥스포드 대학의 포드기념강연에서 이 사실을 인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 되는가? 아직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재의 상태는, 내 생각으로, 역사적 사실이라는 고급 클럽의 회원 후보로 추천된 셈이다. 그것은 지금 지지자와 후원자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수 년 동안 이 사실이 19세기 영국에 대한 책자나 기사에, 처음에는 각주에 나오다가 다음에는 본문에 나을 것이다. 20~30년 내에는 이 사실이 잘 확립된 역사적 사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아무도 이 사실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거에 대한 비역사적 사실로서 망각에 빠져버릴 텐데, 키트슨 클라크 박사가 용감하게 그것을 그 망각으로부터 구출해 내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 중에 어떤 경우가 발생될 것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생각으로는, 키트슨 클라크 박사가 이 사건을 인용한 논문이나 해석이 다른 역사가들에 의해 타당하고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지위는 해석이라는 문제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해석의 문제가 모든 역사적 사실에 개입한다. 개인적인 추억담을 얘기하려는데 너그러이 이해해주기 바란다. 수년 전에 내가 이 대학에서 고대사를 공부하고 있을 때 나는 “페르샤 전쟁 시대의 그리스” 라는 특별 주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나는 서가에다 15~20권의 책을 수집하여 놓고 나서 나의 주제에 관련된 사실이 이 책들 속에 다 기록되어 있으리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 책들이 그 당시에 알려져 있고 알 수 있었던 모든 사실을 포함하였다- 하는 것은 아주 사실에 가까운 것인데 -고 가정하자. 어떤 경로와 마멸과정을 거쳐서, 누구에게인가 알려져 있던 수많은 사실 중에서 이 자세하게 수집된 사실이 살아 남아서 역사적 사실이 되었는가를 조사해 볼 생각은 나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날에 조차도 고대사와 중세사의 매력은 우리가 처분 가능한 범위 내에 모든 사실이 있다는 환상을 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알려져 있는 몇 개 안되는 사실이 모두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과거의 사실을 구분하는 귀찮은 일이 사라져 버린다. 두 시대의 역사를 모두 연구한 뷰리가 말했듯이,” 고대사와중세사의 기록은 탈락된 부분으로 점철되어 있다.” 역사는 탈락된 부분이 많은 거대한 그림맞추기 놀이라고 불리워져 왔다. 그러나 가장 골치 거리는 탈락된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기 전 5세기 시대의 그리스에 대한 그림은, 일차적으로 많은 조각 그림이 우연히 손실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대체로 보아, 당시 아테네시에 살고 있던 소수의 사람에 의해 그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5세기 당시의 아테네 주민들에게 보이던 그리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다. 그러나 그것이 페르시아 사람이나, 노예나, 아테네의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차치하고라도 스파르타 사람이나, 코린트사람, 또는 테베사람 에게는 어떻게 보였는지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우리들의 그림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견해와 그 견해를 뒷받침 하는 사실만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미리 선택되고 결정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세에 대한 요사이의 역사책에서 중세 사람들은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읽을 때, 나는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이것이 사실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중세사의 역사적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거의모두가 수세대에 걸친 연대기작가에 의해 선택되었다. 그들은 종교의 이론과 실천에 전문적으로 종사했던 사람으로서 종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므로 그에 관한 것이라면 모두 기록하고 그 이외의 것은 별로 많이 기록하지 않았다. 독실하게 신앙이 깊은 러시아 농민의 모습은 1917년의 혁명에 의해 파괴되었다. 독실하게 신앙심 깊은 중세 사람의 모습은, 사실이든 아니든, 파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세 사람에 관해 알려져 있는 거의 모든 사실이, 자기도 그렇다고 믿고 남들도 그렇게 믿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전에 선택이 되었고, 그와는 반대되는 증거를 찾아볼 수도 있는 많은 사실들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세대의 역사가, 필경사, 연대기작가의 죽은 손이 반박할 수 없게끔 과거의 모습을 결정해버렸다. 그 자신이 중세사가로 훈련을 받았던 바라클로우 교수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우리가 읽고 있는 역사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혀 실제의 사실은 아니고 일련의 받아들여진 판단인 것이다. 이제 다르기는 하지만 똑같이 심각한 현대 역사가의 곤경에 주의를 돌려 보자. 고대사나 중세사를 다루는 그가 처리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의 덩어리를 수년에 걸쳐 만들어낸 광범위한 선택과정을 감사해 할 것이다. 리튼 스트래치가 장난스럽게 말했듯이, “무지함이 역사가의 첫번째 필수요건이다. 그 무지함이란 단순하게 하고 명백하게 하고, 선택하고 생략하는 것이다.
” 가끔 고대사나 중세사를 쓰고 있는 동료들의 남다른 자신감을 부러워하지만 그들이 그와 같이 자신에 넘치는 것은 대체로 그들이 다루는 주제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 위안을 얻는다. 현대사를 다루는 역사가는 이와 같이 미리 정해진 무지의 혜택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는 스스로 이 필요한 무지를 개발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에 가까이 오게 된다. 그는 몇 개 되지 않는 중대한 사실을 발견하여 역사적 사실을 만들고 또 중요하지 않은 많은 사건을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버리는 두 가지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란 최대한으로 많은 숫자의 반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의 편집이라고 주장하던 19세기 이단설의 정반대인 것이다. 이러한 이단설에 굴복하는 사람은, 역사를 신통찰은 것으로 포기하고 우표수집이나 기타 고물수집을 하거나 또는 정신병원에 가거나 둘 중의 하나를 해야된다. 이 이단설은 지나간 백년 동안 현대 역사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독일,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는 무미건조하게 사실만을 중시하며 미세한 부분을 전공한 역사가, 더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사실 더 아는 것이 없는, 사실이라는 바다 속에 흔적도 없이 가라앉는 자칭역사가들이 수도 없이 대량으로 생산된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역사가 액튼을 좌절시킨 것은-자유주의와 가톨릭 사이의 충성심의 갈등이라기보다는-이러한 이단설 이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초기 논문에서 그는 스승인 될링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불완전한 자료를 가지고는 쓰지를 않았으며 그에게 있어서 자료는 언제나 불완전했다. ” 액튼은 여기서 분명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예언적인 판결을 하였다. 것은 이 대학 역사 이래 현대사에서 가장 훌륭한 흠정교수라고 많은 사람에 의해 인정되면서도 역사책을 쓰지 않았던 역사가의 이상스런 현상에 대한 판결이었다. 액튼은 그가 죽고 난 직후에 발간된 「케임브리지 현대사」제 1권의 서문에다 그 자신의 묘비명 같은 문구를 써넣었다. 그는 역사가를 강박하는 요구사항이 “그 자신을 문필가에서 백과전서 편집자로 변신시킬 것을 강요하고 있다”고 슬퍼하였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잘못된 것은 이 끈질기고 끝도 없는 사실의 축적이 역사의 근본이라는 신념-사실이 스스로 말하고 아무리 많은 사실이 있어도 늘 부족하다는 그 신념에 있었다. 이 신념은 그 당시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어떤 역사가도-오늘날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자기 자신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세기의 사실숭배주의는 문서숭배주의로 완성되고 정당화되었다. 문서는 사실이라는 사원에서 성스러운 계율이었다. 경건한 역사가는 고개를 숙이고 문서에 접근하였으며 두려운 목소리로 그것을 말했다. 문서에 그렇게 쐬어 있으면 그렇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볼 경우, 이 문서들-법령, 조약, 지세대장, 청서, 공식서한, 사신, 일기 -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인가?
어떠한 문서도 그 문서의 저자가 생각한 것 이상을 우리에게 말할 수는 없다-그가 발생하였다고 생각한 것, 발생해야 마땅하거나 발생하리라고 생각한 것, 또는 남들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 그가 생각하였다고 생각한 것 이상을 말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역사가가 그것을 연구하여 해독할 때까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들이 문서에 기재되어 있건 없건 간에 역사가는 그것들을 가공해야만 비로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역사가가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은(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가공하는 과정인 것이다. 내가 잘 아는 예를 들어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겠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상이었던 구스타프 스트레제만이 1929년에 죽었을 때, 그는 외상 임기 6년 동안에 관련된 거의 모든 공식문서, 준공식문서, 사신 등-300상자 가득히-방대한 분량의 문서를 남겼다. 그의 친지와 친척들은 이와 같이 위대한 사람을 기억하기 위하여 당연히 기념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충실한 비서였던 베른하르트가 작업에 착수했다.
3년만에 300상자로부터 추려진 문서가 각 권약 600페이지씩 3권의 방대한 책으로 나왔는데 「스트레제만의 유산」이라는 인상적인 제목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 문서들은 지하실이나 다락에서 썩다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아니면 아마도 한 백년쫌 있다가 호기심 많은 어떤 학자가 그것을 발견하고 베른하르트의 책과 비교해 볼 것이다. 실제로 발생했던 것은 휠씬 더 극적이다. 1345년에 그 문서는 영국과 미국 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양국 정부는 그 문서를 사진으로 찍어서 복사사진을 런던의 기록보관소와 워싱톤의 국립문서 보관소에 비치하고 학자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충분히 끈기 있고 호기 심 이 강하다면 우리는 베른하르트가 해놓은 것을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가 해놓은 것은 매우 이상하다거나 매우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스트레제만이 죽었을 때, 그의 서방정책은 일련의 빛나는 성공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르카르노조약,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 도오즈 안과 영 안, 미국의 차관, 연합국 점령군의 라인랜드로부터의 철수 둥이 그것이다.
이것은 스트레제만 외교정책의 중요하고 값어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점들이 베른하르트의 문서 선택에 있어서 지나치게 강조되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얼다. 한편, 스트래재만의 동방정책, 즉 소련과의 관계는 특별한 소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소한 결과를 낳았던 협상에 대한 방대한 문서는 흥미도 없었을 뿐더러 스트레제만의 명성에 아무것도 보태어 주지 못하였으므로, 선택의 과정은 보다 더 엄격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스테래제만은 소련과의 관계에 보다 더 지속적이고 초조하게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 대소관계는 베른하르트가 선별한 문서집의 독자가 상상하는 것보다 그의 전체 외교정책에 휠씬 더 큰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의 책은 일반 역사가들이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많은 출판된 문서집 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내 얘기의 끝은 아니다. 베른하르트의 책이 출간된 직후에 히틀러가 집권하였다. 스트레제만의 이름이 독일에서는 잊혀졌고 그 책들은 유포 중지되었다. 그 책들은 수도 없이 아마도 거의 전부가 파기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스트래제만의 유산」은 다소 희귀한 책이다. 그러나 서방세계에서는 스트레제만의 명성이 높았다. 1935년에 한 영국의 출판사가 베른하르트 책의 축소판을 내놓았다. 베른하르트의 책에서 다시 추린 것인데 아마도 3분의 1정도가 생략되었을 것이다. 유명한 독일어 번역가인 사튼이 그 일을 적절하게 잘 해내었다. 그는 서문에서 설명하기를 영문판은 “약간 축소가 되었는데, 별것 아닌 부분 일부와 영국의 독자나 학생들에게 흥미가 없을 부분만 생략되었다. “이것 또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피 결과는, 이미 베른하르트의 책에서 지나치게 무시되어 있던 스트레제만의 동방정책이 더욱 더 고려에서 멀어져서, 소련은 사튼의 책에서는 스트레제만의 서방 중심 외교정책 속에 가끔 그리고 반갑지 않게 끼어드는 침입자 같이 비쳐지고 있는 꼴이 되었다. 그러니 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스트레제만의 진정한 목소리를 서방세계에 대표하고 있는 사람은 베른하르트도 아니고, 문서 그 자체는 더욱 아니며, 결국은 사튼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1945년 폭격에 의해 원문서가 없어졌거나 남아 있던 베른하르트의 책이 사라졌더라면 사튼의 신빙성과 권위는 의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본이 없기 때문에 역사가들에 의해 감사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많은 인쇄본 문서집도 이 이상의 안전한 근거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다. 베른하르트와 사튼은 잊어버리자. 현대유럽사의 중요한 사건에 지도자로 참여했던 사람의 문서를 우리가 필요하다면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그 문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무엇보다도 그 문서는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와의 수백회에 걸친 스트레제만의 대화, 그리고 치체린과의 20회 이상의 대화를 기록으로 담고 있다. 이 기록은 공통되는 특성이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스트레제만이 대화를 주도하고 그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펼친 반면, 그의 상대자는 말이 적고 앞뒤가 안맞으며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모든 외교적 대화에는 이와 같은 낯익은 특징이 있다.
그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제만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 그가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기를 원했던 것, 또는 그 자신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를 바랬던 것 등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선택의 과정을 시작했던 것은 사튼이 나 베른하르트가 아니 고 스트레제만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 동일한 대화들에 대한 치체린의 기록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고것으로부터 치체린이 생각했던 것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발생했던 것은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사실과 문서는 역사가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숭배하지는 말라. 그것 자체가 역사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넌더리 나는 질문에 즉석에서 대답을 하여주지는 않는다.
이 시점에서 나는 왜 19세기 역사가들이 일반적으로 역사철학에 무관심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고자 한다. 역사철학이라는 용어는 볼테르가 만들어 낸 말인데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내가 그 말을 사용한다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겠다. 서유럽의 지성인에게 있어서 19세기는 자신감과 낙관론을 안겨 주는 편안한 시대였다. 사실들은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사실에 대한 곤란한 질문을 묻고 답변하려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랑케는 사실만 잘 간수하면 신성하고 성스러운 하느님께서 역사의 의미를 보살펴 주시리라고 경건하게 믿었다. 부르크하르트는 보다 더 현대화된 냉소주의의 기미를 내보이며 “우리는 영원한 지혜의 목적을 주도할 수 없다.” 고 말하였다.
1931년경의 버터필드 교수는 아주 만족스럽게” 역사가들은 사물의 성질과 자기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성질조차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이 강연에서 나의 선임자인 A.L. 로우즈 박사는 제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윈스턴 처칠의 「세계의 위기」라는 책에 대해서 아주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며 비판하였다. 이 책은 개성, 명석함, 생동감 등에서는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에 버금가지만 그것은 단 한 가지”역사철학이 없다”는 점에서 부족하다고 하였다. 영국의 역사가들은 역사가 무의미하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의미가 묵시적이고 자명하다고 믿기 때문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끌려들어가기를 거부하였다. 자유주의적인 19세기 역사관은 세계를 평화롭고 자신에 차서 바라다보는 사상의 산물인 자유방임의 경제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의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게 하라.
그러면 감추어진 손이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리라.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보다 더 높은 것을 향한 자비롭고 무한한 발전이 존재한다는 지고한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순진한 시대였다. 역사가들은 역사의 신 앞에서 알몸인 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들을 가려 줄 한오라기의 철학도 없이 에덴동산을 거닐었다. 그때 이후 우리는 죄를 알고 타락을 경험했다. 오늘날 역사철학이 없어도 괜찮은 척하는 역사가들은 단지 헛되이, 반쯤은 의식적으로 나체촌의 회원처럼 자기들의 정원이 있는 교외에서 에덴동산을 재창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 난처한 질문은 더이상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나간 50년 동안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많은 진지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역사적 사실은 우월하고 자율적이라는 원칙에 대하여 첫 번째 도전이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독일에서 일어났다. 독일은 19세기 자유주의의 안락한 지배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나라가 된다. 도전을 제기했던 철학자들은 지금은 이름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딜타이가 그 중에 유일한 사람으로서 영국에서 때늦은 인정을 받고 있다. 금세기가 시작되기 전,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번영과 자신감이 넘쳐날 정도로 컸기 때문에 사실 예찬을 공격하는 이단자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금세기 초에 그 횃불이 이태리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크로체가 독일인 스승들의 영향을 받은 역사철학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라고 크로체는 선언했다.
이것은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과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된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라는 것을 의미했다. 역사가가 평가하지 않는다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1910년에 미국의 철학자 칼 베커가 고의적으로 도전하는 듯할 언어로 “역사적인 사실은 역사가가 그것을 창조할 때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이 도전은 그 당시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다. 크로체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도1920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것은 크로체가 자기의 독일인 선배들보다 심오한 사상가이거나 더 나은 문장가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세계 1차대전 이후에 사실들은 1914년의 이전 시대보다는 상서롭게 보이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우리가 사실들의 권위를 감소시키는 철학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로체는 옥스포드 철학자이며 금세기의 역사철학에 중대한 기여를 한 유일한 영국사상가요 역사가인 콜링우드에게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콜링우드는 자신이 계획했던 체계적인 논문을 쓸 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다. 그의 사후에 발표 또는 미발표된 논문들이 “역사의 이상”이라는 책속에 묶여져 1945년에 간행되었다. 콜링우드의 견해는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역사철학은 “과거 그 자체”나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생각 그 자체”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양자의 상관관계”와 관련이 있다. (이 용어는 “역사”라는 용어의 두 가지 의미, 즉 역사가의 연구와 그가 연구하는 일련의 과거 사실을 반영한다. )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고 어떤 의미로 볼 때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이다.” 역사가가 과거의 행동 뒤에 숨어 있는 생각을 이해할 수 없으면 과거의 행동은 역사가에게는 죽은, 즉 무의미한 것이다. 이리하여 “모든 역사는 생각의 역사”이며 “역사란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그가 연구하는 역사에 대한 생각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역사가가 마음속에 과거를 재구성하려면 경험적 근거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재구성 과정은 그 자체가 경험적 과정이 아니며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재구성이라는 과정은 사실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것을 관장한다. 이 재구성 과정이야말로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콜링우드와 가까운 입장에 있는 오우크스쇼트교수는 말한다. “역사란 역사가의 경험이다. 그것은 역사가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역사책을 쓴다는 것만이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길인 것 이다.”
이 탐구적인 비평은 몇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무시되었던 진리를 살아나게 하였다.
먼저 역사적 사실은 “순수한 상태”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순수한 상태로는 존재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기록자의 마음속에서 굴절된다. 당연히 우리가 역사책을 집어들 때 첫 번째 관심은 거기에 포함된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쓴 역사가에게 있다. 하나의 예로서, 그의 명예와 이름을 기념하여 이 강연이 마련된 저 위대한 역사가를 들어 보자. 자서전에 쓰여 있는 바와같이 트레벨리안은 “다소 휘그적인 전통이 강한 가정에서 자랐다. ” 내가 그를 휘그 전통에 입각한 마지막 위대한 영국의 자유주의 역사가라고 해도 그는 이 묘사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휘그 전통의 위대한 역사가인 죠지 오토 트레벨리안으로부터 비교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가장 위대한 휘그 역사가인 머콜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가계를 되짚어간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다. 트레벨리안 박사의 가장 훌륭하고 원숙한 저서인 「앤 여왕하의 영국」은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읽혀져야만 독자는 그 풍성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게 된다. 실제로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하고 있다.
탐정소설 애독자가 하는 방식을 따라서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을 먼저 읽어 보라. 당신은재 3권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 오늘날 이야기하는 역사의 휘그적 해석에 대한 가장 좋은 요약(내가 판단하기로는)이 들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트레벨리안이 시도하는 것은 휘그 전통의 기원과 발전을 탐구하고 휘그의 창시자인 월리엄 3세 사후 수년 동안에 공명정대하게 휘그전통을 비호하자는 것임을 당신은 알 수 있게 된다. 비록 이 저서가 앤 여왕 치세시의 사건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유일한 해석은 아닐지라도 이 저서는 타당한 해석을 하고 있으며 트레벨리안의 손을 빌어 유용한 해석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저서를 액면 그대로 감상하려면 그 역사가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콜링우드가 말한 대로 역사가가 그의 극중인물의 마음속에 있던 것을 생각속에 재구성한 것처럼, 독자도 그의 차례로 역사가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연구하기에 앞서 역사가를 연구하라. 따지고 보면 이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것은 똑똑한 학부학생이라면 벌써 행하고 있는 일이다. 세인트 쥬드 대학의 위대한 학자인 죤스의 저서를 읽으라고 추천을 받으면 그 학부학생은 세인트 쥬드 대학에 있는 친구에게로 가서 죤스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골몰하여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물어 본다. 역사책을 읽을 때면 거기에서 울리는 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이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면 당신이 음치이거나 그 역사가가 재미없는 녀석이다. 사실이란 정말로 생선장사의 널판지 위에 놓인 생선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때로는 접근할 수 없는 대양에서 혜엄치는 고기와 같은 것이다. 역사가가 사실을 건져 올리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우연에 의존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가 고기를 잡고자 하는 곳이 대양의 어느 부분이며 그가 사용하는 수법이 어떤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물론 역사가가 잡고자 하는 고기의 종류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대체로 역사가는 그가 원하는 종류의 사실을 얻게 될 것이다. 역사는 해석을 의미한다. 만일 내가 죠지 클라크 경의 말을 거꾸로 말하여 역사를 “의심스러운 사실이라는 과육에 둘러싸인 해석이라는 딱딱한 씨” 라고 말하면 나의 말은 틀림없이 일방적이고 오해를 일으킬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원래의 말보다 더 일방적이고 오해를 일으킨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두번째 요점은 보다 낯익은 것으로서 역사가는 자기가 다루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행동 뒤에 숨어 있는 생각을 상상력이 풍부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이해” 라고 하였지 “동정”이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동정이라고 하면 동의를 내포하는 것 같이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중세가 약했다. 왜냐하면 19세기는 중세의 미신적 신념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야만성에 환멸을 느껴 중세 사람들에 대하여 상상력이 풍부하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는 30년 전쟁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비난하는 말투를 예로 들어 보자. “구교건 신교건 종교적 신념의 구제를 국가의 안전보다 우선하게 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살인을 하는 것은 옳바르고 찬상할 일이지만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 살인하는 것은 사악하고 잘못된 생각이라고 교육을 받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역사가가 30년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이 어려움은 내가 지금 작업을 하고 있는 분야에서는 더욱 뚜렷하다. 지나간 10년 동안에 영어권의 나라에서 소련에 관해 쓰여진 대부분의 자료와 소련에서 영어권의 나라에 대해 쓰여진 자료의 대부분은 가치가 손상되었는데, 서로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상상력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안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서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은 반드시 사악하고 무의미하고 또는 위선적이라고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가 쓰고자하는 사람의 마음과 접촉을 이를 수 없다면 역사는 쓰여질 수 없다.
세번째 요점은 우리가 현재의 눈을 통하여서만 과거를 볼 수 있고 과거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그 시대의 사람이고 인간이 존재하는데 부수되는 여러 조건에 의해 그 시대에 매이게 된다. 그가 사용하는 말들- 민주주의, 제국, 전쟁, 혁명 같은- 도 그가 헤어질 수 없는 현재의 시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사 역사가들은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도시나 평민 같은 원어를 사용했다. 이렇게 하여도 그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도 또한 현재에 살고 있으며 낯설은 또는 폐어가 된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클라미스나 토가를 걸치고 강의를 한다고 해서 더 나은 그리스사나 로마사의 역사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역대의 프랑스 역사가들이 프랑스 혁명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한 파리시의 군중을 부르는 말들-과격공화파, 대중(민중), 하층계급, 헐벗은 일꾼-은 그 말들의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이 본다면 모두 정치적 결연과 특정한 해석을 밝혀주는 말들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선택해야만 한다. 언어의 사용은 역사가가 중립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단어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100년 동안 유럽에서 세력의 균형이 바뀌자 영국역사가들이 프레데릭 대제를 쳐다보는 태도가 일변했다. 구교와 신교의 교회내에서 세력의 균형이 바뀌어 로욜라, 루터 그리고 크롬웰 같은 인물에 대한 영국 역사가들의 태도를 심원하게 변하게 했다. 지나간 40년 동안의 프랑스 역사가들의 작업에 대해 피상적으로나마 알고 있으면 그것이 얼마나 1917년의 러시아혁명에 의해 영향 받았는가를 알 수 있다. 역사가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속해 있다. 트레보- 로퍼 교수는 역사가는 “과거를 사랑해야 한다. “고 말한다. 이것은 의심스러운 명령이다. 과거를 사랑한다는 것은 늙은 사람이나 늙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향수 어린 낭만주의를 손쉽게 표시하는 것이고 현재나 미래에 대한 믿음과 흥미를 상실하였다는 증상이다. 진부한 말에는 진부한 말로 대답하겠는데 나는 오히려 “과거의 죽은 손”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역사가를 좋아한다.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도 아니다. 역사가의 기능은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상이 콜링우드 역사관의 통찰력 있는 부분이라면 이제 그 위험을 고려해야 할 때다. 역사를 만드는 데 있어서 역사가의 기능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그 논리적 결론으로서 객관적인 역사를 전적으로 배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콜링우드도 실제로 어느 순간에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듯 보인다. 그의 편집자가 인용한 미발표 노트를 보면.
성 오거스틴은 초기 기독교도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았다’, 띨르몽은 17세기 프랑스 사람의 관점에서 보았다. 기본은 18세기 영국 사람의 관점에서, 그리고 몸젠은 19세기 독일 사람의 관점에서 보았다. 어떤 것이 옳은 관점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각각의 관점이 그것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유일한 관점이었다.
이것은 전적인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인데 프루드의 “역사란 우리가 좋아하는 말을 뽑아낼 수 있는 어린애들의 글자 맞추기 판이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콜링우드는 “가위와 풀로 오려 붙이는 역사”, 즉사실의 단순한 편집이라는 역사관에 반발하여 위험스럽게도 역사를 인간의 머리에서 뽑아낸 어떤 것이라고 취급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내가 앞에서 인용한 죠지 클라크 경의 문장에서 언급된 결론, 즉 “‘객관적인’역사적 진리는 없다.” 라는 결론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무의미하다는 이론 대신에 우리는 역사가 무한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제시받는데, 어느 것도 더 옳다고 할 수 없으며-결국은 같은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후자의 이론도 전자의 이론과 같이 지지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의 산이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달라 보인다고 해서 무한한 모습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다. 해석이 역사적 사실의 확립에 필요한 역할을 하고 기존의 해석이 전적으로 객관적이지 않다고 해서, 하나의 해석이 다른 해석과 마찬가지로 훌륭하고 나아가 역사적 사실이 원칙에 있어서 객관적인 해석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중에 역사에 있어서 객관성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콜링우드의 가설에는 보다 더 큰 위험이 숨어 있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역사의 시대를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과거의 문제를 현재의 문제에 대한 열쇠로서 연구한다면, 역사가는 순전히 실용주의적인 관점으로 사실에 접근하게 되고 또 올바른 해석의 기준은 현재의 목적과 부합하는 정도에 따른다 라고 생각하게 되지는 않을까? 이러한 가설 하에서는 역사적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고 해석만이 전부가 된다. 니체는 이미 이러한 원칙을 언명했다. “틀린 의견을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생명을 보존해주고 종족을 보존해주고 더 나아가서는 종족을 창조해주느냐 하는 것이다.” 미국의 실용주의자도 니체만큼 분명하고 열렬하지는 않지만 같은 노선을 걸어갔다. 지식이란 어떤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다. 지식의 타당성은 목적의 타당성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이 언명되지 않은 곳에서조차도 이와 같은 이론의 실천은 종종 적지 않은 불안을 주었다. 나의 전공분야에서도 과도한 해석이 사실을 억누르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나는 이 위험한 현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료편집에 있어서 소비에트 학파와 반 소비에트 학파의 과도한 작업 결과를 읽다 보면 종종 저 공상적인 19세기의 순수사실 역사라는 안식처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20세기의 중간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의무를 규정해야 할 것인가? 근년에 나는 문서를 찾아다니고 정독하고 또 역사를 기술할 때 각주가 달린 사실로 채우기 위하여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다. 그래서 사실파 문서를 너무 소홀하게 다룬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었다. 사실을 존중해야 하는 역사가의 의무는 사실이 정확한지를 살펴 보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루고 있는 주제나 재기하려고 하는 해석과 이런저런 의미로 관련이 있는 모든 알려진 또는 알려질 수 있는 사실을 주제의 구도속으로 가져오도록 추구해 한다. 만일 그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인을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으로 묘사하고자 한다면 그는 1850년에 스탤리브릿지 웨이크스에서 벌어진 일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는 그가 역사의 가장 요체인 해석을 제거할 수 있다고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외한들은-즉, 학문과 관계없는 친구들이나 또는 다른 학문에 종사하는 친구들-나에게 역사가가 역사책을 쓸 때에는 어떻게 작업하느냐고 묻는다. 가장 흔한 상상은 역사가는 작업을 2개의 뚜렷하게 구분될 수 있는 단계 또는 시기로 나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먼저 그는 자료를 읽고 공책에 사실들을 적어 넣는 긴 예비 시간을 보낸다. 이것이 끝나면 그는 자료를 치워 두고 공책을 꺼내어 들고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써 나간다. 이것은 나에게는 설득력도 없고 그럴 듯 하지도 않은 모습이다. 나로서는 주된 자료라고 생각되는 것이 몇개 입수되자마자 쓰고 싶은 충동이 너무 강해서 반드시 처음부터가 아니라 어디서부터건 써 나가기 시작한다. 그 후에 읽기와 쓰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읽기를 계속하면서 써놓은 것을 더하거나, 빼거나, 형태를 바꾸거나 취소하거나 한다. 읽기는 쓰기에 의해서 안내되고 지도되고 결실을 맺는다. 내가 쓰면 쓸수록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잘 알게 되고 내가 발견한 것의 의미와 연관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와 같은 예비 집필은 펜, 종이, 또는 타자기로 하지 않고 머리속에서 다 해버리는데 마치 어떤 사람이 장기의 판이나 알이 없이도 머리로 장기를 둘 수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내가 부러워하는 재능인데 나는 그것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러나 이름있는 역사가에게 있어서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입력”과 “출력”의 두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는데 실제에 있어서는 단일과정의 부분들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것들을 떼어놓으려고 하거나 우선 순위를 매기려고 한다면 두 가지 이단설 중의 하나에 빠지게 된다. 의미도 뜻도 없는 가위와 풀로 오려붙이는 역사를 쓰거나, 또는 선전문구나 역사소설을 쓰면서 단지 과거의 사실을 이용하여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을 쓰게 될 뿐이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고찰은 우리들을 분명히 불확실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 우리들의 입장은 미묘하게도 두 위험지점의 사이에 있다. 즉 역사를 객관적인 편집이라 보고 해석보다는 사실이 무조건 우위에 있다는 타당치 못한 역사이론의 위험지점과, 역사는 역사적 사실을 확립하고 해석과정을 통하여 이를 지배하는 역사가의 마음의 주관적 산물이라고 보는 역시 타당치 못한 위험지점이 그것이다. 또한 우리의 입장은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중심을 현재에 두는 역사관과의 사이에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보기보다는 덜 불안정하다. 우리는 이 강연의 나중 부분에서 또 다른 형태로 사실과 해석의 동일한 이분법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특수와 일반, 경험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이분법이다. 역사가의 곤경이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한 것이다 인간은 아주 어린 때와 아주 늙은 때를 제외하고는 환경에 전적으로 몰입하지도 않으며 또 그것에 무조건 굴복하지도 않는다. 한편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전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도 않으며 또 환경의 절대적 지배자도 아니다. 인간의 환경과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가 다루는 주제와의 관계이다. 역사가는 그가 다루는 사실의 공손한 노예도 아니고 횡포한 주인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과의 관계는 동등한, 주고 받는 관계이다. 그가 생각하고 쓰는 도중에 그가 하고 있는 것을 잠시 반성하여 본다면 어느 현역 역사가도 알고 있듯이, 역사가는 그의 해석을 사실에 맞추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과 사실 중 어느 것에다가 우위를 부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가는 그 자신이나 남들이 선택해 놓은 것을 참고하여 잠정적인 사실 선택과 잠정적인 해석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가 작업해 나감에 따라, 사실의 해석과 사실의 선택과 정돈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여 미묘하고, 부분적으로는 무의식적인 변화를 하게 된다. 이 상호작용은 현재와 과거의 상호작용을 포함하기도 하는데 역사가는 현재의 한 부분인 한편 사실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다.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사실의 도움 없는 역사가는 뿌리 없고 쓸모가 없다. 역사가가 없이는 사실은 생명이 없고 무의미하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 사회와 개인
사회가 먼저인가 개인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 같다. 그것을 논리적인 문제로 논하든, 아니면 역사적인 문제로 논하든 간에, 그것에 대해서 언급을 하게 되면 이렇게든 저렇게든 반대되면서 똑같이 일방적인 언급에 의해 수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와 개인은 불가분의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 필요하고 상호 보완하는 것이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단의 유명한 말이 있다. “아무도 그 자체로 완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일부이며 본토의 한 부분이다.” 이것은 진리의 일면이다. 한편 고전적인 개인주의자 J.S. 밀의 말을 인용해보자. “사람은 한군데 모아 놓았다고 해서 다른 종류의 실체로 변하지는 않는다 ” 물론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데 모여지기” 전에 인간이 존재했고 또 어떤 중류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인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세계는 우리에게 작용하기 시작하고 우리들을 단순한 생물적 단위에서 사회적 단위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역사의 모든 단계 또는 선사시대 에서도 모든 인간은 사회 속으로 태어나고 또 아주 어린 나이에서부터 사회에 의해 틀이 만들어진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개인적 유산이 아니라 그가 성장한 집단에서 얻은 사회적 획득물이다. 언어와 환경이 그의 생각내용을 결정하는 데 돕게 된다. 그의 아주 어릴 적 생각은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이다. 이미 잘 언급되었듯이 사회에서 동떨어진 개인은 말이 없고 생각이 없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신화의 계속되는 흥미는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개인을 상상하는 노력에 있는 것이다. 그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로빈슨은 추상적 개인이 아니라 뉴요크에서 온 영국 사람이다. 그는 성경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종족의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였다. 그 신화에 의하면 그는 부하인 프라이데이를 재빠르게 하사받는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의 구축이 시작되었다. 또 다른 관련된 신화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속의 인물인 키릴로프인데 그는 완벽한 자유를 증명하기 위하여 자살한다. 자살은 개인적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는 유일하게 완벽하고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 외의 토든 행동은 이렇게 또는 저렇게 그가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미개인은 문명인에 비하여 덜 개인적인 반면, 더욱더 완벽하게 사회에 의하여 만들어진다고 인류학자들은 흔히 말한다. 이것은 일리가 있다. 단순한 사회는 더 획일적인데, 복잡하고 발전된 사회보다 개인의 기술이나 직업의 다양성을 덜 필요로 하고 그런 기회가 적기도 하다는 의미로 볼 때, 더 획일적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증대되는 개인화 현상은 현대의 발전된 사회에 필수적인 결과이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사회의 모든 행동에 스며져 있다. 그러나 이 개인화의 과정과 사회의 증가하는 힘과 결합력 사이에 대립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다.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는 것이며 서로 조정하는 것이다. 정말로 복잡하거나 또는 발전된 사회란, 개인간의 상호의존이 발전되고 복잡한 양상을 띠는 사회이다. 현대 국가사회가, 그 개개인의 구성원의 성격과 생각을 형성하고 그 구성원간에 어느 정도의 단합성이나 통일성을 만들어 내는 힘이 원시 부족사회보다 미약하다고 가상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국민적 성격을 생물학적 차이에 근거를 둔 구개념은 오래전부터 파괴되었다. 그러나 국민적 성격의 차이가 사회나 교육의 상이한 국민적 배경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인간성”이라는 포착하기 어려운 실체는 나라에 파라 그리고 세기에 따라 너무나도 변화하기 때문에, 것은 지배적인 사회조건이나 인습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 현상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미국인이나, 소련인이나, 인도인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중의 어떤, 아니 가장 중요한 차이는개인들 간에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하여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가 구성되는 방법에 대하여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로서의 미국, 소련, 인도의 사회간의 차이를 연구하는 것은 개개인의 미국인, 소련인, 인도인의 차이를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된다. 문명인도 미개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형성되는데 이것은 사회가 개인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과 같다. 닭이 없이 달걀이 없는 것은 달걀 없이는 닭이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매우 명백한 진리들이 서방세계가 이제 막 빠져나오고 있는 저 경이롭고 예외적인 역사적 시대 때문에 우리들에게 인식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러한 매우 분명한 진리들을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개인주의의 예찬은 가장 만연되어 있는 현대의 역사적 신화 중의 하나이다.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르네상스문화」의 제 2부는 개인의 발전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유명한 성명에 따르면 개인의 예찬은 르네상스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고 시대에 이르러서 여태까지 “자기 자신을 종족, 사람, 집단, 가족, 또는 단체의 일원으로만 인식하던” 인간이 마침내는 “정신을 가진 개인이 되었고 또 그렇게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 이러한 개인 예찬은 후에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이 생겨나는 것과 관련되고 산업혁명의 시작과 자유방임의 원칙과 관련된다. 프랑스 혁명에 의해 선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는 개인의 권리였다. 개인주의는 19세기의 위대한 철학인 공리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몰리의 논문 “타협론”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자유주의를 묘사한 특색을 쓴 문서인데 개인주의와 공리주의를 “인간의 행복과 복지의 종교”라고 하였다. “거친 개인주의”가 인류의 진보의 기본이 되었다. 이것은 특정한 역사적 시대의 이상을 아주 건전하고 타당하게 분석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해두고자 하는 점은 현대 세계의 도래에 수반하여 늘어난 개인화 현상은 발전해 가는 문명의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혁명으로 인해 새로운 사회단체가 권력의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사회적 혁명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개인을 통해서 그리고 개인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 함으로써 운영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에 생산과 분배의 단위가 대체로 개인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질서의 이상론은, 그 사회 질서 내에서 개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역사적 발전 단계에 있어서 특정한 단계를 나타내는 하나의 사회적 과정이었고, 사회에 대한 개인의 반항 또는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개인이 해방된다는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발전과 이상의 중심이 되는 서방세계에서조차도 이와 같은 역사의 시대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징조가 많이 나타났다. 나는 여기서 소위 대중 민주주의가 발생되었다거나 경제적 생산 및 조직이 개인 위주에서 집단 위주로 점차적으로 대치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길고도 풍요로운 이 시대에 생겨난 이 이상은 여전히 서유럽과 영어권 국가에서는 지배적인 힘이다. 우리가 추상적인 말로 자유와 평등 사이의 긴장 또는 개인적 자유와 사회정의 간의 긴장을 말할 때 싸움은 추상적인 생각 사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잊어버린다. 싸움이란 개인과 개인간의, 또는 사회와 사회간의 싸움이아니라 사회속에 있는 집단화된 개인간의 싸움이다. 각기의 단체는 자기에게 유리한 사회정책을 추진하려고 하고 적대되는 사회정책은 좌절시키려고 노력한다. 위대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간의 그릇된 대립이라는 의미 때문에 개인주의는 오늘날 이해집단이 내거는 하나의 슬로건이 되었다. 문제성이 많은 개인주의의 본질은 우리가 세계의 움직임을 이해하는데 장애물이 되었다. 개인을 수단으로, 사회나 국가를 목적으로 취급하는 그릇된 생각에 항의하는 표시로서 개인이 예찬 되는데 대해서는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사회 밖에 서 있는 추상적인 개인의 개념을 가지고 시작하려 든다면 우리는 과거나 현재에 대하여 참다운 이해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빗나가버린 내 이야기의 요점을 말하게 되었다. 상식적인 역사관은 역사란 개인이 개인에 대하여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견해는 19세기 자유주의적 역사가들이 받아들이고 격려한 것인데 본질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너무 단순화되고 적당치 못한 것 같아서 좀더 깊이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가의 지식은 그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소유물이 아니다 아마도 수많은 세대의, 그리고 다른 많은 나라들의 사람들이 그 지식을 축적시켜 왔다. 역사가의 연구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진공에서 활약한 고립된 개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나간 사회의 상황과 충동 속에서 행동하였다. 지난번 강연에서 나는 역사란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의 사실간의 대화이며 상호작용의 과정이라고 묘사했다. 나는 지금 방정식의 양쪽에 있는 개인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의 상대적 무게를 알아보고자 한다. 역사가란 어느 정도까지 개인이며 어느 정도까지 사회와 시대의산물인가? 역사적 사실은 어디까지가 개인에 대한 사실이며 어디까지가 사회적 사실인가?
역사가는 개인적인 인간이다. 다른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도 또한 사회적 현상이며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산물로서 의식을 하든 않하든 간에 그 사회의 대변인이다. 이러한 자격으로 그는 역사적 과거의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역사의 과정은 “움직이는 행렬”이라고 말한다. 이 비유는 매우 적절하나, 역사가를 외로운 암벽에서 그 행렬을 내려다보는 독수리라거나 또는 사열대 위의 요인이라고 생각하게끔 유혹하지는 말아야 한다. 독수리나 요인이라니 당치도 않다! 역사가는 그 행렬의 한 부분에서 뚜벅뚜벅 걷고 있는 하나의 희미한 존재다. 그 행렬이 굽이쳐서 혹은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돌고 때로는 거꾸로 되돌아와서 그 행렬의 다른 부분들이 상대적으로 위치가 항상 바꿔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오늘날의 우리가 1세기 전의우리들 선조보다 더 가까이 중세에 접하고, 또는 시저의 시대가 단테의 시대보다 더 우리들 가까이에 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완전히 사리에 맞는지도 모른다. 행렬이 움직이고 그와 함께 역사가도 움직인다. 이에 따라 새로운 조망과 새로운 시각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역사가는 역자의 한 부분이다. 행렬 속의 역사가가 위치해 있는 지점이 과거를 쳐다보는 그의 시각을 결정한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시대가 그의 당대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도 이 이치는 여전히 통용된다. 내가 고대사를 연구하던 시절 그 주제에 대한 고전은-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그로트의 「그리스사」와 몸젠의 「로마사」였다. 식견 있는 급진적인 은행가였던 그로트는 1840년대에 문필생활을 했는데, 이제 막 피어나는 정치적으로 진보된 영국 중산계급의 열망을 아테네 민주주의라는 이상적인 구도 속에 구현했다. 그 구도 속에서 페리클레스는 벤담주의적인 개혁가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아테네는 방심한 김에 하나의 제국을 획득한 것이었다. 그로트가 아테네의 노예제도라는 문제를 무시한 것은, 그가 소속한 집단이 영국의 공장근로자 계급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사실을 반영한다고 말해도 엉뚱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몸젠은 독일의 자유주의자였는데 1848~1849년의 독일혁명의 굴욕적이고도 혼란스러운 실패에 환멸을 느꼈다. 현실정치라는 단어와 개념이 생겨난 시기였던 1850년대에 글을 쓰면서 몸젠은 독일 국민들이 정치적인 열망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빛어진 그 혼란을 정리할 강력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시저를 이상화한 것도 독일을 폐허로부터 구할 강력한 인물에 대한 동경의 소산이고, 법률가이며 정치가인 키케로가 소설가요, 끈적끈적하고 결단력 없는 인간으로 묘사된 것도 1848년 프랑크푸르트의 바울교회의 의회 토의장으로부터 방금 걸어나온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몸젠 역사의 진면목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로 그로트의 「그리스사」는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 민주주의에 관한 것뿐 아니라 1840년대 영국의 급진주의적인 철학가의 사상을 말하고 있다 해도 지나친 억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1848년의 독일혁명의 실패가 독일 자유주의자에게 미친 영향을 이해하고자하는 사람은 몸젠의 「로마사」를 교재의 하나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 때문에 이 저작들이 위대한 역사서라는 위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뷰리가 그의 취임연설에서 몸젠의 위대함은 로마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문에 대한 집대성과 로마헌법에 대한 업적에 있다고 말한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된 것에 대하여 나는 참을 수 없다. 이것은 역사를 편집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역사가의 과거에 대한 안목이 현재의 문제에 대한 통찰력으로 밝혀지는 바로 그때에 위대한 역사는 쓰여지는 것이다. 몸젠이 공화국 붕괴 이후의 역사를 계속해서 쓰지 못한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종종 놀라움을 표명했다. 그에게 시간이나, 기회, 또는 지식이 모자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몸젠이 역사책을 쓰고 있었을 매 강력한 지도자가 독일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활발히 활동하는 동안에 강력한 지도자가 국정을 주관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현실이 아니었다. 어떤 것도 몸젠으로 하여금 이 문제를 로마라는 무대에다 투영하도록 유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국의 역사는 쓰여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현대의 역사가들 중에서 이러한 현상의 실례를 찾아보는 젓은 용이하다. 지난번 강의에서 트레벨리안 박사의 「앤 여왕하의 영국」이 그가 성장한 휘그 전통에 대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찬사를 표한 바 있다. 이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학계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영국의 역사가라고 간주되는 루이스 네이미어 경의 당당하고 중요한 업적을 고려하여 보자. 네이미어는 참다온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역경에 처하면 75퍼센트쯤은 자유주의자가 되는 전형적인 영국 보수주의자가 아니 라 영국 역사가들 중에는 100년 이상이나 볼 수 없었던 그러한 보수주의자였다. 지난 세기의 중반부터 1914년 사이에 영국 역사가는 역사적 변화란 발전을 위한 변화라고 생각하였고 달리 생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1920년대는 변화란 미래에 대한 공포로 연상되는 시기가 되어 가고 있었고 변화라고 하면 더 나쁜 것으로의 변화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보수주의적 사고가 다시 태어난 시기였다. 액튼의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네이미어의 보수주의는 대륙적 배경에 뿌리를 둔 데에서 그 힘과 심오함이 유래되었다. 릭셔나 토인비와는 달리 네이미어는 19세기 자유주의에 뿌리가 없었으며 그것에 대한 향수 어린 후회 문에 고통받지 않았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피다 만 평화는 자유주의의 파산을 드러내었으며 그에 대한 반발은 두 가지 형태 중의 하나로 나타났는데, 사회주의와 보수주의가 그것이다. 네이미어는 보수주의적 역사가로 등장했다. 그는 두 가지 선택된 분야에서 일했는데 그 두 가지 선택은 의미심장하였다. 영국사를 파악하는 대 있어서 그는, 지배계급이 질서는 있으나 대체로 정체된 사회에서 권세와 지위를 합리적으로 추구하던 바로 전 시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네이미어가 역사로부터 마음을 제거했다고 비난하는 이도 있다. 이렇게 비난하는 말은 매우 적당한 것은 아니나 그 비난했던 사람이 보여주고자 했던 논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죠지 3세의 등극시에도 정치는 아직 열광적인 이상과는 관련이 없었으며, 진보에 대한 열광적인 믿음과도 관계가 없었다. 진보란 개념은 프랑스혁명 이후 세상에 선보인 것이며 의기양양한 자유주의의 세기를 초래했다. 이상도 없고 혁명도 없고 자유주의도 없는 시대, 즉 네이미어는 비록 짧은 동안이긴 하지만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그러한 시대의 나는 초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네이미어의 두번째 주제의 선택도 똑같이 의미심장하다. 네이미어는 현대의 위대한 혁명, 즉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혁명 -그는 이 혁명들에 대해서는 내용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은 무시해 버리고 1848년의 유럽혁명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우리에게 보여주기로 선택했다. 실패로 끝난 1848년의 혁명은 솟아오르는 유럽의 자유주의의 희망을 좌절시켰으며 군대의 무력 앞에서 이상이 란 공허하고 군인들과 대치 한 민주주의자들이 란 힘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치라는 심각한 사업에 이상이 끼어든다는 것은 쓸데없고 위험한 것이었다. 네이미어는 이 굴욕적인 실패를 “지성인의 혁명”이라고 부르면서 도덕감을 되풀이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결론은 단지 추측만의 문제가 아니다. 네이미어는 역사철학에 대하여 체계적인 저술을 한 적은 없지만 수년 전에 발간된 논문에서 예의 그 분명하고 날카로운 어조로 자기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기술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유로운 마음이 정치적인 원칙과 독단 따위에 말려들지 않을수록 그의 사고는 더 좋아진다. “그리고 그가 역사에서 마음을 제거했다는 비난에 언급하면서 이를 부정하지는 않은 채로 계속해서 기술했다.
어떤 정치철학가는 현재 이 나라에 일반정치에 대한 주장이 “따분한 침체”에 빠져서 없다고 불평한다. 양당은 정강과 이상은 망각한 채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방안만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러한 태도가 보다 더 위대한 국가적 성숙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이것이 정치철학의 책동에 방해받지 않고서 오랫동안 계속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나는 지금 이 견해에 문제의 초점을 맞추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나중의 강연으로 미루기로 하겠다. 여기에서 나의 목적은 단지 두 가지 중요한 진실을 설명하는 데 있다. 첫, 역사에 접근하는 역사가의 관점을 먼저 파악하지 않으면 그 역사가의 저작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감상할 수가 얼다. 둘째, 역사가의 관점 자체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에 뿌리를 박고 있다. 마르크스가 언젠가 말한 바 있듯이 교육자 그 자신이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현대적 용어로 말한다면 세뇌시키는 사람의 머리 그 자체가 세뇌되어야 한다. 역사가는 역사책을 쓰기 전부터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내가 방금 언급한 역사가들-그로트와 몸젠, 트레벨리안과 네이미어-은 말하자면 각자가 단일한 사회적, 정치적 틀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들의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 사이에는 현저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급변하는 시대에 처한 어떤 역사가들은 그들의 저작에서 단일한 사회나 단일한 사회구조가 아니고 일련의 상이한 질서를 반영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로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실례는 위대한 독일의 역사가인 마이네케이다. 그의 수명과 저작 활동시기는 이례적으로 길었는데 그동안 그의 조국의 운명은 혁명적일 정도로 격변하는 일련의 변화로 점철되었다. 여기에 실제로 우리는 세명의 상이한 마이네케를 볼 수 있는데 각기 상이한 역사적 시대를 대변하고 있으며 3권의 주요 저작을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1907년에 발간된 「세계시민주의와 민족국가」를 쓸 당시의 마이네케는 자신있게 비스마르크 제국에서 독일의 국가적 이상이 실현되었다고 보고 있으며-마찌니 이후의 많은 19세기 사상가들처럼 -국가주의를 가장 지고한 형태의 보편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 시대를 뒤이은 기이한 빌헬름시대의 산물이다. 1925년에 간행된 「국가적 이성의 개념」을 쓸 당시의 마이네케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분열되고 혼란된 마음으로 말하고 있다. 정치의 세계란 국가적 이성과 도덕감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갈등하는 싸움터가 되었는데 도덕감이란 정치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결국에는 국가의 생명과 안전보다 위에 있을 수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찌의 물결이 그의 학자적 명예를 앗아버린 1936년에 발간된 「역사주의의 성립」을 쓰고 있는 마이네케는 절망적인 비명을 지르며, 현존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인식하는 역사주의를 거부하고 역사적 상대성과 초이성적 절대성 사이에서 불안하게 뒤척이고 있다. 최후로 노년의 마이네케는 조국이 1918년의 패배보다 훨씬 파괴적인 군사적 패배에 굴복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마이네케는1946년에 발간된 「독일의 파국」에서 맹목적이고 무자비한 변화에 역사란 무력하다는 신념 속으로 맥없이 빠져들었던 것이다. 심리학자나 전기작가들은 마이네케의 개인적 발전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역사가의 흥미를 끄는 것은 마이네케가 세 번씩이나-심지어는 네 번씩이나-연속적으로 날카롭게 대립되는 현재의 시대를 역사적 과거로 반영시킨 방법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가까이에서 훌륭한 실례를 들어보자. 자유당이 영국 정치에서 가졌던 막강한 힘이 이제 막 소멸되었던 우상파괴의 1930년대 에버터필드 교수는 「휘그적인 역사해석」이라는 책을 써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럴 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그것은 여러가지 점에서 특색있는 책이었다. 내가 색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찾아낸 범위 내에서 이 책은 약 130페이지 이상에 걸쳐 휘그적 해석을 공격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역사가가 아닌 폭스를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의 휘그도 거명하지 않았고, 휘그가 아니었던 액튼을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란의 역사가도 거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특색있다. 그런데 이 책이 세부사항이나 자세함에 있어서 부촉한 것이 있다면 불꽃 튀는 독설이 그것을 보상했다. 휘그적 해석이 나쁘다는 점을 역설하여 독자는 그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휘그적 해석에 대한 비난 중의 하나는 그것이 “현재와 관련하여 과거를 연구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버터필드 교수는 엄격하고 단호하다.
말하자면 한 눈을 현재에 두고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역사학에 있어서 모든 죄악과 궤변의 원천이다, 그것은 “비역사적”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로 그것이다.
12년이 흘렀다. 우상파괴의 유행은 지나갔다. 버터필드 교수의 조국은 휘그적인 전통에 구체화되어 있는 헌법상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운다고 하는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고, “말하자면 한 눈을 현재에 둔 채 과거를 계속하여 생각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지휘했다. 1944년에 출간된 「영국인과 그의 역사」라는 소책자에서 버터필드 교수는 역사의 휘그적 해석이 “영국적”해석이라고 단정할 뿐만 아니라 “영국인의 역사와의 유대”와 “과거와 현재간의 결연”을 열광적으로 언급했다. 이와 같은 견해의 변화에 주목한다고 애서 동료답지 못한 비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제 1의 버터필드를 제 2의 버터필드를 가지고 반박하거나 술취한 버터필드 교수를 술깬 버터필드 교수와 대면시키는 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전쟁 전, 중간, 후에 내가 쓴 저작의 일부를 정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그는 어려움 없이 내가 남에게서 지적한 것과 같이 뚜렷한 나의 모순과 불일치를 지적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정말로 지나간 50년 동안 지구를 뒤흔든 사건을 겪어오면서 자기의 견해가 파격적으로 수정되지 않은 역사가가 있다면 그를 부러워해야 할지 확실치 않다. 내가 목적하는 바는 단지 역사가의 저작이 얼마나 밀접하게 그가 활동하는 사회를 반영하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변화하는 것은 단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그 자신도 변화하는 것이다. 역사서를 꺼내들 때, 표지에서 저자의 이름만을 찾아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간행된 또는 저작된 날짜도 찾아보라. 그것이 어떤 때는 보다 많은 것을 드러내준다. 우리가 시간상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뛰어들 수 없다는 철학자의 말이 맞는다면, 마찬가지 이유로 같은 역사가에 의해 동일한 두 권의 책이 쓰여질 수는 없는 것이다.
잠시동안 개인적인 역사가로부터 세칭 역사적 서술의 일반적 경향이라는 것으로 화제를 옮겨본다면 역사가는 사회의 산물이라는 의미가 점점 더 명백해진다. 19세기에 영국의 역사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역사의 진행이란 진보원리를 입증한다고 간주했다. 그들은 두드러지게 급격한 진보라는 조건이 사회의 이상이라고 표현했다. 역사가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 주는 한, 역사는 영국 역사가가 보기엔 의미가 가득했다. 역사가 방향을 잘못 들자 역사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이단시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토인비는 역사의 직선적 진보라는 이론을 순환적 변화라는 이론으로 대치하려고 필사적인 시도를 하였는데 그것은 몰락하는 사회에서 특별히 나타나는 이상론이었다. 토인비가 실패한 이후에 영국 역사가들은 대부분 손을 들고 말았고 역사에는 일반적인 유형이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취지로 피셔가 말한 것이 진부하긴 했지만 지나간 세기의 랑케가 말한 경우만큼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지나간 30년 동안의 영국 역사가들은 심오한 개인적 성찰과 자신의 다락방에서 밤늦게 공부한 결과로 이와 같이 변심하게 되었다고 누군가 나에게 말한다면 그 사실을 반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개인적 성찰과 공부를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할 것인데 이는 1914년 이래 우리 사회의 성격과 견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산물인 것이다. 그 사회에서 썩는 혹은 썩지 않는 역사서의 종류만큼 특정 사회의 성격을 의미심장하게 가리켜주는 지표는 없다. 화란의 역사가인 가일은 「나폴레옹, 찬성과 반대」라는 제목으로 영역된 재미있는 논문에서, 19세기의 프랑스 역사가들이 나폴레옹에게 내린 누차의 평가가 19세기를 통해서 변화와 투쟁 과정을 거친 프랑스의 정치적 생활과 사상의 모습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역사가의 생각은 시간과 장소라는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 이러한 진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액튼은 이러한 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역사 그 자체에서 추구하였다.
역사는 다른 시대의 부당한 영향뿐만 아니라 우리들 시대의 부당한 영향, 환경의 횡포와 우리가 숨쉬는 공기의 압박에서부터 우리를 구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역사의 역할을 너무 낙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자기의 상황을 가장 잘 의식하고 있는 역사가가, 자기는 사회현상이 아니라 개인이라고 크게 떠벌리는 역사가보다 그 상황을 더 잘 초월할 수 있고 덜 잘 자기의 사회와 견해를 달리하는 다른 시대나 다른 나라와의 차이에 대한 본질적 성질을 이해한다고 믿는다. 자기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그가 그 상황에 관련되어 있는 정도를 인식할 수 있는 감수성에 의하여 조정되는 것 같다.
첫 번째 강연에서 나는 말했다. 역사를 공부하기 전에 역사가를 공부하라. 나는 이제 거기에다 덧붙이려 한다. 역사가를 공부하기 전에 역사가가 처한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공부하라. 역사가는 개인이기도 하지만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에서 역사학도는 역사가를 쳐다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제 역사가는 접어두고 방정식의 다른 측면-역사적 사실-을 같은 문제에 비추어 생각해보자. 역사가가 연구하는 대상이 개인의 행동인가 아니면 사회적 세력의 행동인가? 이 문제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연구된 것인데 나는 이 문제를 다루어 보겠다. 아이자이어 벌린 경이수년 전에 「역사적 불가피성」이라는 제목의 재치있고 인기있는 논문-이 논문의 주제는 연속되는 강연의 나중 부분에서 언급된다-을 발표했는데, T.S. 엘리어트의 작품에서 따온 말인 “거대한 비개성적인 힘”이란 말로 그 논문의 권두를 장식했다. 논문 전편을 통하여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는 개인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비개성적인 힘”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있다. 내가 존 왕은 나쁜 왕이라고 부르게 될 역사이론은-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성격과 태도라는 견해- 오래된 내력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창조적인 힘으로서 개인의 천재를 요구하는 것은 역사인식이 초보적 단계에 있을 때의 특징적인 사항이었다. 고대 그리스인은 과거의 업적을 그 업적을 이루어냈다고 생각되는 시조 영웅들의 이름으로 장식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들의 서사시를 호머라는 음유시인에게 돌리고, 그들의 법과 제도를 리쿠르구스나 솔론에게 돌리기를 좋아했다. 이와 똑같은 경향이 르네상스시대에 다시 나타나는데 전기작가요 도덕가인 프루타크가 고대의 역사가들보다도 고전 부활의 시대에 훨씬 더 인기있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특히 이 나라에선 우리들 모두가 이 이론을 말하자면, 어머니의 무릎에서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거기에는 유치한 또는 적어도 아이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회가 더 단순하고, 공적인 일이 몇 사람의 개인에 의해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던 시절에는 그것이 좀 그럴 듯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들 시대의 보다 더 복잡한 사회와는 맞지 않는다. 19세기에 새로운 과학인 사회학이 발생한 것도 이 성장하는 복잡성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오래된 전통은 쉽게 죽지 않는다. 금세기 초엔 “역사란 위인의 전기”라는 용어가 여전히 존경받았다. 불과 10년 전에 유명한 미국 역사가가 역사적 인물을 “사회적, 경제적 힘의 괴뢰”로 취급함으로써 “역사적 인물을 대량 학살했다”고 자기의 동료들을 비난했는데 그렇게 진지한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 이 이론에 탐닉하였던 사람들은 오늘날 그것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좀더 연구를 한 결과 나는 그러한 이론의 탁월한 현대적 서술을 미스 웨지우드가 쓴 책들 중의 하나에 대한 서문에서 발견했다.
개인으로서 인간의 태도는 집단이나 계급으로서의 태도보다 나에게 휠씬 흥미롭다. 역사는 다른 경향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경향을 가지고 쓰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이상 또는 그 이하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어떻게 그 사람들이 느꼈으며 왜 그들 나름의 속셈이 있어서 그들이 했던 것처럼 행동했던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서술은 정확하다. 미스 웨지우드가 인기작가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예를 들자면, 로우즈 박사가 우리들에게 말한 바로는, 제임스 1세가 엘리자베드 여왕의 체제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글 체제가 붕괴되었고 17세기의 영국혁명은 스튜어트 왕조의 처음 두 왕들이 우둔했기 때문에”우연히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로우즈 박사보다 더 엄격한 역사가인 제임스 닐 경조차도 튜더 왕조가 나타내는 것을 설명하기 보다는 엘리자베드 여왕에 대한 그의 존경을 표명하기에 더 급급해 보인다. 그리고 내가 방금 인용한 논문 속에서 아이자이어 벌린 경은 역사가들이 징기스칸이나 히틀러를 악인으로 매도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전망 때문에 끔찍히도 근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근대에 더 가까이 올수록 존 왕은 나쁘고 엘리자베드 여왕은 좋다는 이론이 더욱 무성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기원과 성격을 분석하기보다는 그것을 “칼 마르크스의 두뇌의 소생”(나는 이 말을 최근의 증권 중개인들의 회보에서 끄집어냈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쉽다. 볼세비키 혁명에 대해서도 혁명의 깊은 사회적 여러가지 요인을 연구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니콜라스 2세의 어리석음이나 독일의 금력(효)에 돌리는 편이 용이하다. 그리고 20세기의 2차에 걸친 세계대전이 빌헬름 2세나 히틀러의 개인적 사악함이 빚어낸 결과라고 하는 것이 국제관계 구조의 근본적인 붕괴에서 결과를 찾는 것보다 쉽다.
그래서 미스 웨지우드의 진술은 두 가지 제안을 포괄하고 있다. 그 첫번째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행동이 집단이나 계급의 일원으로서의 행동과는 구분이 되고 역사가는 합법적으로 후자보다는 전자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두번째는 개인적인 인간의 행동에 대한 연구가 그 개인적 행동의 의식적인 동기를 연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이미 이야기한 것들로 미루어 볼 때, 첫번째 점은 자세히 얘기할 필요가 없다. 인간을 개인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집단의 일원으로 파악하는 견해보다 다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잘못된 것은 그 둘 사이를 구분 지으려고 하는 그 시도인 것이다. 개인이란 정의상으로는 사회의 일원이며 아마도 한 사회 이상의-예를들면 단체, 계급, 민족, 국가 또는 기타의 것 -일원인 것이다 초기의 생물학자는 조류와 어류와 맹수류를 조롱, 수족관, 진열장으로 분류하는데 만족하였고 그 놓여진 환경과 관련하여 살아 있는 생물을 연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의 사회과학도 이러한 원시적 단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심리학을 개인의 과학, 사회학은 사회에 관한 과학으로 구분한다. “심리주의”라는 이름은 모든 사회적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개인적 인간태도의 분석으로 귀착된다는 견해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지 않은 심리학자는 많이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을 개인으로 취급하는 전기와 인간을 전체의 부분으로 취급하는 역사를 구분하여 좋은 전기가 나쁜 역사를 만든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유혹적인 말이다. 액튼은 언젠가 기술하였다. “개인적인 특성에 의해 일어나는 이해만큼 인간의 역사관에 오류와 불공평을 낳게 하는 것은 없다 ” 그러나 이러한 구분 또한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G.M. 영은 그의 저서 「빅토리아 여왕하의 영국」의 표지에 내걸은 빅토리아시대의 격언, “하인은 사람을 이야기하고 양반은 상태를 토의한다. “라는 그 격언 뒤에 피신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전기서들은 역사에 도움이 되었다. 나의 전공분야에서도 아이작도이처의 스탈린과 트로츠키에 대한 전기가 훌륭한 예이다. 다른 것들은 문학에 속하는 것으로서 역사소설 같은 것들이다. 트레보-로퍼 교수는 기술했다. “리튼 스트래치에게는 역사적인 문제란 언제나 개인적인 태도와 개인적인 특이성의 문제일 뿐이었다. 역사적 문제, 정치와 사회의 문제 따위는 대답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물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 누구도 역사를 읽거나 쓸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역사는 아니지만 과거에 대한 훌륭한 저서들이 저작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관례에 의해-내가 이 강연에서 고렇게 하자고 제의한 것처럼 -사회 속에 존재한 인간의 과거에 대한 진지한 탐구과정을 “역사”라는 단어로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번째 점, 즉 개인이 왜 “자신의 속셈에 따라 자기가 행동한 것처럼 행동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연구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일견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그런데 미스 웨지우드는 다른 지각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설교한 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그녀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틀림없이 매우 이상한 역사를 쓰게 될 것이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바로는 인간은 항상 또는 거의 습관적으로 자기가 잘 의식하고 있거나 인정하는 동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또는 인정하지 않는 동기를 살펴보지 않는 것은 확실히 고의로 한 눈을 감고 작업에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것이 역사가의 할일이라고 말한다. 나의 요정은 이렇다. 존 왕의 나쁜 점은 탐욕스럽고 어리석고 그리고 폭군 노릇을 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는 점이라고 말해 버린다면 당신은 심지어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역사의 수준에서도 이해될 수 있는 개인의 성품만을 언급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존 왕은 봉건제후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반대하는 기존 이익집단의 무의식적인 도구였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존 왕의 나쁜 점에 대하여 보다 더 복잡하고 성숙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신은 역사란 개인의 의식적인 행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무의식적인 의지를 인도하는 외적이고 전능한 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제시하게도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나로서는 가끔 역사적 사건의 방향을 인도했다고 믿어지는 신성한 힘, 세계 정신, 분명히 나타난 운명, 신이 주관하는 역사, 또는 기타의 추상개념 따위를 믿지 않는다. 나는 조건없이 마르크스가 한 말을 지지한다.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막대한 재산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아무런 싸움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하고,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오히려 사람,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인 것이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두 가지 이야기는 추상적인 역사관과는 관계가 없고 순전히 경험적인 관찰에 근거한 것이다.
그 첫번째 이야기는 역사란 상당한 정도까지는 숫자가 문제된다는 점이다. “역사는 위인의 전기이다”라는 부적당한 말을 한 사람은 카알라일이다. 그렇지만 그의 가장 웅변적이고 위대한 역사서 속에서 카알라일이 말하는 바를 들어 보자. 배고픔과 헐벗음과 당연한 압박이 이천 오백만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상처받은 허영이나, 철학적인 지지자들의 상반된 철학, 부유한 상인, 시골양반 둥은 원동력이 아니었다. 어느 나라에서의 어느 혁명이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 다. 또는 레닌이 말한 대로 “정치란 수천이 아니라 수백만명의 군중이 있는 곳에서 시작되며 그곳이야말로 진지한 정치가 시작되는 곳이다.” 카알라일이나 레닌의 수백만은 개인들이 모여서 된 수백만이다. 그들에게는 비개성적인 것은 없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토의하다 보면 종종 무명과 비개성이 혼동된다. 우리가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람들이고 개인은 여전히 개인이다. 엘리어트의 “광대한 비개성적인 힘”은 대담하고 솔직한 보수주의자인 클레런던이”이름이 없는 더러운 사람들”이라고 불렀던 개인들이다. 이 이름없는 수백만은 다소간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개인들이며 함께 모여 사회적 세력을 구성한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역사가는 한 사람의 농부가 불만을 표시하거나 하나의 마을이 불평하여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수천개의 마을에서 수백만명의 농부들이 불평하면 이것은 역사가가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된다. 죤즈가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죤즈 세대의 수천명의 다른 개인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되어 결혼율이 상당히 폭락하지 – 이 경우는 역사적으로는 의미가 있게 되겠지만-않는 한, 역사가의 흥미를 끌지 않는다. 소수의 사람이 역사적 움직임을 시작한다는 진부한 격언에 당황할 필요는 없다. 모든 효과적인 움직임을 보면 지도자가 소수인 대신 대규모의 추종자가 있었다. 이것은 대규모가 그 움직임의 성공에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역사에서는 숫자가중요한 것 이다.
나의 두번째 고찰은 더 잘 논증된다. 많은 상이한 사상의 학과에 속하는 저작가들이 동의했던 것으로서, 개인의 행동은 종종 그 행동자 개인이나 여타 개인이 의도했거나 욕망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개인은 무의식적으로 신의 목적을 대리하여 행동하는 것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믿는다. 맨드빌의 “개인적인 악덕은 공적인 혜택”이라는 말은 이러한 발견을 일찌기, 그리고 대단히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아담 스미스의 감추어진 손이나 헤겔의 “이성의 간계”는 인용이 필요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것인데,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믿고 있는 개인을 부려서 자기(감추어진 손 또는 이성의 간계)와 자기 목적에 봉사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의41판」이라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의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자기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안정되고 필요한 인간관계에 돌입했다. ”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아담스미스를 연상케 하는 글을 썼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기를 위하여 산다. 그러나 인간은 인류애라는 역사적이고도 보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도구가 된다. ” 인용문들이 이미 길어졌는데 버터필드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역사적 사건의 성격에는 여태까지 인간이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역사의 진행을 비틀어 놓는 무엇이 있다. ” 1914년 이래 우리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했는데 그 전의 100년 동안에는 사소한 국지전만이 벌어졌었다.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후반의 75년간에 비해서 20세기 전반에 더 많은 개인이 전쟁을 원했고, 보다 소수의 사람이 평화를 원했다고 주장한다 해도, 이러한 현상에 패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1930년대의 경제적 대공황을 개인이 의도했거나 바랬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공황이 야기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전혀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것을 의식적으로 추구했던 개인들의 행동 때문이었다. 개인이 의도한 것과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의 결과적 차이에 대한 진단은 반드시 과거지향적인 역사가에 의해서 내려져야 되는 것은 아니다. 1917년 3월 당시의 우드로우 월슨 대통령에 대하여 로지는 기술했다.” 그는 전쟁에 참전할 의도는 없었다. 그가 역사적 사건에 의해 휘말렸다고 나는 생각했다. ”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모든 증언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의도에 관한 설명” 또는 행동자 자신에 의한 동기 설명 또는 “행동자 자신의 속셈에 의하여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등을 기초로 하여 역사가 쓰여질 수 있다는 증언을. 역사적 사실은 실제로 개인에 대한 사실이지만 개인의 단독행동이나, 그 개인이 생각하는 실재적인 또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상상적인 행동 동기를 기록한 사실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란 사회에 있어서 개인들의 상관관계를 기록한 사실이며, 종종 개인의 행동이 그 의도와는 상치되는 또는 정반대가 되는 결과를 낳게 하는 사회적인 세력을 기록한 사실이다.
지난 강연에서 논한 바 있던 콜링우드 역사관의 중대한 오류 중의하나는, 역사가가 연구하는 행동에 내재하는 생각이 행동자 개인의 생각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가정이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것은 행동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 원인은 개인의 의식적인 행동과 동기와는 별로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여기서 역사상의 반도나 반대자의 역할을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사회에 반항했던 개인을 대중적인 모습으로 설정하는 것은 사회와 개인간의 잘못된 대립을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다. 어떠한 사회도 완전히 동질일 수 없다. 모든 사회는 사회적 갈등이 벌어지는 마당이며,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개인들이나 그 권위를 수호하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그 사회의 산물이며 반영인 것이다. 리차드 2세와 캐더린 여제는 14세기의 영국과 18세기의 러시아가 지녔던 막강한 사회적 힘을 대표한다. 마찬가지로 대규모 농노반란의 지도자였던 와트 타일러나 투가체프도 그 사회를 대표하는 것이다. 군주와 반도는 그들의 시대와 나라가 처해있는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다. 와트 타일러나 투가체프를 사회에 반역하는 개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잘못된 단순화이다. 만약 그들이 단지 그런 정도의 사람이었다면 역사가는 그들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추종자 때문에 역사적인 역할을 해내었던 것이며 또 사회적 현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보다 더 복잡한 수준에서 뛰어난 반항아인 개인주의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니체처럼 그 시대와 그 나라의 사회에 대하여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반발한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니체는 유럽 사회의, 보다 더 자세히는 독일사회의 직접적인 산물이었으며 중국이나 페루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 이었다 니체가 죽고 한 세대 후의 사람들이 니체의 동시대인 보다 더 분명하게 유럽인, 특히 독일인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느꼈던 것인데 니체는 그 사회적인 힘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니체는 동시대인 보다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역사적 반항아의 역할은 위대한 사람의 역할과 다소 유사한 점이 있다. 역사란 위대한 사람의 역사라는 이론은-특히 엘리자베드 여왕을 존경하는 학파들이 그 좋은 예다-종종 보기 흉하게 대두되곤 하지만, 근년에는 한물 간 유행이 되었다. 2차대전 이후 시작된 인기있는 역사책 시리즈의 편집자가 역사책의 저자들을 초빙하여 “위대한 사람들의 전기 형식으로 중요한 역사적 주제를 설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A.J.P.테일러는 짧은 논문에서 “근대 유럽의 역사는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레닌이라는 세 명의 거인에 의하여 쓰여질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진지한 저작에서는 이와같이 무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사람의 역할은 무엇인가? 위대한 사람은 하나의 개인이고 또 뛰어난 개인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 된다. 기본은 말하였다. “위대한 인물에게는 시대가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다. 크롬웰이나 렛츠같은 천재라도 오늘날이라면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무월18일」이라는 책 속에서 마르크스는 그 반대의 현상을 진단하고 있다. “프랑스의 계급투쟁은 바보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영웅의 옷을 입고 활보하도록 하는 상황과 관계를 만들어 냈다.” 비스마르크가 18세기에 태어났다면- 그렇다면 이미 비스마르크가 아니었을 테니까 어리석은 가정이긴 하지만 -그는 독일을 통일할 수도 없었을 테고 전혀 위대한 사람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말한 것 처럼 위대한 사람은 단지 “역사적 사건에 이름을 붙여주는 딱지표” 같은 것이라고 헐뜯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때는 위대한 사함을 예찬하는 것이 이상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니체의 초인은 징그러운 인물이다. 히틀러의 경우나, 소련에서의 “개인숭배”가 가져온 음울한 결과를 상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위인의 위대함을 헐뜯는 것이 나의 목적은 아니다. 또한 “위대한 사람은 거의 언제나 악인”이라는 이론을 수긍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권장할 수 없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즉 위대하다고 하여 위인을 역사의 밖에다 놓고, 역사 위에 군림하게 하고, “알 수 없는 곳에서 기적같이 튀어나와 역사의 실제적인 흐름을 방해하는 장난감 속의 인형”같은 인물로 취급하는 그러한 견해이다. 오늘날에도 헤겔이 고전적으로 말한 것은 더 손볼 데 없이 훌륭한 것이다.
그 시대의 위대한 인물은 그 시대의 의지를 표현하는 사람이며 그 시대의 의지가 무엇이고 그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위대한 사람의 행동은 그의 시대의 심장이며 본질이다. 그는 자기의 시대를 실현한다. 리비스 박사가 위대한 작가는 “그들이 추진시키는 인간의 자각과 관련하여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헤겔과 유사한 의미였다. 위대한 사람은 언제나 기존의 세력을 대표하거나, 또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자기가 창조하려고 돕는 세력을 대표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같이 기존의 세력에 편승하여 위인이 된 인물보다는 크롬웰이나 레닌과 같이 자기를 위대하게 만들어 준 세력 그 자체의 형성을 도와준 위인들이 아마도 보다 더 높은 창조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자기의 시대보다 훨씬 앞서 있는 위인들의 위대함은 그 후의 세대에 의해서만 인정된다는 것을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나에게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위인이란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요 매개체인 한편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생각을 바꾸는 사회적 세력의 대표자요 창조자인 뛰어난 개인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에 의해서 수행되는 연구와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의 사실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로 볼 때, 역사는 하나의 사회적인 과정이다. 이 사회적 과정 속에서 개인은 사회적 존재로서 관여한다. 그리고 한편 사회와 개인간의 가상적인 대립은 우리들의 사고를 혼란시키기 위한 방해물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이야기한 바 있는 역사가와 사실과의 상호작용의 과정은 추상적이고 고립된 개인간의 대화가 아니고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간의 대화인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빌면,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한 시대에서 기록할 만하다고 판단한 것의 기록”이다. 우리에겐 과거는 오로지 현재에 비추어볼 때 판독 가능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과거에 비추어야만 현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두 가지 기능은 사람들에게 과거의 사회를 이해시키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지배를 증대시키는 데 있다.
○ 역사와 과학과 도덕
역사가가 연구 중에 사용하는 가설의 상태는 과학자가 사용하는 가설의 그것과 두드러지게 유사한 듯하다. 예를 들어 막스 웨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유명한 진단을 살펴보자. 오늘날 아무도 이것을 법칙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만 초기에는 법칙이라고 찬양되었을 것이다. 그 뒤의 후속 연구과정에서 다소 수정이 되기는 하였지만 이 가설은 의심할 바 없이 이 두 가지 운동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증대시켰다. 또는 마르크스의 진술을 예로 들어 보자. “맷돌은 봉건영주가 있는 사회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증기제분기는 산업자본가가 있는 사회를 가져왔다.” 이것은 현대적 용어로는 법칙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마르크스는 법칙이라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유익한 가설은 보다 더 깊은 연구와 신선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지표가 된다. 이러한 가설은 사고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도구이다. 1900년대 초기의 잘 알려진 독일의 경제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는 공산주의를 포기한 사람에게 엄습하는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였다.
여태까지 존재의 복잡성 속에서 우리의 지침이 되었던 편안한 공식을 잃어버리자, 우리는 새로운 발판을 발견하거나 혜엄치는 것을 배울때까지 사실이라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역사의 시대구분에 관한 논쟁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역사의 시대구분은 사실이 아니고 하나의 필요한 가설 또는 사고하기 위한 도구인데, 무언가 설명할 수 있을 때에만 타당한 것이고 또 그 타당성도 해석여부에 달린 것이다. 언제 중세가 끝났는가 하는 질문에 의견이 다른 역사가들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도 서로 다르다. 이 문제는 사실에 대한 문제는 아니지만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지리적으로 구분하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 아니라 가설이다. 유럽사라고 지리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어떤 문맥에 있어서는 타당하고 쓸모있는 가설이지만 다른 문맥에서는 잘못되고 해로운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가가 러시아는 유럽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역사가는 그것을 열렬히 부정한다. 역사가의 취향은 그가 설정하는 가설에 의해 판단될 수 있다. 물리학자로 훈련을 받은 한 위대한 사회 과학자가 사회과학의 방법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말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인용하고자 한다. 그전에는 기술자로 활약하다가 40대가 되어서야 사회의 문제에 대하여 글을 썼던 죠르쥬 소렐은 단순화한다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어떤 상황에서 특정요소를 따로 떼어낼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는 길을 더듬어 가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단편적이나마 가능한 가설을 시도하고 잠정적인 근사치에 만족하면서 발전적으로 수정하기 위한 문을 항상 열어놓아야 한다. 이것은 19세기와는 거리가 먼 외침인데, 그 시대에는 과학자나 액튼같은 역사가들이 잘 검증된 사실들을 수집하여, 단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식의 총체를 확립할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오늘날 과학자나 역사가가 품고 있는 희망은 이보다 온건한 것이다. 즉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로부터 또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을 찾아서 점진적으로 전진하며, 해석을 매개로 하여 사실을 추출하고 그 다음에는 추출된 사실을 가지고 해석을 검증한다는 식으로 전진한다. 과학자나 역사가가 전진하는 방법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첫번째 강연에서 나는 역사란 “전혀 사실적인 것이 아니고 일련의 받아들여진 판단”이라는 바라클로우 교수의 말을 인용하였다. 내가 이 강연을 준비하던 때에 이 대학 출신의 물리학자가 BBC방송에서 과학적 진리란 “전문가에 의하여 공개적으로 받아들여진 진술”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주장들은-내가 객관성 이라는 문제를 토의할 때 다루어질 이유들 때문에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서로 무관한 역사가와 물리학자가 동일한 문제를 거의 똑같은 말로써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비유란 조심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대단히 해로운 함정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소신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신중히 검토하고자한다. 그들의 소신에 의하면 같은 자연과학에서도 수학과 자연과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또한 동일한 과학분야 내에서도 각 학문간에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과학과 역사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분이 설정될 수 있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차이점으로 보아 역사를-아마도 역사 이외의 소위 사회과학도 마찬가지겠지만-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일부 반대는 다른 것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는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역사는 전적으로 특수한 것을 다루는 반면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2)역사는 아무런 교훈도 주지 않는다. (3)역사는 예측할 수 없다. (4)역사는 인간이 자기를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5)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가 개입된다. 나는 이러한 문제를 차례로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역사는 특수하고 특별한 것만을 다루고 과학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만을 다룬다고 주장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확)는 일반적인 진리와 관련이 있고 역사는 특별한 진리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진지하다”고 선언했다. 폴링우드에까지 이르는 일군의 후대작가들은 과학과 역사를 이와 유사하게 구분했다. 이것은 오해에서 기인한 듯하다. 홉스의 유명한 말은 아직도 타당하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그 이름을 빼고는 보편적인 것이란 없다. 왜냐하면 이름이 있는 것은 그 모두가 개인적이고 단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물리과학에 적용되면 확실히 타당한 진실 이된다. 두 개의 지질학적 지층, 같은 과의 두 마리의 동물, 두 개의원자 등은 결코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은 같은 것일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의 특수성을 고집하면, 무어가 비숍 주교로부터 물려받았고 한때 언어철학자들이 특별히 사랑했던 그 진부한 말과 같은 무력하게 하는 효과가 나게 된다. “모든것은 그 자체이고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길로 접어들면 곧 무언가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일종의 철학적 「열반」에 도달하게 된다.
언어를 사용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역사가도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일반화될 수밖에 없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제 2차 세계대전은 매우 다르고 또 독특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이것을 모두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단지 현학적인 사람만이 반대할 것이다. 콘스탄틴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사실이나 이슬람교의 흥기를 모두 혁명이라고 썼을 때, 기본은 두 개의 독특한 사건을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의 혁명을 저술할 때 현대의 역사가들은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실제로 역사가는 특수한 것에 흥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하면서도 일반적인 것에 흥미가 있는 것이다. 1920년대와 역사가들이 제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토의할 때 보통 이러한 가정에서 출발했다. 즉, 그 원인은 여론의 통제를 받지 않고 비밀리에 일하는 외교관의 불찰이거나 또는 세계가 불행스럽게도 여러 나라의 주권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데에 기인한다는 것이었다. 1930년대의 토의는 이러한 가정에서 출발했다. 즉, 그 원인은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압박을 받은 제국주의 국가간에 세계를 나누어먹으려는 경쟁에서 기인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토의는 전쟁의 원인에 대하여, 또는 20세기라는 상황하의 전쟁에 대하여 일반화하려는 것이다. 역사가는 증거를 검증하려고 계속하여 일반화한다. 리차드가 런던탑에서 왕자들을 살해했다는 증거가 분명하지 않을때 역사가는 그 자신에게-의식적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그 시대의 통치자는 왕권에 대한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숙청하는 것이 습관이었던가 하고 묻게 된다. 이러한 판단은 당연히 이러한 일반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일반화의 문제는 나의 두번째 문제인 역사의 교훈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일반화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려고 하고,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얻어진 교훈을 다른 일련의 사건에 적용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우리자 일반화하려고 할 때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일반화를 거부하고 역사란 전적으로 특이한 것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볼 때, 역사에서 배올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다는 주장은 눈에 띄는 많은 사실로 반박되고 있다. 그런 경험은 얼마든지 있다. 1919년에 나는 영국사절단의 젊은 위원으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했다. 사절단의 모든 사람들은 100년 전에 마지막으로 있었던 대규모 평화회의였던 비엔나 회의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 당시 전쟁청에 근무하였던 웍스터 대위는 오늘날 저 명 한 역사가가 된 찰스 웹스터 경 이었다. 그는 그 교훈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는 내용의 수필을 썼다. 그 교훈 중의 두 가지가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첫번째 교훈은 유럽의 지도를 재작성할 때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두번째 교훈은 비밀문서를 휴지통에 버리면 분명히 다른 사절단의 비밀요원이이를 사들일 것이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의 교훈이 복음처럼 받아들여졌고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이 예는 최근의 일이고 사소한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먼 역사에 글보다 더 먼 역사가교훈으로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추적하기는 쉬운 일이다. 로마에 미친 고대 그리스의 영향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로마인이 헬라스의 역사로부터 배운 또는 배웠다고 생각하는 교훈에 대하여 자세한 분석을 시도한 역사가가 있었는지, 확실치 않다. 구약성서의 역사로부터 서유럽이 17, 18, 19세기에 배운 교훈을 검토하면 가치있는 결과를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영국 청교도혁명은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선민개념은 근대 민족주의가 발생하는데 중요한 요소였다. 19세기 영국의 신흥 지배계급에게는 고전교육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로트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범으로서 아테네를 지목했다. 나는 로마제국의 역사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대영제국의 건설자에게 끼친 폭넓고 중요한 교훈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하고 희망한다. 나의 전공분야에서 볼 때 러시아혁명의 지도자들은 프랑스혁명, 1848년의 혁명, 1871년의 파리콤윤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아니, 사로잡혔었다. 나는 여기서 역사의 이중적 성격이 부과한 제한조건을 되새겨 보아야겠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방통행이 아니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안다는 것은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관관계를 통하여 현재와 과거 모두를 보다 더 깊이있게 이해하도록 추구하는 것이다.
세번째 문제는 역사의 예언적 기능이다. 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로부터는 아무런 교훈도 배울 수 없다고 한다. 이 문제는 오해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과학자들은 그전처럼 자연법칙에 대하여 열렬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소위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실제로 무엇이 발생할 것이다. 또는 그런 경향이 있을 것이다 라고하는 진술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도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거나 연구실의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그러한 것이다. 자연법칙은 구체적인 경우에는. 무엇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하지는 않는다. 중력의 법칙은 어떤 특정한 사과가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입증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과는 바구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빛이 직선으로 움직인다는 광학법칙은 어떤 특정한 빛이 어떤 방해물에 의해 굴절되거나 흩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법칙이 무가치하다거나 원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물리학의 이론은 일어나는 사건들의 가능성만을 다룬다고 말하여진다. 오늘날 과학은 귀납법이란 논리적으로 가능하거나 또는 근거있는 믿음을 추출할 뿐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과학은 그 학설을 일반적인 원칙이나 지침 정도로 취급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그 학설이 타당한지는 특정한 행동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 콩트가 말했듯이 “과학은 예지에서 오고 예지는 행동에서 온다.” 역사의 예언이라는 문제를 풀이하는 단서는 이와 같이 일반과 특수, 보편과 독특이라는 구분에 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가는 일반화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가는 미래의 행동에 대하여 일반적인 지침을 마련하는 것인데 이 지침은 특정한 예언은 아니더라도 타당하고 쓸모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특정한 사건을 예언할 수 없다. 왜냐하면 특정한 것은 독특한 것이고 우연의 요소가 가미되기 때문이다. 철학자를 괴롭히는 이 구분은 보통사람에게는 매우 분명한 것이다.
네번째 문제는 역사를 포함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구분해 보자는 좀더 설득력있는 주장을 다루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사회과학에서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같은 범주에 속하여 상호간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적 존재물 가운데 가장복잡하고 변하기 쉬운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인간 이외의 독립된 관찰자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는 인간이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은 생물학에서처럼 인간의 육체적인 모양과 반응만을 연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사회학자나, 경제학자나, 역사가는 인간의 의지가 작용하는 인간태도의 형태 속으로 뚫고 들어가 자기의 연구대상인 인간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와 사회과학에서만 볼 수 있는 관찰자와 피 관찰자라는 관계를 형성한다. 역사가의 모든 관찰에는 그의 관점이 반드시 개입한다. 역사란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성으로 가득차 있다. 칼 만하임의 말을 빌면 “경험들을 포함시키고 수집하고 배열하는 범주조차도 관찰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변화한다.” 사회과학자의 취향이 그의 모든 관찰에 개입되는 것만이 사실이 아니라 관찰이라는 과정이 피관찰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수정을 가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두 가지 반대 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다. 자기의 행동이 분석과 예언의 대상이 되는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반갑지 않은 결과를 미리 경고 받음으로써, 이에 따라 행동을 수정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예언이 아무리 정확한 분석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적중되지 않는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의식이 강한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가 별로 반복되지 않는 이유는 극중 인물이 제 1막의 결말을 제 2막에서는 이미 알고 있어서 자기의 행동이 그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하여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이 결국 나폴레옹이 라는 형태로 끝났다는 것을 볼셰비키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혁명이 동일한 방식으로 끝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혁명지도자 가운데 나폴레옹을 가장 닮은 트로츠키를 불신하는 반면 가장 나폴레옹을 닳지 않은 스탈린을 신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은 반대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권위있고 논지가 설득력있는 경제학자가 현재의 경제조건을 과학적으로 검토한 끝에 앞으로 호경기 또는 불경기가 오리라고 예측했다면 그가 예측했다는 그 사실만 가지고도 예측된 현상이 일어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 관찰에 힘입어 독재체제는 단명이라고 믿는 정치학자는 독재자의 몰락에 힘을 보탤 것이다. 선거후보가 자기의 승리를 의식적으로 예언하여 그 예언의 실현을 더욱 그럴 듯하게 하는 태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바 경제학자나, 정치학자나, 역사가가 예언을 할 때에는 종종 그 예언의 실현을 촉진시키려는 무의식적인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에 대하여 안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상호관계, 사회과학자와 자료와의 상호관계, 역사가와 사실과의 상호관계는 끊임없으며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와 사회과학의 특징적인 일면이다.
역사와 도덕과의 관계는 보다 더 복잡한데 과거에 이 관계에 대하여 논의된 것은 여러가지 불분명한 점이 있었다. 역사가는 자기의 이야기속의 인물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은 오늘날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다 역사가의 관점과 도덕가의 관점은 동일하지 않다. 헨리 8세는 나쁜 남편이었지만 훌륭한 왕이었다. 역사가는 나쁜 남편으로서의 헨리 8세에 대해서는 그것이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미칠 때에만 흥미를 갖는다. 만약 그의 도덕적 타락행위가 헨리 2세의 경우와 같이 공식적인 일에 별로 뚜렷한 영향을 끼치지 알았다면 역사가는 그것을 신경쓰지 않는다. 이것은 악덕과 마찬가지로 미덕에도 적용된다. 파스퇴르나 아인슈타인은 사생활이 모범적인 심지어는 성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여진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충실치 못한 남편, 잔인한 아버지, 뻔뻔스런 동료였다고 해서 그들의 역사적 업적이 그만큼 손상되는가? 역사적 업적이야말로 역사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스탈린은 두번째 아내에게 잔인하고 냉정하게 굴었다고 말하여진다. 그러나 소련을 연구하는 역사가인 나는 이 점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의 도덕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도덕의 역사가 역사의 정당한 한 부분이 될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는 그가 쓰는 역사책의 페이지에 나타나는 개인의 사생활에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는 해야 할 다른 일이 있다.
역사가 과학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요약해보자. 과학이라는 말은 이미 수많은 다른 방법과 다른 기술을 사용하는 지식의 수많은 분야에 통용되고 있어서 그 책임은 역사를 과학에 포함시키고자하는 사람보다 제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제외하자는 주장이, 선민사회에서 역사가를 제외시키지 못해 초조한 과학자한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인문학의 한 분야로 정립시키려는 역사가나 철학자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인문학과 과학을 나누려는 오래된 편견을 반영하는 것인데 이 편견은 인문학이란 지배계급의 폭넓은 문화를 대표했고 과학이란 지배계급을 섬겼던 기술자의 기술을 대표했다는 생각이다. “인문학”이니 “인문”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한 오래된 편견의 잔재이다. 과학과 역사의 대립은 영어 이외의 언어에서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이러한 편견이 특별히 섬나라적인 성격을 띄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를 과학이 아니라고 하는 데 내가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소위 “두 가지 문화”사이의 분열을 정당화하고 영속화하기 때문이다. 이 분열은 그 자체가 오래된 편견의 산물인데 과거시절의 영국사회가 지닌 계급구조에 기인한다. 역사학자와 지질학자 사이의 단절이 지질학자와 물리학자의 그것보다 더 깊고 더 메울 수 없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단절을 메울 방법은, 내 생각으로, 기초과학을 역사가에게 가르치거나 초보역사를 과학자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사고가 혼란되어 우리가 도달하게 된 막다른 골목이다. 그렇지만 과학자 자신은 이런 식으로 처신하지 않는다. 나는 기술자에게 초급식물학 강의를 받도록 권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내가 제시할 수 있는 하나의 처방은 우리의 역사수준을 향상시키고, 역사학을-내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보다 더 과학적으로 만들고, 역사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요구사항을 보다 엄격하게 하는 것이다. 이 대학에서는 학과과목으로서 역사학이, 종종 고전은 너무 어렵고 과학은 너무 심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두 수강하는 과목이다. 내가 이 강연에서 심어주고자 하는 인상은 역사학이 고전보다 훨씬 어려운 과목이고 과학만큼 심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이 심어진다면 역사가들은 자기의 전공분야에 보다 더 강한 신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찰스 스노우경은 최근에 이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하였는데 과학자의 “경솔한”낙관주의와”문학적 지성인”(그가 명명한 이름임)의 “가라 앉은 목소리”와 “반사회적 감정”을 대비시켜서 설득력 있는 논지를 제기하였다. 일부 역사가가-그리고 역사가도 아니면서 역사에 대하여 저술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문학적 지성인”의 범주에 속한다. 기들은 역사란 과학이 아니라고 말하고, 역사가 해낼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고 또 역사의 본질이 아닌 것들을 열거 하느라고 매우 바쁘기 때문에 역사의 업적과 가능성을 얘기할 시간이 없는 것이 다.
그 균열을 치유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과학자와 역사가가 목표하는 바의 실체를 보다 더 깊게 이해하도록 도모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역사와 과학철학에 대하여 새롭게 자라나는 흥미가 주는 중요한 가치인 것이다 과학자, 사회과학자, 피리고 역사가는 같은 학문의 다른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데 같은 학문이라 함은 인간과 인간의 환경에 대하여 연구하고 인간과 환경 간의 상호 영향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 학문의 목적도 같아서 인간으로 하여금 환경에 대한 이해와 지배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물리학자, 지질학자, 심리학자 그리고 역사가가 설정하는 전제조건과 방법은 구체적인 면에서는 매우 다르다. 더 과학적이기 위하여 역사가는 자연과학의 방법을 좀더 긴밀하게 답습해야한다고 제안하지는 않겠다. 피러나 역사가나 자연과학자나 해답을 찾아내고자 하는 목적과, 질문과 답변이라는 절차를 거친다는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역사가는 다른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동물이다. 다음의 강연에서는 역사가가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답하려고 시도하는 방법에 대하여 검토하겠다.
○ 역사의 인과관계
이 시점에서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길목에 가로 놓여져 있는 두 개의 흥미있는 함정을 다루어야겠다. 그 하나는 “역사에 있어서의 결정론 또는 헤겔의 사악함”이라고 명명되고, 다른 하나는”역사에 있어서의 우연 또는 클레오파트라의 코”라고 명명되는 것이다. 먼저 어떻게 이것들이 여기에 나타나게 되었는지 한두 마디 언급해야겠다. 1930년대에 비엔나에서 과학의 새로운 관측에 대하여 무게있는 저작을 한 바 있는 카알 포퍼 교수의 이 저작은 최근에 「과학적 연구의 논리」라는 제목으로 영역된 바 있다. 전쟁 중에 보다 더 대중적인 성격의 두 권의 책 – 「열린 사회와 그 적들」과 「역사주의의 빈곤」 -을 영어로 출간하였다. 이 책들 속에는 헤겔에 대한 반작용의 강한 영향이 반영되고 있는데 혜겔은 플라톤과 함께 나찌즘의 정신적 원조라고 취급되었다. 또한 1930년대의 영국 좌파가 지적 분위기로 삼았던 다소 천박한 마르크시즘도 반박되고 있다. 주 공격목표는 “역사주의”라는 모욕적인 이름아래 뭉뚱그려질 수 있는 혜겔과 마르크스의소위 결정론적 역사철학이었다. 1954년에 아이자이어 벌린 경이 「역사적 불가피성」에 관한 논문을 발간했다. 그는 플라톤을 공격하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옥스포드 대학의 오래된 지주에 패해 하직도 남아 있는 존경심 매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포괴의 비난에 덧붙여서 포퍼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주장을 하고 있다. 즉 해겔이나 마르크스의 “역사주의”는 반대해야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행동을 인과관계로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역사주의”매문에 역사가가 역사상의 샤를마뉴 대게, 나폴레옹, 스탈린 둥의 인물을 도덕적으로 비난해야 할 예정된 의무를 회피케 권장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지난 강연에서 말한 바 있다. )그 외에는 별로 변한 것이 많지 않다. 그러나 아이자이어 벌린 경은 대중적으로 널리 읽힐 가치가 있는 저작가이다. 지나간 5~6년 동안 이 나라와 미국에서 역사에 대한 논문을 썼거나 역사에 관한 저작을 진지하게 검토한 사람은 거의 모두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하여 아는 척하는 경멸적인 태도를 보여 왔고, 역사에 있어서 우연의 역할을 인식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지적해왔다. 제자들의 이와 같은 근도를 아이자이어경의 책임이라고 하면 아마도 공정하지 못할 것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때조차도 그는 그것을 매력적이고 마음에 들게 이야기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용서를 받을 만하다. 그의 제자들은 쓸데없는 소리를 반복하지만 그것을 매력적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어쨌든 이 모든 것에는 새로운 것이란 없다. 찰스 킹즐리는 현대사의 흠정교수 중에 가장 뛰어난 분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헤겔은 읽지도 않았고 마르크스는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1860년의 취임강연에서 인간에게는”자기가 존재하는 법칙을 깨뜨리는 신비한 힘”이 있는데 이것이 역사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란 존재할 수 없다는 증거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킹즐리를 잊어버렸다. 이미 죽은 말의 잔등을 채찍질하여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은밀히 노력해온 것은 포퍼교수와 아이자이어 벌린 경이다. 이러한 혼란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다소간의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먼저 결정론을 언급하겠는데 나는 결정론을-이 점에 대하여 논쟁이 없기를 바란다-발생한 모든 사태는 반드시 하나의 원인 또는 다수의 원인이 있고 원인의 내용이 달라지지 않는 한 그 발생한 사태에 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이라고 정의하겠다. 결정론은 역사에 관한문제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행동에 관한 문제이다. 자기의 행동에 원인이 없고 따라서 결정이 되어 있지 않은 인간은, 지난번 강의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사회의 바깥에 있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인간의 일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포퍼 교수의 주장은 무의미하거나 허구적인 것이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믿지도 않고 믿을 수도 없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는 공리는 우리가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전제조건이다. 카프카 소설의 악몽과 같은 성격은 일어나는 사건마다 분명한 원인이 없고 또한 추적 가능한 원인조차도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것은 인간 개성이 전적으로 붕괴되게 한다. 그런데 인간 개성이란 다음과 같은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이러한 원인은 인간의 마음 속에 행동의 지침이 될 수 있도록 충분히 일관된 과거와 현재의 모형을 설정하게끔 추적 가능해야 한다. 인간의 행동이 원칙적으로 추적 가능한 원인에 의하여 결정이 되어 있지 않으면 일상생활이란 불가능하다. 옛날에 어떤 사람들은 자연현상이 신의 섭리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연구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자이어 벌린 경이 인간행동이 인간의 의지에 지배받기 파문에 인간행동의 원인을 규명하지 않겠다고 반대하는 것은 이런 생각과 같은 범주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반대는 오늘날의 사회과학이, 위와 같은 이유로 자연과학이 반박되던 옛 시절과 동일한 발전단계에 있다고 시사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를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다루게 되는지 살펴보자. 일상생활 중에 당신이 스미스를 습관적으로 만난다고 하자. 당신은 그에게 인사를 하면서 다정하나 별 뜻이 없는, 날씨나 단과대학이나 대학에서 벌어지는 일을 말할 것이다. 그도 똑같이 다정하나 별 뜻이 없는, 날씨나 사무적인 일 등을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스미스가 당신에게 일상적으로 대답하는 대신에 당신의 개인적인 용모나 성격에 대하여 갑작스런 욕설을 했다고 하자. 당신은 어깨를 움찔하고 나서 이러한 사태가 스미스의 자유의지라거나 또는 인간사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로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불쌍한 스미스, 자기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죽더니만,” 또는 “불쌍한 스미스! 아내하고 뭔가 잘 안되어 가는가 보군.” 바꾸어 말하면 당신은 뭔가 원인이 틀림없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스미스가 한 뚜렷한 근거 없는 행동의 원인을 진단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아이자이어 벌린 경의분노를 사게되리라 생각되는데, 아이자이어 벌린 경은 이렇게 심하게 불평할 것이다. 당신이 스미스의 행동을 인과관계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결정론적 가정을 맹종한 것이며 또 스미스를 형편없는 놈이라고 마땅히 비난해야 할 의무를 회피한 것이라고. 그러나 알상생활에서는 아무도 이러한 견해를 취하지 않을 것이며 또 결정론과 도덕적 책임이 위태한 지경에 빠졌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한 논리적 딜레마는 실제 생활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부 인간행동은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고 일부 인간행동은 결정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는 인간행동을 바라다보는 관점에 따라 그것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결정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실제적인 문제는 또 다른 것이다. 스미스의 행동은 하나의 원인 또는 다수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어떤 외부적 충동이 아니라 그 자신의 충동적 성격에 의한 것이라면 그는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성인(또A)은 그 자신의 성격에 대하여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사회생활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특정한 경우에 있어서 스미스에게 책임을 묻는 문제는 당신의 실제적인 판단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의 책임을 묻는다고 해서 당신이 그의 행동은 원인없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원인과 도덕적 책임은 별개의 범주에 속한다. 범죄학 연구소 및 강좌가 최근에 이 대학에 설립되었다. 나는 확신하거니와, 범죄의 원인을 조사하는 사람들이라고 범죄자의 도덕적 책임을 부인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역사가를 살펴보자.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역사가는 인간행동이 원칙적으로 추적 가능한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가정을 할 수 없다면 역사는 일상생활과 마찬가지로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을 연구하는 것이 역사가의 특별한 기능이다. 이것이 역사가로 하여금 인간 행동의 결정된 측면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는 자유의지를 부인하지 않는다- 단 자발적 행동은 원인이 없다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가설을 제외하고는. 그는 또한 불가피성이라는 문제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역사가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건적 요소의 연결이 너무나도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것임을 의미할 때면 종종 수사학적인 용어나”불가피한” 사태라는 말을 쓴다. 최근에 내가 쓴 역사책에서 “불가피한”이라는 불쾌한 말이 없는가 찾아 보았더니 나 자신도 전적으로 깨끗한 건강진단서를 받을 수 없었다. 어떤 문장에서 나는 기술하기를1917년의 혁명 후에 볼셰비키와 그리스 정교간의 충돌이 “불가피했다”라고 썼던 것이다. 차라리 “매우 가능성이 많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현명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고친다는 것이 약간 현학적이라고 하여도 용서가 될는지? 실제로 역사가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그 사건이 불가피하다고 가정하지는 않는다. 역사가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가정에 입각하여 이야기의 주인공이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적인 과정을 빈번하게 토의한다. 그러나 역사가는 왜 이 과정이 다른 과정을 젖히고 결과적으로 선택이 되었는가를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역사가 다르게 발전하려면 그 역사의 선행하는 원인이 달라져야 된다는 엄격한 의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것도 역사에 있어서 불가피하지는 않다. 나는 역사가로서 “불가피한”, “필연적인” “피할 수 없는” 따위의 말과 심지어 “모면할 수 없는” 말조차도 쓰지 않을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은 좀더 무미건조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말들은 시인이나 형이상학자에게 맡겨두자.
이와 같이 불가피성을 공격하는 것은 쓸데없고 무의미한데도 근년에 너무나도 열광적인 공격이 퍼부어졌기 때문에 그 뒤에 숨은 동기를 찾아내야 되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주 원천은, 내 생각으로는, 소위”가상학파,’ 차라리 감상학파일 것이다. 이 학파는 거의 전적으로 현대사에 집착한다. 지난 학기에 이곳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나는 “러시아 혁명은 불가피하였는가?” 라는 제 목으로 어느 학회를 상대로 하는 강연회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정말로 심각한 강연회였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장미전쟁은 불가피 하였는가?”라는 강연회 광고를 보았다면 당신은 단번에 이것이 농담이구나 하고 알아차렸을 것이다. 역사가는 노르만 정복이나 미국 독립전쟁을 기술할 때는, 일어났던 사건은 실제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일어난 사건의 내용과 이유를 단지 사무적으로 설명한다. 역사가가 단정론자가 되고 또 정복왕 월리엄이나 미국의 반도들이 패배할 수도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정확히 이와 같은 방식으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하여 기술할 때 -역사가에게는 유일한 적당한 방법이다- 비평가들은 내가 암암리에 일어났던 사건을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으로 묘사하고, 일어날 수도 있었던 다른 사건들은 검토도 하지 않았다고 하여 나를 비난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스톨리핀이 농업개혁을 완수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든지 또는 러시아가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러시아 혁명은 일어나지 알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는 케렌스키 정부가 잘 해나가고 그 혁명을 볼셰비키 대신에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이 지도하였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라고 말한다. 이러한 가상은 이론적으로는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역사의 가상적인 내용을 가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은 결정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상들이 실제로 발생하려면 그 원인도 달라져야 된다고 결정론자는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가정은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아무도 노르만 정복이나 미국 독립의 결과를 바꾸려고 진지하게 희망하지도 않으며 또 이러한 사건에 대하여 강렬한 반대를 표시하지도 않는다는데 있다. 역사가들이 이 사건들을 완결된 역사의 일장으로 취급하여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승리한 그 혁명 때문에 직접, 간접으로 피해를 보았거나 또는 아직도 그 후유증을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사건에 대하여 반대를 표명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 사건에 대한 역사책을 읽는다면 일어날 수도 있었던 바람직한 사건에 대해서는 상상력을 무성하게 발동시키면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의 내용과 그들이 일어나기를 바랬던 사건이 불발된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는 역사가에게는 분통을 터뜨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현대사의 문제점은, 사람들이 그 당시 여러가지 대안이 가능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대안이 기정사실에 의해 모두 봉쇄되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와 같은 태도를 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감정적인 것으로서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반응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소위 “역사적 불가피성”이라고 하는 원칙을 반대하는 최근의 운동에 불을 댕긴 것이다. 이러한 함정을 영원히 제거하도록 하자.
공격의 또 다른 근거는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유명한 문제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역사란 대체로 우연의 일치에 의해 결정되고 가장 우연한 이유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우발적인 사건들의 장절 이요, 연속이라는 것이다. 악티움 해전의 결과는 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안토니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자제트가 통풍파문에 중앙 유럽으로 진격하지 못했던 것을 두고 기본은 “한 사람의 근육에 통증이 생겼다는 사실이 여러 나라가 비참하게 되는 것을 막아주고 연기시켰다”라고 말했다. 1920년의 가을에 그리스의 알렉산더 왕이 자기의 애완동물이던 원숭이한테 물려서 죽었는데 이 사건이 일련의 사건을 촉발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윈스턴 처칠 경은 “25만명의 사람이 이 원숭이한테 물려 죽었다”라고 말했다. 1923년 가을에 트로츠키픈 지노비에프, 카마네프, 스탈린 둥과 권력투쟁을 벌이는 중요한 시점에 있었는데 트로츠키는 오리사냥을 갔다가 열이 많이 나는 병에 걸려 그 중요한 시점에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트로츠키의 언급을 예로 들어보자. “혁명이나 전쟁은 그 결과를 예상할 수 있어도 야생오리를 잡으러 가는 가을 사냥은 그 결과를 예측하기가 불가능하다. ” 첫번째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이러한 문제가 결정론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안토니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진 사실, 또는 바자제트의 통증, 또는 트로츠키의 오한 등은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인과관계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안토니의 미혹이 아무런 원인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아름다움을 불필요하게 깎아내리는 것이다. 여자의 아름다움과 남자의 미혹이라는 관계는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인과관계이다. 소위 역사상의 우발적 사건이란, 역사가가 일차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연속관계를 방해하는-말하자면 충돌하는-원인파 결과의 흐름을 나타낸다. 뷰리는 매우 적절하게 “두 개의 독립된 인과관계의 사슬”이라고 말하고 있다. 버나드 베렌슨의 “우연사관”이라는 논문을 칭찬하면서 「역사적 불가피성」이라는 논문을 시작한 아이자이어 벌린 경은 이러한 의미로 본 우연과 인과관계적 결정론의 부재를 혼동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혼동은 차치 하고라도 우리에게는 정말로 중대한 문제가 있다. 우리가 다루는 인과관계의 흐름이 또 다른 흐름과 그리고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적절치 못한 흐름에 의해 아무 때나 깨뜨려지고 굴절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일관성있는 인과관계의 흐름을 발견할 것인가? 어떻게 역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 진보로서의 역사
현대 사료편찬의 창시자인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유대-그리스도적 목적론을 그대로 간직했으나 목표를 세속화시켰다. 그들은 이리하여 역사적 과정이 지니는 이성적 특성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역사란 지구상에 있는 인간의 지위를 완성한다는 목표를 향한 진보가 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인 기본은 그가 다루는 주제의 성질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모든 시대는 인류의 참다운 부, 행복, 지식, 그리고 아마도 미덕을 증대시켜 왔고 지금도 증대시키고 있다는 기분 좋은 결론” 이라고 그가 부른 것을 주저하지 않고 기록했다. 영국의 번영과 권세와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진보에 대한 예찬이 극에 달했다. 영국의 저작가와 역사가들이 그 예찬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는 진보에 대한 신념이 최근에 모든 사고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한두가지 문장만 인용하면 충분하다. 「케임브리지 현대사」 발간계획에 대한 1896년의 보고서(나는 첫번째 강연에서 인용한 바 있다)에서 액튼은 역사를 “진보적인 과학”이라고 언급하였다. 액튼은 또한 그 현대사의 제 1권의 서문에서 “역사가 쓰여질 수 있는 바탕은 과학적 가설로서, 우리는 인간사에 있어서 진보를 예상할 수밖에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1910년에 발간된 그 현대사의 마지막 권에서, 나의 대학시절 은사였던 담피어는 “자연적 자원에 대한 인간의 힘과, 인류의 복지를 위한 그 지적 이용방법은 장래에 무한히 발달할 것으로 본다”고 의심없이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이 내가 교육받았던 분위기였다고 얘기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나는 또한 이의없이 나보다 반세대 선배인 버트란드 러샐의 말에 동의한다. 즉, “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충만한 낙관주의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 나에게는 그 당시에 매우 느끼기 쉬웠던 희망에 가득 찬 기분이 남아 있다. “뷰리가 「진보의 이념」이라는 책을 쓴 1920년은 황량한 분위기가 벌써 지배하고 있었다. 그 당시 유행에 따라 그는 그 이유를 “러시아의 공포정치를 확립한 공론가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서구문명의 활기차고 지배적인 이념”으로서 진보를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이러한 소리는 잠잠해졌다.
러시아의 니콜라스 1세는 “진보”라는 말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고 한다. 오늘날 서구의 철학자와 역사가들 심지어는 미국의 철학자와 역사가들은 때늦게 니콜라스 1세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 진보라는 가설은 반박되어 왔던 것이다. 서구의 몰락이라는 말은 너무나도 유명한 문구가 되어 인용부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야단법석은 차치하고라도 실제로 무엇이 발생하였던가? 누구에 의해서 이러한 새로운 의견의 조류가 형성되었는가? 전일 나는 계급의식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듯한 버트란드 러샐의 말(아마도 유일한 것으로 생각되는데)을 읽고서 충격을 받았다. 즉, “대체로, 100년 전의 새상에 비해 지금의 세상은 더 자유가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자유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데, 맡은 사람이 향유하는 커다란 자유에 대하여 소수가 누리는 작은 자유를 저울질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떠한 기준으로 측정하여도 나는 그러한 이야기는 정말로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A.J.P 테일러씨가 가끔 우리로 하여금 옥스퍼드 대학생활을 엿보게 해주는 그 매혹적인 하나의 관찰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그는 서술하기를, 문명의 몰락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는 “대학교수가 전에는 가정부를 두었는데 지금은 빨래를 자기가 직접 해야 된다는 정도의 뜻”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에 가정부였던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교수가 직접 빨래한다는 것은 진보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백인이 우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은 제국주의자, 아프리카 공화주의자, 금광과 구리업계의 투자가들을 고민하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진보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러한 진보라는 문제에 대하여, 왜 내가 사실상 1890년대의 판결보다 1950년대의 판결을 더 좋아하고 러시아, 아시아, 아프리카의 판결보다 영어권 세계의 판결을 더 좋아하고 또, 맥밀런 씨에 따르면 현재 더할 수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시정잡배보다 중산계급의 지식인이 내린 판결을 더 좋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진보의 시대인지 또는 몰락의 시대인지 하고 묻는 질문에 대한 판단을 잠시 보류하자. 그리고 진보라는 개념의 의미, 그 개념 뒤에 숨은 가정, 그리고 그 가정이 어느 정도 부당한 것인지 조금 더 면밀히 검토하자.
나는 먼저 진보와 진화에 대한 혼란을 없애야겠다. 계몽시대의 사상가들은 분명히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계에서 인간의 위치를 입증하려고 했다. 역사법칙과 자연법칙은 동일시되었다. 한편 그들은 진보라는 개념을 믿었다. 그러나 자연이 진보적이고 항상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진전한다고 믿는 근거는 무엇인가? 헤겔은 이러한 난제를, 진보하는 역사와 진보하지 않는 자연으로 뚜렷하게 구분함으로써 해결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곤란한 문제를 일소하는 듯했다. 결국 자연도 역사처럼 진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휠씬 더 중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는데 그 오해란 진화의 원천인 생물적 유전과 역사적 진보의 원천인 사회적 획득을 혼동한 것이다. 그 구분은 잘 알려져 있고 분명한 것이다. 유럽의 아이를 중국의 가문에 입양시킨다면 그 아이는 피부는 백인이지만 중국어를 말하며 성장할 것이다. 염색체 형성은 생물적 유전이고 언어란 인간의 머리를 매개체로 하여 이전되는 사회적 획득물이다. 유전에 의한 진화는 수천만년 또는 수백만년 단위로 측정된다. 기록된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측정할 수 있는 생물학적 변화가 인간에게 일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알려져 있다. 획득에 의한 진보는 세대별로 측정할 수 있다.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은 과거의 경험을 축적하여 자기의 잠재적 능력을 개발 시키는데 있다. 현대인은 5,000년 전의 선조에 비해 머리가 크다거나 사고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이 더 크다거나 하지는 않다. 그러나 현대인이 효과적으로 사고하게 된 것은 지나간 세대의 경험을 자기의 경험에다 흡수하고 배움으로써 사고력이 몇 배로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획득된 특성의 유전을 생물학자들은 부인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진보의 가장 기본이 된다. 역사란 획득된 기술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적으로써 얻어지는 진보인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진보가 어떤 일정한 시작이나 끝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기원전 4,000년 경에 문명이 나일강에서 발생하였다는 학설은 50년이 조금 못 되는 과거에 유행하였다. 이 학설은 오늘날 기원전 4004년에 천지창조가 되었다는 연대학과 마찬가지로 신빙성이 없는 것이다. 진보라는 우리의 가설에 출발점이 될 수도 있는 문명의 탄생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매우 느린 발달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과정 속에서는 때때로 굉장한 비약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진보-또는 문명 -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골치를 썩힐 필요는 없다. 진보에 어떤 일정한 종말을 설정하려는 가설은 더욱더 심각한 오해를 유발한다. 헤겔은 프러시아의 군주제도가 진보의 종말이라고 보았는데 분명한 예측이란 불가능하다는 자기의 견해를 너무 지나치게 해석한 결과로서,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헤겔의 이와 같은 빗나간 주장은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한 사람인 아놀드 오브 러그비에 의하여 절정에 달하게 된다. 아놀드 오브 러그비는 1841년 옥스포드 대학의 현대사 흠정교수로 취임하는 취임강의에서 현대사가 인류역사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했다. “현대사는 모든 것이 완전한 듯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미래사는 없는 것 같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계급 없는 사회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실현시킬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이에 비하면 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낫다. 그러나 역사에 종말을 가정하는 것은 종말론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역사가보다는 신학자에게 더 어울리는 것으로서 역사 외적인 목표라는 오류로 귀착되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종말이란 인류에게는 매력적인 것이다 역사의 진행이란자유를 향한 영원한 진보라는 액튼의 비전은 애매모호하고 차가운 느낌이 있다. 그러나 역사가가 진보라는 가설을 견지하려면, 진보란 계속하여 이어지는 시대의 요구와 조건이 그 특수한 내용이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역사란 진보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진보하는 과학”이며 또는 두 가지 의미에서 – 사건의 진행이라는 의미와 사건의 기록이라는 의미 – 역사는 진보적이라고 액튼의 논문이 뜻한 바 있다. 역사에 있어서 자유의 발전에 대한 액튼의 서술을 상기하여 보자.
변화는 많았지만 진보는 더디었던 지난 400년 동안에 자유가 보존되고 확보되고 신장되고 마침내 이해되게 된 것은 무력통치와 계속되는 악정에 항거하여 힘없는 사람들이 할 수 없이 자기들의 힘을 합쳐 저항했기 때문이다.
액튼은 사건의 진행으로서의 역사는 자유를 향한 진보라고 보았고 이러한 사건의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자유를 이해하기 위한 진보라고 보았다. 이 두 과정은 나란히 발전했다. 진화로부터의 유추가 유행이던 시절에 철학자 브래들리는 “종교적 신앙에 있어서 진화의 종말이란 이미 진화된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역사가에 있어서는 진보의 종말이 아직도 진화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도 매우 막연한 어떤 것이다. 그리고 진보를 가리키는 지표는 우리가 진전함에 따라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표의 중요성이 감소되지는 않는다. 나침반은 가치있고 정말로 없어서는 안될 지침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행해 나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지도는 아니다. 역사의 내용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세째 주장은 이러하다. 아무도 제정신이라면 역전이나, 이탈, 중단이 없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진보는 믿지 않으며, 그래서 아무리 예리한 역전이 있어도 그것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진보라는 신념을 결정적으로 바꾸지는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분명히 진보의 시대가 있는 것처럼 후퇴의 시대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퇴보뒤에 진전이 되면 같은 지점이나 같은 행렬을 따라 진전되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세 개나 네 개의 문명, 토인비의 21개의 문명, 흥기, 몰락, 붕괴의 과정을 문명이 거치게 된다는 수명이론 등-이 모든 이론은 그 자체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어떤 곳에서는 문명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소멸하였다가 나중에 다른 곳에서 나타나고 그래서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진보란 확실히 시간과 장소에 따라 연속되지 않는다는 발견된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정말로 내가 역사법칙을 제정하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 법칙은 이러한 것이 될 것이다. 한 시대에 문명의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한 집단은-계급, 국가, 대륙, 문명 등-다음 시대에도 유사한 역할을 수행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 집단은 전시대의 전통, 이해, 이상 등에 너무나 깊숙이 젖어 있어서 그 다음 세대의 요구나 조건에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한 집단이 몰락했던 시대가 다른 집단에게는 새로운 진전의 탄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진보란 모든 것에 동일하고 동시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최근에 몰락을 예언하는 사람들이나 역사의 의미를 무시하고 진보란 없다고 단정하는 회의론자의 대부분이 수 세대에 걸쳐서 문명의 전진에 눈부신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온 지역이나 사회계급에 속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자신의 집단이 과거에 수행했던 역할이 이제 다른 집단에게로 넘어간다고 말해주어도 그들에게는 위안이 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매우 야비한 술수를 쓴 역사는 의미 있고 합리적인 과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라는 가설을 유지하려면 진보에는 단절된 행렬이 있을 수도 있다는 조건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역사적 행동과 관련하여 진보의 본질적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겠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 민권을 신장시키려고 투쟁하는 사람, 형법을 개정하려는 사람, 인종 또는 재산의 불공평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계속하여 단지 이러한 것들만을 하려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진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또 역사적 “법칙”이나 진보라는 “가설”을 실현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행동에 진보라는 가설을 적용하고 들의 행동을 진보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바로 역사가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진보라는 개념을 무효로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자이어 벌린 경은 “아무리 남용이 되어도 진보와 반응이라는 단어는 공허한 개념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이 점에 있어서 나는 그와 의견을 같이하게 되어 기쁘다. 인간은 선조들의 경험으로부터 혜택을 볼 수 있으며(반드시 혜택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진보란 자연의 진화와는 달리 획득된 자산의 유전에 달려 있다는 것이 역사의 전제이다. 획득된 자산은 물질적 소유물과 인간의 환경을 지배하고, 변형하고, 이용할 수 있는 능력 모두를 포함한다. 실제로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간에 반응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진보라는 전체 건물의 기반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원칙은 “노동력”에 충분히 광범위한 의미가 주어진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광범위한 의미에서 늘어난 기술적, 사회적 지식과 경험이 제공되지 못하고 인간이 환경을 지배하도록 도와줄 수 없다면, 단순한 자원의 축적은 쓸데없는 것이다 물질적 자원과 과학적 지식을 축적하고 과학적인 의미에서 환경을 지배하는 기술을 축적하는 데에 진보라는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요사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사회를 정비하는 데 진보가 있었는지, 국가적으로 또는 국제적으로 사회환경을 지배하는데 발전이 있었는지, 정말로 두드러진 퇴보 같은 것은 없었는지 등이 질문을 던져야 할 내용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진화는 기술의 진보보다 치명적으로 뒤떨어진 것은 아닌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증상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질문은 잘못 제기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많은 전환점이 있는데 그때마다 지도자적 역할과 주도권이 세계의 한 지역, 한 집단에서 다른 지역,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 근대국가가 발생한 것이나, 세력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서유럽으로 옳겨간 시대나, 프랑스 혁명의 시대 등이 두르러진 근대의 예들이다. 이러한 시대는 언제나 과격한 격변의 시기였으며 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의 시기였다. 옛날의 권위는 약화되고 옛날의 지표는 사라졌다. 야망과 격분이 격렬하게 충돌되고 난 후에 새로운 체제가 나타났다.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시대를 지금 겪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구조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그 이해를 바탕으로 사회를 조직하려는 우리의 호의가 퇴보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진실이 아닌 듯 여겨진다. 나는 오히려 그 이해와 호의가 매우 커졌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능력이 감소되었다거나 도덕감이 쇠퇴되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가 겪어나온 시대는 대륙, 국가, 계급 간에 세력의 균형이 흔들리던 시대로서, 이러한 갈등과 격변의 시대가 우리의 능력과 도덕감에 긴장을 주었고, 우리의 능력과 도덕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성취하는 것을 제한하고 좌절시켰던 것이다. 지나간 50년동안 서구세계가 진보하고 있다는 믿음에 대하여 강한 도전이 있어왔는데 나는 그 도전의 강도를 과소평가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역사의 진보가 끝장이 났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진보의 내용을 더 자세히 추궁한다면 나는 이와 같이 대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9세기 사상가들이 종종 주장하였던 바와 같이 역사에는 딱 잘라서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는 진보의 목표가 있다는 개념은 타당하지 않고 무익하다고 입증되었다. 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자동적이거나 필연적인 과정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잠재능력이 진보적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것이다. 진보란 추상적인 단어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구체적인 목표는 때때로 역사의 진행에서 나오는 것이지 역사 바깥에 있는 어떤 원천에서 유래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의 완전함이나 미래의 지상낙원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공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에서는 완전함이란 실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나 신비주의와 나는 같은 의견이다. 그래서 목표를 향한 무제한적 진보-또는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예상하는 한계를 초월하는 진보-의 가능성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진보의 목표란 우리가 그것에 갔을 때에만 정의가 될 수 있고 그 목표의 타당성은 그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 속에서만 검증될 수 있다. 나는 또한 이러한 진보의 개념이 없이 사회가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모든 문명사회는 아직 태어나지 알은 세대를 위하여 현세대에 희생을 강요한다. 미래의 보다 나은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이 희생을 정당화하는 것은 신성이란이름으로 희생을 정당화하는 종교와 대비되는 세속적인 방법이다. 뷰리의 말을 빌면 “후세에 패한 의무라는 원칙은 진보라는 이념의 직접적인 보증인 것이다. ” 이러한 의무는 아마도 정당화가 필요 없을 것이다. 만약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 넓혀지는 지평선
첫번째 강의 시작 부분에서 나는 20세기의 중반과 19세기의 마지막 몇 해를 구분하는 견해의 뚜렷한 차이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킨 바 있다. 나는 결론으로 이 대조를 상술할까 한다. 그리고 이 문맥에서 내가 “자유주의적” 그리고 “보수주의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그것이 영국정당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이해할 것이다. 진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액튼은 “점진주의”라는 대중적인 영국의 개념과 관련하여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혁명 또는 소위 자유주의”는 1887년에 쓰여진 편지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이었다. 10년뒤의 현대사 강의에서 그는 말했다. “현대적 진보의 방법은 혁명이었다.” 또 다른 강의에서 그는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일반적인이념의 도래”를 말했다. 이것은 그의 미발표 유고 중의 한 논문에서 설명된다. “휘그당은 타협으로 통치했다. 자유주의자는 이념으로 통치하기 시작한다. ” 액튼은 “이념에 의한 통치”가 자유주의를 의미하고 자유주의는 혁명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액튼의 일생동안 자유주의는 사회개혁의 원동력으로서 그 힘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오늘날 자유주의의 잔재는 사회의 도처에서 보수주의적인 요소가 됐었다. 오늘날 액튼에게로 되돌아가자고 설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역사가는 먼저, 액튼의 위치를 정립하고 둘째로, 그의 입장을 현대 사상가의 입장과 대조하고 셋째로, 그의 입장 중에 어떤 요소가 오늘날에도 유효한가를 연구한다. 액튼의 세대는 틀림없이 넘쳐나는 강한 자신감과 낙관주의 때문에 피해를 보았는데 그 자신감의 바탕이 되는 구조의 불안정한 성질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자신감은 오늘날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즉 변화를 역사의 진보적인 요소라고 인식한 것과 이성이 복잡한 변화를 이해하게 해주는 지침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제 1950년 내의 목소리를 들어 보자. 지난 강의에서 나는 루이스네이미어 경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이 도모되는 동안 “양당은 강령과 이념을 잊어버린다”고 하며 만족감을 표시하였고 이것이 “국가적 성숙”의 증상이라고 서술하였다. 나는 개인의 일생과 국가의 일생을 유사한 것으로 대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유추를 해나간다면 우리는 “성숙”의 단계를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오는가하고 묻고 싶어진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칭송을 받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비난을 받는 “강령과 이념”사이의 첨예한 대립이다. 이와 같이 이상주의적 이론보다 실제적인 행동을 찬양하는 것은 물론 보수주의의 등록상표이다. -네이미어의 생각으로는 보수주의는 죠지 4세 등극시의 18세기영국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곧 다가올 액튼의 혁명과 이념에 의한 통치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이 친숙한 표현인 완전한 경험주의라는 형태의 완전한 보수주의는 오늘날 매우 인기가 높다. 그것은 트레보-로퍼 교수의 맡 속에 가장 대중적인 형태로 발견되는데 “과격주의자들이 승리는 자기네 것이라고 외쳐댈 때 지각있는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우크스쇼트 교수는 이러한 인기있는 경험주의에 대하여 보다 복잡하게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정치적 관심사에 있어서 “밑도 끝도 없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데 그 바다에는 “출발점도 뚜렷한 종점도 얼고”또 그 바다에서는 유일한 목적이 “가라앉지 않고 평탄히 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정치적인 “유토피아니즘”이나 “메시아니즘”을 매도한 최근의 저작자들의 목록을 뒤져보지 않겠다. 유토피아니즘이나 메시아니즘은 사회의 미래에 대한 원대한 급진적 사상을 모욕하는 시사용어가 되었다 나는 미국의 최근 경향을 논의할 생각은 없는데 미국에서는 역사가나 정치 이론가들이 이 나라의 그들 동료보다 더욱 거리낌 없이 보수주의에 대한 충성심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나는 가장 유명하고 온건한 미국 보수주의 역사가 중의 한사람인 하버드 대학의 사뮤엘 모리슨 교수의 말만을 인용하겠다. 그는 1950년 12월에 미국 역사학회의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연설을 하였는데 그가 말했던 “제퍼슨-잭슨-F텱. 루즈벨트 라인”에 대한반작용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미국의 역사는 “건전한 보수주의적 견지에서 쓰여질 것”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영국에서 이 조심스러운 보수주의적 견해를 가장 명석하고 비타협적인 형태로 한번 더 표명한 사람은 포퍼 교수이다. 그는 네이미어의 “정강과 이념”을 부인하는 태도를 따르면서, “명확한 계획에 따라 ‘사회전체’를 개조할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정책을 공격했다. 그는 “단편적 사회대책”을 권하고 있는데 “단편적 대책”이라든가 “우물쭈물”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뚜렷이 움츠러드는 기색도 없었다. 정말로 어느 일면에 있어서 나는 포퍼 교수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는 여전히 이성의 독실한 신봉자였는데 과거나 현재의 비이성주의로 탈선하는 일 따위와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편적 사회대책에 대한 그의 처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제시한 이성의 역할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단편적 대책에 대한 그의 정의는 별로 자세하지는 않지만 “목적”에 대한 비판은 제외되어 있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사회대책의 합법적인 행동들-“입헌적인 개혁” 그리고”소득의 보다 큰 균등화”를 향한 경향-에 대하여 그가 조심스럽게 제시한 예로 미루어 볼 때 그 행동들이 기존사회라는 가정 하에서 이루어질 것을 의도한 것임이 분명하다. 포퍼 교수의 사태에 대한 계획에 의하면 이성의 역할이란 사실상 영국 공무원의 역할과 같다. 영국 공무원은 집권정부의 정책을 실시하고 나아가 그 정책을 더 잘 가동시키기 위한 실제적인 개선안을 제시하지만 그 정책의 근본적인 전제나 궁극적인 목적을 의문시할 수는 없다. 이것은 유익한 제도이다. 나도 또한 한때는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이성을 기존체제의 가정에다가 종속시키는 것은 결국에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액튼이 혁명-자유주의-이념에 의한 통치라는 등식을 제기했을 때 이성에 대하여 생각하였던 바는 아니다. 과학이든, 역사든, 또는 사회이든, 인간사에 있어서 진보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은, 사태가 되어 가는 방식에 단편적인 개선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이름으로 현재의 사태가 진행되는 방식과 그 방식의 토대가 되는 공인된 또는 숨겨진 가정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시하는 인간의 대담한 각오를 통해서만 진보란 가능한 것이다. 나는 영어권 세계의 역사가, 사회학자, 정치사상가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해낼 수 있는 용기를 회복하게 되는 때를 기대 한다.
그러나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영어권 세계의 지식인이나 정치사상가가 이성에 대하여 신념이 약해져 가는 것이 아니고, 세계를 영원한 움직임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폭넓은 지각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 보면 역설적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한 피상적인 이야기가 요즘처럼 흔하게 들려오는 시대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화가 더 이상 성취, 기회, 진보라고 생각되지 않으며 오히려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경제 전문가들이 처방할 수 있는 것은, 급진적이고 원대한 이념을 불신하고 혁명의 기미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 회피하고, 전진해야 된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전진하라는 경고 이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할 것이 없다. 지나간400년 동안의 어느 때보다도 더 빨리 그리고 더 급진적으로 세계가 그 모습을 바꾸고 있는 이 시점에 이러한 태도는 매우 우둔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맹목적인 무지는 세계의 움직임이 정지할 것이라는 우려보다는, 이 나라가-아마도 다른 영어권 국가들도-일반적인 전진에서 뒤처져서 무기력하게 체념하며 향수어린 침체 속으로 빠져들리라는 우려를 낳기에 충분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낙관주의자다. 루이스 네이미어 경이 나에게 강령과 이념을 회피하라고 경고하고, 오우크스쇼트 교수가 나에게 우리들은 특별한 목적지도 없으며 중요한 것은 아무도 배를 흔들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포퍼 교수가그 자은 T모렐 포드 자동차를 부분적으로 손보아서 그대로 몰고 다니고 싶어하고, 트레보-로퍼 교수가 외쳐대는 것처럼 급진주의자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그리고 모리슨 교수가 역사는 건강한 보수주의적 정신으로 쓰여져야 된다고 호소하였을 때, 나는 혼란스럽고 진통하는 세계를 바라다보며 한 유명한 과학자가 말한 잘 알려진 한마디로써 대답을 삼을까 한다. “그래도 역시 그것(세계)은 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