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Who watches the Watchmen?)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Who watches the Watchmen?) 이 말은 고대 로마의 시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 (Juvenal, 55 ~ 140)의 풍자시에 있는 구절로,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고민하는 자신에게 친구가 감시자를 붙여놓을 것을 권하지만, 감시자를 붙여 놓아도 결국 아내와 감시자가 계획적으로 바람을 필 것이라 소용이 없다는 자조적인 내용이다. 당시 부패를 저지르던 로마의 사회와 관리들을 풍자한 말로, 절대 권력에서 비롯될 수 있는 부작용을 경계한 것이다.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 (라: Decimus Iunius Iuvenalis,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웨날리스, 영: Juvenal, 55 ~ 140)는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반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시인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비롯해 수많은 황제들과 로마의 귀족들,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통렬하지만 유쾌한 풍자시로 유명하며 당시의 라틴 문학은 물론 후대의 풍자작가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베날리스의 생애에 대하여는 확실한 근거를 가진 사료가 별로 없다. 그에 관한 전기도 상당수는 유베날리스가 죽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단지 그의 풍자시에서 단편적으로 유베날리스의 삶을 유추할 수 있다.
유베날리스의 ‘풍자시집’은 모두 16편으로 알려져 있고 다섯 권의 책으로 나뉘어 있다. 제1권은 풍자시 1-5 편, 제2권은 풍자시 6편, 제3권은 풍자시 7-9편, 제4권은 풍자시 10-12편, 제5권은 풍자시 13-16편 (풍자시 16편은 미완성인채로 남아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 홍길복 목사의 라틴어 인문학 (50) 중에서 _ 10월 15일자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쿠이스 쿠스토디에트 이프소스 쿠스토데스)

quis, 원형 qui, 어느, 누가, 어떤
qustodiet, custodes, 원형은 custodio, 지키다, 감시하다, 감독하다, 경비하다, 경계하다, 수위, 경비, 감시자, 보초
ipsos, 원형은 ipse, 자신, 자체, 정확히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쿠이스 쿠스토디에트 이프소스 쿠스토데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감독자는 누가 감독할 것인가?’
우리가 사는 사회조직은 층층이 감시, 감독, 경비 체제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그 모든 조직 체계에서 가장 윗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가 감독하고 감시할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학생은 선생이 감독하고, 선생은 교장이 감독하고, 교장은 문교부가, 문교부는 감사원이 감독한다면, 감사원은 누가 감사한다는 말인가? 물론 오늘의 정부나 각종 사회 조직은 피차, 상호 견제하는 여러가지 장치들을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제도와 조직에는 헛점들이 있게 마련이고, 또 인간이란 교묘하게 이런 헛점들을 이용하여 피해가곤 합니다.
저희도 지난해 올림피아를 방문해 보았습니다만, 고대 올림픽 경기장에는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와 이들을 응원하는 관객들과 멀리 언덕 위에서 이들 선수들과 관객들을 동시에 내려다 보는 철학자들이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회학자들은, 사회가, 언론이, 타인들의 눈이 늘 ‘나’를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문학자들은 내 양심이, 나 자신이 ‘나’를 늘 들여다 본다고 말합니다.
종교인들은 하늘이, 하느님이, 신께서 늘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살피신다고 말합니다.
사회와 언론과 인간들이 하든, 내 양심과 내 인격이 하든, 아니면 하느님께서 하시던, 그도 아니면 이 셋이 합동작전으로 하던, 하여튼 인간과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엔 반드시 감시하고, 감독하고, 경계해야 할 그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성품을 지닌 존재이며, 그런 인간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은 단지 정치-경제 조직만이 아니라 양심과 영혼을 다루는 종교조직 까지도 약한 취약성을 지닌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서 제일 감시, 감독, 견제를 덜받고, 않받고 있는 곳이 각종 시민운동 단체들과 종교단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과연 어느 누가 감히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한다고 하는 그들을 감독한단 말인가? 정말 우리 사회는 인권과 정의, 평등과 선한 일을 외치는 조직이나 그런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누가 나서서 감독하고 견제할 것인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종교단체나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사찰이나 교회의 포교, 선교, 설법, 설교, 재정, 인사를 감시 감독하여 빗나가지 않토록 견제할 수 있을까요? 동시에 이런 조직들은 많은 경우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스스로, 자체적으로 감시, 감독한다고 합니다만, 사실 그런 행태에 공신력이 있을까요? 자기들 끼리 적당히 짜고, 봐주면서 넘어가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AI나 Google을 포함한 각종 인터넷과 컴퓨터가 사람이나 조직이나 규정 보다 훨씬 더 감시, 감독 기능이 우월하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이런 정보를 다루는 기기 자체를 최종적으로 다루는 것 자체 역시 사람이기에 믿을 수 없기는 매 마찬가지라고들 하십니다.
정말 ‘감시자는 누가 감시할 것인가?’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의사의 건강은 누가 돌봐주고, 설교자에게는 누가 설교해주고, 감사원장은 누가 감사하고, 대통령에게는 누가 참말을 해 줄 것인가?
다시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나를 감시하는 감시자는 누구인가? 나에겐 감시자, 감독자가 있기는 한가?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저 부터 다시 저를 들여다 보는 아침입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