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Persepolis)
페르세폴리스 (영: Persepolis, 프: Persépolis)는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이다. 현재 이란 시라즈에서 북동쪽으로 40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고고 유적지이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이 도시를 페르시아인들의 도시라는 뜻의 ‘파르사’로 불렸는데, 이를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어로 옮기면서 ‘페르세’ (Περσες, 페르시아인들)와 ‘폴리스’ (πόλις, 도시)로 불렀고 그 이름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 역사
현대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부터 건설되었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 관련 유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설 연대가 그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최초로 이 도시를 정한 것은 키루스 2세이지만 다리우스 1세부터 궁전과 테라스 등을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완성하였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끝날 때까지 부분적으로 공사가 끊이질 않았다.
기원전 333년경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침입했을 때 페르세폴리스는 최후를 맞았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세폴리스로 쳐들어가 몇 달간 보물을 모두 약탈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 것을 명령했고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은 잿더미로 변했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운 일에 대한 복수로 보인다.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셀레우코스 왕조 치하의 페르시아에서도 여전히 수도로 있었으나 점차 폐허로 변했다.
○ 유적

이란 남부의 파르스 (페르시스) 지방에 위치한 고대 도시 유적 ‘페르세폴리스’ (Persepolis)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수도로, 다리우스 1세 시대인 기원전 518년부터 조영되어 그 후 계속 궁전들이 들어서고 온갖 보물들이 쌓여 부귀영화를 자랑했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왕조를 무너뜨린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곳을 점령한 뒤 방화로 파괴하였다. 이후 파르스의 중심지는 다른 곳이 되었고 페르세폴리스는 복구되지 않고 그대로 폐허로 남아 현재에 이른다.
이 페르세폴리스의 5km 북부에 있는 고대 도시 이스타크르가 페르세폴리스의 폐허의 자재로 건설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스타크르의 지배자이자 이곳의 세습 영주였던 파르스 번왕이 파르티아를 전복시키고 세운 국가가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 사산조의 첫 수도이기도 하다. 이곳도 당연하게도 엄청난 유적이지만 발굴이 지지부진하다.

현대에도 이란 최고의 경작지로 손꼽힐 만큼 본래부터 토지가 비옥한 지역이다보니 이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대대로 거주하였고 16세기에도 아직 사람들이 거주하던 이스타크르 성곽에 반란군이 숨어들어간다던지 하는 일이 있었으며 20세기에는 마르프다쉬트라는 도시가 건설되어 현지 주민들이 모여 거주하고 있다. 지금도 파르스 주에서는 시라즈 다음가는 대도시다. 마르프다쉬트의 이름도 연대가 수천년씩 올라가기 때문에 학자들은 원래 이 지역의 이름이 마르프다쉬트인지 그냥 이스타크르나 페르세폴리스의 근교를 이르는 말이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페르세폴리스란 그리스어로 페르시아의 폴리스를 의미하며, 파르사란 곧 페르시아를 가리킨다. ‘타크트-에 잠시드’란 곧 ‘잠시드의 왕좌’라는 뜻인데, 이름이 붙은 사연이 참 기구하다. 페르세폴리스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파괴된 후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바람에 그 폐허가 원래 어떤 도시였는지 잊혀 버렸다. 그래서 후세의 이란 사람들은 이 폐허의 정체를 두고 고심했는데 결국 전설상의 왕 잠시드의 궁전일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잠시드의 왕좌’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새는 또 다시 ‘파르사’라고 부르기도 하는 듯하다. 어쨌든 고대 페르시아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1971년 이란 정부는 이란 (페르시아) 왕조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이곳에서 거행했고, 1979년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 만국의 문
페르세폴리스에 들어가기 위한 입구이다.
사람 머리를 지닌 날개 달린 거대한 황소 두 쌍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4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 아파다나

크세르크세스 1세대에 지어져 크세르크세스의 대궁전으로도 불린다.
제국의 샤한샤가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을 접견하던 알현실로 쓰였다.
아파다나를 오르는 계단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신들이 비단, 향료, 염소 등을 바치는 행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거대한 건물 뒤로 다리우스 궁전, 그 뒤로는 크세르크세스 궁전으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 아파다나 계단의 부조

아파다나 궁 북쪽에 위치한 계단은 그 규모가 무척 크다. 좌우 넓이가 60m 이고 그 폭이 약 25m 로 주궁으로 오르는 계단이 양쪽으로 나있다.
양쪽 중 동쪽 부분 계단의 벽면 부조는 그 훼손이 그리 심하지 않지만 맞은편은 그 훼손이 무척 심하다. 아랍 침공 시 얼굴상을 의도적으로 파괴해서 그렇다.
이 계단 부조들이 세상에 빛을 보기 1932 이전에는 잿더미와 흙에 그대로 파묻혀있었다. 백주 홀 궁과 이어지는 동쪽 계단을 타고 오르면 페르시안, 메데인들이 도열해 있는 장면이 나온다. 페르시아 병사는 긴 창과 타원형 방패를 들고 있고 메디안 병사들은 창고 단검을 들고 있다.
페르세폴리스 건축물에 새겨진 총 부조 수가 약 3,000여개가 되는 데 그 절반이 아파다나 궁 계단 혹은 기둥에 새겨져 있다. 이궁 건축을 직접 지휘한 다리우스 대왕의 집념이 어떠했는지를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석공들의 돌을 다루는 기술이 얼마나 섬세하고 찬란했는지를 알려주는 불후의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부조들은 건물 벽면에 계단에, 기둥에, 천장에 건축물 전체에 조각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왕들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부조들이 대부분이다. 이를 통하여 백성들이 왕이 곧 신과 통하는 전지전능한 분으로 믿고 있었다. 특히 왕을 미화하는 조각들을 대략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첫째가 왕이 악을 상징하는 신화적인 동물을 공격해 제압하는 부조이다. 이는 왕이 하늘의 신 아후라마즈다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아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백성들을 잘 보호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내용이다.
두 번째는 왕이 근엄하게 좌정을 하고 신하들로부터 깍듯한 보호를 받는 장면이다. 그리고 아키메네스 제국에 속한 속국 사신들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고 있는 장면들이 무척 많다. 이는 당시 제국의 위상이 이렇게 높고 아키메네스 왕은 곧 세계의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조각이다.
세 번째는 왕의 외모 치장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 왕이 입고 있는 옷은 정통 페르시아 스타일로 상의는 날개를 단 듯이 소매가 축 늘어져 있고 바지는 신발을 약간 덮을 듯이 통이 넓었다.
왕은 언제나 금빛 찬란한 왕관을 쓰고 허리에는 줄무늬 허리띠를 띠고 있었다. 그의 오른 손에는 늘 금홀 (금 지팡이)이 들려있었다. 이 금홀이 곧 법의 상징이었다. 금홀을 들고 왕이 외치면 사형에 처한 자를 살리고 왕의 명령을 거스리는 자를 그 자리에서 죽일 수 도 있었다. 왕이 가지는 특별한 권위를 말해주는 표현이다.
이외 부조들 가운데 아키메네스 제국의 군사들이 도열해 있는 장면이 많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군사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 눈에 제일 많이 띠는 부조가 황소와 사자가 싸우는 목우투쟁도 장면이다. 이 투쟁도를 해석 하는 데 상징성에 관해서는 학계 견해가 엇갈린다. 황소는 겨울을, 사자는 여름을 대표하는 동물로 그들의 투쟁은 계절의 이동을 표현한다는 설이 있다.
그밖에 사자가 황소의 뒷부분을 맹렬히 공격하는 것을 두고 페르시아 설 (New year)의 시작을 상징하는 견해도 있다. 한해 사자처럼 활기차게 악의 신을 제압하고 승리하자는 의미이기도 한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사자의 목 갈기를 태양 광선을 의미하며 점성술이 발달되었던 당시 3월 21일 경 춘분 쯤 해서 별자리 중 사자자리 (The Costellation of Leo)가 나타나면서 황소자리 (The Costellation of Taurus)가 사라지는데 이를 두고 사자는 곧 새해의 희망이라는 의미로 상징되었다.
또 하나 그럴듯한 해석은 사자는 왕을, 목우는 적을 상징하므로 사자가 목우를 덮치는 것은 왕의 절대적 통치를 시사한다는 일설도 있다.
기둥 혹은 주춧돌에 벽면에 많이 만나는 부조가가 연꽃무늬, 장미꽃 무늬, 삼나무 무늬이다. 이 조각은 다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연꽃무늬는 풍요를 상징하며 더 자세하게는 탄생, 청결, 부활, 일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12개 꽃잎 장미꽃 무늬는 불멸, 영생, 선행을 상징하며 1년 12개월을 의미하기도 한다, 페르세폴리스 건축의 목재 중에서 제일 많이 사용되었던 삼나무는 신록, 개화, 안녕을 의미한다. 또 기둥 위 많은 동물 두상 중 황소는 번영과 축복, 사자는 태양을 , 독수리는 자유를 사람은 지혜를 상징한다.

– 백주 궁전
백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궁전이다.
하지만 현재는 기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을 환영하여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그 뒤로는 크세르크세스의 하렘과 보물 창고가 이어진다.
– 다리우스 궁전 (타차라)

페르세폴리스 궁전 단지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궁이다.
궁을 건축하면서 석공들이 기둥과 벽면을 사람 얼굴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게 만들어 ‘거울 궁전’이라고도 한다.
다리우스 궁전(타차라)은 크세르크세스의 여름 궁전으로 하렘과 보물 창고가 이어진다.

– 보물 창고
전체 유적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알렉산드로 대왕이 이곳의 보물을 옮기느라 2만 마리의 노새와 5천 마리의 낙타를 동원하였다고 한다.
– 왕릉군

페르세폴리스에서 10km정도 거리에 있다.
다리우스 대제의 무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무덤 등이 있다.
○ ‘페르세폴리스’ 유네스코 등재

.국가 : 이란(Iran, Islamic Republic of)
.위치 : 파르스(Fars) 지방
.좌표 : N29 56 3.984, E52 53 25.008
.등재연도 : 1979년
페르세폴리스 (Persepolis)는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1세 (Darius I)가 아케메네스 왕조 (Achaemenid Empire)의 수도로 세운 도시이다. 거대한 반 (半) 인공, 반 천연 기단 위에 건설되었으며, ‘왕 중의 왕’이 이곳에 메소포타미아 양식의 영향을 받은 웅장한 왕궁 복합 단지를 창건하였다. 페르세폴리스 유적은 그 중요성과 가치로 인해 독특한 고고학적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 영문명 : Persepolis
– 등재기준
.기준 (ⅰ) : 이중 현관 계단, 조각한 장식 띠로 덮인 여러 층의 벽, 대규모의 입구, 날개 달린 거대한 소들, 대형 홀 유적이 있는 페르세폴리스의 기단은 장엄한 건축 조형물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건축가들은 탁 트인 공간에 지붕의 채광을 세심하게 조치하며, 놀랄 만큼 가는 기둥을 최소한으로 사용하였으며, 문과 창문을 가로지르는 가로대는 나무로 만들었다. 페르세폴리스는 전형적인 수도들 가운데 최고이다. 특히 유적 입구 천장 대들보가 교차하는 지점 바로 위에 있는 두 쌍의 황소 조각은 서로 등을 맞대고 무릎을 꿇은 채 하나는 동쪽을, 다른 하나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황소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날개를 달고 있다.
.기준 (ⅲ) : 웅장한 진입로, 기념비적 계단, 알현실, 접견실, 부속 건물들의 이 앙상블은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학적 유적으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고대 문명의 독특한 자질을 보여 주는 증거로 평가된다.
.기준 (ⅵ) : 페르세폴리스의 기단은 바로 그것을 건설한 다리우스 1세가 정상의 자리를 계속 누린 곳이다. 훗날 다리우스 1세와 다름없는 많은 왕들이 끊임없이 나타나 적을 정복하고 왕위를 지켜 나간 이곳에는, 조각되어 있는 무리처럼 전사, 호위병, 고관, 그리고 공물을 가져온 여러 국가들의 사신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 유산면적 : 13㏊
– 참고번호 : 114
페르세폴리스의 웅장한 유적지는 현재의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650㎞ 가량 떨어진 마르브다슈트 (Marv Dasht) 평야의 쿠이라마트 (Kuh-i-Rahmat, 자비의 산) 산기슭에 있다. 기원전 518년에 다리우스 1세가 건설한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수도였다. 기단의 남쪽 면에 새겨진 비문을 보면 다리우스 대제가 페르세폴리스의 창건자임을 알 수 있다.
‘왕 중의 왕’이 거대한 반 인공, 반 천연 기단 위에 메소포타미아 양식의 영향을 받은 웅장한 왕궁 복합 단지를 창건한 것이다. 불규칙하고 바위투성이인 산의 사면을 잘라내어 거대한 기단을 만들고, 잡석으로 갈라진 틈과 팬 곳을 메우는 작업이 주가 되었다. 건물을 세우기까지의 작업은 상당히 힘들고 방대했다. 이중 현관 계단, 조각한 장식 띠로 덮인 여러 층의 벽, 대규모의 입구, 날개 달린 거대한 소들, 대형 홀 유적이 있는 페르세폴리스의 기단은 장엄한 건축 조형물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건축가들은 탁 트인 공간에 지붕의 채광을 세심하게 조치하며, 놀랄 만큼 가는 기둥 (지름 1.6m, 높이 20m)을 최소한으로 사용했고, 문과 창문을 가로지르는 가로대는 나무로 만들었다.
페르세폴리스는 전형적인 수도들 가운데 최고이다. 특히 유적 입구 천장 대들보가 교차하는 지점 바로 위에 있는 두 쌍의 황소 조각은 서로 등을 맞대고 무릎을 꿇은 채 하나는 동쪽을, 다른 하나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황소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날개를 달고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상징으로 왕조 도시의 걸출한 예이다. 그 때문에 330년,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웠다. ‘플루타르크’ (Plutarch)에 따르면, 그들은 20,000마리의 노새와 5,000마리의 낙타에 페르세폴리스의 보물을 실어 갔다고 한다. 오늘날 도시를 이루는 유적은 산을 배경으로 한 반 인공, 반 천연의 거대한 석조 기단이며 크기는 가로 530m, 세로 330m이다.
다리우스 1세는 이 웅장한 복합 왕궁을 통치의 중심지로서만이 아니라 주로 아케메네스 왕가와 제국의 알현식과 연회를 위한 연회장, 연극 무대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생전에 자신의 계획 일부만을 실현하였다. 웅장한 진입로, 기념비적 계단, 공식 알현실 (Apadana), 접견실, 부속 건물들의 앙상블은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학적 유적으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고대 문명의 독특한 자질을 보여 주는 증거로 평가된다.
다음 수세기 동안 많은 사람이 페르세폴리스와 아케메네스 왕궁의 터를 방문하고 묘사했다. 시카고 대학교 동양학연구소의 후원으로, 에른스트 헤르츠펠트 (Ernst Herzfeld)의 감독 아래 1931년~1934년, 그리고 에리히 F. 슈미트 (Erich F. Schmidt)의 감독 아래 1934년~1939년에 페르세폴리스와 그 부근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유적의 터가 발견되었다.
기단에는 다리우스 1세 (기원전 522~486),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대왕 (Xerxes, 기원전 486~465), 그의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Artaxerxes, 기원전 465~424)가 장려한 왕궁 복합 단지를 세웠다. 대규모의 입구, 공식적인 홀, 개인의 방들이 안뜰을 통해 회랑으로 연결되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페르세폴리스는 주로 크세르크세스의 작품이다. 기단의 북쪽 부분은 주로 접견실, 알현실, 크세르크세스 대문으로 이루어지며 페르세폴리스 복합 단지의 공무용 공간으로서 제한된 일반인에게만 접근이 허락되었다. 다른 쪽에는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대왕 및 후궁들의 왕궁, 의사당 등이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처럼 주요 건물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이었다. 현관의 문설주와 상인방, 문틀, 들보의 불룩한 부분, 토대와 기둥머리 등의 주된 지탱 요소, 기념비적인 현관, 조각된 널찍한 바닥에 사용된 마름돌은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