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명사와 동사와의 관계
우리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과 정보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뇌를 해부하고, 우주의 알고리즘을 분석하며 끝없는 지식의 바벨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은 만물이 작동하는 전술과 알고리즘, 즉 ‘동사’를 설명할 뿐입니다. 우주와 생명이 왜 존재하는지, 그 궁극적인 전략과 메커니즘인 ‘명사 (원인)’를 결코 규명해 내지 못합니다.
인류의 불행은 바로 이 가장 단순한 진리를 복잡하게 꼬아버린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뱀이 속삭인 ‘거짓된 유익’에 속아 선악과를 베어 물었듯,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명사를 떠나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려 했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수많은 철학과 과학이라는 복잡한 동사들을 얽어매었지만, 결과는 깊은 영적 공허와 길 잃은 방황뿐이었습니다.
우리의 뇌는 고도의 정보 처리 기관이자 소프트웨어일 뿐입니다. 뇌라는 명사가 올바른 방향을 잡고, 신체라는 다른 기관들이 생명력 있는 동사 (실천)를 맺으려면 영혼을 지휘하는 궁극적인 주체가 필요합니다. 그 주체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 성령이라는 가장 완벽한 명사에 온전히 붙들릴 때, 우리는 세상의 복잡한 알고리즘과 거짓된 유익에 휘둘리지 않고 참된 유익을 향한 생명의 동사들을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낼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지성주의를 경계하며 오직 ‘대 성령 운동’을 외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1세기의 인류를 바른길로 인도할 유일한 해답은 인간이 만든 복잡한 꾀를 내려놓고 초대교회처럼 성령에 민감하게 깨어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주도권을 성령께 내어드릴 때, 우리의 뇌 (명사)와 행동 (동사)은 비로소 하나로 통하게 되며, 이 단순하고도 위대한 진리만이 이 시대를 온전히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생각 (뇌)이 복잡한 계산과 알고리즘을 만들어내려 할 때 잠시 호흡을 멈추고 선포해 보십시오. “성령님, 오늘 하루 내 영혼과 뇌를 다스리는 단 하나의 완벽한 명사가 되어 주시옵소서.” 성령의 지시를 따를 때,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실천 (동사)이 시작됨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에는 늘 애틋함이 배어 있습니다. 자녀가 육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라기를, 굳건한 믿음 안에서 올바르게 성장하기를, 형제들과 서로 화목하고, 그리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훌륭하게 지켜내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한결같은 소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할까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우리를 향한 주님의 깊은 마음을 바르게 읽고 그 뜻을 따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귀한 축복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삶의 모습은 크게 세 가지로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선택이 아닌 필수인 ‘서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34절을 통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성도에게 사랑이란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 과목이 아니라, 반드시 이수해야 할 필수 과목과 같습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점입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권면한 것처럼, 사랑은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세심하게 살피고 채워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시며 우리의 가장 큰 필요를 채워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형제와 자매의 필요를 채우며 진실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을 담는 첫걸음입니다.
둘째는 낮아짐을 통해 이루는 ‘아름다운 연합’입니다.
부모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녀들이 서로 다투고 싸우는 모습일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들이 우애 깊게 지낼 때 부모는 가장 큰 기쁨을 느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서로 다투지 않고 하나가 되어 연합하는 모습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22절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저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며 연합을 간절히 구하셨습니다. 또한 시편 133편 1절에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가 하나 되어 함께하는 모습은 참으로 선하고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합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함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개울물이 되고, 강물이 되어 마침내 넓은 바다를 이루는 이치와 같습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마귀의 속성을 이겨내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연합할 때, 주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며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셋째는 땅끝까지 이르는 ‘복음 전파의 사명’입니다.
누가복음 4장 43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지상 대명령 역시 주님의 가장 간절한 소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복음 전파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만난 예수를 그저 이웃들에게 증거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마음을 가장 시원케 해드리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사시면서 친히 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성육신 (Incarnation)을 통해 스스로 가장 낮아지심으로 우리와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셨으며, 생을 다해 끊임없이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주님의 본을 따라 진실하게 행동으로 서로 사랑하고, 겸손히 연합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아갈 때 예수님의 마음은 비로소 가장 큰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 세 가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하나님의 형상, 인간의 탁월성에 대하여
오늘도 나는 아침 공기를 가르며 10km를 파라미타 강변을 묵묵히 달렸다. 폐부를 채우는 깊은 호흡 속에서 창조주가 빚어내신 인간 신체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야생의 맹수들을 보며 그들의 폭발적인 스피드와 민첩성에 감탄하곤 한다. 치타는 시속 100km로 바람을 가르고, 사자는 엄청난 근력으로 초원을 지배한다. 하지만 창조주께서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부여하신 신체적 탁월성은 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위대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내는 능력’이다. 지난 런던 마라톤에서도 샤워라는 케냐 선수가 결국 1시간 59분 30분초로 2시간내로 진입하면서 세계신기록을 깼다.
야생 동물들의 달리기가 순간적인 사냥이나 도주를 위한 찰나의 ‘단기 전술’이라면, 인간의 달리기는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장기 전략’에 가깝다. 가장 빠르다는 치타조차 1~2분만 전력 질주하면 체온이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급상승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반면 인간은 어떤가? 직립 보행이라는 해부학적 기적을 통해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했고, 온몸의 땀샘으로 열을 식히며 체온을 조절하는 유일무이한 쿨링 시스템을 갖추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바람을 맞으며 스스로를 냉각시킬 수 있는 이 정교한 메커니즘 덕분에, 인간은 수십 수백 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거리 러너로 창조되었다. 실제로 훈련된 인간이 보여주는 지구력의 한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스의 울트라 마라토너 야니스 쿠로스 (Yiannis Kouros)는 24시간 동안 단 한숨도 자지 않고 무려 303.5km를 쉬지 않고 달리는 경이로운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것은 1km당 5분 정도로 뛴 기록이다. 정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어떤 맹수도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이 압도적인 지구력은 단순한 생물학적 우위를 넘어, 영적 존재로서의 비밀을 깊이 품고 있다. 맹수의 달리기는 생존 본능이라는 뇌의 즉각적인 알고리즘에 의해 철저히 지배받는다. 그러나 인간의 장거리 달리기는 끊임없이 타협을 시도하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깨어있는 영혼의 의지에 의해 주도된다. 달리는 도중 뇌가 “이제 그만 뛰고 쉬자”라며 유혹할 때, 이를 다스리고 육체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지휘하는 궁극적인 명사인 ‘성령’과 깨어있는 ‘의지’의 통제력이다.
육체라는 정교한 하드웨어가 생명력 있는 동사 (실천)로 온전히 발현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올바른 방향을 지시하는 주체가 필요하다. 멈추지 않고 대지를 밟아온 수만 킬로미터의 궤적은 결코 육체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스트레스를 털어내고, 창조주와 깊이 교제하며 내면의 질서를 회복해 가는 고도의 영적 알아차림 (Awareness)이자, 참된 유익을 향한 숭고한 실천적 행위이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이와 완벽하게 닿아 있다. 우리의 믿음은 화려하지만 금세 멈추고 마는 단거리 스프린트가 아니라, 호흡을 조절하며 묵묵히 영원한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마라톤이다. 땀방울이 맺히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한계의 순간에도, 우리는 멈추지 않고 생명의 동사를 계속해서 써 내려갈 수 있다. 우리 안에서 영혼과 뇌를 다스리시는 완벽한 명사, 성령께서 우리의 발걸음과 함께 호흡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다시 주일을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이 계속 되길 소망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7)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I have kept the faith.
소금의 영향력
나이가 들수록 건강을 지키는 지혜는 복잡하고 값비싼 약품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소박한 곳에서 발견되곤 한다. 매일 아침 길을 나서며 만나는 바람, 매일 식탁 위에서 마주하는 소금이 바로 그러하다. 흔히 소금은 고혈압의 주범이라거나 현대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백색 공포’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소금은 그 어떤 영양제보다 강력한 ‘천연 처방전’이 된다.
특히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고 목을 많이 사용하는 이들에게 소금의 영향력은 실로 위대하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고 나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입으로 숨을 쉬게 마련이다. 이때 차가운 공기와 먼지가 인두와 후두 점막을 사정없이 긁고 지나가며 성대를 붓게 만든다. 여기에 긴 시간 대중 앞에서 강의를 하거나 강단에서 설교를 쏟아내고 나면 목소리가 잠기고 가라앉는 현상을 피하기 어렵다.
많은 이들이 이럴 때 프로폴리스 같은 고가의 건강보조식품을 찾지만, 체액과 유사한 농도의 따뜻한 소금물로 가글을 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과학적으로 소금물은 부어오른 점막의 수분을 삼투압 현상으로 부드럽게 빼내어 부기를 가라 앉힌다. 말을 하기 전에는 성대에 촉촉한 윤활유 막을 형성해 주고, 말을 끝낸 후에는 마찰로 생긴 미세한 상처를 천연 소독해 준다. 세포 고유의 치유 능력을 자극하는 소금의 물리적 영향력인 셈이다.
이러한 소금의 힘은 비단 목뿐만 아니라 구강 건강 전체를 관통한다. 오랜 세월 소금물로 치아와 잇몸을 관리해 온 이들의 입안을 들여다보면 그 효과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입안의 유해균은 산성 환경을 좋아하는데, 소금은 구강 내를 알칼리성으로 바꾸어 세균이 번식할 수 없는 청정 지대로 만든다. 잇몸의 붓기를 빼주고 피를 멈추게 하는 데 소금만 한 염증 치료제가 없다.
어느 날 현직 치과의사인 아들의 병원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진료실 의자에 앉아 검진을 마친 아들이 나의 탄탄한 치아와 잇몸 상태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버지, 치아 관리를 어떻게 하셨기에 이렇게 깨끗하고 건강하세요?” 내가 빙그레 웃으며 평소 소금물로 이빨을 닦고 관리한다고 하니, 아들은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참 잘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이 좋은 방법을 주변 친구분들께도 제발 널리 알려주세요.” 아들의 극찬에 내가 짓궂게 농담을 던졌다. “야, 그러면 너희 치과에 환자들이 줄어들 텐데 그래도 괜찮겠냐?” 그러자 아들은 환한 웃음과 함께, 환자가 줄어도 좋으니 모두가 건강해지면 좋겠다는 아들의 정직하고 넉넉한 진심 속에서, 소금이 가진 확실한 예방 의학적 가치를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소금의 영향력을 올바르게 누리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굵은 소금 알갱이로 치아를 직접 문지르는 과격함은 오히려 약해진 치아 표면을 마모시키고 잇몸에 상처를 낼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따뜻한 물에 소금을 충분히 녹여 ‘짭짤한 눈물 농도 (약 0.9%)’의 소금물을 만든 뒤, 이를 칫솔에 묻혀 닦거나 양치 후 입안을 머금고 가글하는 것이다.
소금은 스스로를 녹여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소금은 성대를 부드럽게 깨우고, 잇몸을 단단하게 지켜내며 소리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거창한 건강 비법을 찾아 멀리 헤맬 필요는 없다. 달리기 후 건조해진 목을 달래고, 치아를 탄탄하게 유지해 주는 소금물 한 잔의 지혜야말로 자연이 인간에게 선물한 가장 정직하고 위대한 치유의 힘이다.
오늘도 모두 모두 주 안에서 행복한 하루 되세요!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직전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