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예수 중독자
인간은 본성적으로 무언가에 사로잡히려는 중독 경향을 가집니다. 본능적인 쾌락, 일시적인 만족감, 혹은 세상적인 성공과 명예에 쉽게 중독되어 자신을 소모시키곤 합니다. 우리는 흔히 ‘중독’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며, 세상의 쾌락이나 물질에 사로잡혀 자신을 망가뜨리는 상태를 가리키지요. 그러나 이 중독 경향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가장 안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는 대상, 즉 예수 그리스도께 중독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식과 논리를 초월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한 지독한 갈망과 사랑이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예수 중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수 중독’의 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두 인물이 있습니다. 한 분은 신약 시대를 뒤흔든 사도 바울이며, 다른 한 분은 근현대사의 산증인인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예수 중독의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강력한 증인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한때 교회를 핍박하던 율법의 엘리트였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완전히 뒤바뀐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세상이 부러워할 모든 배경과 특권을 가리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립보서 3:7-8) 바울에게 세상의 모든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가치’ 앞에서는 쓰레기 (배설물)와 같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굶주리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고 선언했습니다. 그의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중독되어 있었으며, 이 중독 때문에 그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바울의 ‘예수 중독’ 정신은 근현대사 속에서 손양원 목사님의 삶을 통해 그 절정을 드러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장녀 손동희 권사님은 아버지를 회고하며 “아버지는 차라리 예수 중독자라는 표현이 맞습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1948년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잃었을 때, 손 목사님은 비극 앞에서 절규하는 대신 아들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는 초월적인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 ‘사랑의 원자탄’ 신앙이야말로 인간의 논리와 감정을 넘어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무엇도 계산할 수 없었던 지독한 사랑, 즉 ‘예수 중독자’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중독되어 있습니까? 성공, 돈, 명예, 혹은 일시적인 만족감입니까? 사도 바울과 손양원 목사님의 증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세상의 논리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예수 중독’을 경험하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타협하며, 세상을 등지기보다는 세상과 적당히 섞이려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십자가의 무게 앞에서 머뭇거리고, 작은 손해에도 쉽게 원망하며 그 중독적인 사랑의 고백을 멈춥니다. 그러나 이 두 ‘예수 중독자’의 삶은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를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소망에 집중할 때, 우리 역시 모든 고난을 감사로 바꾸어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을 얻게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 만남을 두고 많은 이들이 신비롭고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지만, 성경은 만남의 길을 두 가지 확실한 경로로 제시하며 우리를 초청합니다. 이 두 길은 인간의 갈망과 하나님의 주권적 약속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오늘 주의날에 예배드리는 모든 자들에게 주님의 만나는 축복이 있으시길 소망합니다.
1. 간절히 찾는 자에게 주신 ‘탐구의 약속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다.” (잠언 8:17)
만남의 첫 번째 길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간절한 탐구’입니다. 이것은 우연이나 막연한 소망이 아닌,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하는 영혼에게 반드시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희생을 동반한 간절함: 동방 박사들은 별이라는 희미한 단서 하나만으로 모든 안락함을 버리고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120 문도들은 약속을 붙잡고 ‘오직 기도에 전혀 힘쓰는’ 간절한 순종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가장 소중한 제물로 드린 사람들입니다. 만남은 그들의 열심과 희생에 대한 주님의 은혜로운 응답이었습니다.
2. 순종하는 자에게 보장된 ‘임재의 확증’
두 번째 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찾아오심입니다. 사울 (바울) 처럼 우리가 대적할 때도 찾아오시는 은혜가 있지만, 특별히 주님은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임재를 확실하게 보장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20)
예수님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 명령을 주신 직후, 이 확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그 순종의 현장은 단순히 사역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곳은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는 가장 확실한 임재의 자리입니다.
주목할 점은 주님께서 이 약속을 ‘조건’이 아니라 ‘명령에 대한 결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명에 순종하여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매이셔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감동시키는 순종의 발걸음을 옮길 때, 만남은 희망이 아니라 필연적인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QT (Quiet Time) / 결단의 질문
1. 당신은 지금 ‘간절히 찾는 자’의 위치에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매일 드리고 있는 경건의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점검해보고, 주님을 향한 당신의 갈망은 진실로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수준입니까?
2.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마태복음 28:20의 순종의 현장 (선교, 전도, 복음 전파)에서 당신은 지금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일상 (직장, 가정, 학교)이 주님의 임재가 보장된 ‘지상 명령의 현장’이 되도록 오늘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순종의 첫걸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열매
복음 (Gospel)은 단순히 기쁜 소식 이상의 것입니다. 예수를 민남 사람들은 복음의 열매를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른 땅에 솟아나는 생명수와 같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실제적인 변화와 풍요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이 복음은 우리의 영혼에 세 가지 핵심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데, 그것은 곧 생명 (生命), 자유 (自由), 사랑 (愛)입니다. 이 세 가지 열매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말해 주는 나침판과 같습니다.
1. 생명입니다
복음의 첫 번째 열매는 ‘생명’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영적인 죽음 상태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죽음의 상태를 깨고 영원한 생명을 선사합니다. 이는 우리가 노력하거나 자격이 있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생명의 근원을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삯인 사망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충만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이 생명은 단지 죽음 이후의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새로운 차원의 삶, 즉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2. 자유입니다
두 번째 열매는 ‘자유’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유는 종종 방종이나 구속으로부터의 일시적인 탈출을 의미하지만, 복음이 주는 자유는 근본적이고 영원한 해방입니다. 우리는 죄와 율법의 정죄, 그리고 죽음의 공포라는 세 가지 굴레 아래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모든 족쇄를 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복음의 본질적인 자유를 굳게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복음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며, 행위로 의롭게 되려던 율법의 무거운 짐에서도 해방되었습니다. 이 진정한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며, 우리의 삶을 억압하던 모든 근심과 염려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자유는 곧 봉사의 삶, 즉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3. 사랑입니다
복음의 가장 두드러진 세 번째 열매는 ‘사랑’입니다.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나아갈 수 없는 상태, 즉 죄인 되었을 때 가장 큰 희생과 헌신을 보이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우리의 공로를 전제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Agape)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사랑의 확증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이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존재가 됩니다. 복음을 통해 받은 사랑은 이웃과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생명과 자유는 복음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의 내용이라면, 사랑은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 세상 속에서 맺어야 할 가장 아름답고 필수적인 열매인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영원한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현재 나의 일상적인 가치관과 삶의 우선순위가 복음을 알기 전과 비교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점검해 봅시다.
2.그리스도께서 주신 참된 자유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스스로 짊어지려고 하거나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종의 멍에’ (타인의 시선, 죄책감, 율법적인 부담감)는 무엇이며, 이 자유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 오늘 내가 취할 행동은 무엇입니까?
3.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확증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비추어 볼 때, 오늘 내가 용서하거나 사랑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누구이며, 그에게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할 나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하루를 살아도 멋지게
사람들은 하루살이를 이야기할 때, 그 짧은 생애를 안타까움으로 말하곤 한다. “하루밖에 못 사는 인생이라니.” 그러나 하루살이의 삶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 하루가 얼마나 치열하고도 충만한지 알게 된다.
하루살이는 물속에서 애벌레로 1년, 길게는 2년을 산다. 그 시간 동안 먹고 자라며, 단 한 번의 비상을 준비한다. 그리고 마침내 성충이 되어 물 위로 떠오르는 순간, 하루살이의 삶은 절정에 이른다. 먹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오직 짝을 찾고 알을 낳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 짧은 하루는 결코 허무하지 않다. 오히려 그 하루를 위해 준비한 긴 세월이 있었기에, 하루살이의 삶은 완성된다. 준비의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의 목적을 향한 집중이었고, 생명을 잇기 위한 헌신이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때로는 긴 기다림과 보이지 않는 수고 속에서 우리는 지치고 흔들린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말한다. “준비의 세월은 헛되지 않다. 그 시간은 너를 날게 할 것이다.”
성공의 순간은 찰나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찰나를 가능케 한 것은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다. 뿌리 내리는 시간, 성장하는 시간,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 시간. 그 모든 준비의 세월이 있었기에 우리는 비로소 날 수 있다.
하루살이처럼, 우리도 언젠가 날개를 펴야 할 때가 온다. 그날이 오기까지, 준비의 세월을 귀히 여기자.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느리게 가는 것 같아도, 그 시간은 우리를 빚고 있다.오늘도 주안에서 멋지게 살아가 보자. 후회없는 삶으로.
그리고 그날,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아, 이 모든 기다림은 날기 위한 것이었구나.”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11:7)
파수군의 책임과 순종 (에스겔 3:17-19)
- 본문 말씀: 에스겔 3:17-19
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요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 오늘의 묵상: 파수꾼의 길
1. 항상 깨어 있으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책임)
파수꾼의 첫 번째 의무는 ‘항상 깨어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주어진 사명 역시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라는 전제에서 시작됩니다(17절). 파수꾼이 아무리 성실하게 성벽을 지킨다 하더라도, 정작 그가 들어야 할 주인(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그의 경고는 무의미해집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적인 파수꾼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 세속의 소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민감한 영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과 기도생활에 게을러진다면, 우리는 파수꾼으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인 ‘경고를 듣는 것’에 실패하게 됩니다.
2. 반드시 전하라
파수꾼의 두 번째 의무는 ‘전해야 할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악인에게 “너는 정녕 죽으리라”는 분명하고 준엄한 메시지를 전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메시지는 파수꾼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이웃과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복음은 단순히 좋은 소식이 아니라, 죄로 인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탈출구에 대한 경고와 구원의 약속이 동시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파수꾼이 경고를 전하는 일에 침묵하거나 주저한다면, 그 메시지를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악인에게서 빼앗는 것과 같습니다.
3. 책임의 경계
이 말씀의 핵심은 파수꾼의 책임이 어디까지인가를 명확히 한다는 점입니다.
파수꾼이 전했으나 악인이 듣지 않았을 경우 (19절): 악인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죽지만, 파수꾼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합니다.
파수꾼이 전하지 않아 악인이 듣지 못했을 경우 (18절): 악인은 죄악 중에서 죽고, 하나님은 파수꾼에게서 그 악인의 피 값을 찾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과 듣는 자의 몫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오직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두려움 없이 충실하게 전달했는가에 있습니다. 때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편하거나 용기가 필요하지만, 우리의 순종이 우리의 영적 생명을 지키는 길입니다.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