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의 2026년 고난주간•부활절 기도문

2026년 3월 29일 (종려주일)
주님,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환호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주님, 저희의 신앙도 순간의 감정과 분위기에만 머무르지 않게 하옵소서. 입술로만 “호산나”를 외치는 신앙이 아니라, 삶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영광만 원하고 고난은 피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시고, 주님의 뜻이라면 순종으로 걷게 하옵소서.
겸손의 왕으로 오신 주님, 저희의 교만을 꺾어 주시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 저희 안의 다툼과 분열을 잠잠하게 하옵소서. 이번 고난주간의 시작에서 저희 마음이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8-9)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무리는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하였습니다(마 21:8-9). 겉으로 보기에는 영광과 환호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환영 속에서도 이미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무리들은 정치적 해방을 기대하였고, 눈에 보이는 승리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세상의 왕좌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그분이 칼과 힘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 줍니다(슥 9:9, 요 12:15).
종려주일은 인간의 기대와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날입니다. 사람의 환호는 쉽게 변하지만, 주님의 사명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영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그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2026년 3월 30일 (월요일 – 고난주간 둘째 날)
주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주님을 묵상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의 집이 장사의 집이 된 것을 보시고 거룩한 분노로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저희의 마음도 돌아보게 하옵소서. 저희의 심령이 참으로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인지, 아니면 염려와 욕심과 계산으로 가득 찬 자리가 되었는지 정직하게 보게 하옵소서. 겉으로는 믿음이 있는 것 같으나 속에는 기도와 순종이 메마른 부분이 있다면 주님의 손으로 깨끗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저희 안에 버려야 할 생각은 버리게 하시고, 무너뜨려야 할 우상은 무너뜨리게 하시며, 회복해야 할 기도의 자리는 다시 세우게 하옵소서. 고난주간을 지나며 저희의 마음이 더 거룩해지고, 예배가 더 진실해지며, 삶이 더 정결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2-13)
월요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장소라기보다, 이미 거래와 이익이 뒤섞인 시장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1:12-13).
이 사건은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온유하기만 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무너질 때 거룩한 열심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또한 이 날은 단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 역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사건 앞에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 마음은 정말 기도의 집인지, 아니면 여러 욕심과 계산이 들어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같은 날과 연결하여 묵상하는 무화과나무 사건도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막 11:12-14, 20-21).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는 나무처럼, 겉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믿음의 열매가 없는 삶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월요일은 우리 안에 있는 거짓된 신앙과 형식적인 경건을 깨뜨리고, 진실한 예배와 거룩함을 회복하도록 부르시는 날입니다.
2026년 3월 31일 (화요일-고난주간 셋째 날)
주님,
고난을 앞두고 계시면서도 끝까지 말씀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의 질문과 반대와 시험 앞에서도 주님은 흔들리지 않으시고 진리의 말씀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주님, 저희도 세상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상황에 따라 진리를 바꾸지 않게 하시고, 사람을 두려워하여 침묵하지 않게 하시며, 사랑 안에서 담대하게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저희 신앙의 중심이 되게 하옵소서.
지식만 있고 사랑이 없는 신앙이 되지 않게 하시고, 말씀은 알지만 순종하지 않는 신앙되지 않게 하옵소서. 저희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서게 하시고, 듣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살아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화요일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계속해서 가르치시며 진리를 선포하신 날로 기억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여러 질문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았고, 세금 문제를 놓고 함정을 파려 하였으며, 부활에 관한 논쟁으로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고자 하였습니다(마 21:23-27, 22장).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질문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지혜와 권위로 대답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시고, 이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37-39). 이 말씀은 율법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엄중히 책망하셨고(마 23장), 종말과 깨어 있음에 대하여도 가르치셨습니다(마 24-25장).
2026년 4월 1일 (수요일-고난주간 넷째 날)
주님,
배신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수요일에 저희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하옵소서. 가룟 유다는 주님 곁에 오래 있었지만 결국 은 삼십에 주님을 팔았습니다.
주님, 저희 안에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는지, 순종보다 더 붙드는 욕심이 없는지, 믿음보다 앞서는 계산이 없는지 살피게 하옵소서. 겉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것 같으나 마음으로는 멀어져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 시간 회개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이용하려는 마음, 주님보다 세상을 더 의지하는 마음, 주님께 향유를 드리기보다 값을 따지는 마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 배신하지 않는 믿음을 주시고,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며,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경건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저희가 주님 앞에 진실한 자로 서게 하시고, 오직 사랑과 충성으로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마 26:14-16)
수요일은 전통적으로 침묵의 날, 혹은 배신이 준비되는 날로 묵상됩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았고, 결국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기로 하였습니다(마 26:14-16). 함께 먹고 마시며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가 돈 때문에 예수님을 넘긴다는 사실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고 차가운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베다니의 한 여인은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께 부으며 사랑과 헌신을 표현하였습니다(마 26:6-13, 막 14:3-9, 요 12:1-8). 한 사람은 주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렸고,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을 값으로 계산하였습니다. 같은 예수님 앞에서도 이렇게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다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을 깊이 돌아보게 만듭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으로 따르는 사람인지, 아니면 여전히 손익을 계산하며 주님을 대하는 사람인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수요일은 겉으로는 조용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무거운 날입니다. 배신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어둠은 점점 예수님을 둘러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 길 끝에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돌아서지 않으셨습니다. 이날은 인간의 배신보다 더 크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게 하는 날입니다.
2026년 4월 2일 (목요일-고난주간 다섯째 날)
주님,
성목요일에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몸소 사랑과 섬김을 보여 주신 주님을 묵상합니다. 가장 높으신 주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신 그 겸손 앞에 저희의 마음을 숙이게 하옵소서.
주님, 저희도 사랑을 말로만 하지 않게 하시고 섬김으로 드러내게 하옵소서. 대접받기보다 섬기게 하시고, 높아지기보다 낮아지게 하시며, 내 권리보다 다른 이의 아픔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겟세마네에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주님, 저희도 인생의 겟세마네에서 원망보다 기도를 택하게 하시고, 두려움 가운데서도 순종을 배우게 하옵소서.오늘 밤 저희의 심령이 깨어 있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과 눈물과 순종을 깊이 배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14-15)
성목요일은 고난주간 가운데서도 특별히 깊은 의미를 지닌 날입니다. 이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유월절 식사 가운데 예수님은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하셨고, 잔을 주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19-20, 고전 11:23-26).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연한 비극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기 위한 새 언약의 희생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요 13:1-15).
당시 발을 씻기는 일은 가장 낮은 종이 맡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친히 그 자리에 내려가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사랑을 가르치지 않으시고, 몸으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3:15). 성목요일은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사실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 줍니다.
그날 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는(마 26:39) 예수님의 고통과 순종을 함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무게를 아셨고, 그 고통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아셨습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붙드셨습니다. 성목요일은 사랑과 섬김, 그리고 눈물 가운데 드려진 순종의 밤입니다.
김환기 사관의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2026년 4월 3일 (금요일-고난주간 여섯째 날)
십자가의 주님,
성금요일에 갈보리 언덕을 바라봅니다. 주님께서 찔리심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주님께서 상하심은 우리의 죄악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저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주님께서 대신 지셨고, 저희가 져야 할 무게를 주님께서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주님, 십자가 앞에서 다른 사람의 죄보다 먼저 나의 죄를 보게 하옵소서. 교만과 미움과 완고함과 숨겨 둔 상처와 욕심까지도 주님의 보혈 앞에 내려놓게 하옵소서. 주님의 못 자국 앞에서 회개하게 하시고, 주님의 흘리신 피 앞에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주님, 그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붙들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를 자랑하게 하시며, 십자가의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죽으심으로 저희가 살았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오늘도 그 은혜 안에 머물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성금요일은 고난주간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붙잡히신 후 대제사장들과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셨고, 빌라도 앞에 서셨으며,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받으셨습니다(마 26:57-27:26, 막 14:53-15:15, 눅 22:54-23:25, 요 18:12-19:16). 그 과정 속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고, 군중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인간의 죄와 연약함, 비겁함과 잔인함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날이 바로 성금요일입니다.
그러나 이 날은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깊이 나타난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이사야는 이미 오래전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사 53:5). 예수님의 고난은 그분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기도하셨고, 마지막에는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패배의 탄식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다는 승리의 선언입니다. 죄의 값이 치러졌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으며,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성금요일은 가장 어두운 날이지만, 동시에 가장 밝은 은혜의 날입니다. 주님의 피 흘림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었고,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화목과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2026년 4월 4일 (토요일-고난주간 마지막 날)
침묵 가운데도 일하시는 주님,
고요한 토요일의 무덤 앞에 섭니다. 돌문은 닫혔고, 제자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했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저희 삶에도 토요일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아무 응답이 없는 것 같고, 눈앞의 현실은 어둡고, 소망이 묻혀 버린 듯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보이지 않아도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응답이 더딘 것 같아도 믿음을 놓지 않게 하시며,
무덤의 돌문보다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기다림 속에서 더 깊은 믿음을 배우게 하시고, 침묵 속에서 더 깊은 소망을 품게 하옵소서. 부활의 새 아침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오늘도 조용히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마 27:59-60)
토요일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머무신 날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몸을 장사하였고, 무덤의 문은 큰 돌로 막혔습니다(마 27:57-61, 요 19:38-42).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갈까 두려워 무덤을 봉인하고 경비병까지 세웠습니다(마 27:62-66).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 숨어 있었고, 소망은 무덤 속에 묻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의 날에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끝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침묵은 부활의 아침을 준비하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기 직전의 깊은 정적이었습니다. 고요한 토요일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신앙을 가르쳐 줍니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무덤의 돌문이 닫혀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닫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토요일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아무 응답이 없는 것 같은 때가 있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요한 토요일은 말해 줍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때로는 더 깊은 준비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토요일의 침묵 속에서도 부활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2026년 4월 5일 (부활절)
부활의 주님,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이 생명을 가두지 못하였으며, 무덤이 주님을 붙들어 둘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으니, 이 부활의 아침에 우리도 살아 있는 소망을 품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고난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눈물 뒤에 기쁨이 있고, 절망 뒤에 소망이 있으며, 죽음 같은 자리에서도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때로 우리는 현실의 무게 앞에서 낙심하고,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며, 상실과 아픔 속에서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무덤 앞에 머물지 않고 생명의 주님을 따라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절은 단순히 하나의 절기나 기념일이 아니라,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무덤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이로써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구원자이심을 온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은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뀐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절은 믿는 사람들에게 산 소망을 주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한 분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도 장차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첫 열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부활절을 맞이할 때 단지 과거의 한 사건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삶 속에서도 부활의 능력과 소망을 붙들게 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