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요15:1-5)
나무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관상수, 유실수, 조경수 등등. 포도나무는 유실수에 속한다. 포도나무를 심는 이유는 열매를 따기 위한 것이다. 만약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본문은 예수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했다. 포도는 가지에 달려 있지만 그 모든 에너지는 나무에서 나온다.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말씀하셨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6)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참 제자가 되지만, 그렇게 못하면 하나님께는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까지도 조롱과 핍박을 받게 된다. 예수는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인데 어떡하면 많은 포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어떡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성공은 3가지가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목적의 성공
바른 목적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보다 목적을 정하는 일에 성공해야 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또 그 결과도 얻었지만 실패한 삶이 있다. 잘못된 목적을 위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를 한다. 정말 열심히 밤을 새우며 금식을 한다. 그 때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기도 제목이 하나님 마음이 합당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잘못된 것을 구한다면 우리의 금식도 우리의 열심도 모두 헛것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과정의 성공
탈무드에 보면 ‘성경을 읽기 위하여 촛불을 훔치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수단을 정당화 시킬 수는 없다. 당장은 조금 어렵고 힘들더라도 정도를 걸어야 한다. 편법으로 한두번은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그 성공이 그의 앞길의 장애가 될 것이다. 토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책이 있다. 주인공은 고린 대금업자를 죽이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고 생각을 하여 그녀를 죽였지만, 그 때부터 그는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결국은 그가 무시하고 비천하게 여겼던 창녀인 소냐를 통하여 회개하고 자수하게 된다.
셋째 결과의 성공
올바른 목적을 세우고,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열매가 없다면, 그 역시 어리석은 것일 것이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지는 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된다. 신앙의 열매는 세상 어떤 방법이나 수단이 아닌 믿음으로 맺어 진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공이란 세상 기준으로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계시록의 서머나 교회는 핍박과 궁핍 속에 있었으나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세상이 아닌, 예수이다. 우리는 이땅에 살고 있지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킬링필드에서 (Killing Field) 리빙필드로 (Living Field)
호주구세군의 ‘극기헌금’ (Self Denial Appeal) 촬영을 위하여 지난 2014년 1월 15~23일 동안 캄보디아에 다녀왔었다. 구세군에서는 매년 4월에 세계선교를 위한 ‘극기헌금’을 한다. 막연하게 ‘선교헌금’을 하는 것보다는, 사용될 곳의 구세군 활동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기 위함이다. 촬영팀 3명을 포함하여 모두 5명이 캄보디아를 찾았다. 이번 촬영은 2015년 ‘극기헌금’을 위한 것이다.
캄보디아는 동남아에 있는 나라로, 베트남, 태국, 라오스와 국경이 맞닿고 있다. 크기는 남한의 1.8배 정도 된다. 나라 이름이 ia로 끝나는 것은 땅(The Land)이라는 뜻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한국이 외국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할 때라 ‘프란체스카 여사’를 환영할 때 호주국기를 걸기도 했다고 한다. Australia 란 ‘South Land’, Austria는 ‘East Land’라는 뜻이다. Cambodia는 ‘Golden Land’ 또는 ‘The land of Peace and Prosperity’로 평화롭고 부요한 나라란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는 이름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 왔다. 캄보디아는 세계적인 문화재인 ‘앙코르 와트(Angkor Wat)’와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잘 알려져 있다. 특별히 ‘폴 포트’ (Pol Pot)란 잔인한 독재자는 농촌에서 공산주의 게릴라 운동을 펼치던 ‘크메르루즈(Khmer Rouge)’의 지도자였다. 그는 캄보디아를 ‘농민의 천국’으로 만든다는 명목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1975-1979까지 무려 200여만 명의 지식인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인류 역사상 히틀러가 저지른 만행 이후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렇게 죽인 사람의 시신을 쓰레기같이 버린 전국 343 곳을 ‘킬링필드’ 라고 한다.

리빙 필드(Living Field)
캄보디아를 ‘Killing Field’ 에서 ‘Living Field’로 바꾸기 위하여 많은 나라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고 있다. 한국 파워는 어디에서나 쉽게 느낄 수가 있었다. 시내 중심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간판은 삼성이다. 거리를 질주하고 있는 많은 승합차는 한국에서 수입한 것들이다. 이곳에는 새 차가 거의 없다. 여기저기서 한글이 적힌 승합차를 쉽게 볼 수 있다. ‘속셈학원, 태권도, 어린이집’ 등의 한글로 쓴 차량들이다. 같은 장소에서 짧은 시간에 ‘경희대 태권도’라고 쓴 차량을 두 대나 보았다.
특별히 기독교 단체에서는 이곳을 동남아 복음화의 전초기지로 삼고 20여전부터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인접한 국가인 라오스나 베트남 등에서는 아직도 선교의 자유가 없다. 캄보디아는 불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대하여 관대한 편이다. 이곳에 4천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데 그중 절반은 선교사라고 한다. 가난한 나라의 선교는 저들이 필요한 그 무엇을 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의료와 교육’이다. 깨끗한 물이 부족하여 수인성 병이 많이 발생되고, 병에 걸려도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킬링필드’로 인적자원이 고갈된 상태이어서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부모들은 사는 것이 힘들다 보니 아이들을 학교 대신 일터로 보내고 있다. 지금 캄보디아는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누군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주어야 한다. 수도 프놈펜에는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운영하는 헤브론 병원이 있다. 병원에서는 진료는 물론 필요하면 수술까지 무료로 해 준다. 상주하는 의료팀도 있지만 단기선교 의료팀이 구성되어 올 때면 많은 환자를 한꺼번에 치료해 줄 수가 있다.
학원선교를 하는 시골 마을도 찾아 갔다. 그곳은 부산 로터리 클럽과 교회가 연합하여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학교가 없는 시골에 초등학교를 세워 교육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다. 중학교도 세워 달라는 마을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 들여 올해부터 중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그곳 선교사는 구세군에서 고등학교를 맡아 운영을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한국 구세군 (Korea Territory)
구세군이 공식적으로 캄보디아에 개전된 것은 2012년 11월 22일이다. 구세군은 개전하기 전부터 ‘청소년센타’(Youth Hostel)를 운영하고 있었다. ‘청소년센타’란 농촌에서 프놈펜으로 공부하러 온 가난한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주는 시설이다. 2012년 3월에 구세군 아현 영문에서 캄보디아 개척자금 1억을 헌금함으로 급물살을 타고 개척 준비를 하게 되었다. 2012년 10월 29일 초대 담임사관인 신진균, 임향 사관의 파송식을 갖고, 11월 16일에 구세군은 캄보디아 정부로부터 종교단체 등록승인을 얻은 후, 공식적으로 2012년 11월 22일 개전하게 된 것이다.
구세군이 위치한 곳은 슬럼가이다. 집 앞에는 쓰레기가 쌓여 있다. 아침에 일어나 쓰레기 속에서 쓸 만한 그 뭔가를 분리하여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교회에는 250여명의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참석한다. 예배가 끝나면 빵과 우유를 나누어 준다. 매주 280개를 준비하는데도 받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주일 성결예배는 학생, 청년을 포함하여 100 여명이 참석을 한다. 예배 후에 도시락을 나누어 준다. 주일은 물론 평일에도 교회는 늘 아이들로 법석이고 있다. 윗도리를 입지 않고 오는 아이도 있고, 신발을 신지 않고 오는 아이도 있다. 가끔 맨발로 왔다가 갈 때는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가는 아이도 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한국에서 신발을 가지고 와 나누어 주기도 했지만, 다음 주 아이들은 다시 맨발로 등장한다. 정말 감사한 것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캄보디아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구세군은 ‘청소년센타’(Youth Hostel), ‘방과후교실’(After School) 등을 운영하고 있다. ‘청소년센타’에는 8명의 대학생이 기숙하고 있다. 많지는 않지만 학생들에게 용돈도 준다. 학생들은 달란트를 통하여 ‘방과후교실’과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프놈펜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은 신사관의 설교를 통역한다. 이번 취재의 주인공인 ‘춘림’은 농대를 다니고 있는데, 꿈이 목회자라고 한다. ‘춘림’은 주일에는 찬양 인도자와 주일학교 교사로 교회를 섬기고, 평일에는 ‘방과후 교실’의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이뿐 아니라 구세군 본부의 ‘의료 친교회’에서 보내준 상비약은 중요한 선교의 도구이다. 얼마 전 구세군의 도움으로 두 사람이 헤브론 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았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그분들은 너무 너무 감사하다며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또한 구세군은 캄보디아에서 수술할 수 없는 심장병 어린아이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수술해 주고 있다. 2013년에는 봄에 10명, 가을에 13명의 어린아이를 수술해 주었다.
아직까지 캄보디아에는 외국인이 땅을 살 수가 없다. 유일하게 땅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법인을 설립하는 것이다. 법인이름으로는 매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세군은 앞으로 법인을 설립하고 땅을 매입하여 본격적인 사역을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신사관의 비전은 도시뿐 아니라 지방에도 ‘청소년센타’를 세워 기독교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캄보디아 사역은 현지인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외국인으로 캄보디아인을 위한 사역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역자를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지방에 중고등학생을 위한 ‘청소년센타’를 세울 수 있다면, 지속적인 연계를 가지고 교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선교의 승패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있다. 같은 돈이라도 누가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선하게 사용할 수도 있고, 악하게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구세군은 무엇하는 단체입니까?”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구세군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 단체입니다.” 살린다는 것은 ‘개인구원’을 위함이요, 키운다는 것은 ‘타인구원’을 위함이다.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암 부드도 “내가 구원 받은 것은 남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Saved to save) 하지 않았던가!

버가모 교회 (Pergamum Church)
2:12 좌우에 날선 검
버가모는 서머나 북쪽 약 100km되는 곳에 위치한 수도로 주전 133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그 전까지 미술 등의 문화가 매우 발달한 곳으로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서관이 있었던 도시이다. 로마시대에는 황제숭배를 하는 예배처가 있었으며, 이방종교와 헬라신의 신전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 의학이 발달한 도시로서 의학교가 있었다. 특별히 치료의 신으로 이해되었던 “아스클레피오스”라 불리는 뱀신과 주신인 ”제우스“, 그리고 황소로 상징되는 ”디오니소스“(로마의 박카스 신)등을 숭배하는 곳이었다. 재미 있는 것은 음료수 박카스가 캄보디아에서 제일 인기 있는 음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한글로 박카스라고 쓰여 있다.
그리스 신화 아폴론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이다. 이 의술신의 딸이 들고 다니는 단장에는 언제나 한 마리의 뱀이 둘둘 말려 있었다. 이 뱀은 의신의 신성한 하인이었고, 해마다 다시 소생하여 탈피함으로서 새로운 정력을 소생시킨다는 스태미너의 심벌로 간주돼 왔다. 지금도 군의관의 배지는 십자가 나무에 뱀 두 마리가 감긴 도안이고, 유럽의 병원과 약국의 문장은 치료의 신, 의술의 신을 상징하는 뱀이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쓰는 편지에서 다양한 차원에서 예수님은 자기계시를 하고 계신다. 버가모 교회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이’라고 했다. 에베소서 6장에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말씀하고 있다. 5가지는 수비형 무기인데 오직 하나 공격형 무기가 있다. 17절의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하나님이고 곧 예수님이다.(요1:1)
2:13 외적 핍박
‘사단의 위’라는 것은 ‘사단의 왕좌’라는 뜻으로 제우스신전을 뜻한다는 견해도 있으며, 혹은 ‘아스클레피오스’라고 불리던 치료의 뱀신을 뜻한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학자들은 버가모에는 황제숭배를 위한 예배처가 있었던 것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위란 단어는 영어성경에는 Seat 즉 ‘자리’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헬라 원문대로 보면 ‘드로노스’로 왕위, 보좌란 뜻이다. 단순한 ‘자리’ 라는 뜻이 아니라 권세를 의미한다. 즉 사단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란 뜻이다. 이러한 곳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혼자 믿음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곳에서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증인이란 단어는 헬라어 순교자란 뜻이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라는 순교자를 배출했다. 안디바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로서, 계시록 일곱교회에서 유일한 순교자이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순교한 자가 가장 미련한 자일 것이다.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 중의 한분은 주기철 목사이다. 그의 4째 아들이 주광조 장로의 아버지에 대한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감옥에서 너무 많은 고통을 받은 후에 풀려난 주 목사는 어느날 밥을 먹고 있는데 일본 경찰이 체포하기 위하여 들어오자 뒷마당으로 도망하셨다고 한다. 우리는 주목사님이 슈퍼맨과 같이 의연하게 대처할 것을 기대하지만 주목사도 정말 피하고 싶었던 길이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인간 주기철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한 성령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주광조 장로는 ‘순교자 나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란 책을 발간했다. 책안에는 이런 글이 있다. ‘주 목사님이 나약해서 힘이 모자라서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 될 수가 없어서 그리고 당연히 가야 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할 이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 죽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닌 자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캄보디아에 2013년 6월에 방효원 선교사 가족이 2년간의 현지적응과 언어 연수를 마치고 수도인 프놈펜에서 사역지인 시엠립으로 가는 도중 교통사고로 2명의 자녀 그리고 부인과 함께 순직하셨다. 이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주의 일을 시작하려는 분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디 이뿐인가 한국 최초의 호주 선교사인 데이비슨은 1889년에 한국에 들어와 6개월간의 언어 연수를 마치고 선교지인 부산에 도착하여 다음 날에 소천 하셨다. 사도행전 7장의 최초의 순교자인 스테반은 어떤 사람인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아 7 집사로 선택이 되었다. 그런 그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했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는가! 그 사건을 통하여 기독교가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고, 데이비슨 선교사의 순교를 통하여 더 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에 파송되었다는 사실을. 가끔 우리는 우리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어 의심의 뿌리를 내리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분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2:14 내적 유혹
외적 핍박에 강했던 교인들이 내적인 유혹에는 약한 면모를 보였다. 발람은 어원적으로는 백성을 정복하라는 니골라와 동일한 뜻을 가지며, 민수기22-24장에 의하면 불의한 삯을 사랑하는 거짓 예언자를 말한다. 또한 민수기25장에 의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우상숭배와 모합 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르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잘못 인도한 책임이 발람에게 있다고 보아 발람을 죽였다. (민31:8) 계시록 본문에서도 발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러한 발람의 교훈은 “벧후2:15, 유1:11”에서도 언급되어지므로 거짓선지자로서 언급됩니다.
니골라 당이란 영지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영적인 것은 거룩한 것이고 육적인 것은 악한 것이니, 영적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은 육적으로는 어떻게 살아도 상관이 없다는 사상이다. 이들은 ‘자유와 방종’을 구분 못하는 자이다. 우리가 영적인 구원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들은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위한 방종으로 착각하고 자들이다. 루터가 자유의 헌장이라고 말한 갈라디아서 5:13에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마틴 루터는 이를 ‘종의 자유’라고 했다.
2: 16절 회개하라
머리 위에 새가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새가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계속하여 사단은 우리 마음에 악한 둥지를 만들려고 시도를 한다. 우리는 오직 회개를 통한 성령 충만함으로 이길 수 있다. 불을 품고 옷이 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는가! 숯불을 밟고도 발이 대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잠6:7,28절)
유럽 어느 마을에 신부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성이 너무 자유로워서 문제가 많이 있었다. 고해성사는 언제나 “신부님 오늘도 간음했어요”라는 내용이다. 신부는 이 말을 듣기가 역겨워서 “간음했다고 하지 말고 넘어졌다” 하라고 말을 바꾸었다. 사람들은 고해성사 할 때마다 한두번도 아니고 하루에도 몇번씩 넘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너무 화가 난 신부는 시장에게 가서 신도들이 자주 넘어지니 도로공사를 하셔야 하지 않겠냐고 요청을 했다. 시장은 재미있어하며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화가 난 신부가 이게 어디 웃을 일이냐며 “당시 부인도 어제 두 번이나 넘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2:16 말씀의 검
버가모 교인들이 회개하면 ‘내 입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들과 싸우겠다고 했다. 마태복음 4장에 광야에서 사탄에게 3번의 시험을 받았으나 예수께서는 모두 ‘기록되었으되’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성도의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사역은 모두가 인본적이다. 인복적인 목회를 한다는 것은 기업경영을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기업도 경영을 잘하면 돈도 벌고 직원도 많아지고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생명이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세상적인 경영 기법을 도입하면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말씀이 없는 교회는 살았다고 하나 죽은 교회이다.
2:17 만나과 흰돌
사도요한은 그리스도가 일곱교회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을 상징적으로 기록하였지만, 모두 최종적인 영광의 구원과 하늘의 영생복락을 뜻하며, 최종적으로 받게 되는 상이다. 감추어진 만나는 신령하고 참된 영적 양식의 상징적인 의미로 메시야이신 예수의 재림을 통하여 주어지는 상을 말한다. 흰돌에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연회에 초대할 때 주는 돌이라는 의미도 있고, 재판과정에서 무죄 판결이라는 의견도 있으며 승리하는 자에게 주는 돌이라는 뜻도 있다. 새이름이란 이기는 자들에게 종말에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영광스러운 지위와 신분들 뜻한다.

용서에 대하여
몇 칠 전 무려 20여 년간 이단을 연구한 목사의 강의를 들었다. 본인이 가장 힘들 때는 이단과 싸울 때가 아니라, 소속 교단 내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를 들을 때라고 한다. 이단에게 받는 비난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나, 동역자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비난은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단보다 1000배 이상의 화가 난다고 한다. 사람이 가장 힘들 때는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할 때이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할 것도 없다. 하지만 믿었던 사람에게는 믿었던 만큼의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말이 있나보다.
정말 그런 사람을 용서하기는 쉽지가 않다. 물론 나에게도 그런 경험은 있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가슴속에 묻어 두고 있다.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용서를 거치지 않은 ‘잊어버림’은 고통과 상처를 회피하는 방편에 불과하다. 받은 상처를 덮어버림으로써 진정한 용서를 기피해 버리는 것이다. ‘나의 감정은 곧 나의 신체이다’. 해로운 감정을 가진 사람은 신체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다. 감정과 신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쉽지가 않다.
용서는 상대방이 용서 받을 행동을 했거나,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 용서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아무런 조건없이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 아니할 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하겠다는 의지적인 선택이다. 따라서 용서와 화해는 조금 다를 수가 있다. 내가 그를 용서 했지만 그가 화해하기 원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생기면 더 이상의 경계선을 넘을 필요는 없다. 거기까지가 나의 일이고 내가할 수 있는 일이다. 그와 화해하지 못했다고 자책하지 마라, 그 다음은 그의 목이고 하나님의 영역이다.
오래전 ‘밀양’(Secret Sunshine)이란 영화를 보았다. 교통사고로 남편이 죽은 후,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신애’(전도연)는 아들과 함께 이사를 간다. 그곳에서 피아노 학원을 열고 정착에 노력했지만, 아들 마자 그곳에서 잃는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그녀는 예수를 믿게 된다. 신앙생활이 깊어지면 질수록 그녀는 한 가지 풀어야할 숙제가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자신을 조건 없이 용서한 것처럼 자신도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감옥을 찾아간다. 하지만 살인범은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다는 것이 아닌가! 피해자인 나는 아직도 아파하는데, 가해자인 살인범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평안하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후 그녀는 반기독교인으로 변신하고, 자신의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여 미쳐 버린다. 그녀는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그녀는 그를 위한 용서가 아닌 자신만을 위한 용서를 고집한 것은 아닐까?
용서에 관하여 성서에 나오는 세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1) 요셉의 이야기다 (창 45:5-8)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창 45:5-8) 요셉이 아버지인 야곱이 죽자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한 말이다.
2) 탕자의 비유다(눅 15:11-32)
자신의 분깃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의 이야기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15:21-24)
3)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이다(마 18:21-35)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 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 (엡4:31)”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