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너는 복이 될지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는 흔히 ‘복’을 생각할 때 먼저 형통을 떠올립니다. 계획한 일이 잘 풀리고, 건강하고, 필요가 채워지고, 걱정이 줄어드는 그런 삶을 복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복을 그보다 더 깊이 말합니다.
1.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복을 받을 것이다”가 아니라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있든, 그의 존재 자체가 복이기 때문에 그를 만나는 사람, 그와 함께하는 사람, 그의 삶과 연결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2.복 있는 사람(시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라가지 않고, 죄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대신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가십니다. 그래서 그 삶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뿌리가 생명의 물에 닿아 있어,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3.복 있는 사람의 복(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팔복 중 3번째는 온유한 자의 복입니다. 한자로 온유(溫柔)는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프라우테스’라고 하는데, 이는 ‘잘 길들여진 야생마의 성품’을 뜻합니다. 온유는 ‘힘과 방향’이 어우러진 단어입니다.
힘은 있는데 방향이 없으면 방종이고, 방향은 있는데 힘이 없으면 구호에 불과합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9).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 5:3)
산상수훈 (마 5–7장)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삶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은 구원을 얻기 위한 ‘구원의 법’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성결의 법’, 즉 거룩한 삶의 법칙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그 다음에 ‘이제 너희가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구원을 얻기 위한 법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가기 위한 ‘성결의 법’입니다.
산상수훈의 서론인 팔복 (Beatitude)은 처음부터 끝까지 “복이 있나니”라는 선언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팔복에서 사용된 ‘마카리오스’라는 단어는 단순한 행복이나 기분 좋은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누리는 하늘의 복, 곧 천국에서 누리는 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팔복의 복은 천국에서 시작하여, 천국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 심령(프뉴마, πνεῦμα)
사람은 단순히 몸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면과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차원을 함께 지닌 존재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인간을 영, 혼, 육이 서로 연결된 통합적 존재로 보았습니다.
‘인간’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두 단어가 헬라어로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와 히브리어로 아담(אָדָם)입니다. 두 단어는 모두 ‘사람’을 뜻하지만, 성경 안에서는 서로 다른 뉘앙스와 신학적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드로포스는 어원적으로 ‘위로 올려다보는 존재’, ‘하늘을 바라보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왜 인간의 머리가 위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보고 살라는 뜻이 있이 않나 생각합니다.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땅만 보고 살면 어떤 현상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거북목이 됩니다. 나무는 땅을 잘 만나야하고, 동물은 주인을 잘 만나야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히브리어 아담(adam)은 구약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기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흙(adamah)’에서 온 말로, 인간이 흙으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두 단어의 의미를 합하면 인간의 육은 흙에서 왔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1) 영 (靈, spirit, πνεῦμα, 루아흐) — 하나님과 연결되는 깊은 자리
성경에서 영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인간의 가장 깊은 차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영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7 —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기는 하나님의 숨결이며,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영적 차원의 근원입니다.
잠언 20:27 — “사람의 영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말하며, 영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비추는 자리임을 보여줍니다.
스가랴 12:1 — 하나님이 “사람 속에 영을 지으셨다”고 하여, 영이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내적 중심임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영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자리이며,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영성(spirituality)이란 영의 성품입니다.
2) 혼 (魂, soul, ψυχή, 네페쉬) — 지정의가 움직이는 내면 전체
혼은 인간의 감정, 생각, 의지 등이 모여 있는 내면의 중심입니다. 성경은 혼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생명력으로 묘사합니다.
시편 42:1–2 — “내 영혼이 하나님을 갈급합니다.” 여기서 혼은 감정뿐 아니라 존재 전체가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명기 6:5 —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혼은 인간의 내면적 전인격을 포함합니다.
창세기 35:18 — 라헬이 죽을 때 “혼이 떠나려 할 때”라고 표현하여, 혼이 생명과 깊이 연결된 개념임을 보여줍니다.
혼은 인간의 지정의가 형성되는 자리이며, 영이 받은 생명을 삶 속에서 해석하고 표현하는 공간입니다. 혼(personality)의 성품은 인성입니다. 심리학(psychology)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심리학이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과학이란 관찰, 측정, 실험, 예측 등이 가능하여 객관적인 통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3) 육 (肉, body, βίος, 바사르) — 삶이 드러나는 구체적 현실
육은 단순히 몸만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적 삶 전체를 포함합니다.
로마서 12:1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육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의 현장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 —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하며, 육체가 영적 삶과 분리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 9:27 —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말하며, 육체가 영적 훈련의 실제 무대임을 보여줍니다.
육은 영과 혼이 실제 행동과 삶으로 드러나는 자리이며, 신앙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통로입니다. 생물학(biology)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세 부분으로 기계적으로 나누기보다, 영·혼·육이 서로 연결된 통합적 존재로 묘사합니다. 영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깊은 자리이고, 혼은 내면의 ‘지정의’가 움직이는 중심이며, 육은 삶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이 세 차원이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 가난 (프토코이, πτωχοὶ)
심령의 가난함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는 영적 진실성입니다.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아는 사람,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설 수 없음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고 하나님 나라를 가장 깊이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비어 있는 심령을 가장 기뻐하시며,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풍성하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가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존 자체가 어려운 절대적 가난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상대적 가난입니다. 상대적 가난은 실제로 생존이 위협받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과 비교할 때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바로 아래 동네의 부유한 사람들과 비교하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느끼지만, 모두가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에서는 그런 상대적 결핍을 크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은 헬라어 ‘프토코이(ptōchoi)’, 곧 영적인 절대적 가난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부족하거나 연약한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인정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저께 ‘브릿지교회’에서 목사 위임식과 장로·안수집사 취임식이 있었습니다. 뉴질랜드, 아들레이드, 브리스번에서 목사님들이 오셔서 축하하고 다양한 순서를 가졌습니다. 노회장이신 아들레이드 교회 문광식 목사님께서 사도행전 2:42-47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뿌리로 향하는 교회”라는 말씀은 전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인 ‘Back to the Bible’을 말씀하시면서, 교회는 뿌리인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몇 번씩이나 ‘인간적인 열심을 내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없으니, 성령충만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의 7 집사를 세울 때의 자격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선교학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말이 있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도록 자신을 비우고 성령으로 채워야 합니다.

- 천국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처음 선포하신 말씀은 바로 “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도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시작과 끝에서까지 반복되는 주제가 바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성경은 천국을 단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을 강조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질서가 인간의 힘이나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의 의지와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공간이며, 인간의 욕망이나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늘의 뜻이 기준이 되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나라’는 같은 의미입니다. 마가와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했는데, 마태는 유대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복음을 기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대신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시작된 새로운 질서를 설명할 때는 “그리스도의 나라”, “메시아의 통치”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오심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시작된 전환점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장차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말할 때는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나라”와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들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미래에는 완전한 형태로 성취될 것이라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천국은 단순히 죽은 뒤에 가는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할 때 예수님은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21:17)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면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엮인 총체적인 존재입니다. 영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혼이 새로워지고, 혼이 새로워지면 삶의 자리에서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못사는 사람,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아는 사람,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설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의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 천국의 복은 먼 미래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천국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브릿지교회 임직식과 위임식 축사
브릿지교회 임직식과 위임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먼저 차제섭, 김종관 장로님, 배진용, 이상우 안수집사님의 임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일곱 사람을 세워 섬김의 사역을 맡깁니다. 그들이 갖추어야 할 모습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단지 감정적으로 ‘성령이 차고 넘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는 삶을 의미합니다. 내 생각,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민감하게 반응하며 순종으로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주의 일은 결국 주께서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일을 내가 붙들고 내가 하려고 하면, 일이 잘될 때에는 교만해지고, 잘되지 않을 때에는 쉽게 실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세우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손에 들린 도구로서 순종할 뿐입니다.
특별히 브릿지교회는 세대와 세대를 잇고, 예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다리가 굳건히 서기 위해서는 기둥이 든든해야 합니다. 오늘 새롭게 세워지신 장로님들과 안수집사님들이 은혜와 진리의 기둥이 되어, 브릿지교회가 험한 세상 가운데 구원의 다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울러 박용대 목사님의 위임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위임’은 성경적으로 직분을 맡긴다는 의미에서 유래하며(출애굽기 29장), 구약의 제사장 위임식처럼 신약 교회도 목회 사역을 맡길 때 공적인 위임 예식을 행해 왔습니다. 위임은 단순한 직책의 부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교회에, 교회를 목회자에게 공적으로 맡기시는 ‘언약의 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는 목사가 교회에서 위임되는 것을 결혼에 비유해 왔습니다. 목사 위임은 교회와 함께 평생을 동고동락하며 한 길을 걸어가는 결단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위임을 통해 박용대 목사님과 브릿지교회가 더 깊은 신뢰와 사랑, 그리고 사명으로 하나 되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올해 9월에 은퇴합니다. 37년의 목회를 돌아보며, 목회자의 축복은 성도를 잘 만나는 것이고, 성도의 축복은 목회자를 잘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2018년 4월 박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나 인터뷰를 했고, 5월에 크리스찬리뷰지 표지 글로 실리기도 했습니다. 이번 축사를 준비하면서 그때의 글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 바보 같은 사람을 만났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육으로는 바보지만, 영으로는 천재이다.”
그리고 작년 10월 6일 브릿지교회 야외예배 때 다시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7년 6개월이 지났지만, 목사님은 처음 만났을 때의 맑은 영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참 좋은 목사님을 만나 참 복된 분들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좋은 성도가 되어 목사님을 더 복된 목회자로 세워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두 분 장로님, 두 분 안수집사님의 임직과 박용대 목사님의 위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말씀을 가름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