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세 갈래의 종교개혁 (롬 1:17, 롬 10:3)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였습니다. 이는 면죄부 판매와 교회의 부패에 대한 신학적 문제 제기였으며, 결과적으로 유럽 전역에 걸친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개신교 교회들은 매년 10월의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며, 복음의 본질과 교회의 갱신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이 날은 단지 과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가 다시금 말씀과 은혜, 믿음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함을 상기시키는 신앙의 절기입니다.
우리는 종종 종교개혁을 루터 한 사람의 외침으로 기억하지만, 사실16세기 유럽에는 세 갈래의 개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교회를 정화하려는 루터의 ‘개신교 개혁’, 또 하나는 영국의 ‘성공회 개혁’, 그리고 마지막은 내부 성찰로 시작했지만 권위 수호로 나아간 ‘가톨릭의 개혁’입니다.

첫째 개신교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
종교개혁에는 간접적인 배경과 직접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간접적인 배경에는 유럽 사회를 뒤흔든 르네상스(Renaissance) 정신이 있었습니다.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다시 태어남’, ‘부활’을 의미합니다. 르네상스는 그리스와 로마의 ‘Humanism’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휴머니즘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이성, 자유의지를 중심에 두는 철학적·문화적 사상입니다. 중세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힌 시대입니다. 중세의 암흑기를 지나며 인간의 이성과 예술, 철학, 과학이 새롭게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휴머니즘에는 3 유형이 있습니다. 유신론적 휴머니즘 (Theistic Humanism)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신이 인간의 삶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신다고 믿는 입장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은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기독교 인문주의(Christian Humanism)가 대표적인 예로, 에라스무스(Erasmus)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 사상가들이 성경과 고전 문헌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자유의지를 강조하였습니다.
이신론적 휴머니즘 (Deistic Humanism)은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 신이 세계를 창조한 이후에는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계몽주의 시대에 특히 두드러졌으며, 인간은 이성, 자연법, 도덕적 직관을 통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의 삶은 자율성과 책임을 바탕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가 강조됩니다.
무신론적 휴머니즘 (Atheistic Humanism)은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인간의 이성과 경험, 과학적 탐구를 통해 도덕과 의미를 구성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칼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등은 신의 개념을 인간의 투사로 보며, 신 없이도 인간은 도덕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현대 세속주의(secularism)와 인권 담론, 윤리적 자연주의 등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배경에는 중세 말기 교회의 부패와 면벌부(indulgence)의 상업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시 교황청은 본래의 영적 사명에서 점점 멀어져, 정치적 권력과 세속적 부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성직 매매(Simony)와 같은 행위도 만연하였으며, 이는 교회의 도덕성과 신뢰를 크게 훼손하였습니다. 면벌부란 본래 죄에 대한 벌을 면제해 준다는 교회의 공식 문서로, 회개한 신자에게 은총을 베푸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면벌부는 금전 거래의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특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대적인 판매가 이루어졌습니다. 면벌부는 죄목에 따라 가격도 다르게 책정이 되었습니다. 요한 테첼(Johann Tetzel)은 “동전이 궤짝에 떨어질 때,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나온다”는 말로 면벌부 판매를 선동하여 루터의 분노를 자극했습니다.
루터는 이에 맞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의는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선포하였습니다. 루터의 개혁정신은 단지 개인의 종교적 열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교회의 모든 제도와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세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성공회 종교개혁(Anglican Reformation)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의 신학적 개혁과는 달리 정치적 요소가 강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왕 헨리8세 는 교황 레오10세로부터 ‘믿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충성스러운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부인 캐서린이 후계자를 낳지 못하자, 그는 교황청에 이혼을 요청했습니다. 교황이 이를 거절하자 헨리 8세는 교황과 결별하고, 1534년 자신을 영국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선포하는 ‘수장령’을 공포했습니다.
헨리 8세 사후, 신교와 구교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메리 1세(Mary I) 시대에는 다시 가톨릭으로 회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의 즉위 이후, 영국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도(Via Media)를 추구하는 안정된 종교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온건한 절충의 길(Road of Moderation)’을 통해 신학적 균형과 국가의 통합을 이루었습니다. 예배의 형식에서는 전통적인 가톨릭의 장엄함을 유지하되, 교리에서는 성경 중심의 개신교 신앙을 수용하였습니다.
헨리 8세는 성공회를 시작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성공회를 정착시켰습니다. 마치 호주를 개척한 사람으로는 ‘아서 필립’ 제독이지만, 근대 호주의 기반을 닦은 사람으로는 5대 총독인 ‘맥라클란 맥콰리’의 관계와 같습니다.

셋째 가톨릭 종교개혁(Catholic Reformation)
종교개혁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며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하자, 가톨릭 내부에서도 깊은 성찰의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이 흐름은 단순히 개신교에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 교회 내부의 잘못을 돌아보고 쇄신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교황권과 전통을 더욱 강화하고 수호하려는 방향으로 기울게 되었고, 그 중심에 ‘예수회(Jesuit, 1540)’가 자리하게 됩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1491–1556)는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창립자이며, 16세기 가톨릭 영성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스페인 귀족 출신의 군인이었으나, 부상 이후 회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위한 전인적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후 예수회는 세계선교와 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예수회는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웠습니다. 한국의 서강대학교도 예수회가 세운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소집된 트렌트 공의회(1545–1563)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대응하기 위해 개최한 가장 중요한 반종교개혁 회의였습니다. 이 공의회는 단순한 교리 방어를 넘어, 가톨릭 내부의 개혁과 교리 정립을 동시에 추진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성경과 전통’은 동등한 권위를 지니며, 인간은 믿음과 더불어 선행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가톨릭의 입장을 재확인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수도사였지만 내면에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갈등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도원 생활을 하며 철저한 금식과 기도, 고해성사, 철야기도, 자기 수련을 반복했지만,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은 그를 더욱 깊은 고뇌로 몰아넣었습니다. 루터는 죄를 지을 때마다 담당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나중에 귀찮아진 담당 신부는 “루터야 죄를 좀 모아서 오거라”고 했답니다.
이 시기의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죄인을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기준”으로 이해하고, 철저히 ‘자기 의’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는 시도 속에서 번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루터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을 절감했습니다. 자기 의란 행위의 의를 말하고, 율법의 의를 말합니다.
그러던 중, 루터는 성경을 깊이 묵상하던 가운데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통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비로서 그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의 의미
10월의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주일’이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부패한 교회의 관행에 도전하며,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강조했다. 종교개혁은 단지 하나의 신학 운동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회심의 운동이었다.
이 개혁의 중심에는 세 가지 핵심 정신이 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루터의 외침은 신앙의 중심을 인간의 행위나 교회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두어야 함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 종교개혁의 배경에는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 르네상스(Renaissance) – 인간의 부활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부활’ 혹은 ‘새로운 태동’을 의미한다. 이는 중세의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과 존엄을 되찾으려는 운동이었다.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으로 돌아가며, 인간의 내면과 창의성, 그리고 자유를 강조했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중심에는 ‘휴머니즘(Humanism)’이 있었다. 휴머니즘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이성의 힘을 믿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상은 세 가지 길로 나뉘었다. 하나님을 믿되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유신론적 휴머니즘,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이신론적 휴머니즘, 그리고 신을 부정하고 인간을 절대화하는 무신론적 휴머니즘이 그것이다. 신 없는 휴머니즘은 결국 인간을 중심에 두려다 인간을 잃게 만든다.
인문학은 사람과 글의 결합으로 ‘인간의 무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문학과 철학, 예술과 역사, 언어는 모두 인간의 무늬를 드러내는 길이다. 인문학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끝없는 탐구이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참모습을 되찾는 여정이다. 진정한 인문학은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형상(Imago Dei)을 회복할 때 완성된다.
- 종교개혁(Reformation) – 말씀의 회복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에 걸었다. 그가 이날을 택한 이유는 바로 다음날이 가톨릭의 ‘모든 성인의 날(All Saints’ Day)’이었기 때문이다. 성당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루터의 선언은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루터의 개혁은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인간의 구원이 행위나 제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았다.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가 종교개혁의 중심에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을 꺾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복음의 핵심이었다.
- 오늘의 메시지 – 십자가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루터의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질문한다. 오늘의 교회는 제도적 개혁보다 영적 회심이 필요하다. 진정한 개혁은 십자가 앞에서 다시 무릎 꿇는 일에서 시작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이며, 인간의 죄가 드러나고 용서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교회가 형식보다 믿음을, 권위보다 은혜를, 전통보다 말씀을 붙드는 것이 오늘의 개혁이다.
우리가 다시 십자가로 돌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단지 16세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 위에 서고 은혜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오늘도 교회를 새롭게 하신다.
“주여, 우리로 말씀 위에 서게 하시고, 은혜로 살게 하시며, 믿음으로 걷게 하소서.”

다리를 놓는 사람들
에베소서 6장 18절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깊게 하는 영적 대화입니다. 기도의 폭이 신앙의 폭이고, 기도의 깊이가 신앙의 깊이입니다. 기도가 타인을 향해 열릴 때, 우리의 신앙은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중보기도는 다리를 놓는 기도입니다. 끊어졌던 다리가 연결될 때 그 다리 위로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게 됩니다.
시드니 하버 브리지는 20세기 초 시드니의 급속한 도시 성장과 교통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1923년에 착공되어 1932년 3월 19일에 개통되었으며,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강철 아치교 중 하나였습니다. 하버 브리지는 시드니의 남과 북을 연결하였을 뿐 아니라, 세계대공항을 극복한 호주인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었던 상징적인 다리입니다. 하버브리지는 차량 8개 차선, 철도 2개 선로, 자전거 도로, 보행자 도로 등이 있습니다. 지금도 감탄하는 것은 100년 후의 시드니의 교통량을 예측하고 만든 것 같습니다.
하버 브리지의 설계와 건설은 영국 북부 미들즈브러(Middlesbrough)에 본사를 둔 Dorman Long & Co. Ltd.가 맡았습니다. 다리 건설에 사용된 강철 대부분이 영국에서 수입되었으며, 영국의 공학 기술과 장비가 대거 투입되었습니다. 미국 사관학교 동기 중에 영국 출신인 Norman Graniger 사관이 있습니다. 제 Facebook에 올린 하버브리지 사진애 고향인 ‘미들즈브러’에서 강철을 가져 왔다는 댓글을 남겼습니다.
작년 9월에 ‘주마음 교회와 호천 교회’가 통합하여 브릿지 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브릿지 교회를 섬기는 박용대 목사님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브릿지 교회’로 이름을 지은 이유를 물었습니다. “두 교회가 하나로 연결되니까 ‘다리’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브릿지(Bridge)’라 이름 지었죠. 이 이름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호천교회와 주마음교회의 연결, 둘째, 세대와 세대의 연결, 셋째 예수님과 세상의 연결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앞으로의 비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제 목표는 후임이 자유롭게 목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들을 위한 EM(English Ministry)를 세워 다음 세대를 세우고 싶습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효도 관광 프로그램도 기획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마지막 사명은 다리를 놓는 일입니다. 교회와 교회, 세대와 세대, 그리고 예수님과 세상을 잇는 다리요. 그래서 교회 이름이 ‘브릿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리를 놓는 사람들’입니다.

- 중보기도는 예수님의 기도
중보기도의 가장 완전한 본보기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 내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병든 자, 소외된 자, 죄인들을 위해 눈물로 간구하셨고,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도록 중보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보호받기를, 하나님의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통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하여 비옵나니”(요 17: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기도가 단지 그 시대의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를 위한 세대를 초월한 사랑의 기도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기도는 용서와 사랑이 하나로 어우러진 하늘의 기도이며, 중보기도의 최고 모범입니다. 이 최고의 기도를 하신 분이 사도행전 7장에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돌을 던지는 사람을 위한 스테반의 기도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이런 사랑과 기도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성령의 충만함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단지 문제의 해결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그 기도는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주기도문에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 이우러 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켜 내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 편이 되는 것입니다.

- 중보기도는 성령님의 기도
요한의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는 ‘파라클레토스’로 옆에서 우리를 돕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로 Helper, Counselor, Comforter 그리고 Advocate라고 합니다. Advocate는 대언자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우리의 혼을 넘어, 영의 차원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도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주도하시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성령입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절) 동사의 형태는 수동태 현재 명령형 2인칭 복수입니다. 수동태는 성령 충만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는 상태입니다. 현재형은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명령형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영적 삶의 방식입니다. 2인칭 복수란 공동체 전체를 향한 명령입니다.
이것은 ‘집중과 몰입’ 그리고 ‘묵상과 관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집중은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고, 몰입(Flow)은 말씀이 나를 읽는 것입니다. 거대한 흐름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항해를 할 때나, 비행기를 탈 때 목적지에 갈 때와 올때의 시간이 다릅니다. 기류와 해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묵상(Meditation)은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관상(Contemplation)은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전 14;15절을 보면 영의 기도가 있고 마음의 기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영으로’(ἐν πνεύματι)는 성령의 감동 아래서,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초월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 기도는 성령께서 직접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깊은 차원의 기도입니다. ‘마음’(νοῦς)은 ‘이해’, ‘지성’, ‘이성’을 뜻합니다.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이성적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성령의 감동에 따라 기도하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 중보기도는 하나되는 기도
중보기도는 공동체를 하나로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 끈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그 사람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중보기도는 사랑의 다리이며, 그 다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흘러갑니다. 이 기도는 개인의 신앙을 넘어서 공동체를 세우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각자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서로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기도할 때 진정한 교회로 서게 됩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니라.” 이 말씀은 중보기도의 공동체적 힘을 강조합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공동체를 치유하고 새롭게 하십니다.
중보기도는 용서와 화해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정죄하는 대신,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미움과 상처가 사랑으로 변하고, 단절된 관계가 다시 연결됩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흘러들게 하는 통로이며, 이 기도를 통해 교회는 참된 하나됨을 경험합니다. 기도는 개인을 변화시키고, 중보기도는 그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도의 폭이 신앙의 폭이고, 기도의 깊이가 신앙의 깊이입니다. 자신의 기도의 제목을 살펴보면 자기의 신앙의 현주소를 알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이고, 중보기도는 성령님의 기도이며, 중보기도는 공동체를 하나되는 하는 기도입니다. 중보기를 통하여 하나님과 세상, 교회와 교회, 세대와 세대, 민족과 민족의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신과의 약속
올해 초,
딸은 자신의 한계를 테스트하기 위한 목표를 세웠다.
두 번의 하프마라톤, 한 번의 풀코스 마라톤, 그리고 철인삼종경기 완주를 결심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운동 계획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믿음을 시험하는 여정이었다.
하프 마라톤의 첫 발걸음은 추운 아침 공기 속에서 시작되었고,
두 번째 하프 마라톤은 피로와 회복 사이의 균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세 번째 목표인 42.195Km 마라톤은 고통과 기쁨이 교차하는 긴 여정이었다.
그리고 어제,
그녀는 그 약속의 마지막 장을 완성했다.
물살을 가르며 수영을 마쳤고,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았으며,
마지막으로 온힘을 다하여 마라톤을 완주하며 철인삼종경기를 마쳤다.
그녀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보다도,
끝까지 달려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평안과 기쁨이 넘쳤다.
그 순간은 단순한 결승선 통과가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Earlier this year,
a young woman set a goal to test her own limits:
two half marathons, one full marathon, and the completion of a triathlon.
It was not merely a fitness plan,
but a journey to challenge her body, her mind, and her faith.
Her first half marathon began in the chill of early morning air.
The second taught her the delicate balance between fatigue and recovery.
The 42.195 km full marathon was a long road where pain and joy intertwined.
And yesterday,
she cut through the water with steady strokes,
pedaled with strength and resolve,
and finally crossed the marathon finish line—completing the triathlon.
On her face was not exhaustion,
but the serenity and joy that only those who have truly endured can wear.
That moment was more than crossing a finish line—
it was the triumphant echo of a promise kept to herself.

새벽에 만나는 여우
올림픽 공원의 안개 사이로 여우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 낯설지 않다.
어쩌면 매일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눈빛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묻는다.
오늘도 너는 너의 길을 걷고 있느냐고.
너의 기도는 아직 살아 있느냐고.
도시의 틈에서 살아가는 여우,
그 존재는 경계 위의 은총 같다.
사람과 자연, 기억과 현재,
그 사이를 잇는 조용한 사자(使者).
나는 걷는다.
그 여우도 걷는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숨겨두신 새벽의 비밀을 나눈다.

꽃이 말을 걸던 날
블루마운틴 보타닉 가든을 찾은 오늘,
나는 꽃이 말을 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맑은 공기 속에서 걷고, 함께한 사람들과 웃으며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나들이일 줄 알았다. 그러나 정원의 길을 따라 걷는 동안, 꽃들이 하나둘씩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색과 향을 지닌 꽃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떤 꽃은 조용히 피어 있었고, 어떤 꽃은 바람에 몸을 맡기며 춤을 추었다. 그 사이를 걷는 우리 입에서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와, 이건 처음 보는 꽃이야.” “이 색은 정말 신비롭다.” 짧은 말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마음이 열리는 소리가 담겨 있었다.
꽃을 바라보며 나눈 그 짧은 감탄은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주었다. 자연은 그 사이를 부드럽게 감싸주었고,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바라보게 되었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꽃은 단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 사이를 잇는 다리였고, 마음을 여는 열쇠였다.
꽃은 그렇게 말없이 사람을 품고, 사람은 그 품 안에서 조금씩 자신을 열어간다. 꽃 앞에서 우리는 경계 없이 서 있었고, 그 앞에서 우리는 조금 더 진실해졌다.
돌아오는 길, 나는 생각했다. 아름다움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 곁을 너무 바쁘게 지나쳐 왔던 것 같다. 이제는, 멈춰 서서 꽃 앞에 귀 기울이는 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나태주 시인의 짧은 시가 마음속에 메아리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오늘 만난 꽃들은 그 시의 의미를 온몸으로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꽃들 앞에서 조금 더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