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시편을 아십니까?
“시편을 아십니까?” 란 질문은 단순히 성경 지식의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진실한가를 묻는 신앙적 질문입니다. 시편은 150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150편은 호흡이 있는 자는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끝을 맺습니다. 시편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타나크’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교의 성경을 타나크(Tanakh)라고 합니다. 타나크는 구약성경과 내용은 같지만 구성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성경은 39권으로 율법서(5), 역사서(12), 시가서(5), 예언서(17)의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타나크는 24권으로 모세의 율법(토라, 5권), 선지서(네비임, 8권), 성문서(케투빔, 11권)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에스라-느헤미야, 열두 소선지서가 각각 상하 혹은 분리되어 총 39권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의 구약성경은 헬라어 버전을 따르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7권이 많아 46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 이 구조를 언급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내게 대하여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이 구절은 시편이 단순한 시집이 아닌, 케투빔을 대표하는 중요한 문서로 이해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성경이란 용어는 신약성경이 아니라 구약성경입니다. 요 5:39 신약성경이 공식적으로 27권으로 확정된 시점은 서기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의 책이 시편이라는 점도 시편의 중심적인 신학적 위치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7가지 말씀 중에 3 말씀이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시편 22:1절, “내가 목마르다”는 시편 69편 2절,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는 시편 31편 5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짧은 장은 시편 117편(2절), 가장 긴장은 시편 119편(176절), 가장 중간 장은 시편 118편 8절입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성경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이 말씀은 삶의 나침반과 같습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두꺼운 책은 시편이고, 가장 두꺼운 장은 겉장(?)입니다.
시편은 90편 모세의 시에서부터 137편 바벨론 유수까지의 거의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쓰여진 시들을 편집한 책입니다. 이렇게 방대한 시편을 한편의 설교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시편의 제목을 통해서 시편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1) 테힐림(Tehillim)
히브리어로 시편은 테힐림(Tehillim), 곧 “찬양들”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시편의 가장 많은 유형이 찬양이 아니라 탄원시라는 점입니다.
탄원시는 거의 시편이 반을 차지한다(70편). 고난과 절망, 억울함과 원통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시들이 가득합니다. 일반적으로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경험할 때의 감정이라면, 탄원은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를 경험할 때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진솔하게 하나님에게 고합니다. 하지만 시의 대부분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하는 찬양으로 마무리됩니다. 그 원인은 탄원 중에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시 73:17).
시편 13편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로 시작하여 “나는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로 끝납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부르고, 끝내는 찬양으로 돌아가는 이 믿음의 여정을 우리는 시편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시편 119:71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백하며,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신앙의 깊이를 더하는 연단의 도구가 됩니다.
세상에 의미 없는 고난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그것을 외면하거나 원망하기보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고난의 의미를 찾고, 신앙으로 반응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2) 프살모이(Psalmoí)
헬라어로 시편은 프살모이 (Psalmoí), 즉 “현악기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시편이 단지 말로 낭독되는 책이 아니라, 악기와 함께 예배의 자리에서 드려졌던 찬양의 예전서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편의 표제를 보면 음악 용어가 여러번 등장합니다.
시편 98편은 선포합니다.
“수금과 노래하는 소리로 찬양하며, 나팔과 뿔나팔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예배에서 레위인들과 함께 다양한 악기들을 사용하여 시편을 불렀습니다.
이 전통은 초기 기독교 교회와 중세 수도원의 기도 시간에도 계승되었고, 지금도 전통 교회에서 시편은 예배 찬송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시편은 예배의 언어입니다. 단지 낭독하거나 묵상하는 것을 넘어서,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단조롭지 않습니다. 때로는 절규이고, 때로는 기쁨이고, 때로는 침묵 가운데 속삭이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하나님에게 악기에 맞춰 노래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3) 시편(詩篇)
‘시편’이라는 명칭은 한자로 “시(詩)의 편(篇)”, 즉 시로 구성된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산문이 이성에 호소한다면, 시는 감성에 호소합니다.
시는 설명보다 체험을, 논리보다 느낌을, 이론보다 고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소개하며 시작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23편은 신앙인의 고백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시편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것은 숨기거나 미화된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낸 신앙의 고백입니다. 때로는 원망이 섞이고, 때로는 두려움이 가득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있습니다. 그 신뢰가 시편을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제시합니다.
시편 146편부터 150편은 시편의 결론입니다. 모든 시편이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야’는 ‘여호와’란 뜻이고 ‘루’는 ‘너희는’이란 뜻이고 ‘할렐’은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할렐’에서 파생된 단어가 시편의 제목인 ‘테힐림’입니다.
특별히 시편 150편은 시편의 세가지 제목의 의미를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종 악기가 등장하며 현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한다는 뜻의 ‘프살모이’란 제목을 이해할 수 있고, 운율과 리듬을 갖추고, 같은 단어 같은 표현을 되풀이함으로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시이고,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라는 선언함으로 시편의 결론을 내립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토라와 네비임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이고, 케두빔은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신앙고백입니다.
시편에는 찬양, 감사, 기쁨 등의 내용도 있지만, 절망, 좌절, 불안, 불평 등과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믿어 결국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인생은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존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를 떠나 천성을 향해 가는 여정입니다.
여정 중 그는 낙심의 늪, 허영의 시장, 절망의 성 등 다양한 시련과 유혹을 겪으며 믿음과 소망을 지켜나갑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의 짐을 벗고, 천국 문 앞의 강을 건너 마침내 천성에 도달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장미빛 아스팔트만 있지 않습니다.
건너야할 강도 있고, 넘어야할 산도 있고, 지나야할 광야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시인처럼 끝까지 인내하여 찬양으로 완성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난하지만 부요한 서머나 교회
서머나 교회
‘서머나’라는 이름은 “몰약”이라는 향료에서 유래되었다. 8,9피트의 높이에 아라비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라는 가시 돋친 나무로서 쓴 맛을 지니고 있으며, 그 향기는 대단히 훌륭하여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께 드리기 위해 준비해 올 만큼 값지고 훌륭한 향료였다.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서머나까지는 약 60Km 정도로 돌무쉬’(미니버스)로 1시간이 걸린다. 오늘날은 이즈미르(Izmir)라 불린다. 성서의 지역 이름은 이슬람 국가가 점령한 곳은 바뀐다. 에베소는 ‘셀축’으로, 서머나는 ‘이즈미르’로 바뀌었다. 서머나는 당시에도 번창한 도시였지만 현재에는 이스탄불, 수도인 앙카라에 이어서 터키에서 세번째 큰 도시이다. 현재는 약 400만 정도 살고 있다.
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마다 예수는 자기표현을 달리하고 있다. 에베소 교회의 경우는 ‘일곱 별을 잡고 일곱 촛대를 오가는 자’라고 했다. 서머나 교회에서 ‘처음이요 나중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라고 했다. 계시록 22:13절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했다. 처음이요 나중이라는 뜻은 예수는 인간의 생사화복은 물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시다는 의미이다. 마치 인간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있다. 마치 내 뜻대로 시작하고 내 뜻대로 끝내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배후에 알파와 오메가 되는 예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다. 또한 그분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이 첫 열매가 되어서 모든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살게 하였다.
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환란
교회사에 기독교의 10대 박해 사건이 나온다. 처음으로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은 AD 64년 로마가 불이 타면서 네로 황제가 희생양으로 기독교인을 지목하면서부터이다. 이어서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을 신으로 우상화하면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도미시안은 베스파시안 황제의 아들이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티토(Titus)의 동생이다. 네로가 죽고 69년 한해에 4명의 황제가 바뀔 정도로 로마는 정치적 혼돈에 빠졌다. 베스파시안이 정권을 잡고 안정을 찾았다. 그의 아들 티토가 이어서 황제가 될 때까지는 기독교는 특별한 탄압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도미티안이 황제(81 -96년)가 되면서 자신을 신으로 우상화 시키고 유태인들이 매년 예루살렘성전에 받치던 헌금을 자신에게 받칠 것을 명령 했다. 이를 거부하는 유태인과 황제가 신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인의 대대적인 박해가 이루어 졌다. 사도 요한은 이때 유배를 당하여 밧모섬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였다.
당시 서머나 교회는 외적 환란을 많이 받았다. 서머나 교회의 환란과 관련되어 대표적인 인물은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이다. 그가 나이 86세 되어 예수를 부인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위협을 받았다. 그 때 그는 “86년 동안 한번도 나를 부인하지 않은 분을 내가 어찌 부인할 수 있겠는가”라며 죽음을 택했다. ‘폴리캅 기념교회’에 가면 화형 당하는 장면이 천장에 그려져 있다.
자칭 유태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내적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외적으로 거룩한 것 같으나 내적으로 썩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회칠한 무덤 같다고 했다. 종교생활은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율법을 지키지만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린 자들이다.

궁핍
서머나 교회는 외적으로 볼 때 지질이도 가난하고 볼품없고 비천한 교회였다. 경제적으로도 그리스도인들은 때문에 많은 불이익을 당했다. 오늘날 무슬림에서 개종을 하면 순교를 각오하고 모든 무슬림으로의 특권을 포기해야 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의 성일은 금요일, 유태교의 성일은 토요일, 기독교의 성일은 주일이다. 모슬렘 국가에서는 주일은 그냥 보통 날이다. 그런 곳에서 크리스천으로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여 보자. 성지순례 중에 알렉산드리아행 버스에서 예수를 믿는 청년을 만났다.
그에게 몇가지 궁금한 점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교회사에 보면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AD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예수의 신성만을 인정하는 단성론(Monophysitism)을 주장함으로 정죄된 적이 있었다. “콥틱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성론을 믿는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지금 콥틱교회는 동방정교회에 소속되어 있고, 예수께서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어떻게 인성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오히려 나에게 반문을 하는 것이다. “카리로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사람들이 거의 없고 관광객만 있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카이로 대학을 나와서 컴퓨터 업계에 근무하고 있는데,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금요일에 예배드립니다.”라고 했다. 모슬렘 국가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잘 믿으면 믿을수록 세상적으로 더 어려울 수밖에는 없다.
이런 힘든 상태인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궁핍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부요한 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말을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도 있다. 외적으로는 많은 것 같은데 한 꺼풀만 벗기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서머나 교회와는 반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자이라고 하나 실상은 가난한 자라고 책망을 받았다.
10절: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고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환란에는 10일이란 정해진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참기 어려운 것은 고난이 계속될 것 같기 때문이다. 교도소에서 형을 언도 받은 사람이 재판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사람보다 마음 편하다고 한다.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그 고난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법, 고난의 양이 채워지면 반드시 광명의 날이 온다.
자신의 잘 못 때문에 받는 고난은 회개해야 하지만, 믿음 때문에 받는 시련은 금보다 귀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6-7)
충성
忠誠 이란 한문을 보면 충은 가운데 中, 마음心, 성은 말씀言, 이룰 成이다. 이것을 이어서 풀이하자면 ‘중심의 말을 이루는 것’이 충성이다. 중심으로 말은 하지만 그 말을 이루기는 쉽지가 않다. 말을 하는 사람의 중심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그 말을 이루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행동이 따라야 하는데, 행동은 희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2)
주님은 세상의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권고하기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줄 것이다”라고 했다. 면류관은 경주나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에 주는 ‘승리의 관’이다. 온갖 핍박과 여러움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을 가리킨다. 우리는 ‘세상의 면류관’이 아닌 ‘하늘의 면류관’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세상 기준으로 살아서는 안되고 하늘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 바울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딤후 4:7-8절의 말씀을 의지하며 말씀을 마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절)

첫사랑을 잊어 버린 에베소 교회
에베소 교회
의학에는 두 종류가 있다. 치료의학과 예방의학이다.
요즘은 치료의학보다 예방의학이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치료의학이란 병이 발생된 후 치료하는 것이고, 예방의학은 검진을 통하여 발병 전에 예방하는 것이다.
이번 주부터 소아시아의 7교회의 영적 건강 상태를 진단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진단 한다는 것은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예방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계시록은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유배되어 쓴 글이다.
7 이란 숫자는 완전 숫자로서 7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소아시아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교회에 주시는 뜻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계시록은 AD 100 경에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당했을 때 쓴 글이다.
그중에 특별히 2장과 3장은 소아시아의 7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영적인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7 교회 중 4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들었고,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 없이 칭찬만 들었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 없이 책망만 들었다.

첫 번째 편지는 에베소 교회를 위한 것이다.
이곳은 아볼로, 바울, 요한 등이 목회한 곳이다.
특히 요한은 이곳에서 목회를 하다가 이곳에서 80K 떨어진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에베소는 항구도시로 소아시아에게 가장 큰 도시이다.
이곳에서는 고대 7대 불가사이인 ‘아데미 신전’이 있다. ‘아르테미스 (Artemi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으로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로 불린다.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폴론과는 남매지간으로 달과 사냥의 여신이다.
고대인들은 아르테미스를 유방이 가득한 여신으로 묘사할 정도로 풍요의 신으로 숭배하고 있다.
사도행전 19장에 에베소에서 바울이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데메드리오’에 의해 고소를 당해 재판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에베소 교회는 많은 칭찬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망을 피하지는 못했다.
2장 1절에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라고 했다.
1장 마지막 절인 20절에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이고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했다.
사자란 단어는 영어에는 Angels로 번역이 되었고, 현대인의 성경에는 ‘교회 지도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촛대 안에는 올리브기름이 있다.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고 있다. 교회에는 성령이 있을 때만이 빛을 발할 수 있다.

- 칭찬 (2, 3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주께서 에베소 교회의 수고, 인내, 부지런함 등에 대하여 안다고 했다. 안다는 경험해서 아는 ‘그노스코’가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안다는 ‘오이다’를 썼다.
바울이 쓴 에베소서를 보면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옥중에서 쓴 글이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에베소 교회에 대한 소식을 로마 옥중에서 듣고 있었다.
엡 1:15-16절을 보면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라고 했다.
바울은 박해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의 소식을 듣고 감사했다.
이민 오면 여러가지 이유로 교회와 관련된 사람들이 ¾ 정도 된다. 한국에서는 인구의 ¼ 이 기독교인데, 호주에 와서 갑자기 신앙을 생긴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호주에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보다 한국에서 하는 사람이 순수하고, 한국보다는 중국에서 하는 사람이 더 순수하다.
하지만 순도 100%의 신앙은 북한에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다.
콘스탄티노플 황제에 의하여 선포된 313년의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를 양적으로 팽창시켰지만, 신앙의 순도는 떨어지게 되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니라 예수가 모든 것이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증인(Witness)’이란 말은 ‘순교자(Martyr)’에서 나왔다. 개인의 믿음을 지키기도 어려운 판국에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책망 (4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같은 일을 계속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Mannerism은 ‘항상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일’ 이다. 연애를 할 때는 구명 쪼기도 없이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 마치 결혼이 사랑의 완성인 것처럼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변한게 아니라,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랑, 그 열정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결혼했으니까 사는 것이고’, ‘살기 위하여 일하는 것이고’, ‘아이를 낳으니 키우는 것인가’? 또 신앙생활은 어떤가? ‘주일이니까 예배드리고’, ‘직분 때문에 봉사하고’, ‘체면 때문에 헌금하는 것인가’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도 이런 모습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최대의 사명’(The Great Commission)은 마태복음 28장의 선교이고, ‘지상 최대의 계명’(The Great Commandment)은 마태복음 22장의 사랑이다. 마태복음 22장에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율법중의 가장 큰 율법이 무엇입니까? 묻는다. 이때 예수님은 위로는 하나님 사랑 옆으로는 이웃 사랑이라고 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도 같은 이야기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질문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되 질문을 한다. “율법에는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이 때 율법사는 마태복음 22장의 예수님과 동일한 대답을 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마22:27)
고전 12장은 은사장이다.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은사에 대하여 언급을 하시고 나서 13장으로 넘어가면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참 많은 일을 했고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처음 사랑을 잊어버려 책망을 받게 된 것이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 경고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회개(Repentance)란 헬라어 ‘메타노이아(metanoia)’란 ‘방향을 바꾸다, 생각을 바꾸다’라는 뜻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한 중세의 정신에서,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는 ‘그리스, 로마’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종교개혁(Reformation)은 잘못된 전통과 권위로 변질된 교회를 개혁시켜, 성서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부흥의 불길은 1907년에 길선주 목사의 ‘회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회개만이 교회가 살길이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했다.
본문에서 촛대는 교회를 말한다. 그렇다면 주님의 교회를 옮기겠다는 말이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인기 중에 상영 중이다. 대사 중에서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라고 했다.
국가란 이름으로 국민을 탄압하는 잘못된 정부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교회도 건물이 아니라 교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슨 말인가? 촛대를 옮기겠다는 말은 교인을 옮기겠다는 말이 아닌가!
마태복음 25장의 악하고 게으른 종의 1달란트 뺏어, 착하고 충성된 10달란트 가진 자에게 준 것과 같이.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겠는가? 사랑으로 만났다가 미움으로 헤어지겠는가? 영으로 시작했다고 육으로 마쳐야 하겠는가?
아니다. 정말 아니다. 회개하자.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주께서 예비하신 상급을 받아야 한다.

- 상급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우리 모두에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기를 바란다.
들은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행함도 있어 모두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