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 (델포이) 개관
델피(Delphi) 혹은 델포이(Delphoi)는 아테네 북서쪽으로 180킬로미터 떨어진 해발 2457미터의 파르나소스 산의 남쪽 경사면, 코린토스만을 바라보는 양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화 속에서 이곳은 제우스가 동서 세상의 끝자락에서 반대방향으로 풀어놓은 두 마리의 독수리가 만난 장소로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세상의 중심이라 여겨졌고, 이러한 까닭에 지구의 배꼽을 상징하는 ‘옴팔로스(Omphals)’라는 커다란 돌이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보관되어 있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동서축을 남부 이탈리아에서 터키의 앙카라까지로,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마케도니아까지를 남북의 축으로 본다면 델피가 실제로 지리적인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피가 자리 잡은 파르나소스 산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믿었다. 그중에서도 신전들의 배경을 이루는 가파른 절벽을 ‘파이드리아데스’라고 부르는데, 이는 빛나는 바위라는 뜻이다. 이 절벽은 다시 둘로 나뉘어 서쪽 절벽은 장밋빛 바위라는 뜻의 ‘로디니’, 동쪽절벽은 불타는 바위라는 뜻의 ‘플레부코스’라고 한다. 남쪽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두 절벽에 반사되어 마치 조명처럼 신전을 밝히고 있어서 ‘빛의 신’ 아폴론의 성지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이곳은 하늘과 땅 지하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우주의 축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분노한 제우스 신이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홍수를 보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의인 데우칼리온과 그의 아내 피라가 방주를 타고 표류하다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 바로 이 산의 정상이었으니, 이는 곧 하늘로 통하는 길을 의미한다. 또한 플레부코스 절벽의 한 구석에 위치한 ‘카스탈리아 샘은’ 하데스가 지배하는 지하세계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카스탈리아 샘의 물은 두 절벽 사이에서 흐르는 계곡수와 합쳐져서 산 아래쪽 계곡으로 이어지는데, 이 물이야말로 지난 수천 년간 델피의 드넓은 올리브 숲을 풍요롭게 키워낸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인 초기 미케네 시대에도 델피는 원시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신성한 땅이었다. 그 무렵 델피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숭배하는 성역으로서 신탁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후로 테미스, 데메테르, 포세이돈 신을 모시다가 미케네 시대 말엽에 이르러 아폴론이 신탁의 수호자가 되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차츰 명성을 얻으면서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그리고 델로스의 아폴로 신전과 함께 그리스의 종교적인 중심지가 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신탁소가 되었다.
델피는 신탁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성역주변의 도시국가들이 신전관리와 제례유지를 위해 결탁한 인보동맹의 핵심이 되기도 했으나, 로마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 쇠락의 조짐을 보이다가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이교도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피의 역사도 함께 막을 내렸다. 이후 중세시대에는 성역의 폐허 위에 카스트리 마을이 세워져 아폴론의 성역마저 자취를 감추었으나 19세기 말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발굴에 착수하여 마을의 서쪽을 재건하고 델피라 명명하였다.
– 아폴론과 델피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이자 아르테미스와 남매인 아폰론은 델로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가 올림포스를 떠나 델피로 왔을 때 이 땅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인 거대한 뱀 피톤의 성지였다. 델피가 신탁을 내리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여긴 아폴론은 왕뱀 피톤을 죽인 뒤, 이곳을 차지했는데 그를 모시는 여사제는 피티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피티아는 피톤이라는 왕뱁에서 얻어진 말이다.

가이아의 아들인 키클로페스 3형제를 죽이는 불경죄를 저지른 아폴론은 테살리아 지방의 템페 강에 가서 몸을 씻고 정죄를 한 뒤에 다시 이곳에 돌아와, 카스탈리아 샘가에 템페 강의 월계수를 옮겨 심었는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델피에 신탁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은 정화의식을 거쳐야 성소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땅을 확보한 아폴론은 추종자들을 찾다가 크레타에서 오는 배를 보고 돌고래의 모습으로 그 배에 뛰어 올라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고 선원들을 신도로 삼아 이곳으로 데려왔다. 이때부터 그는 ‘델피니오스’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성지 또한 ‘델피’라 명명되었다. 하지만 아폴론의 이런 행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델피의 지명의 유래를 자궁이라는 뜻을 지닌 ‘델피스delphys’라는 말에서 찾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인정을 받고 있다.
– 신성한 길
‘신성한 길’이란 델피 성역의 입구에서 아폴론 신전에 이르는 길로 이 길의 좌우에는 각양각색의 봉헌물과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는 대부분 야만인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승리, 또는 도시국가간의 전쟁 이후 승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아폴론 성역에 봉헌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종교적 중심지였던 델피는 신탁 의뢰인들이 가져온 봉헌물들을 팔아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시민들은 사치와 풍요를 누렸다. 지금은 황량한 유적 곳곳에는 각 도시국가에서 세운 보물창고와 금은으로 만든 각종 기념비 등이 즐비했고 특히 아폴론 신전의 입구에는 각국의 봉헌물들이 화려하게 늘어서 있었다. 오늘날 베네치아 성 마르코 성당 앞에 있는 사두마차 조각상은 원래 로도스에서 델피에 바친 봉헌물이었으며, 이스탄불의 히포드롬 광장에서 볼 수 있는 청동 기둥도 이곳에 서있던 기념비였다.
– 아테네의 보물창고와 시빌레 바위

아테네인들이 마라톤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 아폴론에게 바친 봉헌물을 보관하기 위해 바친 보물창고로서, 수많은 도시국가의 보고 중 유일하게 원형을 볼 수 있는 유적이다. 이 창고는 기원전 500년경 도리아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2개의 기둥 및 다양한 부조장식물과 더불어 벽에는 갖가지 비문들이 남아있다. 1904-1906년에 아테네 시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는데,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델피 성역 중 가장 완벽하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아테네 보고의 맞은 편 언덕에 자리한 가이아 여신의 성소는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왕뱀 피톤이 신탁을 내리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근처에 놓인 회색 바위는 당시 델피의 여사제 시빌레가 그 위에서 신탁을 내렸다고 해서 ‘시빌레 바위’라고 불린다.
– 아폴론 신전
델피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아폴론의 신탁이 행해졌던 곳이다. 기원전 6세기 경 이곳에 지어진 신전은 건설비를 봉납한 아테네 귀족 가문의 이름을 따서 ‘알크메오니다이 가문’의 신전이라 명명되었으며, 가로 6개, 세로 15개의 도리아식 기둥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신전이 기원전 373년 지진으로 파괴되자 기원전 330년 다시 재건되었지만, 이마저 다시 지진으로 무너져 버려 현재 기둥 한두 개와 건물을 지지하는 축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바위들을 퍼즐처럼 짜 맞추어 쌓은 축대의 표면에는 300여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비문에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사이에 쓰인 것으로 고대인들의 지혜를 담은 문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전의 내부에는 동쪽과 서쪽으로 양분되는데 동쪽에는 포세이돈을 위한 제단, 제우스 동상, 아폴론 동상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의 제단에서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고 한다. 신탁은 신전의 서쪽 안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발굴당시 파손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 델피의 신탁과정
아폴론의 신탁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성소 입구의 카스탈리아 샘에서 몸을 씻어 심신을 정화하고 적당한 희생동물을 골라 봉헌물로 바친 뒤 신전으로 올라가 신관에게 신탁을 받으러 온 이유를 말한다. 신탁의 순서는 추첨으로 결정되는데 델피에 봉헌물을 많이 바쳤거나 도움을 준 도시국가의 시민은 우선적으로 신탁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신탁을 받으러 몰려들었기 때문에, 이는 대단한 특권이었으며 몇 달씩 델피에 머무르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신탁 의뢰인의 사연을 들은 신관은 신전에서 가장 깊숙한 지하방에 있는 여사제 피티아에게 질문을 전달하게 되는데, 오직 피티아 만이 지하방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신관은 방밖에서 대기해야 했다. 피티아는 카스탈리아 샘물을 마시고 월계수 잎을 씹은 뒤 신성한 삼갇대에서 앉아 지하의 갈라진 바위 틈에서 나온 증기를 들이마신다. 그리하여 환각 상태가 된 피티아가 신의 계시를 받아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면, 신관이 이를 운문의 형태로 받아 적어서 의뢰인에게 전달하였다. 델피 신탁이 애매모호함으로 악명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실성을 의심받지 않았던 까닭은 인간이 신의 의지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고대인들의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탁은 인간이 해석하기에 따라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곤 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유명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을 듣고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지만, 오히려 그 길이 자신이 태어난 테바이로 향하는 길임을 알지 못했기에 결국 신탁이 예언한 비극을 당하고 말았다. 아폴론 신전의 양쪽 대문 기둥 중 하나에 새겨져 있었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뜻을 지닌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이라는 문구는 신탁이 아무리 영험하다고 해도 우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고대인의 지혜가 담겨있다. 다른 기둥에는 ‘아무 것도 지나치지 말아라’는 뜻을 지닌 ‘메덴 아간(meden agan)’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 플라타이아이 삼각 청동 기둥
페르시아 전쟁 중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페르시아군의 방패를 녹여 기둥으로 만들어 아폴론 신에게 바친 승리의 기념비이다. ‘델피 삼각기둥’라고 불리기도 한다, 본래 아폴론 신전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원형은 세 마리의 뱀이 서로 꽈리를 틀어서 중앙의 기둥을 이루고 그 위로 세 개의 머리가 황금으로 된 세발솥을 떠받치고 있었으며, 몸체에는 이 전투에 참가했던 31개 도시국가명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델피가 쇠락하자 로도스에서 봉헌한 사두마차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고, 1204년 십자군에 의해 머리 윗부분이 절단되어 무기로 만들어지거나 현금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이스탄불의 히포드롬 광장에 가면 꽈리를 튼 몸체만 남아있는 델피의 청동기둥을 볼 수 있다.
– 델피 원형극장과 스타디온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원형극장으로 현재의 모습은 로마시대에 개축된 것이다. 총 35열의 관람석에서 약 5천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여름이면 연극이나 콘서트가 공연되기도 한다. 극장의 정상에 오르면 델피 유적지뿐 아니라 광활한 올리브 숲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원형극장의 서쪽 출구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따라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의 경기장인 스타디온(Stadion)이 나온다. 이는 기원전 5세기에 처음 건설되었으나 지금의 모습은 2세기에 개축된 것으로 기단부만 남아있는 동쪽출입구는 본래 3개의 아치형태로 되어 있었다. 약 7천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고대에는 4년마다 이곳에서 피티아 경기가 개최되었다.
– 김나시온(Gymnasion)
아폴론 성역과 아테나 여신의 성역인 마르마리아 사이에 위치한 김나시온은 기원전 4세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고 이후 로마시대까지 보수가 계속되었다. 델피의 김나시온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상층부는 스토아 및 달리기 훈련을 위한 곳이었고, 하층에는 체육관, 수영장, 목욕탕 등이 있었다. 이곳은 특히 피티아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훈련장소로 이용되었으며 비문에 따르면 철학가, 시인, 천문학자와 같은 지식인들도 이곳에 와서 젊은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델피의 김나시온은 경기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한 신체의 단련 뿐 아니라 지적 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 피티아 경기
아폴론 신을 기리기 위한 경기로 처음에는 각 도시국가의 대표들이 모여 음악과 시를 놓고 경합을 벌였으나, 나중에는 레슬링, 복싱, 달리기, 경마 등의 운동 경기도 추가 되었다. 우승자는 월계관을 받았으며 성역 내에 자신의 상을 세울 권리를 얻었다. 이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월계관이 수여되었다.
– 아테나 프로나이아
아테나 여신을 모시던 성역으로 아폴론의 성역보다 아래쪽 산기슭의 올리브 숲에 둘러 싸여 있다. 이 신전은 ‘아테나 프로나이아(Athena Pronaia)’라고 불리는데, 프로나이아는 ‘신전 앞에’라는 뜻으로 델피의 주신 아폴론 신전 앞에 있는 신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입구의 정면에는 아테나 여신의 제단이 있고, 2개의 보물창고, 톨로스라고 불리는 원형 신전, 후대에 지어진 아테나 신전 등이 모여 있다. 그 중 톨로스는 직경 13, 5미터의 둥근 대리석 구조로 된 도리아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4세기 초에 지어진 것이다. 그리스 유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알려진 이 톨로스 신전에는 총 20개의 기둥이 있었으나 현재 3개만 재건되어 있으며 정확한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편 신전 뒤편에 놓인 커다란 바위들은 페르시아 군이 이 성역을 침범하려 했을 때 스스로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져서 병사들을 덮쳤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 델피 고고학 박물관
델피 유적 입구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은 규모는 작지만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 하나이다. 1980년에 완공된 이 박물관에는 아폴론의 성역과 마르마리아에서 발굴된 조각품, 봉납물, 비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세계의 배꼽을 의미하는 옴팔로스이다. 옴팔로스는 계란형 구체 표면에 탯줄을 감아놓은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지구상의 신성한 장소를 표시한 것이라 추측할 뿐, 정확한 의미는 밝혀지지 않았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