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중국) 제자백가의 사상 2 – 묵가의 사상
[목차]
– 묵가
– 묵가의 사상
.묵자
.묵자 서
– 별묵
– 묵가
묵가는 묵자(墨子)를 시조로 하며, 겸애(兼愛)를 주장하여 유가의 형식주의와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하늘(天)이 만민을 겸애(兼愛: 박애의 뜻)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도 서로 겸애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리사욕을 타파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절검(節儉)과 근로(勤勞)를 내세웠다.
묵가는 천귀사상(天鬼思想)을 중심으로 종교적 색채를 띠었으며, 또 삼표(三表)의 논리로써 경험을 중시하는 실증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이 경향은 후세 별묵(別墨)이라 불리며, 논리학파인 사공파(事功派)로 분파되었고, 사공파는 다시 전도파(傳道派) · 실행파(實行派) 및 기타로 나뉘었다. 실행파는 묵자의 역행주의(力行主義)를 이어 허행(許行) · 진상(陳相) 등의 철저한 무정부주의 · 사회주의 · 무위자연의 사상으로 흘렀다.
– 묵가의 사상(墨家-思想)
전국시대에 묵가(墨家)는 유가와 병립하는 유력한 학파였다. 맹자는 묵자와 양주(楊朱)의 사설(邪說)이 유행되고 있는 데 분격하고 있었으며 한비자(韓非子)도 ‘세상의 현학은 유儒)와 묵(墨)이다’라고 하였다. 한대 초기에는 학자를 통칭하여 ‘유묵’이라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후 중국의 사상계에 있어서는 유가사상만이 역대 왕조의 공인을 받아서 비상하게 번영하고 묵가사상은 이단사상이라 하여 배격되었다. 묵가사상 및 그 원전(原典)인 묵자(墨子)에 대한 재평가가 청조의 권위가 동요한 19세기 말에 시작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묵자는 처음에 유가에 나아가 배웠다고 하지만 그의 사상은 거의 유가사상에 반대되고 있다. 유가가 부모형제들의 혈연관계를 윤리의 기본에 두는 데 반하여, 묵가는 그러한 차별에 관계하지 말고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였다(兼愛論). 유가가 인재의 등용에 있어 덕의 유무를 기준으로 하여 군자와 소인의 차별을 엄격히 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농민이건 상공업자건 구애할 것 없이 재능있는 자는 계속해서 등용하라고 하였다(尙賢論). 유가가 관혼상제나 일상의 의식을 중시하는 데 대하여 묵가는 군주의 긴요하지 않은 지출을 덜고(節用論), 궁중 음악 등은 그만두고(非樂論) 장례의식 등도 간소하게 하라고 하였다(節葬論). 유가가 인간의 도덕적 실천(人道)을 중히 여기면서도 오히려 인력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운 천도(天道)나 천명(天命)을 인정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일체 명(命)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非命論), 인간의 행위의 선악은 모두 귀신에게 감시받으며, 귀신은 정확하게 그에 대응하여 상벌을 내린다고 한다(明鬼論). 유가가 개개인의 도덕적 자각을 중요시하고 어느 군주를 섬기느냐 하는 판단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하위자(下位者)는 상위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며(尙同論), 인간 중의 최상위인 천자(天子)도 천(天)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였다(天志論). 이러한 특징을 구비한 묵가사상은 개조(開祖)인 묵자가 이끄는 집단이 성벽의 수축이나 방어작전 등에 종사하는 공인(工人)의 집단이었다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그것은 유가의 사상이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학문을 토론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묵가사상은 묵자의 사후 그 지위를 이은 수령(首領) 밑에 결속한 집단의 내부로부터 서서히 정리되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묵자(墨子)는 그 집단 활동의 결정(結晶)인 것이다.
○ 묵자(墨子; 생몰 연대 미상)
공자(孔子) 보다 조금 늦은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활약한 묵가(墨家)의 개조(開祖). 이름은 적(翟)이며 송(宋) 또는 노(魯)의 태생이라고 전해진다. 묵(墨)이라는 성은 자자(刺字)의 형(刑)을 받은 죄인의 출신을 표시한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깎고 갓을 쓰지 않았으며, 맨발에 짚신으로 돌아다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의관에 위의(威儀)를 바르게 한 상류계층 출신은 아니고, 아마도 각지의 국군의 의뢰를 받아서, 성벽의 수축이나 방어작전에 종사하는 공인(工人) 집단의 수령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묵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초왕(楚王)은 공수반(公輸般)이 발명한 운제라는 공성기계를 사용하여 송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묵자는 노에서, 10일간 주야를 달려와 공수반(公輸般)과 도면 위(圖上)에서 공방작전을 전개한 끝에 공수반의 공격 수법을 무력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수반이 자기를 살해하려는 것을 안 묵자는 “송(宋)을 공격하여도 송의 성벽에는 자기의 제자 금활리(禽滑梨)가 300인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묵자가 인솔하는 집단은 도성의 수축이나 방위라는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묵자의 법(法)’이라든가 ‘묵자의 의(義)’라고 불리는 규율 밑에서 굳게 결집하여 있었다. 묵자 사후 그 수령의 지위는 거자(巨子) 라고 불리는 후계자에 의해 전국말까지 대대로 계승되어 오면서 그 집단원은 거자(巨子)의 명에 헌신적으로 복종하였다. 묵자는 처음에 유학을 배웠다고 하나 뒤에 그것을 탈각하고 혈연적 폐쇄주의를 타파하여 사람들이 널리 서로 사랑할 것(兼愛主義), 자기 국가의 이익 본위의 전쟁을 그칠 것(非攻主義), 신분을 불문하고 재능 본위로 인재를 등용할 것(尙賢主義), 쓸데없는 의례적 낭비를 절약할 것(節用節葬主義)등 유가의 학설과 상반되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뒤에 맹자로부터 ‘사람의 도를 무시하는 금수의 가르침이라’하여 비난과 공격을 당함으로써 이후 중국에서는 19세기 말에 이르도록 묵자사상은 이단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묵자의 주장에는 춘추전국시대의 변동을 사회의 밑바닥에서 경험한 자의 솔직한 소리가 반영되어 있다. 그 점에서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그 겸애론·비공론(非攻論) 등은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 묵자(墨子) 서
중국의 전국시대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묵가 집단에 의하여 집대성된 저작집. 일부는 개조(開祖)인 묵자 자신의 언론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은 그의 후배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저작으로 추측된다. 원래 71편이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53편이다. 묵자(墨子)의 제편(諸篇)은 그 내용에 의하여 다음의 다섯으로 분류된다. ① ‘친사(親士)’부터 ‘삼변(三辯)’까지의 7편, 이것은 묵가의 잡론집이다. ② ‘상현(尙賢)’부터 ‘비명(非命)’까지의 23편, 이것은 묵가의 주요 사상으로 이 책의 핵심을 이룬다. ③ ‘경(經)’ ‘경설(經說)’ ‘대취(大取)’ ‘소취(小取)’ 6편, 이것은 말의개념이나 표현의 논리를 분석한 것이다. ④ ‘경주(耕柱)’로부터 ‘공수(公輸)’까지의 5편, 이것은 개조 묵자의 언행·사저집으로 공자를 논란한 비유(非儒)편도 이 부류에 들어 있다. ⑤ ‘비성문(備城門)’ 이하의 11편, 이것은 묵가의 방어전술을 적은 것이다. 이들 중에서 ③류는 일괄하여 묵변(墨辯)이라고도 호칭되는데 기하학·광학·역학 등에 관한 명제(命題)도 포함하는 특색 있는 중국 고대의 논리학의 부분이다. 또 ⑤류는 성의 방어전술에 필요한 병기·기구·설비·자재의 제작이나 취급하는 법을 논한 이색적인 부분으로서 성의 방어를 청부하는 묵자 집단의 특성을 전한 것이다. 그렇지만 ‘묵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유가(儒家)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을 갖는 ②류일 것이다. 즉 ‘상현(尙賢)’ 은 관리의 임용에는 신분·직업에 구애하지 않고 넓게 문호를 개방하여 인재를 구하라고 말하였고, ‘상동(尙同)’은 상위자(上位者)의 명령에 하위자는 복종하여 부강을 달성할 것을 말하였고, ‘겸애(兼愛’는 자국과 타국, 자가와 타가의 차별을 없애고 사람은 널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비공(非攻)’은 전쟁이 불의이며 백성에게 해로움을 주장하고, ‘절용(節用)’ ‘절장(節葬)’은 군주의 의례적인 사치에 반대한 것이다. ‘천지(天志)’는 천(天)을 최고의 존재로 하여 천자(天子) 이하 이에 순종할 것을 말한 것이고, ‘명귀(明鬼)’는 사람의 사후의 영혼의 실재를 강조하여 그 상벌을 두려워하라고 말한 것이다. ‘비악(非樂)’에서는 궁정음악(宮廷音樂)이 백성의 이익에 배반됨을 말하였으며, ‘비명(非命)’에서는 숙명관을 배제하여 사람의 근면한 영위에 대하여 귀신은 반드시 보상을 준다고 말하였다. 이것들 10론(論)에는 각기 상·중·하의 3편이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가 분실, 23편이 남아 있다. 상·중·하 각편은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조금씩 자구나 사상 내용에 상위(相違)함이 있어 묵가의 주장의 변천이나 분파의 자취를 더듬을 수가 있다. ‘묵자’는 맹자에 의하여 이단사상으로 배격당한 이래 추종자를 거의 갖지 못하였으나, 청조(淸朝)의 고증학의 전성 속에서 재인식되어 손이양의 ‘묵자간고’와 같은 우수한 주석서가 제작되었다.
○ 별묵(別墨; 비정통 묵가)
.묵자가 죽은 후 묵가는 분열되었다. 묵자의 각파는 모두 묵경을 암송하였지만 서로 상대를 비방하며 상대를 별묵(別墨, 비정통 묵가)라고 불렀으며 서로 자기들이 묵가의 정통임을 자처하였다. 이것이 전국시대 묵가의 상황이다.
– 후기 묵가
1. 후기묵가의 상황과 『묵경』
묵자가 죽은 후 묵가는 분열되었다.『한비자(韓非子)』「현학편(顯學編)」에는 상리씨 유파, 상부씨 유파, 등릉씨 유파가 생겨났다는 기록이 있다. 양계초에 다르면 묵가는 네 파로 나눌 수가 있는데 상리근, 오후 등은 주로 근검과 역행에, 고획, 이치, 등릉자 등은 주로 이론적인 학문에, 송견과 윤문 일파는 주로 비공과 관용에 힘썼다고 한다. 묵자의 각파는 모두 묵경을 암송하였지만 서로 상대를 비방하며 상대를 별묵(別墨, 비정통 묵가)라고 불렀으며 서로 자기들이 묵가의 정통임을 자처하였다. 이것이 전국시대 묵가의 상황이다.
『묵자』에는 다른 편과는 달리 논리적 관심을 가진 6편의 특수한 논문이 실려 있는데 경상, 경하 편에서는 논리, 도덕, 수학, 과학, 사상에 관한 정의가 기록되어 있으며 경설상, 경설하 편에는 경상과 경하 두 편의 경문을 설명하였으며 대취, 소취 편에서는 논리적인 문제가 주요 관심사로 언급되어 있다. 이 6편의 목적은 묵가를 옹호하는 것이며 논리적인 방법으로 명가를 비판하고 있다. 이 6편을 통틀어서『묵경』이라고 한다.
도가나 명가의 이론은 모두 반성적인 사색의 결과이므로 양자 모두 일상적인 규범을 반대하였다. 그 반면 유가와 묵가는 상식을 옹호하는 학파였으며 실천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유묵은 실용을 중시하였기에 우주에 대한 견해도 상식에 근거했으며 변자들의 말을 궤변이라고 여기며 이를 반박하였다. 묵가와 유가는 명가의 이론을 반박하고 옹호하기 위하여 인식론적, 논리적인 여러 이론을 발전시켰다. 유묵이 감각적 관점에서 우주를 해석하였다면 변자는 이지적인 관점에서 우주를 해석하였다. 변자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근거가 필요했던 것만큼 학설을 표명할 때에도 이전보다 정확하고 치밀해졌다. 대체로 묵가는 유가보다 논변을 더 중시하였는데 그럼 면에서 순자 정명편보다 그 업적이 크다고 볼 수 있다.
2. 지식과 이름에 관한 토론
『묵경』에서 전개한 인식론은 일종의 소박 실재론이다. 지(知)란 인식능력이다. 인식능력 그 자체로 지식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며 인식대상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식능력인 시력을 가지고 있지만 인식대상이 있어야 만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지(知)는 인식능력이 인식대상과 접촉하여 생긴 지식이다. 다시 말하면 지식은 사람들의 주관 인식능력으로 사물과 접촉하는 것이며 사물의 형태와 모양을 모사해 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눈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사람에게는 여러 감각기관 이외에도 마음이 존재하고 있어서 우리는 이 마음에 의해서 지의 대상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지는 사물을 통찰한다. 지는 자기가 이미 인식한 것을 통하여 사물을 분석하여 탐구하는 일이다. 이는 눈이 사물을 명백하게 보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마음은 감관을 통하여 들어온 외물의 인상을 명백하게 해석한다. 예를 들면 꽃나무를 보면 그 형태를 감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복숭아 나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는 그 복숭아 나무를 우리의 경험 속의 나무의 종류 가운데에서 열거함으로서 가능해진다. 이로서 우리는 객관대상에 대한 앎이 확연해지게 된다.
이 밖에 또 다른 지식이 있는데 그것은 오관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이 감각기관을 통하지 않고 인식된 것은 예를 들자면 시간이 있다. 시간은 구(久-시간)는 모든 특정 시간을 총괄한 시간이다.
『묵경』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재능을 인간 생명의 본질로 보기 때문에 생명이란 육체에 지각능력이 깃든 상태를 말하며 수면은 지각능력이 있으나 지각작용이 없는 것이며 이 둘 다 없는 것은 죽음이다.
이밖에도『묵경』은 논리학 측면에서 우리인식의 근원과 그 종류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지식에는 문지, 설지, 친지, 합지, 명지, 실지, 위지가 있다. 그 중에서 문지, 설지, 친지는 인식의 근원의 종류를 말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인식의 종류를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자.
1) 문지(聞知)는 전수-자신이 직접 들었거나 전설이나 기록에 의한 얻은 것-를 통해서 얻은 지식을 말한다.
2) 설지(設知)는 추론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말한다.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토대로 미지의 것을 추측가능하게 한다.
3) 친지(親知)는 우리가 몸소 경험하여 얻은 지식을 말한다. 즉, 우리의 인식능력이 인식대 상인 사물과 접촉하여 얻은 지식을 말한다.
다음으로 지식대상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지식은 4종류로 나누어진다. 여기서는 명, 실, 명과 실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데 이는 명가의 독특한 관심사였다는 것을 알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들이다.
1) 명에 관한 지(名知)는 이름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이름은 실상을 일컫는 것으로 사물을 일컫는 수단이 된다. 이름은 세 종류는 달명(일반적인 것), 유명(분류된 것), 사명(개별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보편적인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달명(達名)이다. 물(物)은 모든 사물을 지칭하는 최고의 유의 이름인 달명이다. 실체가 있는 것들은 반드시 지니는 이름이다. 말이라는 이름은 유명(類名)이다. 그 종류의 사물은 반드시 이 이름을 가져야 한다. ‘장’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사명(私名)이다. 장은 한 사람의 고유명사로 이 이름은 단지 개인에게만 쓰여질 수 있다. 이 이름은 장씨라고 하는 실물에 국한되는 것이다.
2) 실에 관한 지는 실지이다. 다시 말하면 실지(實知)란 실상에 대한 지식이다. 실상은 이름이 일컫는 대상, 즉 이름이 지칭하는 개체를 말한다. 우리가 A를 사과라고 부른다면 A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실상이다.
3) 합에 관한 지는 합지(合知)인데 이름과 실상이 부합되는 지의 여부를 아는 지식이다. 어떤 사물을 보고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이 무엇이라고 불리는지를 안다면 이는 명실이 배합한 것으로 합지이다.『묵경』에 따르면 이름으로서 실상을 알 수 있는 언표에 이전(移轉), 제시(擧:호칭), 적용(加) 세 가지가 있다. ‘강아지는 개이다.’는 언표가 이전이다. 강아지는 개의 일종이다. 이것은 개라는 이름을 옮겨서 강아지라고 부른 것인데 즉, ‘이전’이다. ‘제시’란 그 이름을 말하여 그 실상을 제시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강아지와 개를 제시하여 강아지와 개의 실상을 제시하고 있다. 한 강아지를 보고 “강아지”라고 소리친다면 ‘이것은 강아지이다’라는 의미인데 강아지라는 이름을 개체에 적용한 것이기에 이른바 ‘적용’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대상을 강아지라고 부를 때 그것이 과연 강아지인지에 대해서 이름과 실상이 부합하는지의 여부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이름과 실상이 부합하는 여부를 아는 지식이 바로 합지이다.
4) 위(爲)에 관한 지식은 위지(爲知)이다. 위지란 어떤 일을 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뜻과 행위가 위지를 구성한다. 위지에는 존립(存), 제거(亡), 교역(易),소탕(蕩), 정상발전(治), 변화(化) 이렇게 여섯 가지가 있다.
「경설」: 갑옷과 누대는 존재가 목적이고 병은 제거가 목적이고 매매는 교역이 목적이고 소멸하여 없앰은 소탕이 목적이고 조성하고 양육함은 정상발전이 목적이고 개구리와 쥐는 변화가 목적이다.
이것은 행위의 목적 즉, 뜻의 차이에 따라서 위지를 분류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뜻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을 위지라고 한다.
3. 변에 관한 토론
소취편은 대부분 변辯에 관하여 토론한 것이다. 논변이란 시비의 구분을 밝히고 안정과 혼란의 근본을 규명하고 유사점과 차이점의 소재를 밝히고 이름과 실상의 이치를 고찰하고 이익과 손해를 규정하고 의심을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논변의 기능을 말한 것이다.
논변에서 이기기 위한 선력조건들 제시하고 있는 부분에서 제시되고 있다. 그 방법은 이름으로서 실상을 제시하고 사(辭)로서 의미를 표현하고 논증으로써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첫째는 이명거실(以名擧實)이다. 거는 사실을 반영한다는 의미로 이름으로써 실상을 제시하고 둘째는 이사서의(以辭抒意), 명제로써 의미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설출고(以說出故)즉, 논변하는 사람은 사로서 판단을 표현해야 하고 그 판단에 이르게 되는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고(故)는 근거 도는 이유를 뜻하는데 대고와 소고가 있다. 소고는 그것이 있다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없으면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것이다. 대고는 그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렇고 없으면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것을 말한다. 소고는 현대 논리학의 필요조건이고 대고는 필요충분조건이다. 넷째는 ‘유로써 취하고 유로써 추론한다’이다. 상대방이 자기가 인정하는 주장을 들고 나오면 이를 반대할 수 없으며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것을 상대방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유비추론이다.
또한 논변을 행하는 방법에는 7가지가 있는데 이는 소취편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1) 혹(或:개연판단)이란 어떤 것은 그러하다는 의미로 전부는 아닌 경우를 지칭한다.
예를 들면 말이 전부 다 흰 것은 아니다. 말은 흴 수도 있고 검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말은 희다고 할 수 없다. 지식이 불완전 한 경우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개연판단만 할 수 있다.
2) 가(假:가언판단)이란 가령 그러하다면 이라는 뜻으로 현재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공자가 말하길 “만일 누가 나를 기용한다면 1년이면 달라질 것이고 3년이면 치적을 세울 것이다.” 고 했는데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3) 효(效:imitation)란 하나의 표준을 세워서 그것을 본보기로 삼는 것이다. 원인이 효에 부합하면 참된 원인이고 효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른 것이다. 이것이 효의 방법이다. 어떤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하려면 이 명제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하나의 준칙, 법을 세우고 그것에 비추어서 실험을 해보는 것이다. 정사각형을 예로 들어보자. 네 변의 길이가 같은 것을 정사각형이라고 간단하게 가정하자.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서 앞에 있는 것이 정사각형인지 아닌지를 판별해본다고 한다면 앞의 것이 정사각형이라고 말하려면 네 변의 길이가 같아야 할 것이다. 맞으면 참이고 아니면 거짓이 된다.
4) 비는 비유로 어떤 모양이 비슷한 사물을 제시하여 어떤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비유는 직접 설명할 수 없을 때 별도의 사물을 들어서 밝히는 것이다. 『묵자』귀의 편에서 예를 들어보면 “그로써 나의 말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마치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 천하의 달걀을 다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그 돌을 부수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묵자는 돌을 비유로 들어서 자신의 주장이 강력하고 달걀을 들어 상대방의 주장이 약하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
5) 모(侔:직접추론)란 명제를 비교하여 똑같이 간주하는 방법이다.
「소취편」에 “흰말은 말이다. 흰 말을 타는 것은 말을 타는 것이다. 검정말은 말이다. 검정말을 타는 것은 말을 타는 것이다.”모는 형식논리에서 말하는 직접추론인데 ‘흰말을 탄다’에서 ‘말을 탄다’를 추론한 것이다.
6) 원(援:유추)이란 증거를 끌어내는 것으로 상대방의 논점을 원용하여 자기의 논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네가 긍정하는데 나라고 긍정하지 못하겠느냐는 것이다. 원은 현재의 전례를 드는 것이다. 공손룡이 공자가 초나라 사람과 사람은 분별된다고 여긴 것을 지적하면서 공자가 이미 초나라 사람과 사람을 다르게 여겼는데 내가 왜 흰말과 말을 다르게 여길 수 없겠는가라는 말을 하였는데 여기서 쓰인 방법이 원의 방법이다. 소취편에 ‘도적이 많은 것은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다’라고 상대방이 주장한다면 ‘도적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묵자는 겸애를 주장하면서도 살도를 주장하였는데 이 두 주장은 모순처럼 보이지만『묵자』에서는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7) 추(推)란 유추이며 이는 동일한 사물 가운데 아직 판단을 취득하지 않은 이 부분과 취득한 저 부분을 비교하여 이 부분에 판단을 내려주는 것이다. 에를 들면 우리는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는 과거의 사람들이 다 죽는 것을 보았고 현재의 사람과 장래의 사람이 동일한 유(類)이기 때문에 현재와 장래의 사람도 죽는다고 추리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추란 상대가 수용하지 않는 내용 역시 그가 주장하는 내용과 동일하다는 것을 제시해준다. 상대방의 주장을 유추추론의 전제로 삼아 본질상 그것과 유사하지만 엉터리인 한 결론을 도출하여 상대방에게 제시하여 그가 받아들이는 지의 여부를 살핀다. 그러면 상대방은 자신이 견지한 내용 역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이것의 예는 묵자 공맹편에 묵적과 유자인 공맹자의 논변에 나타나 있다. 공맹자는 ‘귀신이 없다고 하면서 군자는 반드시 제사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이에 묵자는 그것은 손님도 없는데 손님 맞는 예를 행하는 것이며 물고기도 없는데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은 유(類)이다. 만약 당신이 물고기가 없는데도 그물을 던지는 것을 옳다고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또한 귀신이 없는데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추의 방법론에 의거한 것이다.
이상의 7가지 방법 가운데 비, 모, 원, 추는 서로 다른 명제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에 의거하여 추론한 것이다. 소취편에는 이러한 추론이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태를 단편적으로 봄으로서 야기될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묵가의 논변사상은 궤변논자들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후기 묵가에서는 객관적인 사실과 그 사실체계가 필연적인 관점에서 맺어졌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사실은 알려질 수 있고 참과 거짓이 판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개념.판단.추리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여 중국고대 논리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4.『묵경』중의 공리주의
공리주의는 묵자철학의 근본이다. 다만 묵자는 이익을 중시하였으나 왜 이익을 중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묵경』은 더욱 진일보하여 공리주의에 심리적 근거를 부여하였다. 묵자와 후기 묵가는 선(善)과 이익을 동일시하여 이익은 선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이익의 본질은 무엇인가? 묵가는 이 문제를 제시하지 않았지만 후기 묵가는 이를 문제 삼아서 해답을 찾았다. 이익이란 얻어서 기쁜 것이고 얻어서 싫은 것은 손해이다. 인간은 본래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인간본성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리주의가 인간 행위의 정당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후기 묵가는 묵가의 공리주의적인 철학을 쾌락주의적으로 해석하였다. 이 입장은 벤담의 유용성의 원리를 연상시키는데 벤담이 말한 쾌락과 고통은『묵경』에서의 이익과 손해 즉 쾌락과 고통을 가져오는 것들이다.
욕망은 맹목적이라서 반드시 지혜의 지도를 받아야 장래의 이익을 추구하고 장래의 해를 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혜의 기능은 현재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는데 있다. 일단 결과를 예측하면 지혜의 인도 아래서 눈앞의 작은 이익을 버리고 장래의 큰 손해를 피하거나 눈앞의 작은 손해를 감내하고 큰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이것이 소위 권(權)이다. 권이란 체험하는 것들 중에서 경중을 가늠하는 것이고 손해와 이익을 치우침 없이 고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리철학은 눈앞의 작은 이익이 아니라 장래의 큰 이익이고 피해야 할 것은 눈앞의 작은 손해가 아니라 장래의 큰 손해이다. 따라서 욕망하는 것이 다 이익은 아니게 된다. 반드시 올바른 가늠을 거쳐서 욕망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이익이 된다. 싫은 것이 다 손해는 아니며 올바른 가늠을 거친 뒤에 싫어할만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면 손해가 된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묵경』에서는 여러 덕목을 정의하고 도덕의 본질은 이익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경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의(義)란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이고 그 의가 반드시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효(孝)란 부모를 이롭게 하는 것이고 부모의 뜻에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충(忠)은 군주를 이롭게 하는 것이며 임금에게 그 충이 꼭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공(功)이란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그런데 공적은 때와 독립적이어야 한다. 혼란이 닥친 후에 대처함은 목이 마르고 나서야 샘을 파는 격이니 혼란이 닥쳐 대처함은 때에 종속된 공적이므로 때에 독립된 공적만큼 큰 이익을 얻지 못한다. 모두 이익이 여러 덕목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5. 겸애설에 대한『묵경』의 변호
겸애설에 대한 후기 묵가는 겸애의 주요 속성을 ‘함께 한다’로 보았다. 소취편에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야 비로소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지 않아야 할 필요는 없다.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연적으로 역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나타나 있다.
사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여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대의 측면에서 보면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을 미워했다는 것은 그가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묵가의 추리이다.
후기 묵가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논변을 중요시 여겼다. 그래서 묵가를 비판하는 당시의 사람들을 묵가는 논변으로 반박했다. 묵가의 겸애설에 대해서는 당시의 두 종류의 비평이 있었다.
첫째, 인구의 무한함은 겸애주의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 인구의 수는 무한한데 어떻게 한 사람이 그들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비판자는 남방이 유한하다면 겸애의 대상에 모두 포함시킬 수 있지만 무한하다면 모두 포함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유한과 무한조차도 알지 못하면 다 포함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도 알지 못할 것인데 묵가들이 인간을 모두 다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을 말했다. 이에 대해서 후기 묵가는 만약 무한한 남방에 사람이 가득 차 있지 않다면 사람 수는 유한한 것이며 모두를 사랑하는데 문제가 없으며 남방에 사람이 가득하다면 이는 곧 무한한 남방이 아니라 유한한 남방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지역이 유한하다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비판자는 ‘사람 수도 모르면서 어떻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했으며 이에 대한 답으로 묵가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그들 모두를 사랑하면 된다고 하였다. 또한 비판자는 ‘모든 사람이 사는 곳을 모르면서 어떻게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했으며 이에 대해 ‘그들의 사는 곳을 몰라도 사랑하는 데에 방해받지 않는다.’고 후기 묵가는 답변하였다. 강아지를 잃어버린 사람, 자식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강아지나 자식을 사랑하는 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번째, 단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성립된다면 ‘도적을 죽인다는 벌은 성립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도적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다. 이에 대해 ’획‘의 부모는 사람이다. 그런데 획이 자기 부모를 섬기는 것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의 동생이 미남이다. 그가 동생을 사랑하는 것은 미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도적은 사람이다. 그러나 도적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도적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들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것으로 그러하기에 도적은 물론 사람이지만 도적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도적을 미워함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도적을 죽임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 번째 주장에서 비판자가 말한 사랑은 사람을 이롭게 함을 포괄하여 한 말이다. 이것이 확실히 묵적이 말한 의미이기도 하다. 비판가들은 지역이 무궁하고 인구의 수도 모르고 사람들이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실제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를 물은 것이다. 그러나『묵경』은 사람의 사랑을 일종의 심리상태로 한정시켜서 “겸상애”와 “교상리”를 분할 시켰기 때문에 인구의 수, 사는 장소와 상관없이 모두 사랑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랑은 추상적인 사랑으로 실천적인 사랑을 벗어난 것이다. 문자상의 논쟁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흰말을 말이라고 하는 것은 제1요소가 말이기 때문이며 동생을 사랑하는 것은 동생이기 때문이지 미남이어서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도적에 관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가 도적이라는 점이지 사람이라는 점이 아니다. 따라서 묵학도는 도적을 죽이는 경우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와는 다르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적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는 명제의 사람은 통칭으로서의 인류를 지칭하는 것이며 “도적을 죽임은 사랑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는 명제 중의 사람은 곧 피살되는 개인을 의미한다. 두 명제는 사람의 지칭 대상이 동일한 것이 아니므로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함께 논할 수 없는 것들이다. 순황은 ‘도적을 죽임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를 이름의 사용에 미혹되어 이름을 교란시킨 궤변으로 간주하였는데 이것은 애매어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6. 제가에 대한 비평
후기 묵가는 자신을 반박하는 다른 학파의 주장을 반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비평하기도 하였다. 특히나『묵경』에는 명가를 비판하는 글이 많이 실려 있다. 혜시의 합동이와 공손룡의 견백론에 대한 비판이 있으며 이외에도 유가에 대한 비판과 음양가 그리고 장자에 대한 비판도 있다.
혜시는 합동이를 주장하였는데 10사에서 그의 주장은 ‘만물은 모두 같기도 하고 모두 다르기도 하다.’는 명제에서 ‘모든 만물을 사랑하라. 천지는 하나의 전체이다.’라는 결론으로 진행된다.
후기 묵자는 이를 동(同)자의 애매함에서 생긴 오류로 생각하였다. 동(同)에는 중(重), 체(體), 합(合), 유(類) 측면의 동이 있다. 중동은 하나의 실물에 두 개의 이름이 있는것을 중동이라고 하고 묵자와 묵적은 하나의 실상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중동이다. 체동은 부분이 전체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체동이라고 하며 손, 발, 머리, 눈은 다 같이 사람의 사람 신체의 일부분인데 이것이 체동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사물이 한 곳에 모인 것을 합동이라고 하는데 교실 안의 학생들이 있는 경우는 합동이다. 마지막으로 비슷한 사물은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유동이고 사람은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 예일 것이다.
또한 다름에 대해서도 자세히 논의되고 있다. 이(異)에는 이(二), 불체(不體), 불합(不合), 불류(不類)의 이가 있는데 두 실체가 반드시 다른 것이 이이고 연속되지 않은 경우가 불체이고 같은 장소에 있지 않은 경우가 불합이다.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불류이다.
혜시는 만물은 어느 면에서 같고 어느 면에서 다르다고 했는데 이는 만물은 다를지라도 같은 점이 있고 만물은 같을 지라도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물에 같은 점이 있으므로 유동이라고 할 수 있으나 만물이 한 몸이라고 한 것은 유동을 체동으로 여긴 것이다. 동자를 두가지 다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어느 특정한 상황에 적용되는 명제의 진리는 다른 명제의 진리로부터 추리해낼 수 없다.
만물은 어느 면에서 다르다는 것도 그 다름이 무엇인지를 지적해야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동이(同異)는 상대적으로 결정된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물의 상반된 속성 가운데 어느 한 측면에서 고려한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굳음과 흼은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 굳음과 흼 둘이 있다고 가정하자. 다른 곳에 있으면 서로 포함하지 않고 서로 배척하므로 서로 배제한다.
굳음과 흼은 서로 의존적이다. 굳음을 만진 곳에서 흼도 얻으니 둘은 반드시 서로 포함한다.
하나씩 따로 떼어 둘로 삼을 수 없다.
이것은 견백의 분리를 주장한 공손룡의 설을 반박한 것이다.『묵경』은 공손룡의 견백론을 비판하는데 견백의 분리대신에 견백의 결합을 주장하였다. 공손룡은 인식론적으로 독립된 두 일반개념임을 증명하였는데 감각된 것이 있고 감각되지 않은 것이 있는데 즉 이는 서로 분리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굳음과 흼이 서로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기 묵가는 굳고 흰돌이 구체적으로 이 우주에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흰성질과 굳은 성질은 동시에 돌에 존재한다. 이는 굳음과 흼은 서로 포함하고 서로 배제하지 않으며 다 같이 돌에 존재한다고 여긴 것으로 이른바 공존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돌을 볼 때 흼만 포착하고 만질 때는 굳음만 포착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감각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일 뿐 돌에 견백이 있고 없음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는 형이상학적으로 굳음과 흼이 둘이라고 증명한 공손룡의 설을 반박한 것이다.
「경하」 지(指)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측면도 도외시할 수 없다.
인식대상을 논하면서 지시할 수 없다는 것은 엉터리이다.
이는 공손룡이 말한 지(指)에 대한 논변인 듯하다. 공손룡이 말한 지는 바로 이름의 지칭대상인 일반개념이었다. 공손룡 일파에 따르면 하나의 이름에는 알려지는 것도 있고 알려지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름이 지칭하는 일반개념만 알고 그것이 지칭하는 개체는 모른다. 그러나 후기 묵가는 일반개념은 바로 개체 속에 있으며 일반개념 단독으로는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름이 오직 일반개념만을 지칭한다면 그 의미는 완전하지 못하다. 공손룡 일파의 변자가 말한 굳음과 흼이 과연 존재한다면 지칭하여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체는 지칭하여 보여줄 수는 있지만 일반개념은 본래 알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는 것이어서 지칭하여 보여줄 수가 없다. 인식대상을 논하면서 지시할 수 없다는 그러한 논증은 엉터리라고 했던 것이다. 공손룡 일파가 말한 일반개념은 본래 지칭하여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한 대상은 본래부터 지칭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일반개념에[ 대한 공손룡 일파의 학설은 고대서양철학의 실재론이고『묵경』의 경우는 유명론에 가깝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묵경』에는 명가 이외에도 나머지 학파에 대한 비판들이 실려 있다.
요 임금이 의롭다는 평판은 지금의 일이지만 그 사실은 옛날의 일이므로 시대를 달리한다. 왜냐하면 의로움의 내용이 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순을 본받는 유가의 설을 논박한 것이다. 요순이 천하를 잘 다스렸다함은 지금 옛날 일을 논한 것이다. 만약 옛날에 지금 일을 논한다면 요임금이 잘 다스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가가 말한 요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것은 유가가 인식한 내용일 뿐이다. 요임금의 의로운 이름은 지금 생겨났고 의로운 실상은 옛날 일이다. 옛날과 지금은 시대가 다르므로 의로운 이름과 의로운 실상은 별개사항이다. 요임금의 훌륭한 이름을 칭송하는 것은 지금의 일이고 훌륭했던 시절은 옛날인데 이름과 실상이 어떻게 하나일 수 있겠는가? 유가가 부여한 요임금의 의로운 이름과 반드시 요임금의 의로운 실상과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인과 의를 각각 내적인 것, 외적인 것으로 구분함은 그르다. 왜냐하면 모순되기 때문이다.
인내의외(仁內義外)는 고자 일파의 설이다. 인은 마음속에서 촉발된 것이고 의는 외부에서 촉발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랑하고 베풀 수 있음은 나 자신이고 사랑의 대상과 베풂의 대상은 모두 외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베풀 수 있는 능력은 모두 내적인 것이다. 인내의외의 경우는 사랑의 경우는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베풂의 경우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비판에서 묵경은 주관적 능력과 객관적 대상의 차이를 명확히 분별하였다.
학문은 유익하다. 논거는 그것을 반박하는 주장 자체에 있다.
무가 반드시 유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말하는 내용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자의 설에 대한 반박이다. 노자는 학문을 단절하면 근심이 없어진다고 하면서 학문은 무익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학문이 무익하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가르침으로 삼으면 반드시 학문이 있게 되고 여전히 학문의 유익함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또 노자는 유와 무가 서로 의존적이라고(생성한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무가 반드시 유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에를 들면 말(馬)이 없다고 할 때의 없음은 말(馬)이 있음에 의존하는데 이것은 세상에 말이 있기 때문에 말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함몰은 없다고 할 때의 없음은 있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데 정말로 하늘의 함몰이 있기 때문에 하늘의 함몰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논변에는 승자가 없다.’함은 부당하다. 논거는 논변 자체에 있다.
‘모든 논단은 오류이다.’는 논단은 오류이다. 논거는 바로 그 논단에 있다.
‘앎이나 모름이나 마찬가지다.’함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토론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앎이 있어야 토론을 진행할 수가 있다.
‘비판은 그르다.’함은 오류이다. 논거는 그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모두 장자의 설을 논박한 것이다. 장자에 따르면 모든 사물과 인간의 견해는 만가지로 각기 다르다. 만약 하나만을 옳다고 고집하지 않으면 모두가 옳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보면 장자는 시비를 폐하지 말고 초월할 것을 주장했다. 소극적 측면에서 보면 장자는 오직 하나만을 옳다고 고집하지 않는 것만이 옳다고 여겼으며 논변에는 승자가 없으며 또 앎이나 모름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제물론』에 따르면 논변에는 항상 통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위대한 논변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말은 논변하기 때문에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부분들을 통해 장자는 모든 논단은 모두 오류라고 여겼으며 사람들의 상호비판을 그르다고 여겼다. 그러나『묵경』에는 인간의 시비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논변하고 타당한 쪽이 승리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논단은 오류라는 논단 자체가 오류라고 보았으며 만약 그 논단이 옳다면 그 논단만은 오류가 아닌데 어떻게 모든 논단은 오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 논단이 그르다면 물론 논단은 오류가 된다. 앎이나 모름이나 마찬가지라는 말 역시 오류인데 그 논단 자체가 하나의 앎을 나타나고 있으며 앎은 모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앎이 있음으로 해서 토론할 수 있는 것이고 앎이 없다면 토론할 수 없다. 모든 비판은 그르다는 논단 자체가 하나의 비판이 되므로 이 말을 한 사람은 자기 주장을 그르다고 한 셈이다. 자신의 비판이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비판이란 그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가를 비판하는 후기 묵가들은 서양철학에서 문제시되었던 논리적 역설을 발굴해 내었다. 그러나 현대 논리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후기 묵가의 비판은 타당성을 잃는다. 그러나 후기 묵가들이 그러한 논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고대 중국의 어느 다른 학파보다도 그들은 순순한 인식론과 논리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묵자철학은 한무제가 유가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채택하고 제자백가의 철학과 사상을 배척하면서 쇠미해졌다. 그러나 사람들을 평등하게 사랑하려는 그의 사상은 의협을 숭상하는 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청나라 이후로 경험을 중시하는 묵자의 실증적 학문관과, 자연과학적 지식과 논리학에 관해 탐구한 후기 묵가들의 노력이 새로이 평가되기 시작하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